평신도 (13)

그것은 우리가 세상의 흐름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어야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아마도 레슬리 뉴비긴이 했던 말로 기억하는데…
세상과 소통한다는 것은,
세상이 복음을 비판/평가하도록 내버려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복음이 세상을 비판/평가하는 것이 주된 것이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복음으로 세상에서 돌아가는 것을 해석해낼 수 있어야 하고,
그래서 그 문제가 무엇인지를 진단하기 평가하고 비판하는 것이 가능해져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
기독교는 세상을 해석해내는 힘을 사실상 다 잃어버렸다. ㅠㅠ

가만히 생각해보라.
사회적으로 중요한 담론이되는 이슈들…
사회적 불평등, 성적 불균형, 정치적 대립, 환경문제, 인종문제, 정의(justice)의 문제, 혁신(innovation), 현대 사회의 불안의 문제, 하다못해 지금 세계가 모두 함께 겪고 있는 팬데믹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기독교가 이런 것들에 대해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기독교계에서 무슨 이야기가 전혀 나오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대부분 기독교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은, 기독교적 관점에서 세상을 해석하고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기독교인이 이미 가지고 있는 사회적/정치적 입장에 따라 기독교의 옷을 입고 비판을 하는 것이다.

그러니 정치적으로 보수인 기독교인들은 보수가 기독교의 가치라고 외치고,
정치적으로 진보인 기독교인들은 진보가 기독교의 가치라고 외치는데…
그 속에서 기독교는 없고 그냥 정치 사회적 외침만이 있을 뿐이다.

이렇게 된 이유는 기독교가 세상을 해석할 힘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지금은 다시 그 힘을 찾아야 한다. 세상과 소통해가며 다시 그 힘을 찾아야한다.

평신도 (12)

세상과 소통하면서 하나님나라의 컨텐츠를 만들어간다는 모델이 특히 더 중요해지는 때가 있다.
그것은 세상의 흐름이 매우 빠르게 바뀌고 있는데 교회가 그것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을때이다.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 기독교는 지난 2000년동안 꽤 성공적으로 그런 작업을 해 왔다.
사실 고대, 중세, 근대, 현대를 거치면서 사회와 소통하며 그 컨텐츠 자체를 잘 update해온 종교는 기독교 이외에는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렇게 세상의 사상과 흐름이 바뀌는데에는 물론 기독교가 영향을 끼친 부분도 당연히 없지 않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는 지난 2000년동안 계속해서 세상에 영향을 주기도 하고, 그 세상의 모습을 보면서 수용,비판등을 거듭해왔던 것이다. 왜 그런데 지금은 우리가 그것을 멈추어야 하는가?

오히려 지금이야말로 그런 작업을 더더욱 적극적으로 해야할때가 아닌가 한다.

왜냐하면, 내가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세상은 생존을 위해서 미친듯이 여러고민을 하여 그 흐름을 바꾸어가고 있고,
그래서 세상이 아주 빠른 속도록 바뀌어가고 있는데…
교회가 그 흐름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이야말로, 세상을 바라보고, 그 세상과 소통하면서,
지금 이 시점에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가,
지금 이 시점에 교회가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를 아주 깊게 고민하여 그 내용(contents)를 만들어 나가야할때라는 것이다.

평신도 (11)

지난 글에서 했던 세상과 소통하면서 하나님나라의 컨텐츠를 update해야한다는 것을 아주 알기 쉽게 설명한 짧은 비디오 클립이 있다.
IFES (한국의 IVF, 미국의 Intervarsity Christian Fellowship)의 Vinoth Ramachandra의 짧은 설명이다.

IFES는 학생들을 위한 단체이므로 engaging the university라고 해서 대학사회와 어떻게 대화할 것인가 하는 내용으로 이야기했지만 이것은 일반적으로 교회가 세상과 어떻게 소통할 것인가 하는 것에도 잘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평신도 (10)

하나님 나라의 컨텐츠는 무엇일까?
기본적으로는 하나님께서 통치하신다는 것이 핵심이겠지만, 실제로 그 구체적인 내용은 살아가는 사람들이 채워가야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보자.

피부색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지 말아야한다는 것은, 아마도 정상적인 생각을 가진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누구나 동의하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일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늘 그래왔던 것은 아니다.

실제로 역사속에서 어떤 순간에는, 그리고 심지어는 아직까지도 일부, 인종 차별이나 인종에 대한 편견이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가치와 병립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거나 심지어는 기독교적 가치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어왔다.

그런데 그런 모든 사람이 피부색에 따라 차별받지 말아야한다는 생각은 어떻게 이제는 하나님나라의 중요한 가치 가운데 하나도 받아들여지게 되었을까?

그것은 세상속에서 진행되어온 사상의 흐름, 과학적 발견 등을 기독교가 바라보면서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과정을 거쳤기 때문이다.

아, 물론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서는 인종에 대한 차별적 시각을 개선하는데 기독교가 공헌했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도 그런 관점에 상당부분 동의한다.
그렇지만 인종문제에 대한 모든 토론과 연구와 실험과 투쟁등이 이루어졌던 주된 장은 교회가 아니라 세상이었다. 그리고 그 세상에서 벌어진 많은 내용들을 교회가 바라보면서 수용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일부 자신들이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것을 수용하기도 했을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 복음이 흔들리지 않는 진리라는 사실을 약화시키는 것이 전혀 아니다.
오히려 기독교 복음의 핵심을 든든하게 잡고, 그 주변의 것들을 유연하게 비판하기도 하고 수용하기도 하면서 복음을 더 진지로서 잘 설 수 있도록 만드는 작업이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나라의 컨텐츠는, 한번에 주어지는 것이 분명 있지만, 때로, 그리고 매우 많은 부분, 세상과의 소통 속에서 update되기도 하고, 수정되기도 하고, 보완되거나 추가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 매우 자연스럽다.

평신도 (9)

흔히 ‘성경적’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대단히 이상한 개념들을 참 많이 들었다.
성경적 직업관, 성경적 가정, 성경적 남성/여성상, 성경적 정치, 성경적 재정관리, 성경적 데이트…
그런데 내가 생각하기에 이것들중 아주 많은 것은 (거의 대부분이라고 쓰고 싶은 유혹도 사실 조금 있지만…)
성경적이라기 보다는 (답답한) 교회문화적이라고 하는 것이 더 맞지 않을까 싶다.

성경적인것과는 별로 상관없이 형성된 교회 내의 하위문화의 산물로 만들어진 개념들을 성경적이라는 딱지를 붙여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엔,
사실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생각보다 그렇게 많지 않다.

성경은 하나님과 세상과 인간을 바라보는 매우 종요하고도 핵심적인 진리를 담고 있지만,
그것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들을 시시콜콜 이야기해주지 않는다.

그 구체적인 내용들을 성경의 구절을 문맥과 무관하게 따와서 성경적이라는 딱지를 붙여보지만… 그건 엄밀하게 성경적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심지어는 그렇게 성경적이라는 딱지를 붙인 것 가운데 대단히 폭력적이거나 몰상식한것들을 발견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성경은 삶에대한 기본적인 원칙을 제공해주는 책이지, 삶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정보를 제공해주는 매뉴얼이 아니다.
성경에 서술적으로(descriptive) 쓰여져 있는 것을 규범벅(prescriptive)으로 받아들이면 너무 많은 왜곡이 생긴다. 실제로 역사 속에서 그런 왜곡이 얼마나 많이 있어 왔나! – 노예제도나 인종차별을 지지한다던지, 인권을 무시한다던지, 과학과 신앙을 대립되는 것으로 본다던지…

그렇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성경적으로 살기 위해서는,
성경이 제공해주는 원칙들을 구체적으로 채워나가는 작업이 있어야 하고…

나는 이것이 평신도가 해야하는 매우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
(다음주에 계속)

평신도 (8)

가끔 나에대해 띄엄띄엄 알고 있는 목사님들중 어떤 분들이…
내가 그분이 섬기시는 교회에 방문할 기회가 생기면, 혹은 그런 방문한 기회를 만들어서,
내가 그 교회의 청년이나 성도들에게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어떻게 사는가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해달라고 부탁을 하시는 경우가 있다.
아니면 간증을 해달라고 부탁을 하시는 경우도 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들 기본적인 생각은 대충 이렇다.
내가 교회에서 복음의 내용에 대해서는 이미 잘 이야기해왔고, 그 원칙은 이미 교인들이 잘 알고있으니까, 네가 와서 그 적용의 예를 좀 설명해달라고 부탁하는 것이다.

나는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그런 부탁을 받았을때 대부분 정중히 거절한다.
그 이유는, 대부분 그분들이 복음의 내용이라고 설명한 것 자체가 충분하지 않아서, 내가 하고 있는 고민을 이야기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 이해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비유를 하자면 이렇다.

그 교회에서는 덧셈 뺄셈을 열심히 가르치고 세상에서 그걸 가지고 잘 적용해서 살라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세상에 나가보면 세상에서는 미적분을 어떻게 할까를 가지고 고민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무식하게 미적분이 무슨 소용이야, 덧셈뺄쎔이면 짱이지…라며 고래고래 고함을 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은 세상에서 하는 미적분에 기가 죽어 자신이 교회에서 배운 덧셈뺄셈에 대한 이야기는 꺼내보지도 못한채 세상에서는 그냥 미적분의 원칙대로만 살고, 교회에서는 덧셈뺄셈으로만 살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그런 상황에서 아예 덧셈뺄셈만을 이야기하며 이제 미적분을 하는 세상 속에서 그 덧셈뺄셈을 적용하며 살라고 이야기하는 교회에 실망해서 교회를 떠나거나 신앙 자체를 떠나기도 한다.

덧셈뺄셈만을 열심히 설교강단과 교회 프로그램에서 이야기하면서…
마치 세상을 모두 다 이해하고 정복할 원칙을 다 가르쳤다고 생각하는 교회 어르신에게,
사실 내가 고민하는 것은 미적분입니다… 라고 이야기해보려 해도 말이 통하질 않는 거다.

그러니 그냥 정중히 간증을 해서 사람들에게 좋은 적용의 예를 보여달라고 하는 부탁을 거절할 수 밖에…

평신도 (7)

적어도 내가 경험하는바, 세상의 발전은 정말 놀랍다.
이건 단순히 기술의 발전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세상은 복잡하게 벌어지는 많은 일들에 대해 다양한 방법으로 많은 고민을 한다.

가령, 다양한 의견을 포용하는 것에 대한 고민을 교회와 사적 기업들 가운데 어디가 더 많이 할까?

적어도 내가 silicon valley에서 경험하는 것에 의하면, 비교할수 없을만큼 회사에서는 다양한 담론에 대한 고민이 많다. 그것은 다양성을 어떻게 다루느냐 하는 것이 그 회사의 이익에 매우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생존을 위해서 아주 치열하게 그런 고민을 하는 것이다.

그것이 어찌 포용성(inclusivenes)에 대한 것 뿐이겠나.
공정, 평화, 평등, 정의, 관용 등등… 어쩌면 교회에서 많이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은 내용에 대한 논의는 도저히 세상을 교회가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세상은 생존을 위해 정말 죽어라고 그런 문제들을 고민해왔는데, 교회는 그런 것에 대한 교민 자체가 그렇게 우선순위가 높은 일들이 아니었기 때문이겠지.

그런데 적어도 내가 주장하는바는,
이제는 교회도 그런 것을 고민해서 어느정도 방향을 좀 잡지 않으면 생존이 어려워지는 시대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미 한국과 미국에서 (특히 요즘 한국을 보면) 사회 상황과 관련된 중요한 이슈들에대해 너무나도 무지한 타락한 교회가 생존을 위협받으며 무너지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평신도 (6)

아니… 평신도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다고 처음 글머리를 열었는데, 왜 평신도에 대한 이야기는 하나도 하지 않은채 이렇게 긴 이야기를 하느냐…
내가 생각하기에 지금 평신도들의 역할을 잘 정리하는데에는 지금까지 이야기한 배경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교회와 기독교가 맞닥드리고 있는 세상은 변했고,
그 속에서 기존의 기독교 신학과 선교와 윤리가 뭔가 삐걱거리며 잘 맞지않는 시대에 우리가 놓여있다.
그런데 다행히도 이런 상황에 대한 신학적 고민들이 꽤 많이 진전되어왔다.

결국 이 정도 이야기를 지금까지 한 셈이다.

그런데 문제는 크게 두가지가 있다.

첫째, 많이 진행되어온 신학적 논의에대해 현장의 교회들이 너무 무지하다. ㅠㅠ
특히 목회자와 교회 지도자들의 무지가 대단히 심각한 수준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에 대해 할 말이 정말 많지만, 이번 시리즈에서는 평신도에 대한 이야기이므로 이 부분은 이 정도로만 언급하려고 한다.

두번째는, 많이 진행되어온 신학적 논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많은 신학적 논의들이 대부분 실천적이지 못하다.
이론적이고, 사변적일뿐 아니라, 그 신학적 아이디어들을 현실에서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 적용했을 경우 어떤 결과들을 얻을 수 있는지 하는 것에대해서도 별로 아이디어가 없다.

그래서 많은 평신도들은 이원론적 신앙생활을 하거나 신앙을 사유화해서 세속화의 함정에 빠져버리고 만다.

평신도 (5)

교회가 2000년만에 처음으로 맞이하는 새로운 상황에서 이 상황을 해석하기위한 신학적 작업들도 많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

역사적 예수연구, 바울에 대한 새로운 관점, 선교학쪽에서의 새로운 접근등이 다각도적으로 새로운 상황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도움을 주는 것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들이 포함된다.

– 예수가 선포했던 하나님 나라는 구약의 약속을 이루는 것이었다.
– 그 하나님 나라는 죽어서 가는 장소가 아니라, 이 땅에서의 하나님의 통치를 일차적으로 의미한다.
– 흔히 이신칭의라는 말로, 다소 환원적(reductionistic)으로 사용되었던 개념에대한 다각도의 반성과 재평가가 이루어져왔다. 이런 신학적 흐름은 현재 사는 하나님나라 백성의 윤리의 중요성을 강조하게 되었다.
– 제국주의적이거나 강압적인 말로하는 선교와 달리, 그 백성의 윤리가 하나님께서 선교를 하시는 매우 중요한 것으로 강조되었다.
– ‘대화’가 타협이나 혼합을 의미하지만은 않는다. 대화는 복음이 세상과 engage하는 매우 중요한 수단이다.
– 교회의 일차적 목적을 세상의 변혁 혹은 세상을 기독교로 정복하는 것으로 보았던것과는 달리, 교회의 일차적 목적이 세상 속에서 교회됨일수 있다.

물론 더 많은 것들이 나열될수 있겠고, 나 같은 비전문가가 그저 한 5~10분 투자해서 글을 쓰는 것이니 허술하게 outline을 잡은 것이겠지만…
적어도 내가 판단하기에 일반적으로 신학계에서는 post-Christendom의 기독교가 가져야하는 모습에 대해 꽤 많은 논의를 진전시켜왔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