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ID-19 뉴스

우리 회사에는 Obama 정부에서 FDA commissioner를 했넌 Robert Califf 라는 사람이 있다.
FDA commissioner라는 것은 미국의 FDA의 총 책임자이다. 하여간 많이 높은 사람. ^^
대통령이 직접 임명하는 자리이고.

그런데 Robert Califf가 우리 회사 사람들에게 자신이 바라보는 현재의 COVID-19 상황에 대해 한주에 한번씩 정리해서 이메일을 보낸다.

그런데 가끔 한번씩은 회사 외부로 보낼 수 있는 버전을 만들어서 주는데, 이번주에도 그게 하나 나왔다.

주변에서 얘기해보면 의외로 COVID-19에 대한 이상한 소문을 믿고 있는 사람들이 꽤 많은 것 같은데…
그래서 Rob Califf가 외부용버전을 만들때마다 나도 이곳 blog에서 posting을 해보려고 한다.

일단 지난 월요일에 나온 버전 download는 여기에서

대충 핵심적인 내용들 몇개 정리하자면

  • 미국 상황이 점점 좋지 않다.
  • 백신 접종률이 낮은 주에서 급격히 COVID-19이 퍼지고 있다
  • Delta variant는 무지하게 빨리 퍼진다!
  • Delta variant는 그래도 전반적으로 FDA에서 승인된 백신으로 방어가 된다. (특히 Pfizer와 Moderna. J&J 는 아직 data가 부족)
  • Breakthrough infection(돌파감염)이 보고되지만, 여전히 그 비율은 매우 낮다.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 immunocompromised인 경우
  • 병원입원+사망의 case는 사실상 모두 (virtually all) 백신 미접종자들이다.
  • 현재까지의 data로는 아주 소수의 면역기관 이상자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은 2차 접종으로 충분하다.


교회에 대한 고민을 할때 읽어야할 사람

  1. 레슬리 뉴비긴
    영국에서 인도로 선교사로 갔다가 돌아왔더니 영국이 선교지가 되어있었다…
    그러면서 레슬리 뉴비긴은 다원주의 사회에서 복음이 어떻게 선포되어야 하는가 하는 것에 대한 다양한 분석과 제안을 했다.
    얼마전 youtube에서 레슬리 뉴비긴이 지금으로부터 30년전에 했던 짧은 인터뷰 영상이 있어서 보았다.
    아, 이 사람은 벌써 이때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싶어 참 놀라웠다.
  2. 스탠리 하우어워스
    스탠리 하우어워스가 했던 강연중에 맨 마지막에 이런식으로 마무리 지었던 것이 있었다. 정확한 wording은 기억나지 않지만 대충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오랫동안 서구사회에서 계속되어오던 Christendom이 끝나가고 있다. 그것은 교회가 마침내 물질중심성으로부터 벗어날 기회를 갖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상황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제안은 이것이다. Let’s make the most of out it. (이 상황을 최고로 잘 활용하자)”
    나는 이런 인사이트가 교회 내에서 넓게 나누어지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3. 팀 켈러
    팀 켈러는 어려운 개념을 사람들이 알기쉽게 잘 설명하는데 아주 탁월하다.
    게다가 뉴욕의 맨하탄에서 목회하면서 그 사람들과 많이 대화하고, 그 사람들의 생각의 체계를 정말 잘 이해하고 분석했다고 생각한다.
    팀 켈러가 관찰한 것들, 그것에 대한 분석들은 들어보면 무릎을 칠만하다.

운동선수처럼 살아야?

올림픽 상황을 아주 열심히 보고 있지는 않지만,
그냥 기사로 올라온 사진등을 보면서 조금씩 따라가고 있는 중이다.

한국 팀 소식은 한국 신문등에서 보고, 전반적인 올림픽 소식은 미국 신문 등에서 보고.

그런데 그 기사들에 나오는 운동선수들의 환호하는 모습, 열심히 힘을 내는 모습등은 참 멋지다.
그게 어느나라 사람이 되었건 간에.

그 운동선수들이 그렇게 멋지게 보이는 이유는,
최선을 다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붇는 모습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렇게 힘을 다 하고서도 미치지 못해 경기에서 지더라도, 그냥 그것으로 멋지다.

삶에서 어떤 영역까지, 얼만큼 열심히 사는 것이 가능할까?

열심히 성경 공부하고,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직장 생활하고, 열심히 사랑하고, 열심히 해야할일들 하고, 열심히 사람들 섬기고…
그러면서 삶의 영역에서 조금 덜 열심히 살아도 되는 것들을 어떻게 잘 분별해가며 살아갈 수 있을까?

20대에 삶이 단순하던 시절에는 정말 내 삶에게 주어진 거의 모든 영역에 최선을 다하면서 살수 있었다.
그러나 삶이 조금씩 더 복잡해지는 30대를 거치면서 그게 쉽지 않아졌고, 40대를 지나면서는 어느새 20대에 열심히 사는 모습을 많이 잃어버린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나님께서 내게 의탁하신 것을 주께하듯 그렇게 사는 것을 다시 한번 결심하고,
옷 매무새를 고쳐매고,
조금 더 힘을 내볼 참이다!

로마서 8:28

성경을 나름대로 그래도 꽤 열심히 공부한다고 하는데,
아직도 아주 기본적인 것도 제대로 모르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때가 많이 있다. ㅠㅠ

지난 몇달동안 성경을 보면서 새롭게 깨달았던 것 몇가지를 정리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로마서 8장 28절.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협력해서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οἴδαμεν δὲ ὅτι τοῖς ἀγαπῶσιν τὸν θεὸν πάντα συνεργεῖ εἰς ἀγαθόν τοῖς κατὰ πρόθεσιν κλητοῖς οὖσιν

여기서 συνεργεῖ라고 쓰여진 동사와 함께 τοῖς ἀγαπῶσιν τὸν θεὸν 라는 구절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해석하느냐하는게 문제다.

NASB는 이것을 work together… to those who love God 이라고 번역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일하셔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선한 일이 일어나게 한다는 뜻이 된다.

그런데 RSV는 이것은 work… with those who love God 이라고 번역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선한일을 이루어가시는 것이라는 뜻이 된다.

NSAB는 선행이 이루어지는 대상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인데
RSV에서는 선행을 이루는 주체가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는 것이다.

어떤 번역이 더 자연스러운가를 따지기 위해서는 συνεργέω 라는 단어를 잘 살펴보면 도움이 된다.
συνεργέω (수네르게오)는 영어의 synergy와 어근이 같다.
그러니까, συνεργέω는 누구누구 함께 일한다 할때 쓰는 단어라는 말이다.

실제로 이 단어가 신약성경에 쓰인 다른 용례들은 모두 다른 사람과 함께 일할때 사용하였다. (마 16:20, 고전16:16, 고후 6:1, 약2:22)

그러니까 이 συνεργέω(수네르게오)라는 단어가 사용되었기 때문에 NASB의 번역보다는 RSV의 번역이 더 자연스럽게 된다.

이걸 한국말로 바꾸어서 다시 번역하면 이렇게 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께서는 모든 선한 일을 이루신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이걸 이렇게 번역을 하고 나면, 로마서 8장이 정말 다르게 읽힌다.
그리고 조금 더 나아가서 로마서의 전체가 다르게 읽힌다고도 이야기해볼 수 있겠다.

하나님 나라 follow-up을 하면서 (5)

기존에 교회에서 듣던 이야기로 이들에게 충분하지 않았다.

내가 꽤 생각을 많이 해야하는 이야기를 그것도 꽤 빠른 속도로 쭈루룩~ 풀어놓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아주 흥미롭게 듣고 반응한다.

일부는 철학 이야기,
일부는 신학 이야기,
일부는 기독교 변증,
일부는 역사 이야기,
그리고 일부는 삶의 이야기들을 풀어놓는데,

이런 얘기는 잘 들어본적이 없다. 뭔가 막혀있던 것이 풀린다…
이런 식의 반응을 꽤 자주 듣는다.

모두가 그렇게 듣는다고 이야기할수는 당연히 없겠지만,
적어도 내게 반응해오는 사람들중에 다수는 왜 이런 이야기를 들어볼 수 없었을까요..
라며 신기해 하기도 한다.

하나님 나라 follow-up을 하면서 (4)

음악이 매우 중요하다.

나름대로 여러가지 신학적 개념들을 설명하기도 하고,
역사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철학에 대한 이야기를 한 이후에도 대개 나눔은…

“오늘 나눈 이야기에 딱 맞는 찬양 한곡을 띄웁니다”… 이런 방식이다.

내가 20, 30대일때도 그랬나?
우리도 물론 사람들 모이면 기타치면서 찬양을 부르기도 했고,
우리 세대야말로 두란노 경배와 찬양이 처음 시작되는 것을 경험한 세대이니…
당연히 찬양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었지만,
지금은 그런 경향이 훨씬 더 한것 같다.

하나님 나라 follow-up을 하면서 (3)

지극히 신앙이 개인적이다.

20-30세대가 공정에 관심이 많다고 이야기하기도 하고,
사회 정의에 관심이 많다고 하기도 하는데,
이게 신앙에 관한 discussion에 들어가면 결국은 다 그래서 ‘나’에 대한 질문들로 귀결된다.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잘 알 수 있는가
내가 기쁨을 유지할 수 있는가
내가 어떻게 더 성장할 수 있는가… 등등.

하나님 나라는 내가 들어가는 것이라기 보다는,
우리에게 다가온 것이라는 이야기를 설명하는데 더 많은 시간과 정성을 쏟아야 한다.

이게 신앙에 열심이 있는 사람들의 특징인지, 아니면 일반적으로 20-30세대의 특징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내 생각엔 일반적인 특징인 것 같다.)
결국 그렇게 사회정의나 공정에 대한 관심도,
그 사회 속에서 어떻게 하면 내가 살아남느냐 하는 것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비롯된것 같기도 하다.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는 너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라를 것

하나님 나라 follow-up을 하면서 (2)

또한 이런 신앙의 열심이 있는 사람들이 이 내용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지식의 연역적 접근을 선호한다.

이것은 결국 어제 이야기한 신앙을 교리적으로 접근한다는 것과도 연관되어 있을 수 있는데…

가령 성경의 이야기로부터 어떤 내용을 귀납적으로 끄집어 내는 것을 대개는 불편해하거나 익숙하지 않게 생각한다.
오히려 이미 알고 있는 신앙의 지식을 이용해서 성경 text를 해석하는 것에 훨씬 더 익숙하다.

그런데 그렇게 알고 있는 신앙의 지식들이 살짝 좀 이상한 것들이 있다. ^^
그러니 성경을 읽어보면 성경 본문이 이상하게 해석이 되는 것이다.

가령 구약의 본문에서 무리하게 예수님을 찾으려고 하는 시도를 하는 사람들을 만난다.
그러면 구약의 제사법에도 예수님이 드러나 있고,
시편의 어느 구절에도 예수님이 드러나 있고…이런 식으로 보는 거다.
음… 뭐 그렇게 볼수도 있다고 보는데, (내가 선호하는 성경읽기 방식은 아니지만.)
이게 좀 도를 넘어서, 다소 무리하게 그렇게 성경을 읽어내는 것들을 보기도 한다.

요즘 많은 교회에서 ‘교리’ 수준으로 설교와 성경공부 세팅에서 강조되는 것들중
워낙 이상한 이야기들이 많이 있다보니…
그런 교회 세팅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들의 생각이 그렇게 오염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하나님 나라 follow-up을 하면서 (1)

요즘 KOSTA follow-up으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세션을 계속하고 있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여러 질문들을 받기도 하고,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아무래도 몇주동안 이렇게 ‘하나님 나라’라는 주제로 더 공부해보겠다고 하는 사람이면 어쨌든 조금 더 ‘열심’이 있는 사람들일테고,
나름대로 기독교신앙에 대한 기본내용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일것이다.

적어도 내가 접한 바, ‘기독교에 조금 더 열심있는’ 사람들이 던지는 질문들, 그 사람들의 생각들을 몇가지 적어보고자 한다.

우선,
이들의 생각이 대단히 ‘교리중심적’이다.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는 결국 성경 전체의 ‘스토리'(내러티브)에 대한 것이므로,
진리가 내러티브의 성격을 띤다는 것을 이해해야 하는데,
기독교를 ‘교리’로 배운 사람들에게 내러티브라는 것은 좀 생경하게 느끼져는 것 같다.

한참 네러티브를 설명하고, 이야기를 쭉~ 하고나서..
결국 나오는 질문은, 그래서 교리에서 이러이러한 부분은 어떻게 생각해야 하나요…
그런 부류다.

그런데, 그건 사실 그렇게 놀랍지 않다.
처음 하나님 나라라는 개념을 이해하려고 했던 나 역시, 이 하나님 나라의 개념을 내러티브로 이해하기 보다는 교리의 일부로서 채워넣으려 했으니.

Teachability

어떤 사람이 teachable하다고 이야기하면, 그 사람이 가르칠줄 안다는 뜻이 아니라, 그 사람이 잘 배우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teachability는 “학습능력” 쯤으로 번역을 해야하지 않을까 싶다.

내가 처음 teachability라는 이야기를 들은 것은 기독교 모임이었다.
대충 Christian circle에서 teachability라는 말을 주로 discipleship과 연관시켜서 많이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20대, 30대에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나도 정말 teachable한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많이 결심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teachability에 대한 강의를 하던 사람들을 막상 만나서 이야기를 해보니,
그 사람들이 teachable하지 않다는 것을 발견할때가 많았다.
아… 그 난감한 배신감은…

기독교인들이 teachability라는 말을 꽤 많이 쓰는데,
막상 기독교인들이, 특히 열심이 있는 기독교인들이, 혹은 기독교의 지도자들이,
왜 이토록 teachable하지 않은 걸까.

나는 왜 별로 teachable하지 않은 사람인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