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ul and the Gift (2)

저자는 이 책에서 ‘Grace’ / 은혜라는 단어를 새로운 시각으로 다시 연구해서 바라보았다.
실제로 바울 당시에 은혜라는 단어가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를 여러가지 그 당시 문헌등을 사용해서 연구해보았다.

실제로 저자는 ‘선물’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그 당시에 이해되었는가를 찾아보면서 은혜의 개념을 정리했다.
우리는 흔히 선물이라고하면 특별히 댓가 없이 주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바울 당시에 그리고 고대시대에 선물은 선물을 주고 받는 두 당사자가 관계를 맺는 다는 것을 의미했다고 한다.
그러니 선물을 줄때는 아무에게나 주는 것도 아니고, 선물을 받는 것도 그냥 받고 감사합니다 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그로부터 관계가 형성되기 때문에 쉽게 선물받고 ‘생까는’ 것이 일반적이지 않은 사회였다. 특히 저자는 바울 당시의 그래코-로만 사회에서 여러가지 예를 들면서 선물이 ‘관계’를 형성하였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벌써 여기까지만 들어도, 음… 은혜가 그러니까 일종의 댓가를 요구하는 거라고?? 하는 생각이 확~ 든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소위 값싼 은혜 cheap grace를 아주 학문적으로 자근자근 밟아버린다고 할 수도 있겠다.

Paul and the Gift (1)

요즘 ‘Paul and the Gift’라는 John Barclay 책을 공부하고 있다.
음… 정말 ‘공부하고’ 있다는 말이 딱 맞다.
빡쎈 공부다. ㅠㅠ

이게 대중적으로 쓰여진 책이 아니고, 그야말로 학술서적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에,
완전 빡빡하게 이해하기 어렵고, 게다가 양도 많아서…

이 책에 대한 평가는 정말 화려하다. 20세기 이후 성서신학 분야 최고의 책이라는 평가도 있고, 이 책으로 New Perspective가 끝났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다. 실제로 SBL (Society of Biblical Literature / 성서학회)에서 John Barclay와 N T Wright이 공개적으로 토론이 붙었던 적도 있었다고 한다. (참석했던 사람들에 따르면 토론은 Baclay가 사실상 이긴 분위기 였다고 ㅋㅋ)

이제 대충… 아주 대충… Baclay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살짝 이해가 될 듯 하다.
살짝… 신박하다! ㅎㅎ

좀 새로운 개념을 접했으니 당분간 Barclay가 이야기하는 개념을 염두에두고 성경을 읽게되지 않을까 싶다. ^^

현재 계획으로는,
연말까지 Barclay가 이야기하는 갈라디아서를 이해하는데까지 이해해보려고 한다.
그리고 혹시 내가 어느정도 이해했다고 판단이 되면, 내년 봄에는 갈라디아서 성경공부를 한번 해보면 어떨까 싶다.
그러면서 아마 자연스럽게 이곳 블로그에서도 내가 공부한 것들도 조금씩 적게 되지 않을까.

참고로,
아주 아주 쉽게 설명한 한국어 강의
아주 아주 쉽게 설명한 영어 책 요약 <– 참고로 이 사람의 youtube channel은 구독추천!

하나님 나라 follow-up을 하면서 (5)

기존에 교회에서 듣던 이야기로 이들에게 충분하지 않았다.

내가 꽤 생각을 많이 해야하는 이야기를 그것도 꽤 빠른 속도로 쭈루룩~ 풀어놓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아주 흥미롭게 듣고 반응한다.

일부는 철학 이야기,
일부는 신학 이야기,
일부는 기독교 변증,
일부는 역사 이야기,
그리고 일부는 삶의 이야기들을 풀어놓는데,

이런 얘기는 잘 들어본적이 없다. 뭔가 막혀있던 것이 풀린다…
이런 식의 반응을 꽤 자주 듣는다.

모두가 그렇게 듣는다고 이야기할수는 당연히 없겠지만,
적어도 내게 반응해오는 사람들중에 다수는 왜 이런 이야기를 들어볼 수 없었을까요..
라며 신기해 하기도 한다.

하나님 나라 follow-up을 하면서 (4)

음악이 매우 중요하다.

나름대로 여러가지 신학적 개념들을 설명하기도 하고,
역사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철학에 대한 이야기를 한 이후에도 대개 나눔은…

“오늘 나눈 이야기에 딱 맞는 찬양 한곡을 띄웁니다”… 이런 방식이다.

내가 20, 30대일때도 그랬나?
우리도 물론 사람들 모이면 기타치면서 찬양을 부르기도 했고,
우리 세대야말로 두란노 경배와 찬양이 처음 시작되는 것을 경험한 세대이니…
당연히 찬양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었지만,
지금은 그런 경향이 훨씬 더 한것 같다.

하나님 나라 follow-up을 하면서 (3)

지극히 신앙이 개인적이다.

20-30세대가 공정에 관심이 많다고 이야기하기도 하고,
사회 정의에 관심이 많다고 하기도 하는데,
이게 신앙에 관한 discussion에 들어가면 결국은 다 그래서 ‘나’에 대한 질문들로 귀결된다.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잘 알 수 있는가
내가 기쁨을 유지할 수 있는가
내가 어떻게 더 성장할 수 있는가… 등등.

하나님 나라는 내가 들어가는 것이라기 보다는,
우리에게 다가온 것이라는 이야기를 설명하는데 더 많은 시간과 정성을 쏟아야 한다.

이게 신앙에 열심이 있는 사람들의 특징인지, 아니면 일반적으로 20-30세대의 특징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내 생각엔 일반적인 특징인 것 같다.)
결국 그렇게 사회정의나 공정에 대한 관심도,
그 사회 속에서 어떻게 하면 내가 살아남느냐 하는 것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비롯된것 같기도 하다.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는 너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라를 것

하나님 나라 follow-up을 하면서 (2)

또한 이런 신앙의 열심이 있는 사람들이 이 내용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지식의 연역적 접근을 선호한다.

이것은 결국 어제 이야기한 신앙을 교리적으로 접근한다는 것과도 연관되어 있을 수 있는데…

가령 성경의 이야기로부터 어떤 내용을 귀납적으로 끄집어 내는 것을 대개는 불편해하거나 익숙하지 않게 생각한다.
오히려 이미 알고 있는 신앙의 지식을 이용해서 성경 text를 해석하는 것에 훨씬 더 익숙하다.

그런데 그렇게 알고 있는 신앙의 지식들이 살짝 좀 이상한 것들이 있다. ^^
그러니 성경을 읽어보면 성경 본문이 이상하게 해석이 되는 것이다.

가령 구약의 본문에서 무리하게 예수님을 찾으려고 하는 시도를 하는 사람들을 만난다.
그러면 구약의 제사법에도 예수님이 드러나 있고,
시편의 어느 구절에도 예수님이 드러나 있고…이런 식으로 보는 거다.
음… 뭐 그렇게 볼수도 있다고 보는데, (내가 선호하는 성경읽기 방식은 아니지만.)
이게 좀 도를 넘어서, 다소 무리하게 그렇게 성경을 읽어내는 것들을 보기도 한다.

요즘 많은 교회에서 ‘교리’ 수준으로 설교와 성경공부 세팅에서 강조되는 것들중
워낙 이상한 이야기들이 많이 있다보니…
그런 교회 세팅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들의 생각이 그렇게 오염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하나님 나라 follow-up을 하면서 (1)

요즘 KOSTA follow-up으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세션을 계속하고 있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여러 질문들을 받기도 하고,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아무래도 몇주동안 이렇게 ‘하나님 나라’라는 주제로 더 공부해보겠다고 하는 사람이면 어쨌든 조금 더 ‘열심’이 있는 사람들일테고,
나름대로 기독교신앙에 대한 기본내용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일것이다.

적어도 내가 접한 바, ‘기독교에 조금 더 열심있는’ 사람들이 던지는 질문들, 그 사람들의 생각들을 몇가지 적어보고자 한다.

우선,
이들의 생각이 대단히 ‘교리중심적’이다.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는 결국 성경 전체의 ‘스토리'(내러티브)에 대한 것이므로,
진리가 내러티브의 성격을 띤다는 것을 이해해야 하는데,
기독교를 ‘교리’로 배운 사람들에게 내러티브라는 것은 좀 생경하게 느끼져는 것 같다.

한참 네러티브를 설명하고, 이야기를 쭉~ 하고나서..
결국 나오는 질문은, 그래서 교리에서 이러이러한 부분은 어떻게 생각해야 하나요…
그런 부류다.

그런데, 그건 사실 그렇게 놀랍지 않다.
처음 하나님 나라라는 개념을 이해하려고 했던 나 역시, 이 하나님 나라의 개념을 내러티브로 이해하기 보다는 교리의 일부로서 채워넣으려 했으니.

대안적 희망 (22)

희망을 갖게되는 것은 어떤 과정으로 이루어질까?

한편 논리적인 설득을 통해서,
한편 상황의 정확한 관찰을 통해서,
한편 감정적 동요를 일으켜서…

이런 과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모두 가능하지만,
나는 희망을 갖게되는 것도 역시 일종의 ‘종합예술’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설명할수도 있을 것 같다.

희망을 분명하게 확보하려면 위에 언급한 여러가지가 모두 잘 조화를 이루어 존재해야하지만,
희망을 잃어버리는데에는 희망을 구성하는 요소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심각하게 결어되는 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이 ‘믿음’을 어떻게 갖을 수 있느냐 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믿음을 갖는데에는 논리, 객관적 사실, 감정 등 모두가 조화를 이루어야히지만,
이중 하나라도 무너지면 믿음이 무너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희망을 갖는 것은 쉽지 않다.
희망은 늘 up-hill battle 이다

대안적 희망 (21)

가령 예를 들어서,
Rodney Stark의 The Rise of Christianity를 보면 2세기 로마에 닥친 역병을 기독교가 어떻게 다루었는지 잘 나와있다.
역병이 무서워서 사람들이 병자와 도시를 버리고 도망갔을 때,
그리스도인들은 그 속에 들어가서 병자를 간호하고, 버려진 사람들을 돌보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이 결론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의 생존률이 비그리스도인들의 생존률보다 더 높게되는 결과를 낳았다고.
그러면서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이건 초대교회 이야기를 보면 꽤 일관되게 나오는 theme이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순교를 했던 사람들도 있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선교를 했던 사람들도 있다.
죽어도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산다고 했던 사도바울도 있고.

그런데,
현대에는 그런 신앙이 어디에 있을까?

신학적 우파쪽에서는 신앙이 개인화되어버려서 그냥 내가 죽어서 천당간다는게 다인 모습이고,
신학적 좌파쪽에서는 현세에서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강조가 너무 커서 죽음을 두려워하는 theme 자체가 그 신학 체계내에 존재하기 어렵다.

이렇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신앙도 역시,
신앙의 초월성의 영역에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대안적 희망 (20)

내가 생각하기에 대안적 희망으로 또 한가지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초월성’이다.

역사적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극도의 어려움에 있을때마다 이들에게서 나왔던 것은 묵시문학이었다.

궁극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초월적 미래,
지금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어떤 새로운 세상,
이런 것들이 희망이 되는 것이다.

나는 어떤 의미에서,
이런 초월적 희망이 현대 기독교에서 사실상 거의 자취를 감추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사실 초월적 희망이란 사실 보수적 신학을 가진 사람들이 더 바랄만한 내용인데,
보수 신학진영이 전체적으로 세속화되면서 초월성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기껏해야 초월성이라고 하는게,
랄랄라 따따따 방언하는거나,
기도가 용한 사람에게서 기도를 받아 살림살이 나아지는것 같은 수준이니, 그게 무슨 희망이 될 수 있을까…

몰트만이 희망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낙관주의란 현재의 상태로부터 생각해낼 수 있는 밝은 미래에 대한 전망이다.
낙관주의는 논리적이고 연속적이다.
낙관주의의 미래는 현재로부터 탄생한다.

그러나 희망은 현재의 상태로부터 생각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희망은 현재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것이다.

나는 이것이 희망의 초월성을 아주 잘 이야기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대안적 희망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건강한 초월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희망을 잃어버린것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