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소한 1000개 이상의 건물이 불에 탔고,
1백만명 이상이 영향을 받는 정전이 생겼고,
3만명 이상에게 대비령이 내려졌다고 한다.
뉴스에서 보는 모습은 정말 무슨 지구 종말 영화 같은데서 나오는 것 같다.
그나마 바로 산불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들도,
숨을 쉬기 어려울 정도라고 한다.
내가 이렇게 저렇게 아는 사람들도 영향을 받아서 피신한 것 같고,
여러가지로 영향을 받고 있는 듯 하다.
그냥 당황하며 기도하는 수 밖에…
최소한 1000개 이상의 건물이 불에 탔고,
1백만명 이상이 영향을 받는 정전이 생겼고,
3만명 이상에게 대비령이 내려졌다고 한다.
뉴스에서 보는 모습은 정말 무슨 지구 종말 영화 같은데서 나오는 것 같다.
그나마 바로 산불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들도,
숨을 쉬기 어려울 정도라고 한다.
내가 이렇게 저렇게 아는 사람들도 영향을 받아서 피신한 것 같고,
여러가지로 영향을 받고 있는 듯 하다.
그냥 당황하며 기도하는 수 밖에…
나는 성경의 내용을 무리하게 해석하면서 내가 처한 현실의 상황에 빗대어서 읽는 것을 불편해하는 편이다. 그것은 성경의 내용을 읽기 보다는 내가 처한 현실을 성경을 통해서 읽어내는 것이고, 결국 성경 텍스트의 내용을 왜곡하게 되기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즘 매일성경 본문인 여호수아는,
내가 코스타를 생각하면서 하고 있는 고민을 많이 담아 읽게된다.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해도 그게 잘 안된다. ㅠㅠ
결국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출애굽이라는 부흥의 시기를 지낸 사람들이 아니라,
40년의 광야를 지내고 그곳에서 태어난 사람들이라는 것.
그들은 한편 40년동안 많이 흩어지고 잃어버렸을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대해 다시 remider가 되었어야 했을 거다. 실제로 여호수아서 초반부에 이 사람들에게 할례를 하는 것으로 시작을 한다. 광야에서 태어난 남자들이 할례를 하지 못했던 것.
아마 가나안에 들어가기전 나이 많은 일부 사람들은 출애굽의 영광을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요즘 아이들’을 보면서 암담하게 생각했을 수도. 자기들도 직접 출애굽을 경험하지도 못했으면서…
하지만 여호수아가 세워졌고,
이들은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들어갔다.
내 바로 윗 세대는 나름 그들이 모세와 같다고 생각했을 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실제로 나도 그렇게 믿었다. 그들중 어떤 분들은 모세와 같은 분들이라고.
그런데…. 내 윗 세대로부터 여호수아는 세워지지 않은 것 같아 보인다.
그리고 모세의 세대는 망가지고 말았다.
이걸 어쩌나….
어떤 사람들은 한국 교회는 본받아 지킬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많은 한계와 부족함이 있었지만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공산당에 핍박 당하고, 독재에 항거하고, 그 속에서 사랑을 베풀고 전도를 하고 기도를 하고 교회를 세우며 헌신해갔던 선배들이 있었다. 그로인해 사회가 달리지는 것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보이지 않는다….
내 바람은,
어떻게든 내가 하는 모든 일들을 통해,
여호수아 같은 사람들이 세워지도록 하는 것이다.
광야 40년의 암담함 속에서, 어쨌든 새로운 세대가 자신의 언어로 신앙을 이야기하고
나와 내 가족은 여호와를 섬기겠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
가능할까?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섬기고 살아가는 노력이 열매로 맺힐 것이라는 희망이 희미해져가는 것 같이 느껴진다.
It’s our direction, not our desire, that determines our destination.
어제 설교 중에서, 내가 마음 속으로 밑줄을 그은 문장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내가 더 생각하게 된 것은,
desire는 때로 매우 추상적이기 쉽다.
그렇지만 direction을 가질때 그 desire가 비로소 구체화되곤 한다.
적어도 내겐 그렇다.
그리고 어제 설교에서,
삶을 살아가면서 여유(margin)와 소망(hope)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그것이 결국 우리가 우리 삶에서 무엇인가가 이루어 지는 방식이라고.
2025년은,
나와 내가 사랑하는 이들에게,
하나님이 더 분명하게 드러나고,
우리의 고단한 삶 속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심이 밝히 드러나게 되길 간절히 빈다.
아침 해가 돋을 때 만물 신선하여라
나도 세상 지낼 때 햇빛 되게 하소서
주여 나를 도우사 세월 허송 않고서
어둔 세상 지낼 때 햇빛 되게 하소서
새로 오는 광음을 보람있게 보내고
주의 일을 행할 때 햇빛 되게 하소서
주여 나를 도우사 세월 허송 않고서
어둔 세상 지낼 때 햇빛 되게 하소서
한번 가고 안오는 빠른 광음 지날 때
귀한 시간 바쳐서 햇빛 되게 하소서
주여 나를 도우사 세월 허송 않고서
어둔 세상 지낼 때 햇빛 되게 하소서
밤낮 주를 위하여 몸과 맘을 드리고
주의 사랑 나타내 햇빛 되게 하소서
주여 나를 도우사 세월 허송 않고서
어둔 세상 지낼 때 햇빛 되게 하소서
나는 이분이 얼마나 신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잘 알지 못한다. 내가 잘 알고 있는 정치가도 아니다.
그렇지만 이분이 이 찬송가를 부르는 것을 들으며 함께 울었다.
이런 가사에 울면서 노래하고 기도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위로가 된다.
나도,
내가 흘리는 눈물의 기도로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었으면…
나는 축구를 잘 모르지만 손흥민은 참 축구를 잘한다.
세계 최고의 무대에서 아주 뛰어난 선수중 하나로 활약하고 있으니.
그런데,
그런 손흥민도 한국 국가대표에서 뛰면서는 자신보다 훨씬 못한 선수로 이루어진 팀에게 지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
그건, 손흥민이 축구를 잘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속한 팀이 그의 수준만큼 잘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손흥민 뿐 아니라, 한국의 선수들이 참 뛰어나다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그런데 그 뛰어난 선수들이 모여있는데도 막상 한국 팀이 축구를 그만큼 잘 하지 못하는 것을 많이 보곤 했다.
살다보면,
나는 나름대로 열심히 하는데,
하나님 앞에서 부끄럼 없이 살려고 노력도 하는데,
영 여러가지가 꼬이고 어렵고 힘들기도 하다.
물론 내가 잘 못해서 그럴수도 있겠지만,
때로는 그냥… 내가 속해있는 팀이 영 엉망이어서 그런것일수도 있겠다.
심지어는 다른 선수들도 다 잘 하는 선수들인데도, 그냥 그 팀이 잘 못하는 거다.
내가 열심히 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은 벽을 느낄때,
내가 뭘 어떻게 해볼 수 없는 것 같은 막막함 앞에서,
손흥민을 생각하며 위로를 얻는다.
나도 어쩌면…. 손흥민일지도 몰라…
내가 아는 아무개도,
내가 사랑하는 아무개도,
그렇게 위로받길 기도한다.
시편에 나오는 저주의 시를 보면 한편 유치하기도 하고 한편 좀 흉측하기도 하다.
109편이 대표적으로 그렇다.
그런데 정말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런 저주의 시를 외치는 사람들은 결국은 그 악에 대해 뭐 어떻게 할 능력이 없는 약자들이었을 것이다.
당장 가서 그 분노를 쏟아부어낼 방법이 없으니 이렇게 하나님에게 저주의 기도를 하는 것이었을 것.
정말 그렇다.
쏟아져 나오는 뉴스에 분노를 어떻게 추스릴 방법이 없다.
그래서 아주 점잖게 이야기를 해주는 뉴스보다 확실하고 과감하게 욕을 해대는 저렴한 youtube 채널이 차라리 더 마음에 든다.
시편 109편이 성경에 있다는 것이 참 다행이다.
참 위로가 된다.
저가 판단을 받을 때에 죄를 지고 나오게 하시며 그 기도가 죄로 변케 하시며
그 년수를 단촉케 하시며 그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시며
그 자녀는 고아가 되고 그 아내는 과부가 되며
그 자녀가 유리 구걸하며 그 황폐한 집을 떠나 빌어먹게 하소서
고리대금하는 자로 저의 소유를 다 취하게 하시며 저의 수고한 것을 외인이 탈취하게 하시며
저에게 은혜를 계속할 자가 없게 하시며 그 고아를 연휼할 자도 없게 하시며
그 후사가 끊어지게 하시며 후대에 저희 이름이 도말되게 하소서
여호와는 그 열조의 죄악을 기억하시며 그 어미의 죄를 도말하지 마시고
그 죄악을 항상 여호와 앞에 있게 하사 저희 기념을 땅에서 끊으소서
저가 긍휼히 여길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가난하고 궁핍한 자와 마음이 상한 자를 핍박하여 죽이려 한 연고니이다
저가 저주하기를 좋아하더니 그것이 자기에게 임하고 축복하기를 기뻐 아니하더니 복이 저를 멀리 떠났으며
또 저주하기를 옷 입듯하더니 저주가 물 같이 그 내부에 들어가며 기름 같이 그 뼈에 들어갔나이다
저주가 그 입는 옷 같고 항상 띠는 띠와 같게 하소서
아멘!
전성민 교수님이 수염 없던 시절에 하셨던 설교 중에서.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
악한 자가 교만하여 가련한 자를 심히 군박하오니 저희로 자기의 베푼 꾀에 빠지게 하소서
악인은 그 마음의 소욕을 자랑하며 탐리하는 자는 여호와를 배반하여 멸시하나이다
악인은 그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치 아니하신다 하며
그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
저의 길은 언제든지 견고하고 주의 심판은 높아서 저의 안력이 미치지 못하오며
저는 그 모든 대적을 멸시하며 그 마음에 이르기를 나는 요동치 아니하며
대대로 환난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나이다
그 입에는 저주와 궤휼과 포학이 충만하며 혀 밑에는 잔해와 죄악이 있나이다
저가 향촌 유벽한 곳에 앉으며 그 은밀한 곳에서 무죄한 자를 죽이며
그 눈은 외로운 자를 엿보나이다
사자가 그 굴혈에 엎드림 같이 저가 은밀한 곳에 엎드려 가련한 자를 잡으려고 기다리며
자기 그물을 끌어 가련한 자를 잡나이다
저가 구푸려 엎드리니 그 강포로 인하여 외로운 자가 넘어지나이다
저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잊으셨고 그 얼굴을 가리우셨으니 영원히 보지 아니하시리라 하나이다
(시편 10:1-11, 개역성경)
어제 하루 종일,
회사에서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멀리 타국에서 사는 아무것도 아닌 한 사람이 그저 뉴스로 벌어지는 상황을 보면서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분노하면서 기도하는것 뿐이겠지만,
그래도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안되겠다 싶었다.
어제는 유난히 바쁜 날이었다.
그리고 일이 많이 힘든 날이었다.
몸도 마음도 무거워져 버겁게 기도했다.
아침에 5시 반쯤 일어나서 조금 있다보니 뉴스에 난리가 났다.
그리고 그러부터 국회에서 계엄선포 무효결의를 하는 아침 8시까지,
계속 마음을 졸이며 뉴스를 체크했다.
그 와중에 나는 아침에 나와서 회사에 가야 했고.
문득 생각했다.
요즘 나는,
그리고 내가 알고 있는 기독교인들은,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