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내가 치매에 걸린다면…

나는 치매에 걸린 사람들을 많이 보지 못했지만,
때로 치매에 걸린 사람들이,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어떤 것을 끝까지 기억하고 그것을 되뇌이는 것 같다.

그렇게 그 사람이 자꾸만 되뇌이는 그 삶의 기억은 그 사람에게 있어서 하이라이트 같은 것이겠다.

어떤 이에게는 그것이 대학 합격, 돈을 많이 번 일, 큰 상을 탄 일과 같은 성공의 기억일테고,
어떤 이에게는 그것이 가난, 전쟁, 상실과 같은 고통과 아픔의 기억일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이에게는 그것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보낸 시간일수도 있을 것이고,
어떤 이에게는 그것이 평생 열정적으로 했던 일에 대한 회상일수도 있겠다.

정말 그러지 않기를 바라지만,
혹시 내가 치매에 걸리게 된다면…
나는 내가 끝까지 붙들고 되뇌이게 되는 그 기억과 생각이…
내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나의 서사이길 바란다.

다른 것은 몰라도,
예수님을 이야기하면 그저 눈에서 눈물이 주룩 흘러내리며 그분에 대한 감사가 내 마지막 인지능력에 남아있으면 좋겠다.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내게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이 내게 마지막으로 남는 가장 소중한 지식이자 기억이 되면 좋겠다.

꿈 속에서 주님 한번 만나기

내가 꽤 자주 되뇌어보는 바람이 있다.
그런 잘때 꿈 속에서 주님 한번 만나는 것.

음…
우선, 나는 꿈을 거의 꾸지 않는다. 그러니 이런 바람이 이루어지기 대단히 어렵고,
어쩌다 꿈을 꾸더라도 그 꿈을 깨어서까지 제대로 기억하는 일도 거의 없다.

그리고 그나마 어쩌다가 꿈을 꾼다 하더라도 내가 꾸고 싶은 내용을 막 생각해서 꿈을 꾸어본적도 한번도 없다.

그러니…
나이가 들어가면서 꿈 속에서 주님 한번 만나기와 같은 바람은 내게는 일어나지 않을 것 이라는 나름대로 합리적인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런데….
나 같이 꿈도 잘 안꾸고,
꾸더라도 꿈 기억도 잘 못하고,
꿈을 기억하더라도 꿈의 내용이 주로 시덥지 않은 것들인 그런 사람에게,

정말 꿈 속에서 주님을 만나는 일이 일어난다면 그거야 말로 진짜가 아닐까?
하는 다소 황당한 생각을 최근 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주님, 제 꿈속에는 나타나지 않아도 좋으니,
고통받는 사람들, 정말 주님께서 얼굴을 비추어주셔야 할만큼 절박하거나 절실한 사람들…
그런 이들의 꿈 속에는 꼭 좀 나타난 주십시오.

요즘 내가 하는 기도다.

초월성

하나님께서 초월적이라는 것을 잊고 살면서
‘신앙생활’이라는 것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나도 그렇다.

하나님께서 내가 살고 있는 세상과는 다른 차원(dimension)에 계시다는 사실은,
내가 하나님과 엮여지기 시작하면 내 삶에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채워지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나쁜 것도 아니고, 의미가 없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그 신비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다보면,
내가 추구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결과와 열매와 종착점에 도달하게 되기도 한다.

그리고는 그 모든 과정 속에서
‘하나님은 선하시다’는 고백을 하게 된다.

나는…
아직 하나님을 믿고 사는 것의 10%도 이해하지 못하고 살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욥기 9:33

“우리 둘 사이를 중재할 사람이 없고, 하나님과 나 사이를 판결해 줄 이가 없구나!”

어제 욥기 9장에 나와있는 이 구절이 정말 팍~ 마음에 박혔다.

욥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그 억울함과 답답함을 쏟아내고 있다.
억울하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한데…
하나님과 맞장떠서 대화를 해보기라고 하면 좋겠다 싶은데,
그것도 불가능해보이니 정말 속이 터지는 거다.

그러다가…
아니, 하나님 말고 다른 누가 좀 객관적으로 지금 이 상황을 잘 판단해서 나와 하나님 중 누가 잘못했는지를 가려주기라고 하면 좋을텐데…
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

욥이 정말 하나님 말고 다른 중재자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욥의 이런 외침은 정말…
무엇이 믿음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다.

관계와 특권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 예수님의 제자…
이렇게 하나님과 우리가 어떤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그 관계로서만 가능한 특권이 주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최근,
민우가 뭐가 좀 필요하다고 해서 약간 도와주고 있는 중이다.
민우는 뭐 작은 걸 하나 해주더라도 “thank you 아빠” 라는 말을 참 잘 하는 편이다.
뭐 예의바르고 좋은 것이기도 하지만…

지난 주말에는 민우에게 이야기해줬다.
민우야, 아빠가 네게 뭘 해주는걸 고맙게 생각하는건 좋은 일이지만,
아빠가 민우에게 무엇인가를 해줄 수 있다는 것은 아빠에게도 큰 특권이야.
그리고 민우에게는 아빠의 딸로서 누릴 수 있는 자격이 되는 것이고.

아빠에게 고맙다고 생각하고 이야기하는 것도 참 좋지만,
그것보다는 훨씬 더…
나는 아빠 딸이니까 아빠로부터 도움을 얻는건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걸 꼭 기억해라.
그리고, 민우같이 독립적이면서도 뭐든 잘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thank you God은 할지 몰라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그 백성이 갖는 독특하면서도 유일한 특권을 잘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렇게 이야기하면서…
당장 이건 내게 해주어야하는 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한편,
민우는 나를 닮은 거구나.
그리고 나도 내가 민우에게 해준 충고를 들어야 하는 거구나.

The Desert Song

이거 가사가 참 좋다.

‘사막’에서 부르는 노래로 시작한다.
가난하고, 배고프고, 필요가 있을때의 노래로 시작한다.
또 시험과 고통이 있을때 부르는 노래로 시작한다.

그런데,
중간에 그 어떤 것도 나를 해치지 못한다고 이야기하고,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노래가 이어진다.

전쟁중에도, 아직 승리가 먼 미래의 일같이 느껴지는 때에도,
여전히 하나님이 하나님이시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풍종할때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뿌리고 거두어서 다시 어려움이 있을때
추수해서 얻은 것을 다시 뿌리겠다고 노래가 끝난다.

아… 참 멋지다.

Big Comfort

하나님을 믿는것으로부터 오는 가장 큰 위로는,
하나님께서 즉각적으로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주신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믿는데서 오는 가장 큰 위로는,
우리의 상황에 무관하게,
그 상황을 대하는 우리의 상태와 무관하게,
그분의 사랑이 그쳐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의 기도 몇마디로 하나님이 흔들리지도 않으시고,
혹은 우리가 기도 좀 하지 않는다고 그분이 당장 노하셔서 벌을 내리거나 하시는 분이 아니시고,
우리가 뭘 좀 잘했다고 그것 때문에 우리에게 복과 해결을 주시는 분이 아니시라는 것이다.

그러니,
힘들때는 충분히 힘들다고 이야기할 수 있고,
기쁠때는 충분이 기뻐해도 된다.

내가 뭔가를 잘했느냐 못했느냐에 따라 쉽게 왔다갔다 하는 하나님이 아니신 것.

내가 얼마나 형편없이 부족한가 하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니…

모래위의 발자국

대학교때 이 시를 발견하고 얼마나 감격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신기한건…
막상 주님께서 동행하고 계시지 않는다고 느낄때는 이 시가 전혀 감동적이지 않다.
그 과정을 끝나고 나서야 비로소 이 시가 가슴에 다가오곤 한다.

깜깜하거나 답답할때는 그냥 그런것이 아닌가 싶다.
그냥 그렇게 주님께서 잘 보이지 않는 그 기간을 피할수는 없는 것 같다.

One night I dreamed a dream.
As I was walking along the beach with my Lord.
Across the dark sky flashed scenes from my life.
For each scene, I noticed two sets of footprints in the sand,
One belonging to me and one to my Lord.

After the last scene of my life flashed before me,
I looked back at the footprints in the sand.
I noticed that at many times along the path of my life,
especially at the very lowest and saddest times,
there was only one set of footprints.

This really troubled me, so I asked the Lord about it.
“Lord, you said once I decided to follow you,
You’d walk with me all the way.
But I noticed that during the saddest and most troublesome times of my life,
there was only one set of footprints.
I don’t understand why, when I needed You the most, You would leave me.”

He whispered, “My precious child, I love you and will never leave you
Never, ever, during your trials and testings.
When you saw only one set of footprints,
It was then that I carried you.”

우리의 일차적 적은 하나님

Stanley Hauerwas가 이런 이야기를 했었다. – 물론 정확한 wording을 다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내용은 기억한다.

우리의 fist enemy (첫번째 적, 일차적 적)은 하나님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선물을 받으면 대개는 그 선물을 갚으려 한다. 왜냐하면 인간관계에서 선물은 결국 권력관계를 형성하기 마련이고, 그 권력관계를 공평하기 만들기위해 우리는 선물을 받으면 그것에 상응하는 것을 주려고 한다.

그런데,
하나님께는 그것이 불가능하다. 우리의 존재 자체가 선물이다. 은혜이다.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을 미워하는/싫어하는 (hate)반응을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스도인이되는 것의 핵심은,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Giving up control

하나님을 깊게 마주하며 기도하는 것에 대하여…

Control을 포기하는 것이, 하나님을 마주하는 것의 전제 조건일까?
아니면 하나님을 마주하게될때 나타나는 열매일까?

잘 알수는 없지만,
한편으로 하나님을 더 깊게 마주하기 위해서는 내 영혼을 잠잠하게 재우는 것이 중요한 것 같고,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마주하는 일이 없다면 정말 내가 내 control을 포기할 수 없는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지금 내 기도는,
하나님을 더 깊게 만나기 위해,
내 빈손을 완전히 드러내고,
그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