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적 질문과 개인적 상황

세상에 악이 이렇게 있는데, 신이 있다는것이 말이 되는가,
기독교의 신이 유일신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소위 기독교변증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여러 내용들을 다루는 교회 소그룹이 어제 끝났다.
봄학기 동안 했던 것인데…

내가 마지막에 했던 이야기는 이것이었다.

나름대로 꽤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 보았고, 그 사람들이 하는 까다로운 지적(intellectual) 질문들을 많이 접해 보았다.
똑똑한 사람들이니 그 사람들이 하는 질문들도 당연히 매우 날카롭다.

그렇지만 그렇게 날카로운 지적 질문을 하는 사람들의 다수는, (적어도 내 경험으로는 80% 이상의 사람들은) 그 지적질문이 단순히 지적 호기심으로부터 비롯된 것들은 아니다.
대개는 개인적인 상황으로부터 파생되어나온 질문들이다.

가령, 개인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아픔을 겪었기 때문에 선하고 전지전능한 신의 존재에 대한 거부감이 생겼다던가,
자신의 꿈이 좌절되었기 때문에 신이 자신을 돌본다는 것을 믿기 어렵다건가 하는 것들이다.

그래서 날카로운 지적 질문을 하는 사람들의 대다수는,
‘믿을 수 있는 이유’를 찾는 것이 아니라
‘믿지 않을 수 있는 이유’를 찾는 것이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에대한 적개심을 정당화할 이유를 찾는 것이다.

그것은,
기독교인들이 자신들만의 echo chamber안에서 자신의 입맛에 맞는 이야기만을 들으며 즐거워하는 것만큼이나 비겁하다.
하나님에 대한 거부감이 있다면, 그 거부감을 ‘지적 질문’뒤에 숨겨둔채 지적인 질문만을 던질 것이 아니라,
그 신에 대한 거부감 자체를 꺼내놓고 다루어야 한다.

기독교를 받아들이기 위해서 그렇게 해야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이 ‘진리’에 대한 정직한 자세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하루 좀 쉬어보자!

회사 휴가가 쌓인게 남아 돌아가서,
최대로 누적이 되었기 때문에 지금부터는 휴가를 쓰지 않으면 그냥 없어져버린다고 매주 이메일이 날라온다.

그래서 원래는 오늘 하루 쉬어보겠다고 큰 계획(?)을 세우고 미리 시간다 비워두고,
혼자 시간좀 보겠다고 생각했으나….

어제 밤까지 text message오고,
이메일 날라오고…
결국 오늘 일하게 되었다.ㅠㅠ

요 한 고비 넘기면 살짝 좀 여유가 생길 것 같은데…
요 고비가 잘 안넘어가네.

지금 문제는,
팬데믹 때문에 일이 되는게 계속 느려지는데,
일을 마쳐야하는 deadline은 여유있게 잡혀있지 않으니 결국 나와 사람들을 들들 볶아가며 일을 해야하게 된거다.

어제 늦은 밤까지 나와 이메일하고 text message하면서 씨름했던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면 참 안쓰러운거고…

나도 그렇지만 그렇게 다 함께 아둥바둥하고 있는 사람들이 하루쯤 이메일 걱정 안하고 쭈욱~ 쉴 수 있으면 좋겠다.

내가 가는 회사마다 망한다?

내가 처음 hp에 갔을때, hp는 한참 뜨고 있었다.
결국 내가 hp에 있는 동안 hp는 pc 시장 점유율 1위를 달성했고,
tech 업계 최고의 시가총액을 달성했다.
그런데 그렇게 최고점을 찍고나서 슬슬 밀려나더니 내가 나올때쯤에는 완전 쭈루룩~ 밀려나는 분위기였다.

그 후에 다녔던 apple은,
내가 막 들어갈때 막 ipad를 시장에 처음 냈었고, apple watch가 소문만 무성하던때였다.
뭔가 역동적으로 잘되는 것 같았는데,
iphone 5정도부터 예전과 같은 성장이 잘 되지 않았고,
iPad도 처음엔 좀 되는 것 같다가 점점 시들해지는 분위기였고,
apple watch도 전반적으로 sales가 아주 잘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apple은 뭐 회사 분위기가 어려워지는 때는 없었지만, 다니다가 뭔가 정체가된다 싶었을때쯤 나는 나왔다.

그 다음에는 Lenovo에 다녔다.
내가 Lenovo에 들어갈때는 Lenovo가 pc 시장 점유율 1위였고,
모토롤라를 사서 mobile 시장에도 진출하던 때였다.
Lenovo 브랜드의 mobile phone도 있었고.
내가 그 회사에서 나올때쯤 pc 시장이 전반적으로 주저앉으면서 회사 분위기가 완전 좋지 않게 되었다.

이렇게보면,
내가 지금 회사 이전에 다녔던 회사들은,
한참 뭔가 잘 나가기 시작할때 내가 들어갔고,
뭔가 잘 안되거나 정체될때 내가 나오게 되었다.
이쯤되면 내가 그 회사들을 어렵게 만든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살짝 들기도… ㅎㅎ

부디 지금 회사는 어렵게 되지 말고 잘 되면 좋겠다는 작은 바램이…

Work from home after COVID-19

나는 hardware를 만드는 일을 하기 때문에 회사에 가서 일을 해야하는 일들이 그래도 좀 있다.

그런데 software engineer들은 그냥 집에서만 있어도 기능적으로는 일이 대부분 잘 되는 경우가 있는 것 같다.

그럼에도 실리콘 밸리의 큰 회사들중 꽤 많은 회사들이 COVID-19 이후에 직원들이 office로 출근을 하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인터넷에서 돌아다니는 이야기들의 분위기를 보면, 엔지니어들은 계속 work-from-home을 자유롭게 더 하고 싶다는 분위기가 많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지만)

그래서 다시 office로 돌아오라고 강요하면 회사 옮기겠다고 하는 사람들도 꽤 있는 것 같다.

회사에서는 office로 돌아오라고 하고, 직원들중 꽤 많은 수는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하고…

COVID-19이 끝난 이후 이 일이 어떻게 전개될지는 잘 모르겠다.

위선과 피상성

복음서에서 위선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hypocrisy라는 영어단어와 발음도 비슷하다.
ὑπόκρισις (후포크리시스 쯤으로 읽을 수 있겠다.)

그런데 이 단어를 ‘위선’으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는 내용을 읽었다.
Joel Green의 누가복음 주석 (NICWT)에서 본 것이다.

후포크리시스라는 단어의 용례를 70인역에서 찾아보면,
위선자라는 단어는 대개 하나님의 뜻에 맞는 행동을 하지 않는 사람들, 혹은 godless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의 모습을 ‘후포크리시스’로 표현하신 것은,
이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과 성경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그래서 이 사람들의 행동이 깊이 뿌리를 두지 못한 피상적인 종교적 열심에 머물러 있었던 것을 말씀하신 것이라는 설명.

내가 나름대로 그것을 곰곰히 곱씹어보면,
바리새인의 문제는 속은 거짓이 가득한데 겉만 뻔지르르한 위선이 문제가 아니라,
속은 텅 피어있어 내용이 없는데 겉은 종교성으로 가득한 피상성이 문제라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누가복음에 나와있는 바리새인의 ‘후포크리시스’를 ‘피상성’이라고 생각하고 읽어보니 이야기가 아주 술술~ 잘 풀린다!

최근 피상성에 대해 들었던 말 중에 아주 멋진 말.
미라슬라브 볼프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
“Religion is most dangerous when it’s superficial”

깊이 생각할줄 모르는 종교성은 파괴적이라는 생각을 더 많이 하게 된다.

Because I’m not in charge

나름대로 열심히 살려고 노력도 하고,
단순히 열심히 살 뿐 아니라, integrity도 잃지 않으려고 정말 많이 노력한다.

그러나,
가끔 한번씩은…
내가 이렇게 열심히 노력하는데, 내가 잘하고 있긴 한걸까?
내가 완전히 잘 못 생각하고 있는 것들이 있다면 어쩌지?
그런 생각들을 하게 된다.

지난 주말,
다른주말보다 조금 더 쉬고,
더 게을렀다.

그러면서 어제 저녁에 문득 바로 이런 생각이 나를 확~ 감쌌다.

어쩌면 지금 내가 완전히 틀렸을지도 몰라…

그럼 어쩌나.
그럼 뭘 어떻게 해야하나….

이래저래 그렇게 저녁시간을 보내다가 결국 자기전에 다다른 생각.

I’m not in charge.

그래, 결국 내가 당연히 다 맞을순 없지.
당연히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들, 생각하는 것들, 이야기하는 것들중 틀린 것들이 많이 있겠지.
그래도 이런 불완전한 사람들을 통해서 뭔가를 이루시는 게 하나님이니.

내가 생각해야하는 것은,
내가 정말 모든 것들을 다 옳게 하고 있냐는 질문이 아니라,
내가 여전히 하나님께 충성된(faithful)가… 하는 질문이 아닐까 싶다.

Am I faithful?

그 질문에 대해서도 여전히 자신이 없긴 하지만,
그래도…
뭐 하나님께 faithful하려고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이야기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I’m not in charge.

어제 밤에 잘 잘 수 있었다.

대안적 희망 (22)

희망을 갖게되는 것은 어떤 과정으로 이루어질까?

한편 논리적인 설득을 통해서,
한편 상황의 정확한 관찰을 통해서,
한편 감정적 동요를 일으켜서…

이런 과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모두 가능하지만,
나는 희망을 갖게되는 것도 역시 일종의 ‘종합예술’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설명할수도 있을 것 같다.

희망을 분명하게 확보하려면 위에 언급한 여러가지가 모두 잘 조화를 이루어 존재해야하지만,
희망을 잃어버리는데에는 희망을 구성하는 요소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심각하게 결어되는 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이 ‘믿음’을 어떻게 갖을 수 있느냐 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믿음을 갖는데에는 논리, 객관적 사실, 감정 등 모두가 조화를 이루어야히지만,
이중 하나라도 무너지면 믿음이 무너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희망을 갖는 것은 쉽지 않다.
희망은 늘 up-hill battle 이다

대안적 희망 (21)

가령 예를 들어서,
Rodney Stark의 The Rise of Christianity를 보면 2세기 로마에 닥친 역병을 기독교가 어떻게 다루었는지 잘 나와있다.
역병이 무서워서 사람들이 병자와 도시를 버리고 도망갔을 때,
그리스도인들은 그 속에 들어가서 병자를 간호하고, 버려진 사람들을 돌보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이 결론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의 생존률이 비그리스도인들의 생존률보다 더 높게되는 결과를 낳았다고.
그러면서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이건 초대교회 이야기를 보면 꽤 일관되게 나오는 theme이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순교를 했던 사람들도 있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선교를 했던 사람들도 있다.
죽어도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산다고 했던 사도바울도 있고.

그런데,
현대에는 그런 신앙이 어디에 있을까?

신학적 우파쪽에서는 신앙이 개인화되어버려서 그냥 내가 죽어서 천당간다는게 다인 모습이고,
신학적 좌파쪽에서는 현세에서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강조가 너무 커서 죽음을 두려워하는 theme 자체가 그 신학 체계내에 존재하기 어렵다.

이렇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신앙도 역시,
신앙의 초월성의 영역에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대안적 희망 (20)

내가 생각하기에 대안적 희망으로 또 한가지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초월성’이다.

역사적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극도의 어려움에 있을때마다 이들에게서 나왔던 것은 묵시문학이었다.

궁극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초월적 미래,
지금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어떤 새로운 세상,
이런 것들이 희망이 되는 것이다.

나는 어떤 의미에서,
이런 초월적 희망이 현대 기독교에서 사실상 거의 자취를 감추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사실 초월적 희망이란 사실 보수적 신학을 가진 사람들이 더 바랄만한 내용인데,
보수 신학진영이 전체적으로 세속화되면서 초월성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기껏해야 초월성이라고 하는게,
랄랄라 따따따 방언하는거나,
기도가 용한 사람에게서 기도를 받아 살림살이 나아지는것 같은 수준이니, 그게 무슨 희망이 될 수 있을까…

몰트만이 희망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낙관주의란 현재의 상태로부터 생각해낼 수 있는 밝은 미래에 대한 전망이다.
낙관주의는 논리적이고 연속적이다.
낙관주의의 미래는 현재로부터 탄생한다.

그러나 희망은 현재의 상태로부터 생각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희망은 현재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것이다.

나는 이것이 희망의 초월성을 아주 잘 이야기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대안적 희망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건강한 초월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희망을 잃어버린것이 아닌가…

대안적 희망 (19)

나는 하나님의 통리라고 설명되는 하나님 나라의 개념을 매우 좋아한다.
내가 세상과 내 삶을 해석해내는 가장 근본적 기본이 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 이야기를 하는 어떤 사람들이 하는것 같이,
‘초월성’이 배제된 하나님 나라를 이야기하는 것은 잘 공감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초월성의 배제한 하나님나라가 우리에게서 희망을 빼앗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초월성이 배제되어버리면 결국은 하나님나라의 이야기도 우리의 ‘의지력’과 ‘행동력’이 얼마나 강한가에 의해 좌우되는 이야기가 되어버리고 만다.
더 정확하고 논리적으로 사람들을 설득해서 그렇게 설득된 사람들이 강한 의지를 가지고 제대로 execution 해내는 것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결국 초월성이 배제된 하나님나라 운동은 엘리트 운동이 되어버린다.
논리적 구조를 잘 이해하지 못하거나, 강한 의지, 실행력이 부족한 사람들은 함께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