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M (미국 뉴스앤조이)에서 원래 글에 대한 변호의 글을 올렸다.
http://www.newsm.com/news/articleView.html?idxno=4236
그래서 나는 또 거기 아래에 답글을 달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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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재영 기자의 응답에 경의를 표합니다.
(그리고, 한국 복음주의에 대한 비판에 대해서는 많은 부분 깊이 공감하고 동의합니다.)
그러나, 죄송합니다만, 여전히 비판과 그 변론의 논리의 흐름이 명확하지 않다고 느껴집니다.
1. 저는 여전히 일부 목회자의 도덕적 문제가 복음전도-사회참여에 대한 신학적 논쟁과 직접 연관이 있다는 진단에 대해서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문제제기와 논리의 흐름이, 적어도 제게는 충분히 convincing하게 인식되지 않았습니다.
언제 기회가 되면,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토론해보아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2. 그리고, 제가 댓글에서 언급했던 것 같이, 코스타가 민중의 아픔을 외면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양기자님의 원래 글이나, 이번에 쓰신 변론의 글 모두, 코스타가 민중의 아픔을 외면했다는 가정하에서 쓰여진 것으로 보입니다.
이전 글에서는 그 점을 매우 explicit하게 쓰셨고, 이번 글에서는 조금 더 에둘러서 쓰셨습니다.
그렇지만, 코스타가 민중의 아픔을 외면했다는 비판을 하려면, 코스타가 이야기했던 message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전 반박 글에서 썼던 것 같이, 코스타가, 적어도 지난 10여넌동안 담아내고자 했던 주제와 그 주제문을 읽어본다면 그 비판의 내용이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령, 금년에 시카고와 인디애나폴리스 전체집회에서 나누어진 컨텐츠가 무엇인지를 살펴본다면,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부분이 어떤 것인지, 적어도 일부 드러날 수 있을 것입니다.
3. 총론과 거시는 옳은데, 각론과 미시가 잘못되었다는 지적에 대해서.
제가 반론 글에서 적고자 했던 것은, 그 총론과 거시의 관점에 헛점이 많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총론과 거시의 내용을 정확하게 포괄하려면, 그것이 사실에 근거한 비판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언급한 data들에 오류가 많다는 지적을 하고 싶었습니다.
가령, 자동차를 하나 만들어 놓고, “이건 참 잘 만든 자동차입니다. 다만 강판이 좀 약하고, 브레이크에 약간 문제가 있을뿐” 이라고 한다면, 잘 만든 자동차라는 거시적 선언에 약점이 있는 것입니다.
양기자님이 지난 글에서 언급한 코스타 비판의 총론은 이렇습니다.
코스타는 처음부터 민중의 아픔을 외면하고 복음전도만을 강조하는 신학적 입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김규동 목사의 이런 문제도 생긴 거다.
실제로 보면 코스타는 이러이러한 문제를 가지고 여태껏 왔다. 그리고 지금도 그 문제는 그대로다.
저는 그것에 대해 다음과 같은 비판했습니다.
코스타는 민중의 아픔을 외면하지도 않았다.
민중의 아편을 외면한것과 일부 목사의 도덕적 문제는 그 연결고리가 약하다.
지금 코스타의 모습을 보면 제시한 ‘코스타의 문제점’들은 사실에 근거하지 않는 것으로 설득력이 약하다.
저는 제 논지가, 양기자님의 총론과 거시에 대하여 충분히 근거있는 반박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4. 코스타가 자본의 덫에 걸려있다는 비판에 대해.
이것은, 양 기자님의 글에서도 지적하셨던 것 같이, ‘통계의 적확함’이 아니라 ‘심리적 거부감’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심리적 거부감’이 정확하지 못한 데이터에서 나온 것이라면, ‘편견’이 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역시, 지난 5년간, 인디애나폴리스와 시카고 미국 코스타 강사들을 한번 확인해 보십시오.
정말 돈많은 목사들만 찾아올 수 있는 집회였는지.
코스타가 자본의 덫에 걸려있다는 비판을 하려면, 적어도 다음의 한가지 가운데 하나여야 합니다.
– 코스타는 자본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다.
– 코스타는 자본을 가진 사람들만 참여하고 있다.
– 코스타의 메시지와 정신이 자본을 찬양하고 칭송하는 방향으로 설정되어 있다.
그렇지만, 과연 정말 그렇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data가 충분히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그렇게 생각할 여지가 아주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의 방향을 지지하는 데이터들을 더 많이 있습니다.
적어도 미국 코스타에 관한한 말입니다. (저는 다른 나라 코스타에 대해서는 어떤 언급을 할 만큼 충분히 알지 못합니다.)
5. 비판의 촛점이 자꾸만 옮겨가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처음에는 “김규동 목사의 성추행의 문제는, 민중의 아픔을 외면하는 신학적 첫 단추가 잘못 끼워졌기 때문이다.” 라고 했다가,
이번에는 “코스타는 자본에 덫에 걸려 있다. 돈이 많이 들고 스타강사를 부를 수 밖에 없다” 라고 옮겨갔습니다.
처음 비판에 대해서도 저는 나름대로 반론을 폈고, 이번 두번째 양기자님의 글에 대해서도 역시 정확하지 못한 부분에 대해 반론을 씁니다.
6. 코스타가 완벽하다고 항변하는 것은 물론 절대로 아닙니다. 코스타의 한계가 명확하게 있고, 더 잘 할 수 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실제로 저도 그런 의미에서 코스타를 향해 하고 싶은 비판의 내용들이 많이 있습니다.
다만 제가 지난 답글과 이번 답글을 통해서 쓰고 싶은 것은, 그 비판이 정확한 사실에 근거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양 기자님이 써주신 변론의 글에, 다시한번 경의를 표합니다.
그냥 무시하고 지나가셔도 좋았을 한 독자의 답글에 이렇게 시간을 내어 자세히 변론을 써주신 것만으로도 감사를 드립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양기자님의 의도와 기본적인 문제의식에 대해 저도 많은 부분 공감합니다.
언제 기회가 되면, 차 한잔 마시면서 좋은 대화를 가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저야 미국 한 지역에서 그냥 회사다니면서 살아가는 평범한 직장인이지만, 그런 대화를 통해서 저 같은 사람도 더 배우고 자라나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