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한 욥기 해석

1.
나는 욥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
그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우선 너무 어렵다. 이해가 잘 안된다.

그리고,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욥기의 어떤 해석이, 너무 쉽게 죄에대하여 면죄부를 주는 것 같이 생각되기 때문이다.

흔히 사람들은 욥기의 중요한 message 가운데 하나를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고통은 인과응보의 결과가 아니다.”
“고통을 받는 이유는 그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다.”

음…
뭐 어떤 경우는 물론 그렇다. 딱이 뭐 죄가 없는데도 정말 억울하게 고난을 당하는 경우가 있다.

그렇지만…
나는 그렇다고 모든 고통이 그 자신의 죄와 무관하다고 결론짓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뭐 모든 고통이 자신의 죄의 직접적 결과가 아닐수는 있어도,
사실 많은 고통은, 자신의 죄와 연관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나는 가지고 있다.

적어도, 내 자신의 고통의 문제를 바라볼때 나는 그렇다.

2.
돌이켜 생각해보면,
내가 겪었던 고난의 많은 부분은 정말 내 죄와 연관이 있었던 것 같다.

아니, 그게 반드시 내 죄의 직접적 결과는 아니라 하더라도,
나는 고난과 고통의 순간을 지내며, 내 죄의 모습을 깊이 깨닫고 묵상해볼 수 있었다.

그리고 결국은, 아… 그래…. 내 이런 죄의 모습이 이렇게 드러나는 구나… 결국 나는 이 죄에 묶일수 밖에 없는 존재였던 것이구나… 하는 탄식을 올릴 수 밖에 없었다.

만일,
내가 내 고통의 순간에, 이건 내 죄와 무관하게 그냥 일어난 일이고, 나는 그저 하나님의 완전함을 의지하면 된다는 식으로 보냈다면,
깊은 죄에대한 묵상으로부터 나오는 깨달음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죄에대한 깨달음을 마주하면서 더 깊게 하나님을 대면하게 되는 경험 또한 없었을 것이다.

3.
내가 아직 대학생일때,
나보다 한살 더 나이가 많았던 같은 교회의 한 무뚝뚝한 형은,
내 죄에대한 지적질을 뜬금없이 해주곤 했었다. -.-;

뭐 그 형이 늘 맞았었는지 하는건 잘 기억이 안나지만,
적어도 그 형이 집어주는 어떤 부분은 정말 아주 날카롭게 잘 맞았다.
내가 내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욕망과 싸우고 있을 때, 그 형은 내 그 죄의 핵심을 찝어서 내게 이야기해 주었다.

내가 sexual desire와 씨름할때, 그 형은 그 이야기를 해주었다.
(참고로 그 형은 아주 기도가 깊은 사람이었다.)
그 형의 그런 지.적.질.은, 내가 죄를 제대로 맞서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4.
공동체에서 사랑하는 사람의 잘못된 모습을 보며 사랑으로 이야기해주는 것을 무조건 욥의 친구의 모습으로 몰아부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정말 건강한 공동체라면, 사랑하는 형제에게 그것이 죄이다. 그 결과로 너는 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직언을 해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욥기를 해석함에 있어…
그것을 고난은 죄의 결과가 아니다 는 식으로 이야기하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어떤 고난은 죄의 결과가 아니다.
그렇지만 어떤 고난은 분명히 죄의 결과이다.
그리고 또 어떤 고난은 죄의 직접적인 결과가 아니라 하더라도 그 고난의 과정 중에 깊은 죄가 드러나게 된다. 그리고 그 고난이 자신의 그런 죄와 어떤 연관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수도 있다.

5.
욥기는 처음에,
욥이 얼마나 괜찮은 사람이었는가 하는 것을 거듭해서 강조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정말 죄를 짓지 않고 의인으로 살았다고 거듭 이야기한다.

그런데,
우리중 얼마나 많은 사람이 욥과 같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나는 욥기를 over-generalization (과잉일반화)해서 적용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욥기는 하나님의 신비애 대하여 매우 깊은 통찰을 제공해준다.
그러나 욥기는 고난과 죄에대한 연관성 유무를 이야기해주기 위한 책은 아니라는게 내 생각이다.

6.
요즘,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고 칭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불편하면 그것이 진리가 아니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내 잘못을 누군가가 지적해주면 기분이 나쁘고 불편해. 그러니까 그건 잘못된 거야.

그렇지만,
잔리의 판단 기준은,
내 감정적 반응에 있지 않다.

오히려 죄인인 인간의 감정적 반응은, 진리의 판단기준을 흐리기 쉽다.

N. T. Wright의 시리즈 강의

몇주 전 internet에서 찾은 N. T. Wright의 강의 시리즈.

나는 첫번째 것과 두번째 일부만 들었는데.

정말 강추!

특히, N. T. Wright의 생각 전체를 조망해서 알고 싶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좋을듯. 아주 새로운 이야기를 한것 같지는 않고, NTW가 자신의 생각을 대중을 위해서 정리한 아홉번의 강의인 것 같아 보인다.

실력과 인격

뭐 자랑이 아니고… 

(이런 자랑 천박하다는거 잘 아니까 이런 자랑은 사실 별로 안한다. 이제 그런거 자랑할 나이도 지났고…)

고등학교때부터 계속 ‘엘리트’들과 지내왔다.

고등학교 동창의 70% 이상은 IQ가 155가 넘는다.

그러다보니, 부지불식간에 나는 세상 사람들이 다 그렇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 후에 다녔던 학교도, 직장도 계속 그런 부류의 사람들을 많이 만나며 지냈다.

내 ‘신앙’의 영역에서도 역시 마찬가지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정말 ‘탁월한’ 분들과 ‘개인적인’ 친분을 가지고 지낸 경우가 많았다.

여러분들과 참 값지고 귀한 fellowship을 나누었고, 그분들의 영향을 참 많이 받았다.

그리고 지금도 역시 그렇다. 어찌 되었건, 꽤 깊은 신앙/신학적 통찰을 가진 분들과 그래도 계속 ‘fellowship’이 있고, 지금도 그분들과 영향을 주고 받고 있다.

소위 신앙의 엘리트들이다.

이렇게 내가 만나고 살아온 사람들은 대단한 실력을 갖춘 사람들이다. 

그러나 내가 물론 그런 사람들만 만나고 산건 아니다. 

그처럼 뛰어난 실력을 갖추지 못한 분들과도 물론 계속 fellowship이 있다.

소위 이렇게 뛰어난 실력을 갖춘 사람들을 만날 때,

그만큼 실력이 되지 않는 사람들이 흔히 보이는 반응은, 

‘나도 그렇게 빠지지 않아’ 라는 자세를 보이는 것이다.

그러다보면, 무리수를 두고, 잘못된 사리판단을 하기도 한다.

뭐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실력이 없는 것은 물론 죄가 아니다.

그러나, 그 실력 없는 것을 다루는 방법에서 대단히 어긋난 접근을 하는 것은 죄이다.

문제는

뛰어난 실력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나의 나됨’을 계속 지키면서, 실력이 부족한 것이 결코 인격체로서 열등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계속 인식하고 사는 것이 참 쉽지 않다는데 있다.

나 역시, 

나보다 뛰어난 사람들 사이에서 늘 이런 문제로 갈등하고 살았고,

지금도 계속 이런 문제로 씨름하며 살고 있다.

예전에는,

뛰어난 실력을 가진 사람들을 보며 그 사람들을 따라가려고 노력했었다.

이제는,

뛰어난 실력을 가지지 못했지만, 그건 자체를 받아들이면서 겸손할줄 아는 사람. 그런 인격을 가진 사람들을 따라가고 싶다.

실력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격이다.

그리고 진정한 인격은, 하나님 앞에 서는 겸손함으로부터 형성된다.

사랑과 연민

내가 생각하기에,

연민(Compassion)은 그 사람과 내가 ‘같은 사람’임을 인정하고 느끼는데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Love)은,

그 사람과 내가 ‘다른 사람’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데에서 시작한다.

사랑함에 있어, 대상을 나와 동일시하는 것은 자칫 ‘자기애(self-love)’에 머무르게 하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은 연민보다 더 어렵다.

나는 도대체 왜 다른 사람이 나 같지 않은지 하는 것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부류의 사람이다.

나는 사랑을 참 잘 못하는 사람이다.

마지막 숨을 쉬는 그 순간까지,

계속 사랑을 노력하며 살아야 하는 사람.

아, 사랑이 좀 더 자연스러운 그런 사람은 얼마나 좋을까. 그런 성품의 사람들이 부럽다.

KOSTA/USA-2014 Chicago Conference 마친 단상들 (5)

마지막으로,

이번에 휘튼에 간 것은 2년 만이었다. 

작년에 과일회사에 다니면서 아예 conference 자체를 참석할 수 없었으니…

그런데,

휘튼 구석구석은 정말 내게 너무나도 익숙했다.

그곳에서 만나는 분들도 참 익숙하고 반가웠다.

한국에서 유명한, 나보다 연배도 위 이신 목사님께서 내게 먼저와서 인사를 청하시기도 하셨다. (완전 민망… 죄송….)

뭐 그도 그럴 것이 96년부터 휘튼에 매년 갔으니…

여러분들과 반갑게 인사도 하고, 늘 그렇듯이 섬기는 사람들 보면서 감동도 받고, 군데군데 모여있는 학생들보며 뭉클하기도 하고…

뭐 그렇게 지내고 밤을 꼬박 새우고 목요일 새벽에 ORD 공항으로 왔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허억.

이거… 너무 내가 모든 것이 익숙해져 있다.

이렇게 많이 편하고 익숙하면, 편하고 익숙한 것에 감추어진 blind spot을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인데.

오래 코스타를 섬겨오면서 이렇게 그냥 편하고 익숙해져 버렸다면…

그래서 화들짝 위험하다고 느꼈다면… 

– 코스타가 바뀌어야 하는가

– 내가 바뀌어야 하는가

– 둘 다 바뀌어야 하는가

– 내가 코스타를 떠나야 하는가

글쎄….

내게는 무거운 숙제이다.

KOSTA/USA-2014 Chicago Conference 마친 단상들 (4)

뭐 하루 반짝 참석해놓고 이래저리 길게도 쓴다고 뭐라고 하실 분들이 계시겠지만서두,

뭐 내 블로그니까 내맘이다. ㅎㅎ

어제 글에 이어서…

이번에는 집회 자체는 거의 참석하지 못했고,

공동대표 모임, 간사 모임에 좀 참석했고, 몇분들과 이야기를 좀 나누었고, 그리고 중보기도실, 서점 등 다니면서 오랫만에 뵙는 분들 인사다닌게 전부였다.

코스타와 관계된 여러가지 기사들, 사건들, 그리고 facebook이나 다른 포스팅들을 보면서 여러가지 생각들을 해 보았다.

집회 직전에,

문창극 총리후보를 support하는 성명서를 낸 어르신 목사님들도 그 자리에 계셨고,

그것을 보면서 저분들과는 도무지 함께 할 수 없다고 열받아하는 사람들도 그 자리에 계셨다.

그중 어떤 분은, 아예 설교 시간에 보수적 정치적 발언을 하시기도 하셨고,

그걸 보고 엄청 열받은 강사님도 계셨다.

그 두가지의 정치적 입장을 놓고 보았을때,

내가 나름대로 가지는 정치적 입장은 비교적 뚜렸하다.

한국 선거에 투표한 적이 많지는 않았지만, 내가 처음 선거권을 받은 이후 

92년 대선부터 최근 대선까지 늘 한쪽 후보만을 위해 투표했다.

이 블로그에서 자주 드러내고 쓰지만, 나는 어떤 특정 정치집단은 매우 싫어한다. (한국도 미국도 마찬가지이다. ^^)

그러나,

이런 세팅에서 이번에 더욱 많이 고민하게 되는 것은…

과연 이렇게 다른 정치적 색깔을 가진 사람들이, ‘복음’안에서 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불가능할까? 하는 것이다.

내가가진 정치적 입장이,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는 유일한 신앙적 입장인 것 같아 보인다 하더라도 

(사실 나는 그런 입장을 갖는 것은 일종의 오만일 수 있다고 본다.)

적어도 반대의 정치적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가진 신앙 자체를 일단 받아줄수는 없는 걸까? 

꼭 저 반대쪽 ‘빨갱이’ 혹은 ‘꼴통’을 쳐부수고 쓸어버려야만 직성이 풀리는 걸까?

적어도 코스타 세팅에서는,

양쪽의 분들이 불편하게 여기는 한이 있더라도, 

양쪽의 분들을 다 모시고 우리가 한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고백하도록 하는 시도를 해봐야 하는 걸까?

아니면 그것은 코스타 세팅에서 해잴 수 없는 무모한 시도일까?

정치적 입장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충분히 가질 수 있느 것이지만,

그런 정치적 입장은 신앙의 하위 개념으로서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며, 

똘레앙스를 갖는 것은 불가능 한 일일까?

KOSTA/USA-2014 Chicago Conference 마친 단상들 (3)

딱 하루 있었는데도,

이런 저런 분들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들이 좀 있었다.

그중 하나는, 코스타의 대선배님과의 대화였다.

저녁집회 시간에, 저녁집회를 다 빼먹고, 그분과 열띤 대화를 하느라 시간을 다 보냈다.

그것도 꼬박 서서 그분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 선배님의 말씀을 정리하면 이렇다.

지금 최근 코스타의 방향 대로라면, 지역교회의 보수적인 목회자들이 자신의 교인들을 거기에 보내는데 우려를 하는 수준이 되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 오는 어떤 어떤 강사를 보니, 내가 거기 갈 자리는 아니구나 하고 느낄만 하다. 적어도 일정부분의 balance가 필요하다. 적어도 지금은 balance가 많이 깨어진 것 같아 보인다.

내 항변을 정리하면 이렇다.

우선, 지금 방향과 강사 선택에 있어서 어느정도의 balance는 이미 확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지나치게 기계적인 balance를 추구하려고 들다보면 운동성을 놓쳐버릴 가능성이 있다.

또한, 지금 소위 그 ‘보수적인 목회자 그룹’의 color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교회를 떠나는 젊은이들이 많이 있는 판국이다. 바로 그런 이유때문에 코스타운동에 함께 하지 않는 젊은 그룹도 있다.

적어도 지금 현재는, 보수적 목회자 그룹이나 개혁적 젊은 그룹 양쪽이 보기에 모두 다 불편한 수준에 머물러 있다고 생각한다. – 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우리가 취해야만 하는 position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양쪽 중 어느 한쪽을 쉽게 포기할 수 없다. 보수적 목회자 그룹의 눈치만을 보거나, 개혁적 젊은 그룹의 눈치만을 보고 있자면 코스타만이 해 낼 수 있는 역할을 놓치게 된다.

가령 86년에 코스타를 시작할 당시, 그 당시 ‘보수적 어르신들’이라고 할 수 있었던 교단 정치 목사들을 코스타 운동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그것은 그분들과의 balance를 맞추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 당시로서는 젊은 개혁그룹이였던 신복음주의자들이 이 운동을 시작했고 일으켰고 때로는 날카로운 날을 세워가며 목소리도 높였다.

왜 그런데 지금은 그런 생각이 적용될 수 없다고 보시느냐?

음…

뭐 내 블로그이니까, 당연히 내 주장을 더 길게 썼다. ^^

그분의 말씀과 생각에도 물론 깊이 고려해보고 생각해볼 내용이 있었다.

나중에는 나도 약간 목소리가 커지고 톤이 높아지도록 열띠게 이야기를 했는데,

생각해보면 한참 선배님이신 그분께 버릇없지는 않았는지 후회와 반성이 된다.

그분과의 대화를 한지 3주가 지났는데도, 그 생각이 계속 내 머리에 남아있다.

코스타는 얼마나 ‘날카로움’을 확보하는 것이 가능할까.

KOSTA/USA-2014 Chicago Conference 마친 단상들 (2)

코스타를 섬기는 사람들이 매년 100명 수준은 되지 않나 싶다.

강사, 찬양팀, 어린이코스타 교사, 간사 등등.

그중,

그 사람의 생일이 언제라는걸 알만큼 가까운 사람들은 대충 간사 + 일부 강사님들정도가 아닐까.

그 수를 따져보면 40명 수준?

매년 놀라는건데,

유난히 코스타 집회 기간에는 이 섬기는 사람들의 생일이 많다.

금년에도 따져보니…

적어도 3-4명 정도의 생일이 그 기간에 겹쳐있다.

확률적으로는 40명 중, 그 한주에 생일이 들어있는 사람이 0.8명 정도 있어야 한다. (40명 / 52주)

그런데 4명이라는건, 확률의  자그자치 다섯배나 되는 거다.

흠… 이건 참 흥미롭다. 매년 그렇다. 

그리고 그렇게 생일이 그 주에 끼어 있는 사람들 중에서는 10년 넘게 자기 생일을 코스타 집회기간중에 보내는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께서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다.

네 생일… 내가 더 많이 복되게 해줄께.

네 소중한 섬김으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는 것. 정말 그건 네게 큰 선물이 될꺼야.

이 사람들의 섬김이 참 복되다.

….

개인적으로,

내 아내, 내 아버지, 내 동생의 생일이 모두 7월 첫째주에 몰려있다.

그래서 더더욱 이런 생각을 하게된지도 모르겠다. ^^

아, 물론 그렇다고 이 기간에 생일 있지 않은 사람은 별로 섬기는거 아니라는건 아니다. ㅎㅎ

이 기간에 생일 있는 사람이 더 섬기는 거라는 얘기도 아니고. ㅋㅋ

Getting back to…

장인어른께서 갑자기 세상을 떠사셔서,

한국에 다니왔고, 아내는 오늘 미국으로 돌아온다.

너무 갑작스럽게 떠나셔서, 아직도 잘 믿어지지 않는다.

아내는, 참 많이 힘들텐데도, 이 과정을 잘 이겨내고 있다.

지금쯤 미국으로 오는 비행기 안에 있을 텐데…

참 좋은 분이셨다.

‘착한 사람’이 어떤 모습인지 하는 것을 보기 원하면 우리 장인어른을 보면 되었다.

이제 다시 getting back to ordinary life 할때인가?

아마 그럻지 않을 것 같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는 것은, 그것을 털어버리고 getting back to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듯 하다.

그저 마음 속에 계속 그 횡함을 간직한채 계속 살아가야 하는 것 같다.

Getting back to 도 아니고, moving on도 아니고…

그저 bearing with 쯤 된다고 할 수 있을까.

오늘 아내가 돌아오면,

한국에서 여러가지로 수고한 아내 안마라도 해줘야 겠다.

지난 한주,

아내가 많이 보고 싶었다.

당분간 블로그를 쉽니다.

당분간 블로그를 쉽니다.

어제 저녁에 소식을 들었습니다.

저희 장인어른께서 갑자기 저희 곁을 떠나 하나님의 품으로 가셨습니다.

참 선한 분이셨습니다. 제 아내의 선한 성품은 저희 장인어른을 참 많이 닮았습니다. 

지난 봄에 저희 집에 잠깐 방문하시고 저희와 좋은 시간 보내셨는데,

갑자기 이렇게 저희 곁을 떠나실지는 정말 몰랐습니다.

저희도 몹시 당황스럽고, 믿을 수 없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제 아내는 어제 밤 울다 잠이 들었습니다. 

그 손을 잡고 저도 울었습니다.

오늘 한국으로 출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