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개 같기만 하다면…

하이디는, 

정말 상처가 많은 개였다.

처음 우리 집에 왔을때,

몸에 손을 대려고 하면 당장 물을 기세로 대했다.

아마도 남자들에게 특히 abuse를 많이 당했던 것 같았다.

남자들에게는 경계태세를 잘 풀지 않았다. (나를 포함해서)

먹을 것을 주면 받아먹긴 하지만,

와서 먹을것 달라고 조르거나 하는 일도 거의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내가 앉아 있으면 옆에 와서 꼬리를 흔들며,

함께 놀아달라고, 간식 달라고 조른다.

잘 때에도 꼭 우리 자는 옆에 와서 자려고 한다. 자기 침대가 거실에 있더라도, 우리가 방에 누워 있으면 우리 침대 바로 옆 바닥에 누워 잠을 청한다.

민우가 소파에 누워 있으면 가서 옆에 누워서 배를 쓰다듬어 달라고 배를 위로 하고 눕는다.

이제는 꽤 귀찮게 굴때도 있다.

정말 우리가 편해진 거다.

사람에게 상처받은 사람들, 혹은 하나님에게 상처받은 사람들이…

이렇게 조금만 잘 대해주면 금방 그 묵은 감정을 떨어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정말, 사람들이 개 같기만 하다면…

참 멋진 사람들

그저께 저녁에는,

교회의 ‘운영위원회’가 있었다.

말하자면 장로교의 당회와 제직회의 중간 같은 역할이라고 할 수 있을텐데,

한달에 한번 모이고 있다.

주로 커피숍 같은 데에서 만나서 기도하고 이야기나누고…

늘 많이 느끼는 거지만,

이번에 여러 대화를 나누면서는, 아… 참 멋지다…

뭐 그런 생각이 들었다.

목사님도 그렇고, 운영위원들도 그렇고,

참 생각도 깊고, 세상과 사람들에 대하여 insight도 있고…

그렇게 많이 내세우거나 떠벌리지도 않는데도… 언뜻 언뜻 보이는 사람을 향한 깊은 애정과 관심에도 새삼 감동했다.

목사님이야 뭐 나랑 비슷한 나이이시니 그렇다고 하더라도,

나보다 10살씩 어린 다른 운영위원들을 보면서는…

나도 과연 저 나이에 저런 정도가 되었던가 하는 생각도 문득 들었다.

새벽부터 해질때까지 정말 죽어라고 일하다가 가서,

몸과 마음이 천근만근 무거운 상태로 갔는데,

이 사람들 마음 씀씀이 보는 것으로 마음이 따뜻해져,

혼자 기분 좋아라 집에 돌아왔다.

참 감사했다.

지시하는 사람과 지시 받는 사람

나와 함께 일하는 소위 ‘technician’들이 꽤 있다.

그중에는 나보다 나이가 더 많은 사람도 있고,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사람도 있다.

그런데, 많은 경우 technician들은,

아침 7시에 출근해서, 오후 3시면 퇴근을 한다.

나는 저녁 8시까지 일하곤 하는데 말이다.

Not Fair!?

그렇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나는 그 사람들에게 어떤 일을 하라고 ‘지시’하는 사람이고,

그 사람들은 내가 ‘지시’한 일들을 따르는 사람들이다.

‘지시’하는 사람은, 무슨 일이 되어야 한다는 것에대해 더 큰 그림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호흡대로 일을 진행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렇지만 ‘지시’를 받는 사람은, 큰 그림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일이 ‘떨어지면’ 그냥 갑자기 그 일을 해야하는 것으로 여기게 되기 쉽니다.

지시를 받는 사람이 self-motivated 되어 일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에게도 큰 그림을 잘 설명해주려는 노력이 참 필요하다.

그렇지만, 그것이 현실적으로 어려울때도 있다.

따라서, 지시를 받는 사람은, 지시를 하는 사람보다는 덜 motivate되기 마련이다.

이것이, 지시를 하는 사람이 지시를 받는 사람보다 더 열심히 일을 해야하는 여러가지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technician들이 3시에 퇴근하고, 내가 8시에 퇴근하는 것은, ‘fair’하다.

쓰고 싶었으나, 지금은 쓸 수 없는 글

사실 지난 1년여동안,

나는 내 정치적 색깔이 확연하게 약해졌다.

여전히 내 정치적 선호는 꽤 분명한 편이기는 하지만,

예전과 같이 어느 특정 정치세력이나 집단을 지지하거나 응원하지는 않게 되었다.

왜 그런 변화가 있게 되었는가 하는 것을 시간을 내어 좀 쓰려고 마음을 먹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도저히 그 글을 쓸 수 없다.

지금은 도저히…

‘이런 상황에서 적절한 정치적 균형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는 요지의 글을 쓸 수가 없다.

그렇지만…

이런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선(goodness)이, 어느 한쪽 정치집단에 있지 않음을 계속 기억해보려고 노력하고 있는 중이다.

……

87년, 대학교 1학년일때, 나는 아직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한 상태였다.

내 모든 가치는 성공과 성취에 있었고, 

공의, 정의, 민주, 인권 등의 개념은 전혀 내 관심사가 아니었다.

89년 예수님을 만난 이후,

내가 가장 후회한것은, 그 결정적인 pivotal point에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세상을 구원하시는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한없이 부끄러웠다.

…..

세상을 바라보며, 역사를 바라보며, 민족을 바라보며, 그리고 신앙 앞에서…

또 다시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있을 수는 없겠느냐는 기도를 해본다.

지진!

지난 주일 새벽에,

비교적 가까운 곳에서 지진이 일어났다.

6.1이면, 그래도 꽤 큰 편인데…

우리동네 사람들도 새벽에 흔들림에 잠이 깬 사람들이 꽤 있었던 것 같다. 

내 아내도 새벽에 침대가 흔들려서 깨었다고 한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땅’은 움직이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이다. ^^

그래서 땅을 기준으로 사람들은 기초를 세우고 경계를 정하고… 등등의 일을 한다.

그런데,

그 땅이 움직이니 정말 난감한 상황인 것이다.

움직이지 않을 것으로 여겨지는 땅도, 때로는 움직인다.

땅은 우리가 의지할 reference를 제공해주지 못한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신념, 고집도 마찬가지이다.

내 모든 관념체계를,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기본적인 전제를 바탕으로 쌓아놓고 있는데,

그 기본적인 전제 자체가 흔들리는 일들이 분명히 있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심심치않게… 이런 일들을 하신다.

내가 하나님을 믿는 신앙 안에서 꼭 붙들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을 심하게 흔들어, 그것에 기댈 수 없도록 만드신다.

땅도, 내 신념도, 

그것을 reference point로 삼을 만한 것이 못된다.

지진은, 

혹은 내 신념을 흔들어 놓는 인생의 경험은,

나를 겸손하게 한다.

그래서 진리에 한걸음 더 다가가게 만든다.

지진을 간접경험하며, 잠깐 해본 생각이었다. ^^

회사 일을 limit 하기, 하나님을 신뢰하기

한달 쯤 전,

회사에서 10시간 있지 않기.

회사일 하루에 12시간 이상 하지 않기.

이렇게 두가지를 결심했었다.

그렇게 한 것은,

내가 열심히 일하는 것이, 성실함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내가 무언가를 다 해야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나온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후로 대충 잘 지켰던 것 같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그렇게 하면서도 일을 크게 빵꾸내지 않고 할 수 있었다.

아, 물론 8시에 출근해서 8시에 퇴근하는 날이 꽤 있었지만, (사실 이번주는 거의 매일 그랬지…)

가서 처음 40분 정도는 혼자서 말씀 기도,

점심시간에 한시간 뛰고…

뭐 그렇게 했으니… 

그런데,

그렇게 일의 양을 줄인다고 해서, 내가 일을 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을 더 신뢰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최근 깨닫고있다.

여전히 나는 내가 해야하는 일로 전전긍긍하고 있고,

한밤중에 깨어서 ‘다른나라’에서 날라온 이메일들을 보고 있고,

무리하게 계획을 짜고서는 그걸 해내야한다는 pressure를 받고 있다.

하나님을 그래도 이만큼 믿어 왔으면,

좀 하나님을 척 잘 믿어야 하는거 아닐까.

도무지 이렇게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있다.

카타굼의 헌아식(?)

카타굼에 살던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을 한번 생각해본다.

그때 유아세례를 했을지 잘 모르겠지만… 

혹은 요즘 교회에서 하는 것 처럼 헌아식 뭐 그런걸 했는지 잘 모르겠지만…

만일 그런걸 했더라면, 그렇게 어린아이를 두고 그 아이를 위해 기도하는 부모의 마음은 찢어지듯이 아팠을지도 모른다.

이제 이 아이도, 이렇게 하나님 백성으로 자라도록 드려지게 되는데…

그럼 이 아이도 이 지긋지긋한 카타쿰에서 살겠구나.

저 화려한 로마의 세상 속에서, 출세라는 것은 평생 꿈에도 꾸지 못하고, 겨우 사자밥이나 되지 않으면 다행으로 여기며 그렇게 살겠구나.

시저가 왕이라고 이야기하는 세상 속에서, 예수가 왕이라고 이야기하는…

계란으로 바위치기를 하는 것과 같이 평생을 살게 되겠구나.

주님,

이 아이가 그렇게 평생 고생하면서 살게 될거라는거 압니다. 

그렇지만, 그것 이외에 다른 삶의 방법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이 아이를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도록 드립니다. 이 아이의 길을 인도해 주십시오.

그러면서 정말 많이 울지 않았을까.

신앙의 비장함을 잃어버린 세대 속에서,

비장한 신앙을 생각해본다.

또다시, 뉴스 M의 기사에 대한 반박 글

뉴스M (미국 뉴스앤조이)에서 원래 글에 대한 변호의 글을 올렸다.

http://www.newsm.com/news/articleView.html?idxno=4236

그래서 나는 또 거기 아래에 답글을 달았다. -.-;

=====

양재영 기자의 응답에 경의를 표합니다.

(그리고, 한국 복음주의에 대한 비판에 대해서는 많은 부분 깊이 공감하고 동의합니다.)

그러나, 죄송합니다만, 여전히 비판과 그 변론의 논리의 흐름이 명확하지 않다고 느껴집니다.

1. 저는 여전히 일부 목회자의 도덕적 문제가 복음전도-사회참여에 대한 신학적 논쟁과 직접 연관이 있다는 진단에 대해서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문제제기와 논리의 흐름이, 적어도 제게는 충분히 convincing하게 인식되지 않았습니다.

언제 기회가 되면,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토론해보아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2. 그리고, 제가 댓글에서 언급했던 것 같이, 코스타가 민중의 아픔을 외면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양기자님의 원래 글이나, 이번에 쓰신 변론의 글 모두, 코스타가 민중의 아픔을 외면했다는 가정하에서 쓰여진 것으로 보입니다.

이전 글에서는 그 점을 매우 explicit하게 쓰셨고, 이번 글에서는 조금 더 에둘러서 쓰셨습니다.

그렇지만, 코스타가 민중의 아픔을 외면했다는 비판을 하려면, 코스타가 이야기했던 message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전 반박 글에서 썼던 것 같이, 코스타가, 적어도 지난 10여넌동안 담아내고자 했던 주제와 그 주제문을 읽어본다면 그 비판의 내용이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령, 금년에 시카고와 인디애나폴리스 전체집회에서 나누어진 컨텐츠가 무엇인지를 살펴본다면,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부분이 어떤 것인지, 적어도 일부 드러날 수 있을 것입니다.

3. 총론과 거시는 옳은데, 각론과 미시가 잘못되었다는 지적에 대해서.

제가 반론 글에서 적고자 했던 것은, 그 총론과 거시의 관점에 헛점이 많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총론과 거시의 내용을 정확하게 포괄하려면, 그것이 사실에 근거한 비판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언급한 data들에 오류가 많다는 지적을 하고 싶었습니다.

가령, 자동차를 하나 만들어 놓고, “이건 참 잘 만든 자동차입니다. 다만 강판이 좀 약하고, 브레이크에 약간 문제가 있을뿐” 이라고 한다면, 잘 만든 자동차라는 거시적 선언에 약점이 있는 것입니다.

양기자님이 지난 글에서 언급한 코스타 비판의 총론은 이렇습니다.

코스타는 처음부터 민중의 아픔을 외면하고 복음전도만을 강조하는 신학적 입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김규동 목사의 이런 문제도 생긴 거다.

실제로 보면 코스타는 이러이러한 문제를 가지고 여태껏 왔다. 그리고 지금도 그 문제는 그대로다.

저는 그것에 대해 다음과 같은 비판했습니다.

코스타는 민중의 아픔을 외면하지도 않았다.

민중의 아편을 외면한것과 일부 목사의 도덕적 문제는 그 연결고리가 약하다.

지금 코스타의 모습을 보면 제시한 ‘코스타의 문제점’들은 사실에 근거하지 않는 것으로 설득력이 약하다.

저는 제 논지가, 양기자님의 총론과 거시에 대하여 충분히 근거있는 반박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4. 코스타가 자본의 덫에 걸려있다는 비판에 대해.

이것은, 양 기자님의 글에서도 지적하셨던 것 같이, ‘통계의 적확함’이 아니라 ‘심리적 거부감’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심리적 거부감’이 정확하지 못한 데이터에서 나온 것이라면, ‘편견’이 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역시, 지난 5년간, 인디애나폴리스와 시카고 미국 코스타 강사들을 한번 확인해 보십시오.

정말 돈많은 목사들만 찾아올 수 있는 집회였는지.

코스타가 자본의 덫에 걸려있다는 비판을 하려면, 적어도 다음의 한가지 가운데 하나여야 합니다.

– 코스타는 자본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다.

– 코스타는 자본을 가진 사람들만 참여하고 있다.

– 코스타의 메시지와 정신이 자본을 찬양하고 칭송하는 방향으로 설정되어 있다.

그렇지만, 과연 정말 그렇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data가 충분히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그렇게 생각할 여지가 아주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의 방향을 지지하는 데이터들을 더 많이 있습니다.

적어도 미국 코스타에 관한한 말입니다. (저는 다른 나라 코스타에 대해서는 어떤 언급을 할 만큼 충분히 알지 못합니다.)

5. 비판의 촛점이 자꾸만 옮겨가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처음에는 “김규동 목사의 성추행의 문제는, 민중의 아픔을 외면하는 신학적 첫 단추가 잘못 끼워졌기 때문이다.” 라고 했다가,

이번에는 “코스타는 자본에 덫에 걸려 있다. 돈이 많이 들고 스타강사를 부를 수 밖에 없다” 라고 옮겨갔습니다.

처음 비판에 대해서도 저는 나름대로 반론을 폈고, 이번 두번째 양기자님의 글에 대해서도 역시 정확하지 못한 부분에 대해 반론을 씁니다.

6. 코스타가 완벽하다고 항변하는 것은 물론 절대로 아닙니다. 코스타의 한계가 명확하게 있고, 더 잘 할 수 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실제로 저도 그런 의미에서 코스타를 향해 하고 싶은 비판의 내용들이  많이 있습니다.

다만 제가 지난 답글과 이번 답글을 통해서 쓰고 싶은 것은, 그 비판이 정확한 사실에 근거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양 기자님이 써주신 변론의 글에, 다시한번 경의를 표합니다.

그냥 무시하고 지나가셔도 좋았을 한 독자의 답글에 이렇게 시간을 내어 자세히 변론을 써주신 것만으로도 감사를 드립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양기자님의 의도와 기본적인 문제의식에 대해 저도 많은 부분 공감합니다. 

언제 기회가 되면, 차 한잔 마시면서 좋은 대화를 가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저야 미국 한 지역에서 그냥 회사다니면서 살아가는 평범한 직장인이지만, 그런 대화를 통해서 저 같은 사람도 더 배우고 자라나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유난히 귀에 잘 들어오는 설교

우리 교회 목사님은,

정말 오랬동안 알고 지냈다. ^^

30대를 함께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그렇게 함께 많은 것을 share했다.

그렇지만, 매주 그 목사님의 설교를 듣는 것은

그렇게 오래 함께 했던 분과 조금 더 시간을 보내는 것과는 또 다른 경험이다.

이번주,

목사님의 설교가 유난히 귀에 쏙쏙 들어왔다.

설교의 내용은 ‘죄’에 대한 것이었는데…

음…

그 내용이 나와 유난히 더 relevant해서였던 것 같지도 않고 (아, 물론 나는 죄인이지만서두 ㅎㅎ)

목사님의 그날 설교가 좀 다른 format을 취했다거나 했던 것도 아니고,

그야말로 특별한게 없었는데, 그렇게 귀에 쏙 들어왔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다.

뭐 딱이… 목사님이 설교를 이상하게 하신 것 같지 않은데, 

도무지 그 설교가 무슨 내용이었는지 하나도 남지도 않고 이해도 안되는 날이 있다.

이게 순전히 내 영적 상태 때문일까, 

그렇지 않으면, 내가 유난히 설교가 귀에 잘 들어왔다고 느낀 날에는 목사님도 ‘이번건 잘 했다.’고 느끼신 날일까. ㅎㅎ

한번 여쭈어봐야 겠다. ^^

카톨릭 신자가 되라!?

프란시스코 교황, 참 마음에 많이 든다. 

어찌보면, 예수를 믿는다면 누구든 당연히 해야할 이야기들과 행동들인데, 

그 말과 행동들을 보면서 감동받고 환호하게되는 현실이 참 마음 아프다.

그럼에도, 

프란시스코 교황은 참 멋지다.

요즘 같아서는,

새로 ‘신앙’을 갖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개신교로 오지 말고 카톨릭으로 갈 것을 생각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개신교인이라는 것이 정말 부끄러워서 견딜수가 없다.

물론,

나는 도저히 카톨릭의 신학적 입장에 동의할수 없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받아들일 수 없는 입장들이 참 많이 있으므로, 내가 카톨릭으로 개종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렇게 동의하기 어려운 여러가지 신학적 입장에도 불구하고,

그냥 ‘흔한’ 개신교회에 출석하면서,

그저 목사의 왕국 신민이 되어,

그저 자기 욕심을 신앙의 이름으로 추구하면서, 반지성적 비이성적 행동만을 따라가게되는 것보다는,

조금 ‘잘못된’ 신학의 입장을 가지고 예수의 길을 따르고자 노력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정말 처절하도록 절망적인 생각 때문이다.

뭐 그래도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카톨릭 쪽에서도… 정진석, 염수정 추기경 같은 사람들이 한국 카톨릭의 제일 어른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카톨릭이나 개신교나 둘다 별볼일 없긴 만찬가지가 아닌가 싶기도 하고…

아,

정말 예수 잘 믿어야 겠다.

예수 잘 믿는 사람들을 길러내야 겠다.

예수 잘 믿자고 서로 격려하면서 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