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을 경험하지 않고 아픔을 공감하기

사람들을 섬기는 사람으로서 내가 갖는 깊은 갈등 가운데 하나는 이것이다.

왜 도대체 나는,

아픔을 경험하지 않고는 아픔을 공감하지 못하는가.

내가 깊은 시련과 절망과 고통을 경험한 정도까지만…. 다른 이들의 시련과 절망과 고통을 공감하고 이해하는 것 같다.

게다가 나는 내가 조금만 좀 편해지만… 그 고통에 대한 기억을 쉽게 까~맣~게~ 잊어버리게 되고,

그래서 다른 이들의 아픔에 대해 깊이 마음으로 공감하는 것을 역시 까~맣~게~ 잊게 되는 것 같다.

내 개인적으로,

참 마음이 무너지는 것과 같은 아픔을 겪는다거나,

마음이 많이 힘들어지는 어려움을 겪는다거나,

혹은 깊은 좌절을 경험하는 시기에야 나는…

고통받는 다른 이들을 위해 마음을 다해 기도하게 되는 것 같다.

나는….

언제나… 철이 들까.

그래도 잠깐 자랑질은 해야겠기에… ㅋㅋ

지난 주말,

‘동네 애들’이 모여서 하는 Math Olympics에 민우가 학교 대표로 나갔다.

작년에는 computation 분야로 출전해서 상을 받았는데,

금년에는 reasoning 분야로 출전해서 상을 또 받아왔다.

(아 ,참고로, 뒤에 리본 쌓여 있는걸 보면 알겠지만… 사실 참석한 사람의 40% 정도는 대충 상을 받았던 것 같다. 그야말로 상을 남발하는 뭐 그런 동네 대회다. 대단한건 아니고… )

감기에 걸려서 그 전전날은 학교에서 조퇴를 할만큼 몸 상태가 좋지 않았는데…

그래서 그날 아침에 겨우 일어나서 아침도 제대로 못먹고 가서 시험을 봤는데…

그래도 이렇게 상을 받고서는 기분이 좋아한다. 무진장 쑥스러워 하면서 ^^

가만 생각해보면,

나는 수학경시대회 뭐 그런것에서 상받은 기억이 없는데…

이런거… 엄마 닮은 건가. ㅋㅋ

강점으로 일하라? 부족한 점은 어쩌라고…

성도들을 성추행해서 물의를 일으킨 

J 목사가 예전에 쓴 ‘강점으로 일하라’라는 책이 있었다.

나는 뭐 그 책을 읽어보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그분의 설교를 꽤 많이 들어보았으므로 어떤 내용이었을지는 대충 알 것 같다. ^^

한편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그 사람의 강점을 자꾸 더 develop해서 그것을 이용해서 step-up 해야지, 자신의 부족한 면에 집중하다보면 자꾸만 down 되어서 일을 잘 하기가 어렵다.

사실 소위 ‘self-help’ 혹은 ‘자기 계발’ 계열의 책들이 다들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강점을 잘 활용해서 성공하라고.

사람을, functional unit으로 보면 정말 그렇다.

사람의 존재 목적 자체가 얼마나 제대로 perform하느냐 하는 것에 달려있다면 정말 그렇다.

그런데,

사람은 그것보다는 훨씬 더 귀중한 존재가 아닐까.

사람은 functional unit 혹은 일하는 기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창조된 위대한 존재가 아닌가.

그리고,

특히 복음을 받아들여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들이라면,

이제 평생 자신의 모든 인격을 그리스도께 복종시켜 그분을 닮는 길을 사는 것이고.

그렇게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여정을 걸어가는데에 있어서는,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부족한 면을 자꾸 깊이 다루시곤 하는 것 같다.

(적어도 내 경험에서는 그렇다.)

가령, 내가 참을성이 부족하면, 그걸 평생 포기하지 않으시고 내 삶속에서 끈질기게 다루어내신다.

아니… 이제 좀 그만좀 하시지… 하는 생각이 들정도로.. 아주 집요하게.. 하나님께서는 내 약점을 깊이 다루어내신다.

왜냐하면, 그 약점 때문에 내 전 존재가 그리스도를 닮는 여정을 가지 못하는 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다른 강점이 잘 develop된다고 하더라도,

어떤 특정한 약점 하나가 제대로 다루어지지 않으면,

영적 성장이 한 걸음도 더 이루저 지지 않는 경우를 참 많이 경험하곤 한다.

목회자의 인간적 야망을 ‘비전’이라고 치장하는 교회에서 흔히…

‘강점으로 일하라’는 식의 message를 많이 듣게 되고,

사람의 본질적 변화를 갈망하고 추구하는 공동체일 수록,

약점을 다루어내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많이 이야기하는 것은…

분명 우연은 아닌 듯 하다.

용서와 망각

제가 지난주에 쓴 글중,

용서를 위해서는 잊는 것이 필요하다는 글에 대해 많은 분들이 No~를 외쳐 주셨습니다.

이에 대해 몇가지 좀 정리를 한번 해보려고요… ^^

용서는 망각을 필요로 하는가.

아직은 좀 자신이 없는 부분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용서와 망각이 무관하다는 입장으로 아직 후퇴하고 싶지는 않다.

내가 용서에 망각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한 것에 약간의 배경 설명이 더 필요 할 것 같다.

가령,

사기꾼에게 당해서 재산을 몽땅 날린 일이 있다고 하자.

그래서 온 가족이 몇년간 혹독한 고통을 당하고, 온간 수모를 겼었다고 하자.

사랑하는 배우자와 자식들에게 모욕당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고…

이것은 그 사람에게 매우 큰 상처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 상처를 끄집어내어 확인할 때 마다 그 사람은,

그 상처를 입힌 사람을 자꾸만 생각하며 미워하게 될 것이고.

여기에서… 나는 그 사기꾼을 잊어버린다거나, 그 사건을 잊어버리는 것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한 것이 아니다.

다만, 그때 그 사건이 일어났을때, 나와 온 가족이 고생과 수모를 겼었던 그 ‘상처’를 잊어버리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야기한 것이다.

그때 얼마나 그것이 아팠는지…. 하는 그 생생한 기억이 무디어지고 희미해지는 과정을 통해서,

혹은 그 상처의 기억이 상대화되고 trivialize되는 과정을 통해서 용서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 날카로운 상처의 생생한 기억을 무디게 하는 것은 물론,

오랜 시간이 걸려 이루어 질 수도 있지만,

‘은혜’라는 강력한 해독제가 그 마음 안에 떨어져서,

생생한 상처의 기억을 무디에 만들어서… 혹은 상처의 기억을 상대화시켜서….

용서에 이르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어쩌면,

아픈 기억의 상처 자체에 집중하지 않고,

그 상처를 입힌 사람의 ‘인격’을 ‘은혜’의 과정을 통해 보게 될 때에야 비로소 용서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 것이다.

계속 상처 자체에 연연해서 매달리고 있는 한,

그 상처의 생생한 기억을 고이 간직하고 있는 한,

그 상처를 입힌 사람을 용서하기란 쉽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뭐 자신이 없는 생각이긴 하지만서두,

혹시 좋은 comment, feedback 있으면 좀 주시와요. ^^

Hurried

예전 직장에서 일을 할때는,

일이 많긴 했지만, 내가 control할 수 있었고, 그래서 호흡 조절도 가능했었다.

그런데 A사에서 일하면서는,

내가 바쁜 정도를 내가 control하는 것이 전혀 불가능하고,

그저 정신없이 위에서 벽돌이 떨어지는데 key를 눌러가며 tetris를 하는 것과 같이 살고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예전 직장에서 지금보다 훨씬 더 ‘쫓겨서’ 살았던 것 같다.

소위 ‘분주함’이 늘 마음 속에 있었고… 그 분주함을 manage하며 살았었다.

지금은 그때보다 더 바쁘긴한데,

마음 속에서 더 ‘분주함’이 넘쳐나지는 않는다.

왜 그럴까.

가만 생각해보면…

아마도 올해 새해 결심으로 내가 했던 것 중에,

“passive한 삶”과 연관이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아직까지는 새해 결심을 다 까멱고 살고 있지는 않은 듯… ㅎㅎ

요즘은…

요즘은,

매일 블로그에 글을 쓰고 들어올 시간이 여의치 않아서,

대개는 주말에 5일분을 써놓고, 혹시 시간이 되면 들어와서 약간 수정하는 수준으로 글을 쓰고 있다.

글쓰기가 시원치 않아진게 눈에 띄게 드러나는 것일까.

뭔가 블로그에 활기도 없는 것 같고.. ㅎㅎ

아직은 설익은 생각을 매일 쓰는 것에 자꾸 회의가 들기도 하고…

게다가 시간도…

자꾸 글쓰기를 계속할지 고민이 많은데…

아직까지는 그저..

몸과 마음이 바빠셔 급한 일로 쫓기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려니…

생각하며 버티고 있는 중이다.

사랑이 아젠다가 될때…

‘사랑’은 참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사링은 그것이 ‘아젠다’가 될때 그 본질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가령,

내가 내 딸을 사랑하는 것을 예를 들어 풀어보자.

나는 내 딸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아이를 위해서 최선의 것을 주고 싶어 한다.

그렇게 하다보면 내 삶의 많은 부분을 그 아이를 향한 사랑에 맞추게 되고…

그 사랑을 방해하는 요소들을 제거하기도 하고, 사랑과 충돌하는 다른 아젠다들을 없애 나가기도 한다.

그렇게 하다보면,

내 딸을 사랑하는 사랑은, 내 삶의 다른 아젠다들과 대결구도를 형성하게 되고,

그러는 과정에서 내 딸을 향한 내 사랑은 하나의 아젠다가 되어 버린다.

즉,

딸을 사랑하는 것이 내가 해야하는 high-priority to-do list에 들어가게 되고,

나는 그것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그런 과정을 겪게 된다.

그렇게 되면, 너무나도 자주…

내 사랑에서… 내 딸을 인격적으로 대하는 요소가 희석되게 되고,

사랑이라는 아름다운 가치가 핏기 없고 차가운 아젠다로 전락하게 된다.

글쎄,

모든 사람이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너무나도 자주 사랑을 아젠다로 환원시켜버리는 우를 범하곤 한다.

내가 목숨을 다해 사랑한다고 늘 마음에 두고 있는 내 아내나 민우를 향한 사랑도 그렇고,

다른 가족을 위한 사랑이나,

내가 섬기는 사람들을 위한 사랑,

공동체나 사역을 향한 사랑…

더 나아가서 주님을 향한 사랑 까지도…

나는 자주 내 아내에게,

나는 너를 이렇게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사랑한다…

이렇게 항변하는데,

내 아내는 그것을 사랑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을 자주 경험한다.

아마도,

생명 넘치는 사랑을,

아젠다로 환원시켜버리는 내 못된 습성 때문이 아닌가 싶다.

용서를 위해서는 잊어야 하는 걸까?

어떤 과정을 통해서 용서가 이루어 지는 걸까?


여러가지 인간적인 오해가 논리적으로 풀려나가는 과정을 통해서 되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내게 해를 가한 사람에 대한 인간적인 연민을 갖게 되어서 해결되기도 하고,

혹은 시간이 지나 그 사건/사람/관계 등을 잊게되어 용서하게 되는 경우도 있지 않을까 싶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은… 

내 죄를 용서받은 것이 너무 크기 때문에, 나도 다른 사람을 용서하게 되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다시 말하면 은혜에 대한 깊은 인식 때문에, 나도 은혜를 베풀게 된다는 것인데…



나는,

유난히 한번 화가 나면 잘 풀지 못하고,

내게 잘못한 것을 용서하지 못하는 편이다.


그래서 도대체 왜 나는 이렇게 용서를 잘 하지 못하는 것일까.. 하는 고민을 참 많이 하면서 신앙생활을 해 왔는데…


물론 내가 은혜에 대한 인식이 부족해서,

다른이들에게 그 은혜를 베풀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정말 용서의 과정을 밟게되는 것을 가만히 살펴 관찰해보면,


결국은 내가 받은 은혜의 크기가 너무 커서,

내게 돌아온 불이익, 피해, 억울함 등등을 trivialize하게 되고,

그래서 그 상처의 날카로움이 ‘잊혀지는’ 과정을 통해서 용서에 이르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은혜를 받아들여 용서를 하는 과정 역시,

‘망각’이 용서의 핵심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즉, 용서의 문제는 어떻게 하면 그 날카롭게 찔린 것을 ‘망각’하느냐 하는 것인데…

강력한 은혜가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고.


나는 잘은 모르지만,

미라슬라브 볼프가 이야기하는 용서도 바로 이런 mechanism으로 가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그런데 분명한건,

자세한 mechanism은 잘 모르겠는데…

내가 은혜에 대한 인식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사람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따라서 용서가 더 잘 이루어지기는 한다는 것이다.

위험한 상황에서의 마음의 평안

아주 좁고 꾸불꾸불한 낭떠러지 길을, 

매우 빠른 속도록 운전해서 가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다고 생각해보자.

(뭐 뒤에서 악당이 쫓아오는 것과 같은 진부한 예를 들어도 좋겠다. ㅎㅎ)

그럴때,

다음 세가지 경우 가운데 어떤 경우에 가장 마음이 불안할까?

(1) 나와 운전 솜씨가 비슷한 친구가 운전을 하고 있고 나는 그 옆자리에 앉아있는 경우

(2) 그래도 꽤 운전솜씨가 괜찮은 내가 운전을 하고 있는 경우

(3) 세계 최고의 운전사가 (그래서 사고 날 가능성의 0%인) 운전을 하고 있고 나는 옆자리에 앉아 있는 경우.

물론 아마 불안한 것부터 평안한 것까지 순서대로 차례를 매기자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1) > (2) > (3)

대개는,

(상황이 어느정도 manageable한 경우에)

내가 운전대를 잡고 있으면 나와 비슷한 운전솜씨의 친구가 운전을 하고 있을때보다 더 마음의 평안이 있는 것 같다.

내가 control을 여전히 가지고 있다는 것이 그런의미에서 더 마음에 평안을 주는것 같다.

그렇지만 그 운전대를 잡은 사람의 솜씨가 절대적이라면, 그 경우에 훨씬 더 마음에 평안이 있을 것이다.

경제적인 문제로 힘들어 하거나,

진로의 문제로 힘들어 하거나,

기타 여러가지 위기와 난관을 만났을때 역시…

이와 비슷한 것 같다.

내가 아무런 control을 잡고 있지 않은 경우 가장 불안하고,

그나마 내가 약간의 control을 잡고 있는 경우 좀 덜 불안하지만…

결국 그 난관을 움직이시는 절대자를 신뢰하는 것만큼 마음에 평안을 주는 option은 없는 것 같다.

이 과정을 가는데 있어서…

절대자의 신뢰를 찾는 과정이…

(1)에서 (3)으로 바로 건너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이는

(2)의 과정을 거치고 나서야 (3)으로 가게되는 사람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자신의 상황에 불안감을 가지곤 하는 겁쟁이 내게 가끔 이렇게 호통을 친다.

야 임마.

좀 일어나서 정신차려!

그리고 뭐라도 좀 해봐.

그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

그럼 당장 네가 그렇게 힘들어하는 깊은 골짜기로부터는 나올 수 있을꺼야.

그리고 나서 차차 눈을 들어,

네 삶을 주관하고 계신 절대자를 좀 바라봐.

그렇게 하지 않는 한,

네 걱정을 끊이질 않을꺼야.

들개가 된 토끼

나는 어려서부터 참 겁이 많았다.

꽤 커서까지, 세발자전거를 탈 용기가 나지 않아, 한살 아래 여동생이 타면 그 뒤에 쪼그리고 앉아서 탈만큼 겁이 많았다.

그렇게 겁이 많았기 때문에 나는 늘 ‘안정’을 추구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던 것 같다.

내게 있어서 ‘안정’을 보장해주는 가장 중요한 key는 공부였다.

그래서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했다.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거나, 성취감을 느끼거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 공부했다기 보다는,

그것이 내게 안정을 가져온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복음을 받아들이고나서, 그러나… 

나는 대단히 큰 혼란을 겪었다.

그렇게 안정을 제공해준다고 믿었던 공부가,

내 궁극적 소망의 근원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보게 된 것이다.

한동안 사실 나는 그 새롭게 보게된 진리를 인정하기 어려웠다.

그렇게 살아온 관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복음을 받아들이고,

여러 경험들과 깨달음을 통해서 나는 조금씩 조금씩 야성을 갖게 되었다.

내 궁극적 안정성의 근거가 내게 있거나 세상에 있지 않고,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을 지/정/의의 차원에서 인정하며 배워가기 시작한 것이었다.

요즘 내 자신을 보면서…

나는 아직도 여전히 겁이 참 많긴 하지만,

예전에 토끼와 같이 겁이 많았던 모습에서 이제는… 

야수와 같은 모습 까지는 아직 되지 못하다고 해도, 적어도 들개 수준을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복음은…

정말 사람을 바꾸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