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라-느헤미야 (4)

역시 이 모든 본문을 조작 혹은 프로파간다로 보는 입장도 있다. 당연히 이분들은 급진적/극단적 비평주의적 관점이고.

어떤 분들이 여기에 해당하는지는 여러가지 google search를 통해서만 찾을 수 있었는데,
Philip Davies, Thomas Thompson, Lester Grabbe 등이 있다고 한다.

이분들은 대개 느헤미야서와 키루스 실린더로 대표되는 페르시아의 문서들과의 유사성을 들면서 결국 에스라-느헤미야역시 일종의 창작물이고 이들을 역사적 인물로 보기 어렵다고 이야기한다고 한다.

이런식의 argument는 구약을 비롯한 여러 문서들을 볼때 자주 등장하는 것인데, 적어도 나는 이것은 대단히 convincing하다고 느끼지 못하고 있다.

나는 잘 모르지만 이분들 모두 대단한 학자이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렇게 받아들이긴 좀 힘들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복음주의자’로 남아 있는 지도 모르겠다.

에스라-느헤미야 (3)

에스라-느헤미야의 개혁을 실패로 보는 사람들은 온전한 복음주의자 혹은 문학비평적 관점에서 접근하는 사람들, 아니면 일종의 ‘신학적 아젠다’로 본문을 보는 사람들인 것 같아 보인다.

Hugh G.M. Williamson이 적어도 내가 찾아본 바에 따르면 거의 압도적인 것 같다.
이분은 1985년에 WBC주석을 쓰셨고 이 주석이 바로 그런 관점인것 같아 보인다.

그리고 흥미로웠던 것은, Tamara Eskenazi라는 유대인 학자역시 이런 관점을 가진다는 것이다. (Anchor Bible Commentary)

성벽 재건과 제도적 개혁이 성공한 듯 보였으나 결국 공동체의 배신과 느헤미야의 분노로 끝나는 구조가 전체의 핵심이라고 본다. 그래서 이것을 통해서 결국 외적 개혁과 율법 조문만으로는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결국 인간의 마음이 바뀌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예레미야나 에스겔이 예언한 마음이 변화되는 새 언약으로 연결된다고 보는 것 같다.

내가 이 관점에서 특히 좋았던 것은,
그래야 결국 에스라-느헤미야에 나오는 폭력적으로 보이는 강제 이혼, 이방인 배척, 사마리아인들과의 대결 등등이 해소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관점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결국 이 사람들이 지나치게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하는 신학적 의도로 본문을 본다고 이야기한다. – 그럼에도 유대인학자인 Tamara Eskenazi가 이런 관점을 견지하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에스라-느헤미야 (2)

에스라-느헤미야의 개혁을 성공으로 보는 관점은 주로 보수주의적 학자들인것 같아 보인다.

가령 F. Charles Fensham (NICOT 주석), Derek Kidner (TOTC 주석) 같은 보수주의적/복음주의적 학자이 그렇게 본다.

이들은 전반적으로 text의 역사성을 높게 평가하고, text가 이야기하는 교훈을 그대로 수용하는 입장이다.
그래서 주로 페르시아 제국이라는 역사적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영적 순결과 언약적 신실함을 지켜냈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그래서 결국 이책의 핵심 메시지는 역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으로 영적 정체성과 정통성을 성공적으로 보존했다는 것이라고 본다.

그런데 이것에는 몇가지 단점/한계/문제들이 있는 것 같다.

여전히 느헤미야 13장의 결말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지켰다’는 식으로 맺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아 보인다. 그리고 이방인 강제 이혼, 사마리아인 배척, 이주민 여인과 아이들을 쫓아낸 조치등등이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온 세상의 하나님이시라는 다른 구약의 책들 (가령, 룻기나 요나서 같은)과 충돌하는 것 같아 보인다. 그리고 아브라함으로부터 계속되어온 온 세상을 위한 언약이라는 관점에서도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사실 이 관점은 복음주의권에서 거의 압도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관점이고, 나는 에스라-느헤미야를 본문으로한 설교중에 이 관점이 아닌 설교를 들어본 기억이 사실 없다.

에스라-느헤미야 (1)

Encounter with God의 성경 묵상본문이 에스라여서, 나름 지난 주말 시간을 내어 에스라-느헤미야에 대해 약간, 정말 아주 약간 공부를 조금 해 보았다.
그런데 나름 전에는 잘 알지 못했던 흥미로운 것들을 더 알게 되어서 약간 정리해보려고 한다.

대충 보기엔 최소한 세가지 부류의 다른 접근과 해석이 존재하는 것 같다.

첫번째 부류는 에스라-느헤미야의 개혁을 일종의 성공으로 보고, 따라야할 모범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나 역시 이런 관점에 제일 익숙했고, 한때는 에스라-느헤미야의 개혁이 어떻게 내 삶의 모범이 될 수 있을까를 많이 고민하기도 했다.
느헤미야의 영적 리더십에 대한 책이나 글들도 많이 읽었던 것 같다.

두번째 부류는 에스라-느헤미야의 개혁을 일종의 실패로 보고, 되새겨야할 타산지석으로 보는 것이다.
결국 에스라-느헤미야의 개혁은 하나님 나라를 가져오지 못했고, 특히 느헤미야 13장이 일종의 열려있는 부정적 결말로 끝나는 것에 주목해서, 성경은 이 개혁을 성공으로 기술하고 있지 않다는 관점이다.

세번째 부류는 물론, 이 문서 자체가 대부분 조작이고, 후대 유대교 세력이 자신들의 종교적 기득권과 혈통적 배타성을 정당화 하기 위해 꾸며낸 종교-이데올로기적 프로파갠다로 보는 것이다.

나는 첫번째 부류의 생각을 주로 가지고 있었으나, 적어도 약간의 공부를 통해서 현재는 두번째 견해로 옮겨가게 된 듯 하다. 그것이 지나치게 배타적인 에스라-느헤미야의 개혁을 더 잘 설명한다고 보여진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참여하면서

그런데 율법 교사로서, 온 백성에게서 존경을 받는 가말리엘이라는 바리새파 사람이 의회 가운데서 일어나서, 사도들을 잠깐 밖으로 내보내게 한 뒤에, 의회원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이스라엘 동포 여러분, 여러분은 이 사람들을 어떻게 다룰지 조심하십시오. 이전에 드다가 일어나서, 자기를 위대한 인물이라고 선전하니, 약 사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그를 따랐소. 그러나 그가 죽임을 당하니, 그를 따르던 사람들은 모두 다 흩어져 없어지고 말았소. 그 뒤에 인구 조사를 할 때에, 갈릴리 사람 유다가 일어나 백성들을 꾀어서, 자기를 뒤따라 반란을 일으키게 한 일이 있소. 그도 죽으니, 그를 따르던 사람들은 다 흩어지고 말았소. 그래서 지금 내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는 바는 이것이오. 이 사람들에게서 손을 떼고, 이들을 그대로 내버려 두시오. 이 사람들의 이 계획이나 활동이 사람에게서 난 것이면 망할 것이요, 하나님에게서 난 것이면 여러분은 그것을 없애 버릴 수 없소. 도리어 여러분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봐 두렵소.” 그들은 그의 말을 옳게 여겼다.
(사도행전 5:34-39)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생각하면서,
정말 내가 하는 일이 하나님 일이 맞나…
괜히 내 열심에 내 일을 하는 것은 아닌가…
그런 생각을 문득 문득 하게 될때가 있다.

그런데,
이제 맞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되는 순간들이 있다.
그런 아주 엉뚱하게도 어려움을 맞이하게 될때이다.
말도 안되는 억울한, 혹은 폭력적인, 혹은 그냥 순수하게 아주 질이 나쁜 여러가지 형태의 반대를 만날때,
아니면 아주 엉뚱하거나 어이없는 어려움에 빠지게 될때,
아이러니컬하게도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결국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산다는건,
내가 하는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이룬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내가 참여한다고 생각하면서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컨트롤 할 수 없는 일을 마주할때 오히려 조금더 명확하게 하나님의 길과 그렇지 않은 길이 보이게 되기도 하는 것.

나는… 정말… 하나님의 길을 가면서 살아가고 있는 걸까.
지난 한두주 이걸 가지고 많이 씨름 했다.
지금까지의 결론은, likely yes.

넘쳐나는 조롱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에 있느냐?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에 있느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우리는 감사를 드립니다.

내가 본 조롱중에서 제일 짜릿한 것.

바라기로는,
내 삶의 마지막에 이런 멋진 조롱을 하며 마무리 하게 되길.

포기할것과 포기하지 않을 것

어떤 꿈은 포기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당연한데 포기하지 않는다. – 이건 철이 없는 거다
어떤 꿈은 포기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그걸 포기하기도 한다. – 이건 현실적이고 지혜로운 거다.
어떤 꿈은 포기하지 말아야 하는데 포기하면서 살기도 한다. – 이런 안타깝다.
어떤 꿈은 포기하지 말아야 하기도 하고 포기하지 않으며 살기도 한다. – 이건 믿음이다.

인사이트

한때 나는 인터넷에서 랜덤으로 설교 찾아듣기 뭐 그런 비슷한걸 했던 적이 있었다.
그렇게 해서 전반적으로 어떤 설교들이 이루어지는지 알고 싶기도 했고,
혹시라고 조금더 내가 follow할만한 분들을 찾고 싶기도 했었다.

그런걸 몇달하다가 완전 맥이 빠져 포기해버렸다.

정말… 일반적인 설교들은 매우 수준이 형편없었다.
논리도 엉망이고, 그렇다고 그분들이 이야기하는 ‘진리’의 핵심에 잘 뿌리박혀 있는 것들도 아니고,
어떤 분들은 그냥 소리만 질러대거나, 어떤 분들은 그냥 거의 랜덤으로 예화 돌리기 해서 나온거 뽑아가지고 와서 설교하는거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나는 그저 그런 설교들을 듣는 것 자체가 너무 고통스러워서 그거 좀 하다가 그만 두었는데….

지난 주말 혼자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어떤 설교가 내게 특히 고통스러웠는가 하는 것을 정리하게 되었다.

물론, 완전 엉터리 이야기를 하는 설교는 당연히 듣기 힘들었고,
성경본문을 완전 오해하고 하는 설교도 그랬지만…
자기 나름대로는 신앙과 삶에 대한 통찰력이라고 한마디 하는데 그 수준이 천박한 경우에는, 우아 참 힘들었다. 대개 그건 그분들의 삶의 경험과 성경말씀을 어설프게 점목시켜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렇게 생각해보면,
정말 명설교라고 느껴지는 설교들에는 늘 깊은 통찰이 담겨있었던 것 같다.

공부에는 낭만이 있(었)다

이 이야기가 정말 사실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다녔던 학교의 내가 다녔던 학과에서는 이런 전설같은 이야기가 내려왔다.

David Turnbull은 Harvard의 교수였고 John W Cahn은 MIT 재료과 교수였다.
어느날 Harvard에 교수로 있던 David Turnbull이 MIT에 와서 세미나를 했다고 한다.
세미나가 어려워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 세미나가 다 끝나고 질문시간에, 듣고 있던 John W Cahn이 손을 들고 질문을 했다.

그러자 Turnbull이 그 질문에 대답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더니,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Cahn도 역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질문의 내용을 이해한 사람들은 그 두 사람에게 기립박수를 보냈다.

…

우아, 이런거 완전 멋있지 않은가.
나는 원래 이런 ‘학문’을 하고 싶었다. 그런데 물론 내가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내가 대학원을 할때에 이미 이런 ‘학문’은 사실상 거의 소멸된 상태였다. 적어도 내 전공분야에서는 그랬다.

내가 다녔던 학교는 정말 전설같은 교수들이 있었고, 거의 Material Science라는 학문 자체를 만들어낸 학자들이었다.

Crystallogrphy의 사실상 개척자라고 할 수 있는 Martin Buerger가 그곳의 교수였고, 바로 그 제자가 내가 학교다닐때 역시 교수로 있었다. (Prof. Wuensch)
Ceramic분야의 거의 원탑 대가인 Kingery도 그곳의 교수였고, 그 제자 (Prof. Chiang)가 역시 내가 학교 다닐때 교수로 있었다.
위에 언급한 Carh의 제자중 한 사람이 교수로 있었고, 내 박사논문 심사위원중 한명 (prof. Allen)이었다.
Solidifcation process의 대가인 prof. Flemings는 내가 학교 다닐때 심지어 교수로 있었다. Prof Allen만 하더라도 Allen-Cahn equation이라는 엄청 유명한 수학적 모델을 만들어 낸 사람이었다.

그런데,
내가 지도교수를 정할때만 하더라도 정말 ‘학문’으로서의 Material science는 거의 소멸되었고, 누가 더 sexy하고 cool한 것을 만들어 내느냐 하는 것에 모두가 집중하고 있을 때였다. (그런 쪽에 돈이 다 몰려서 그랬겠지만)

지금 대학원에서 하는 일들을 보면 이제 정말 모두 ‘돈 되는 것’을 하는 것을 넘어서 ‘돈이 더 되는 것’에 모두가 매달리고 있는 상황이다.

사실 물리적, 화학적, 수학적인 거대한 발견이나 breakthrough가 20세이 초반이후 사실상 별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요즘은 박사를 받고 나오는 사람들이 하는 일을 보면, cool하긴 한데 낭만이 없다.
멋지긴 한데 재미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

얼마나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AI가 수학의 난제들을 풀어내고 있다는 뉴스를 보았다.
그나마 학문하는 낭만과 재미 자체를 AI가 빼앗아 가 버리고 이제 인간은 더 효율적이고 cool한 기술만을 개발하는 사람들이 되어가는 걸까.

여러가지로 씁쓸하다.

인디언 섬머

이번 주 초 며칠은 이곳 날씨가 방콕만큼이나 더웠다.
방콕도 최고 기온이 91도, 이곳도 최고 기온이 91도.
(물론 습도는 방콕이 훨씬 더 높긴 하지만)

이걸 인디언 섬머라고 한다고 하는데, 뭐 그 이름이 별로 맘에 들지는 않는다.

이렇게 예상하지 못한 더위와, 예상되는 더위중 무엇이 더 견디기 어려울까?
음… 내겐 예상되는 더위가 더 견디기 어려운 것 같다.
일단 훨씬 더 기간도 길고, 더 강도도 센데다, 가끔을 이렇게 더운데 더 더워진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날씨를 만나기도 한다.

…

삶을 살아가면서도,
정규 여름시즌 같은 어려움을 만나기도 하고, 인디언 섬머와 같은 어려움을 만나기도 한다.

무엇이 더 견디기 어려울까?

내가 어릴때는 인디언 섬머 같은 어려움이 더 힘들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건 그때 내가 정규 시즌과 같은 어려움을 아직 만나기 못했기 때문에 했던 생각이었다.

삶을 살아가면서 어쩔 수 없이 겪게되는 여러가지 어려움들,
그중 어떤 것은 예상되는 어려움이고, 삶의 phase에서 그저 그렇게 맞닥드리게 되는 어려움들이다.
그건… 더 길고, 더 깊고, 더 힘들다.

…

삶이 그런 끔찍한 더위나 살을 에는 겨울과 같은 고통으로 끝나지 않는 다는 소망은 그런 의미에서 다른 차원으로 삶을 생각하게 한다.

이번주, 고린도전서 15장 말씀 묵상을 하면서 그런 생각을 참 많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