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참여하면서

그런데 율법 교사로서, 온 백성에게서 존경을 받는 가말리엘이라는 바리새파 사람이 의회 가운데서 일어나서, 사도들을 잠깐 밖으로 내보내게 한 뒤에, 의회원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이스라엘 동포 여러분, 여러분은 이 사람들을 어떻게 다룰지 조심하십시오. 이전에 드다가 일어나서, 자기를 위대한 인물이라고 선전하니, 약 사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그를 따랐소. 그러나 그가 죽임을 당하니, 그를 따르던 사람들은 모두 다 흩어져 없어지고 말았소. 그 뒤에 인구 조사를 할 때에, 갈릴리 사람 유다가 일어나 백성들을 꾀어서, 자기를 뒤따라 반란을 일으키게 한 일이 있소. 그도 죽으니, 그를 따르던 사람들은 다 흩어지고 말았소. 그래서 지금 내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는 바는 이것이오. 이 사람들에게서 손을 떼고, 이들을 그대로 내버려 두시오. 이 사람들의 이 계획이나 활동이 사람에게서 난 것이면 망할 것이요, 하나님에게서 난 것이면 여러분은 그것을 없애 버릴 수 없소. 도리어 여러분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봐 두렵소.” 그들은 그의 말을 옳게 여겼다.
(사도행전 5:34-39)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생각하면서,
정말 내가 하는 일이 하나님 일이 맞나…
괜히 내 열심에 내 일을 하는 것은 아닌가…
그런 생각을 문득 문득 하게 될때가 있다.

그런데,
이제 맞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되는 순간들이 있다.
그런 아주 엉뚱하게도 어려움을 맞이하게 될때이다.
말도 안되는 억울한, 혹은 폭력적인, 혹은 그냥 순수하게 아주 질이 나쁜 여러가지 형태의 반대를 만날때,
아니면 아주 엉뚱하거나 어이없는 어려움에 빠지게 될때,
아이러니컬하게도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결국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산다는건,
내가 하는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이룬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내가 참여한다고 생각하면서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컨트롤 할 수 없는 일을 마주할때 오히려 조금더 명확하게 하나님의 길과 그렇지 않은 길이 보이게 되기도 하는 것.

나는… 정말… 하나님의 길을 가면서 살아가고 있는 걸까.
지난 한두주 이걸 가지고 많이 씨름 했다.
지금까지의 결론은, likely yes.

넘쳐나는 조롱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에 있느냐?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에 있느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우리는 감사를 드립니다.

내가 본 조롱중에서 제일 짜릿한 것.

바라기로는,
내 삶의 마지막에 이런 멋진 조롱을 하며 마무리 하게 되길.

포기할것과 포기하지 않을 것

어떤 꿈은 포기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당연한데 포기하지 않는다. – 이건 철이 없는 거다
어떤 꿈은 포기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그걸 포기하기도 한다. – 이건 현실적이고 지혜로운 거다.
어떤 꿈은 포기하지 말아야 하는데 포기하면서 살기도 한다. – 이런 안타깝다.
어떤 꿈은 포기하지 말아야 하기도 하고 포기하지 않으며 살기도 한다. – 이건 믿음이다.

인사이트

한때 나는 인터넷에서 랜덤으로 설교 찾아듣기 뭐 그런 비슷한걸 했던 적이 있었다.
그렇게 해서 전반적으로 어떤 설교들이 이루어지는지 알고 싶기도 했고,
혹시라고 조금더 내가 follow할만한 분들을 찾고 싶기도 했었다.

그런걸 몇달하다가 완전 맥이 빠져 포기해버렸다.

정말… 일반적인 설교들은 매우 수준이 형편없었다.
논리도 엉망이고, 그렇다고 그분들이 이야기하는 ‘진리’의 핵심에 잘 뿌리박혀 있는 것들도 아니고,
어떤 분들은 그냥 소리만 질러대거나, 어떤 분들은 그냥 거의 랜덤으로 예화 돌리기 해서 나온거 뽑아가지고 와서 설교하는거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나는 그저 그런 설교들을 듣는 것 자체가 너무 고통스러워서 그거 좀 하다가 그만 두었는데….

지난 주말 혼자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어떤 설교가 내게 특히 고통스러웠는가 하는 것을 정리하게 되었다.

물론, 완전 엉터리 이야기를 하는 설교는 당연히 듣기 힘들었고,
성경본문을 완전 오해하고 하는 설교도 그랬지만…
자기 나름대로는 신앙과 삶에 대한 통찰력이라고 한마디 하는데 그 수준이 천박한 경우에는, 우아 참 힘들었다. 대개 그건 그분들의 삶의 경험과 성경말씀을 어설프게 점목시켜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렇게 생각해보면,
정말 명설교라고 느껴지는 설교들에는 늘 깊은 통찰이 담겨있었던 것 같다.

공부에는 낭만이 있(었)다

이 이야기가 정말 사실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다녔던 학교의 내가 다녔던 학과에서는 이런 전설같은 이야기가 내려왔다.

David Turnbull은 Harvard의 교수였고 John W Cahn은 MIT 재료과 교수였다.
어느날 Harvard에 교수로 있던 David Turnbull이 MIT에 와서 세미나를 했다고 한다.
세미나가 어려워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 세미나가 다 끝나고 질문시간에, 듣고 있던 John W Cahn이 손을 들고 질문을 했다.

그러자 Turnbull이 그 질문에 대답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더니,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Cahn도 역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질문의 내용을 이해한 사람들은 그 두 사람에게 기립박수를 보냈다.

…

우아, 이런거 완전 멋있지 않은가.
나는 원래 이런 ‘학문’을 하고 싶었다. 그런데 물론 내가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내가 대학원을 할때에 이미 이런 ‘학문’은 사실상 거의 소멸된 상태였다. 적어도 내 전공분야에서는 그랬다.

내가 다녔던 학교는 정말 전설같은 교수들이 있었고, 거의 Material Science라는 학문 자체를 만들어낸 학자들이었다.

Crystallogrphy의 사실상 개척자라고 할 수 있는 Martin Buerger가 그곳의 교수였고, 바로 그 제자가 내가 학교다닐때 역시 교수로 있었다. (Prof. Wuensch)
Ceramic분야의 거의 원탑 대가인 Kingery도 그곳의 교수였고, 그 제자 (Prof. Chiang)가 역시 내가 학교 다닐때 교수로 있었다.
위에 언급한 Carh의 제자중 한 사람이 교수로 있었고, 내 박사논문 심사위원중 한명 (prof. Allen)이었다.
Solidifcation process의 대가인 prof. Flemings는 내가 학교 다닐때 심지어 교수로 있었다. Prof Allen만 하더라도 Allen-Cahn equation이라는 엄청 유명한 수학적 모델을 만들어 낸 사람이었다.

그런데,
내가 지도교수를 정할때만 하더라도 정말 ‘학문’으로서의 Material science는 거의 소멸되었고, 누가 더 sexy하고 cool한 것을 만들어 내느냐 하는 것에 모두가 집중하고 있을 때였다. (그런 쪽에 돈이 다 몰려서 그랬겠지만)

지금 대학원에서 하는 일들을 보면 이제 정말 모두 ‘돈 되는 것’을 하는 것을 넘어서 ‘돈이 더 되는 것’에 모두가 매달리고 있는 상황이다.

사실 물리적, 화학적, 수학적인 거대한 발견이나 breakthrough가 20세이 초반이후 사실상 별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요즘은 박사를 받고 나오는 사람들이 하는 일을 보면, cool하긴 한데 낭만이 없다.
멋지긴 한데 재미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

얼마나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AI가 수학의 난제들을 풀어내고 있다는 뉴스를 보았다.
그나마 학문하는 낭만과 재미 자체를 AI가 빼앗아 가 버리고 이제 인간은 더 효율적이고 cool한 기술만을 개발하는 사람들이 되어가는 걸까.

여러가지로 씁쓸하다.

인디언 섬머

이번 주 초 며칠은 이곳 날씨가 방콕만큼이나 더웠다.
방콕도 최고 기온이 91도, 이곳도 최고 기온이 91도.
(물론 습도는 방콕이 훨씬 더 높긴 하지만)

이걸 인디언 섬머라고 한다고 하는데, 뭐 그 이름이 별로 맘에 들지는 않는다.

이렇게 예상하지 못한 더위와, 예상되는 더위중 무엇이 더 견디기 어려울까?
음… 내겐 예상되는 더위가 더 견디기 어려운 것 같다.
일단 훨씬 더 기간도 길고, 더 강도도 센데다, 가끔을 이렇게 더운데 더 더워진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날씨를 만나기도 한다.

…

삶을 살아가면서도,
정규 여름시즌 같은 어려움을 만나기도 하고, 인디언 섬머와 같은 어려움을 만나기도 한다.

무엇이 더 견디기 어려울까?

내가 어릴때는 인디언 섬머 같은 어려움이 더 힘들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건 그때 내가 정규 시즌과 같은 어려움을 아직 만나기 못했기 때문에 했던 생각이었다.

삶을 살아가면서 어쩔 수 없이 겪게되는 여러가지 어려움들,
그중 어떤 것은 예상되는 어려움이고, 삶의 phase에서 그저 그렇게 맞닥드리게 되는 어려움들이다.
그건… 더 길고, 더 깊고, 더 힘들다.

…

삶이 그런 끔찍한 더위나 살을 에는 겨울과 같은 고통으로 끝나지 않는 다는 소망은 그런 의미에서 다른 차원으로 삶을 생각하게 한다.

이번주, 고린도전서 15장 말씀 묵상을 하면서 그런 생각을 참 많이 했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내 돈에 대한 철학은 결국 누가복음 16:9이다. “불의한 돈으로 친구를 사귀라”

돈이란, 그렇게 사람을 위해 쓰는 거다.
사랑하는 사람, 더 사랑 받아야 하는 사람, 그 돈이 필요한 사람을 위해서 쓰라고 내게 주어진거다. 나를 위해서 쓰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고.

때로 그것은 논리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 낭비처럼 보일수도 있다.

흔히 불의한 청지기 비유라고 불리는 누가복음의 이 본문을 해석하는것은 그리 만만치 않다.

그런데,
그 비유 바로 다음에 나오는 본문의 흐름등을 염두에 두고 보았을때, 불의한 청지기 비유의 핵심은 돈은 사람들을 위해서 쓰라고 있는거다… 라는 것이라는게 내 생각이다. 그리고 그것이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기지 않는 중요한 key가 된다.

이런 생각을 하다보니, 꽤 뜬금없이 누가복음 16장의 이 본문이 내 삶에서 참 큰 (그러나 자주 지키기 쉽지 않은) 원칙을 만들어 내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설교는 강의일까? 선포일까? 설득일까? Reminder일까?

내가 Grace Chapel을 떠난지 20년이 더 지났다.
보스턴을 떠나온것이 그렇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그 이후 지금까지, 거의 대부분의 그 교회 설교를 들어오고 있다.

내가 있을때 계시던 목사님이 은퇴를 하셨고, 그 후에 젊은 목사님이 오셨는데, 그분은 1년 조금 더 지나서 원래 자신이 있던 교단으로 돌아간다고 그 교회를 그만 두셨다.
그러니 그 교회가 꽤 어려워졌을 것.

힘든 기간을 지나서 몇주전 그 교회에 새 목사님이 오셨다. Gordon Conwell에서 교수를 하시던 분인데 Grace Chapel에서 삼고초려를 한 모양이다. 은퇴한 Bryan목사님이 전화를 해서 설득을 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이분은 Cambridge에서 성서학으로 Ph.D를 하신 학자다. 그러니 이분의 설교가 그렇게 학문적,논리적,이성적일 것 같은데… 몇번의 설교를 들어보면 사실 그렇지 않다.

물론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부분이 꽤 많은 부분을 차지하긴 하지만,
설교 전체의 흐름은 논리적 설득과 설명이라기 보다는 그저 알고 있는 것을 사람들에게 reminder해주는 것 같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한다.
그리고 그것에 더 구체적 설명을 하지 않는다. 그냥 그렇다고 선언해버리고 만다.

이분은 브라질 출신이다. 브라질에서 10년동안이나 목사를 하다가 그 이후 공부를 더 하기 위해서 캐나다-그리고 그 이후 영국에 갔으니 미국적이라기 보다는 브라질의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할수 있을까? 그래서 일까? 머리에 호소하기 보다는 그냥 더 가슴에 호소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적어도 내겐… 그게 참 좋다.

그러면서 다시 생각을 해보게 된다.
설교란 도대체 무엇일까. 가르침 (teaching)일까, 선포일까, 설득일까, 아니면 회중을 향한 reminder일까.

아마도 all of the above이겠지만,
그냥 지금의 내게 그런 설교가 더 필요한 것이겠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대화

태국에 많이 다녀오면서 제한적이지만 어떤 사람들과는 살짝 개인적인 이야기들도 할 기회가 있었다.
심지어는 종교에 대한 이야기까지 한 경우도 있었다.
주로 내가 묻고 그 사람의 생각을 듣는 것들이었지만, 대화를 나눈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사는지 조금 더 알 수 있게 되기도 했다.

그렇게 대화를 나누면 그 사람들을 정말 ‘사람’으로 보게 된다.

지난주,
우리 회사와 그쪽 회사의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모인 큰 미팅이 있었다. 분기별로 한번씩 하는 큰 미팅이다. 거기서 우리쪽 E가 그쪽을 큰 소리로 몰아붙이면서 그쪽의 잘못을 지적하는 일이 있었다.
우리 회사 사람들은 E를 칭찬하면서 잘 했다고 다들 좋아했다.
그런데, 나는 그럴 수 없었다. 그렇게 궁지에 몰리게 된 사람들과 나는 여러 대화를 나누며 그들의 개인적인 이야기들을 제한적이지만 들었고, 그 사람들의 상한 마음을 생각해볼때 그런 상황이 그저 많이 불편했다.

믿기 쉬운 것과 믿기 어려운 것

적어도 내겐,

하나님께서 계시다는 것을 믿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러나 그 하나님이 나를,우리를,세상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 더 어렵다.

하나님께서 존재하신다는 것은 믿어지기도 하고, 그 신의 존재를 믿는 것이 심지어는 더 논리적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하나님이 지금 여기 나와/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은 훨씬 더 어렵다.

믿음이란, 추상적인 존재나 원칙이나 생각에 대한 지적동의를 의미하지는 않는 것 같다.
그런 것이 믿음이라면 훨씬 단순하고 쉽다.

믿음은 결국, 그런 존재/원칙/사상 등등과 ‘나’를 연결시키는 operation이다.
그러니, 따지고보면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것에 머무른다면 그것은 엄밀한 의미의 믿음이 아닐 것 같다.
그 하나님이 나를, 우리를, 세상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 되어야 비로소 믿음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