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내 돈에 대한 철학은 결국 누가복음 16:9이다. “불의한 돈으로 친구를 사귀라”

돈이란, 그렇게 사람을 위해 쓰는 거다.
사랑하는 사람, 더 사랑 받아야 하는 사람, 그 돈이 필요한 사람을 위해서 쓰라고 내게 주어진거다. 나를 위해서 쓰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고.

때로 그것은 논리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 낭비처럼 보일수도 있다.

흔히 불의한 청지기 비유라고 불리는 누가복음의 이 본문을 해석하는것은 그리 만만치 않다.

그런데,
그 비유 바로 다음에 나오는 본문의 흐름등을 염두에 두고 보았을때, 불의한 청지기 비유의 핵심은 돈은 사람들을 위해서 쓰라고 있는거다… 라는 것이라는게 내 생각이다. 그리고 그것이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기지 않는 중요한 key가 된다.

이런 생각을 하다보니, 꽤 뜬금없이 누가복음 16장의 이 본문이 내 삶에서 참 큰 (그러나 자주 지키기 쉽지 않은) 원칙을 만들어 내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설교는 강의일까? 선포일까? 설득일까? Reminder일까?

내가 Grace Chapel을 떠난지 20년이 더 지났다.
보스턴을 떠나온것이 그렇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그 이후 지금까지, 거의 대부분의 그 교회 설교를 들어오고 있다.

내가 있을때 계시던 목사님이 은퇴를 하셨고, 그 후에 젊은 목사님이 오셨는데, 그분은 1년 조금 더 지나서 원래 자신이 있던 교단으로 돌아간다고 그 교회를 그만 두셨다.
그러니 그 교회가 꽤 어려워졌을 것.

힘든 기간을 지나서 몇주전 그 교회에 새 목사님이 오셨다. Gordon Conwell에서 교수를 하시던 분인데 Grace Chapel에서 삼고초려를 한 모양이다. 은퇴한 Bryan목사님이 전화를 해서 설득을 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이분은 Cambridge에서 성서학으로 Ph.D를 하신 학자다. 그러니 이분의 설교가 그렇게 학문적,논리적,이성적일 것 같은데… 몇번의 설교를 들어보면 사실 그렇지 않다.

물론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부분이 꽤 많은 부분을 차지하긴 하지만,
설교 전체의 흐름은 논리적 설득과 설명이라기 보다는 그저 알고 있는 것을 사람들에게 reminder해주는 것 같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한다.
그리고 그것에 더 구체적 설명을 하지 않는다. 그냥 그렇다고 선언해버리고 만다.

이분은 브라질 출신이다. 브라질에서 10년동안이나 목사를 하다가 그 이후 공부를 더 하기 위해서 캐나다-그리고 그 이후 영국에 갔으니 미국적이라기 보다는 브라질의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할수 있을까? 그래서 일까? 머리에 호소하기 보다는 그냥 더 가슴에 호소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적어도 내겐… 그게 참 좋다.

그러면서 다시 생각을 해보게 된다.
설교란 도대체 무엇일까. 가르침 (teaching)일까, 선포일까, 설득일까, 아니면 회중을 향한 reminder일까.

아마도 all of the above이겠지만,
그냥 지금의 내게 그런 설교가 더 필요한 것이겠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대화

태국에 많이 다녀오면서 제한적이지만 어떤 사람들과는 살짝 개인적인 이야기들도 할 기회가 있었다.
심지어는 종교에 대한 이야기까지 한 경우도 있었다.
주로 내가 묻고 그 사람의 생각을 듣는 것들이었지만, 대화를 나눈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사는지 조금 더 알 수 있게 되기도 했다.

그렇게 대화를 나누면 그 사람들을 정말 ‘사람’으로 보게 된다.

지난주,
우리 회사와 그쪽 회사의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모인 큰 미팅이 있었다. 분기별로 한번씩 하는 큰 미팅이다. 거기서 우리쪽 E가 그쪽을 큰 소리로 몰아붙이면서 그쪽의 잘못을 지적하는 일이 있었다.
우리 회사 사람들은 E를 칭찬하면서 잘 했다고 다들 좋아했다.
그런데, 나는 그럴 수 없었다. 그렇게 궁지에 몰리게 된 사람들과 나는 여러 대화를 나누며 그들의 개인적인 이야기들을 제한적이지만 들었고, 그 사람들의 상한 마음을 생각해볼때 그런 상황이 그저 많이 불편했다.

믿기 쉬운 것과 믿기 어려운 것

적어도 내겐,

하나님께서 계시다는 것을 믿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러나 그 하나님이 나를,우리를,세상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 더 어렵다.

하나님께서 존재하신다는 것은 믿어지기도 하고, 그 신의 존재를 믿는 것이 심지어는 더 논리적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하나님이 지금 여기 나와/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은 훨씬 더 어렵다.

믿음이란, 추상적인 존재나 원칙이나 생각에 대한 지적동의를 의미하지는 않는 것 같다.
그런 것이 믿음이라면 훨씬 단순하고 쉽다.

믿음은 결국, 그런 존재/원칙/사상 등등과 ‘나’를 연결시키는 operation이다.
그러니, 따지고보면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것에 머무른다면 그것은 엄밀한 의미의 믿음이 아닐 것 같다.
그 하나님이 나를, 우리를, 세상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 되어야 비로소 믿음이 된다.

할말이 많은, 말을 줄여야 하는…

내일은 이 동네 KOSTAN들이 몇명 모인다고 한다.
SJ 자매가 엄청 나서서 사람들을 모았고, 그곳에 정우 형제와 나를 초대해서 뭔가 이야기를 해보자고 한다.

그러면서 물어보고 싶은 질문들도 미리 보내주었다.

아마 10년쯤 전이라면,
매우 열정적으로 모든 질문에 대해 하나씩 하나씩 하고 싶은 말들이 엄청 많았을 것 같다.

사실 여전히 지금도 할 수 있는 말들은 꽤 많다. 그리고 하고 싶은 말도 여전히 많은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예전만큼 내 말에 자신은 없다.

내가 정말 충분히 지혜롭게 말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한 자신도 없고,
이런 말들이 듣는 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일까 하는 것에 대한 자신도 없다.

아마도… 내일은 우리 정우형제를 많이 이야기하도록 시키는 것이 좋을 듯 하다. ^^

가을

나는 어주 어려서부터 가을을 참 좋아했다.
더운 여름 끝에 마주하는 시원한 기운이 참 좋았고, 오랜만에 다시 긴팔을 입었을때의 기분이 좋았다.
살짝 지루했던 여름방학 끝에 다시 개학을 하고 학교에 가는 것도 좋았다.
가을에 먹게되는 여러가지 음식/과일들도 좋아했고, 추석 즈음에 송편 먹는 것도 좋아했다.

나는 사춘기를 심하게 경험하고 지나가진 않았지만,
대충 10대후반-20대에는 나름 가을을 타기도 했었다.
웬지 외로운 기분이 드는 그 묘한 느낌이 좋았다.
적당한 음악을 틀어놓고 혼자서 그 앉아있었던 시간도 좋아했다.

내가 살고 있는 이곳에는 대단히 가을이 확연하게 오지는 않는다.
그냥 살짝 더운 여름, 살짝 시원한 가을 뭐 그렇고 그런…

그래서 나는 가끔, 특히 가을에는 더, 계절의 변화가 있는 곳에 사는 것이 그리워진다.

이번 가을에는 그래서 어떻게든 가을 기분을 하나쯤 내보려고 한다.
그런데… 뭘 해야할지는 잘 모르겠다.
기껏해야 좀 시원해진 동네 작은 trail 걷는 것 정도 하게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