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할 여유가 없다면…

내가 예전부터 가지고 있던 지론(?)은,

사랑할 여유가 없을 만큼 바쁘게 사는 것은 죄이다… 라는 것이었다.

어떤 사람은 좀 더 바쁘게 살더라도 사랑할 여유가 있을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은 별로 바쁘게 살지 않더라도 사랑할 여유가 없을 수도 있으니,

사람마다 바쁘게 사는 정도를 자신에 맞게 조정해야 할 터인데…

지난 두어주 정도,

사람을 사랑하고 돕고 하는 이메일, 카톡, 텍스트 등등이 쏟아졌다.

대충 4~5사람을 동시에 ‘도와주는’ mode에 있었던 것 같다.

어제 오후 카톡 하나가 띵~ 하고 들어왔을때…

어휴… 뭐가 또….

그 생각이 든 순간,

금방 내게는 red flag이 올라왔다.

….

나와 내 아내는, 

결혼기념일보다 2월 16일을 더 소중하게 생각한다.

97년 2월 14일, 발렌타인데이에..

서로 좋아하는 마음이 있는걸 빤히 알고 있으면서도.. 서로 이야기하지 못하고… 그냥 그렇게 지났는데….

(게다가 내가 박사과정을 그만두어야 할지 말지를 고민하고 있었을 때였기에 나는 정말 무언가를 시작할 자신이 없었다. 자칫 그냥 내가 내 아내에게 부담만 주게될 것 같아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었다.)

2월 15일, 

내 아내 (그 당시는 ‘수영이’ㅋㅋ)가 대학원 원서를 막판에 준비해서 넣는걸 도와준다고 만나서…

저녁먹고…

머뭇거리다가 (정말 많이 머뭇거리다가..) 자정이 조금 넘어서 사랑을 고백했었다. 

그 이후 17년 동안,

나도 내 아내도 참 바쁘게 살아왔다.

지금의 나를 돌아보면,

내 아내를 사랑할 여유를 잃어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내 아내를 사랑하는 일은,

내가 회사의 project를 잘 해내는 일이나, 성경공부를 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일텐데 말이다.

Dallas Willard가 John Ortberg에게 이야기했다고 하는 충고를 따라, 내 삶을 좀 정리해야할 듯 하다.

“You have to ruthlessly eliminate hurries in your life.”

(but… I don’t yet know how… -.-;)

소그룹 성경공부 때문이다!?

최근 마태복음을 공부하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니, 이처럼 공격적인 선언으로 가득차 있는 이런 복음서를 읽으면서,

어떻게 도대체 멜랑콜리한… 마음이 따뜻해지는… 순정만화 같은… 그런 기독교를 진짜라고 믿을 수가 있는 걸까?

그건…

활활타는 용광로 앞에서 작은 주전자를 들고 차 한잔 마실 물을 끓여보겠다고 하는 것,

나이아가라폭포가 쏟아지고 있는데, 작은 생수병 하나 들고, ‘생수’ 받아가겠다고 나서는 것,

3000년 묵은 키가 100미터가 되는 큰 나무를 보고, 그걸 분재해서 집에 키우고 싶다고 하는 것 보다도 더 터무니 없는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내가 뭐 대단히 긴 세월을 기독교인으로 살아온 것은 아니지만,

늘 내가 ‘순정만화’식의 기독교 메시지만을 들었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예전에는 그래도 거칠고 투박하고, 심지어는 신학적으로 약간 편향이 있었을 망정,

‘선포’, 혹은 ‘선언’ 이라고 번역하는 ‘케리그마’가 살아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과연 무엇이 현대 기독교를 이처럼 천박하게 만들었을까?

최근 내가 고민하면서 주목하고 있는 것은…

‘소그룹 성경공부’이다.

뭐 아는 사람은 다 알지만, 나는 소그룹 성경공부를 무척이나 소중하게 생각하며 지난 20여년을 보내왔다.

늘 소그룹 성경공부를 하며, 인도하며 살았다.

그런데,

현대 교회의 소그룹 성경공부는,

‘선포’의 장대한 서사시와 같은 복음을,

어린아이들이 부르는 동요와 같은 scale로 전락시켜 버렸고,

복음의 사유화 (privatization)을 가속화 시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신학적으로 많이 부족한 인도자가,

그저 좋은 성경공부 분위기를 만들려면…

우리끼리 서로 힘이 되는, 따뜻한 이야기, 

위로와 격려가 되는 이야기…

이런 것에 치중할 수 밖에 없게 되고,

결국 위에서 기술한 것과 같은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이 아닐까.

‘말씀’을 전하고,

‘말씀’을 나누고,

‘말씀’을 배우면서…

삶과 사랑을 나눈다고 이야기하는 소그룹 성경공부가… 사실은…

말씀을 말씀답지 못하게 하고, 

말씀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shallow한 자기 생각을 나누고,

말씀을 배우기 보다는 말씀을 사유화하는 것을 배우고,

그래서 궁극적인 삶과 사랑의 의미를 찾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딱딱 거리는 어떤 사람을 대하면서

새 회사에 온 후,

아주 다른 일들을 참 많이 한다.

(나는 정말 일 복이 터졌다. 얼마나 일복이 터졌나 하는건 언제 이 블로그에서 시리즈로 한번 다루어볼까 한다. ㅋㅋ)

그중 하나는,

내 office에서 30마일 정도 떨어진 곳에 가서 실험을 좀 하는 일이다.

그런데, 그곳의 lab manager가 아주 딱딱 거리고 나를 힘들게 했다. 이것도 안된다, 저것도 안된다… 네가 그건 잘 몰라서 하는 소리다….  내가 S***ford 다닐때 실험실에서 다 해본거다…

음…

이거 참…. 일하기 막막하네…

그러다 최근, 이 사람이 나랑 linked in으로 연결이 되었다.

그렇게 연결된 다음날, 이 사람의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다!

아주 나긋나긋 싹싹…

몇가지 가능성,

1. 내가 너무 어려보여서 만만하게 봤는데, linkedin을 보니, 나이가 좀 있어서… 그렇게 막대하지 않기로 했다.

2. 내가 뭐 그냥 별볼일 없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linkedin을 보니, 나름대로 학벌과 경력이 괜찮아 막대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음…

뭐 두가지 다 가능성이 없지 않은데…

결국 내용은 이거다.

나는 실제로 대하면 별볼일 없는데…

resume 상으로는 profile이 훨씬 더 좋다.

음….

resume profile로 밀어붙여 돈벌어먹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

resume profile에도 불구하고 일 열심히 해서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할텐데…

이렇게 일복이 터져서,

이렇게 열심히 일하지만…

아직도 나는 professionally 많이 부족한걸까.

하나님 나라가 선포됨

마태복음을 읽으면서 느끼는건,

정말 이게 하나님 나라 이야기라는 것이다.

아주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통치 라는 개념의 하나님 나라 (하늘나라)에 대한 언급이 참 많이 나오는 것 같다.

지난주 금요일 성경공부 시간에 함께 하는 사람들과 좀 나눈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1.

‘차원’이라는 개념을 사용해서 하나님 나라의 선포를 이해하면 도움이 참 많이 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3차원에서 살고 있고, 그런 ‘공간’은 ‘시간’이라는 것과는 별개의 개념으로 이해하곤 하는데…

사실 물리학적 개념으로는 그렇지 않다. 

아인쉬타인의 상대성이론에 따르면, 시간과 공간은 ‘시공’ 혹은 Space-time 이라는 개념으로 서로 엮여 있다. 그 ‘시공’이라는 것이 중력 부근에서는 휘기도 한다는게 일반 상대성 이론의 내용이다.

뭐… 갑자기 엉뚱하게 물리학 이야기를 꺼내긴 했지만서두…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길을 걸어가고 있는 사람은 위치가 바뀐다.

보통 우리 사람은, 그 사람의 위치가 시간에 따라 바뀐다는 식으로 이해를 하지만…

‘시간’이라는 축을 아예 하나의 축으로 놓고 전체 frame을 이해하자면, 시간에 따라서 어떤 위치를 지나온 그 사람의 모든 궤적 자체가 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즉, t=t0에 x0 라는 위치에 있는 사람, t=t1에 x1 이라는 위치에 있는 사람, t=t2에 x2 라는 위치에 있는 사람 모두를 다 포함해야 시간축을 따라서 존재하는 그 사람을 다 기술해 내는 것이다.

시간축에 대해서 ‘초월’하지 못한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 사람의 time-slice 밖에 볼 수 없지만, 시간축에 대해서 ‘초월’한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 사람의 모든 time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다.

2.

마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선언하시는 하나님 나라는,

time-sliced description이 아니라, 전 시간적 description이라는 생각이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이게 온전히 하나님의 통치가 완성되어야만 가능한 이야기를 하시기도 하고, 

(가령, 하늘 아버지의 완전함 같이 너희도 완전하라  와 같은…)

어떤 경우에는, 아직 깨어진 세상 속에서도 충분히 실행/현실화 가능한 이야기를 하시기도 하신다.

(가령, 아무것을 두고도 맹세하지 말라 하는 것과 같은..)

오른 뺨을 때리면 왼 뺨을 돌려대라 라는 말씀을 제대로 지키면서 이 현실 사회에서 살아가는 것이 정말 가능할까?

이게… 사실상 불가능한건데, 시간축을 초월해서 성경을 읽어내면 이게 가능해지는 거라고나 할까.

마태복음을 읽었던 마태복음의 일차적 독자들은, 

산상수훈과 같은 이야기를 읽으면서…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아마도, 이제는 새로운 하나님의 통치의 시대가 열렸으니,

이제 새롭게 살아가는 삶의 방식인거구나…

하면서, ‘지금’ ‘여기서’ 지켜야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윤리 코드로 이것을 받아들였을 것 같다.

3.

구약에서 나타난 율법 역시, time-sliced description/prescription 이라기 보다는, 초시간적 기술이자 명령인 것 같다. 

이것 역시, 현실적으로 지킬수 있는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었는데…

그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홍해바다를 가르고 우리를 이끌어내신 하나님의 새로운 통치가 시작되었으니, 이제는 그렇게 살아야하는 거구나… 하고 받아들였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4. 

따라서, 그런 ‘구약적'(?) 사고방식에 익숙한 유대인 독자들은,

산상수훈을 읽으며 / 들으며…

지금 우리가 겪는 혼란이 훨씬 적지 않았을까.

이미 그런 생각의 틀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5.

가령,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해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라는 주기도문의 내용을 우리가 읽으면서는…

그래서, 우리가 먼저 용서해야 우리가 용서 받는거야? 그러면 이거 이신칭의랑은 어떻게 되는거야?

이런 고민을 하지만,

이걸 시간초월적 명령으로 받으면… 언젠가는 죄의 용서가 완전히 이루어지는 새 시대가 완성되는 날이 오는데… 지금 바로 여기서 그 시대가 열리고 있는 거야! 그러니까, 그 시대의 사람으로 살아야해! 

이렇게 이해가 되는 거다.


그런 의미에서,

(산상수훈을 포함해서…) 복음서… 더 나아가서는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 백성의 윤리 코드는,

지금 바로 지키면서 살도록 요청하는 명령이지,

그걸 통해서… 이신칭의를 깨닫게 하도록 도움을 주는 그련 메타포가 아니다.

6.

예수님께서는,

시간 이라는 차원을 초월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턱~ 하고 우리에게 던져 주시면서,

자 이제 이런 시대가 열렸고, 열리고 있고, 열릴거야!

그러니까 이렇게 살아!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Already, but not yet 이라는 하나님나라의 파라독스는…

하나님 나라의 선포가, 시간 초월적 선언이라는 것을 이해하면 훨씬 더 받아들이기 쉬워지는 게 아닌가 싶다.

…..

뭐 이런 식의 이야기를 성경공부 시간에 했더니만,

목사님께서…

비공돌이들에게는 그런 비유로 설명하려고 애쓰지 말라고 하셨다. ㅋㅋ

나는 이렇게 생각하니까, 머리에 팍팍 들어오는데 말이야… ㅎㅎ

상처 많은(?) 개

우리가 개(하이디)를 키우기 시작한지 벌써 4-5개월 정도가 지났다.

이 개를 입양한 쉘터의 안내에 따르면, 하이디를 길에서 발견했을 때, 도대체 무슨 종류의 개 인지, 무슨 색깔의 개인지 하는 것 조차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상태가 나빴다고 한다.

무슨 험한 세월을 살았는지, 이 아이는 앞니가 거의 다 없다.

그래서 보통 개들이 좋아하는 “뼈다귀” 같은 것을 하이디는 즐기지 못한다.

이가 좋지 않아서, 먹이가 조금만 크면 잘 못먹는다.

처음 왔을 때에는, 정말 잔뜩 긴장이 되어 있었고, 도무지 친한척을 잘 하지 않았다.

먹을것을 줘도 극도로 조심하고, 잘 다가오지도 않고…

그래서 우리는 하이디는 그냥 많이 얌전하고 부끄러움 많은 개 인줄 알았다.

그런데 최근 하이디는 우리가 많이 편해졌는지, 우리들에게 다가와서 놀아달라고 조르기도 하고, 먹을 것 달라고 떼를 쓰기도 한다. 아침에 눈을 뜨면, 당장 와서… ‘놀자’고 꼬리를 흔들며 아침 인사를 한다. 약간 기분이 좋으면 집 안에서도 이리 저리 뛰어다니며 흥분을 표현한다.

민우가 소파에 누우면, 바로 민우 품에 쏙 들어가서 눕는다.

험한 삶을 살면서,

몸과 마음에 상처가 많았던 하이디가,

이제 민우 옆에 누워서 민우에게 떼도 쓰게된걸 보며…

참 많이 감사했다.

그러면서도,

아… 사람도 이렇게 몇달만 사랑을 주면, 예전의 상처를 씻고 다시 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뭐 그런 생각을 해 보았다.

신선한 예배

어제는,

산호세 CRC (미국교회)와 함께 ‘공동예배'(?)를 드렸다.

하나의 씨앗교회는 CRC (Christian Reformed Church) 라는 교단에 소속되어 있는데,

이 동네의 CRC 미국 교회가 우리를 host해서 함께 예배를 드린 것이다.

그 목사님과 우리 목사님이 한편의 설교를 반반씩 나누어서 했고,

그 교회 사람들은 우리를 위해서, 찬송가도 한절은 한국말로 불렀다. ^^

예배도 좋았고, 설교도 좋았고…

CRC는 화란의 개혁교회 사람들이 캐나다와 미국으로 이민오면서 만든 교단이란다.

그런데,

우리 목사님의 말씀에 따르면,

‘개혁교회’ 사람들은, 자신들을 ‘복음주의’라는 범주에 넣는 것을 불편해 한다고.

복음주의냐 아니냐라는 구분 자체가 자신의 신학적 identity와는 다소 맞지 않는 다고 이야기한단다.

예배를 드리면서,

찬송가의 선곡이나, liturgy의 흐름이나, 그 교회의 30대 젊은 목사의 설교, 또 그분과의 짧은 대화 등등을 통해 받은 느낌은…

음… 이거 신선한데? 뭐 그런 느낌이랄까.

그 젊은 목사님은 Fuller 출신이라고 하니, 

뭐 복음주의적 성격을 가지고 있긴 하겠으나…

복음주의가 무척이나 답답하게 느껴지는 요즘,

내가 불편하지 않는 non-evalgelical의 신앙의 단면은 본것은 아닐까 싶어,

잠시 반가웠다.

(뭐 자세한건 더 공부해봐야 하겠지만.)

복음서에 빠지다?

예전에 누가복음과 마가복음은… 뭐 건성이지만 좀 공부해본 적이 있었는데,

마태복음과 요한복음은 차근차근 공부해본적이 없었다.

특히 나는 요한복음이 요즘은 많이 땡기는 모드여서, 요한복음이 그리고 있는 예수의 모습을 더 알고 싶은 마음이 강하던 차였다.

최근 교회에서,

주일에는 요한복음 강해가 계속되고 있고,

금요일 성경공부에는 마태복음이 계속되고 있는데…

허억… 이거 참 대박이다.

요한복음 설교는, 

아… 설교자와 그 설교를 듣는 청중을 인격적으로 알면서 설교를 듣는 다는것이 이런 장점이 있는 거구나… 하는 것을 깊이 경험하며 듣고 있는 중이고,

마태복음 성경공부는,

만일 내가 읽고 있는 방식대로 이 마태복음을 읽는 것이 맞는 것이라면,

지금 우리가 접하는 99%의 기독교는 다 가짜다… 라는 생각이 들 정도의 강펀치가 담겨있다고 느껴진다.

이 정도를 가지고,

복음서에 빠져있다고 이야기하기엔 택도 없지만…

그래도 새해의 첫달을 복음서와 함께 지낼 수 있었던건 참 큰 blessing이었던 것 같다.

(게다가 새해 QT 본문도 마태복음…)

그러나 아직 잘 풀리지 않은 것들은,

– 내가 보기에, 요한복음의 기독교와 공관복음의 기독교는… 너무나도 많이 달라서, 과연 이것이 같은 종교를 다루는 이야기일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인 것 같아 보인다. 과연 이것이 어떤 통합된 view로 제대로 통합될 수 있는 걸까. 논리적이고 학문적인 차원에서의 통합도 중요하고, 또한 내 자신 안에서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되는 통합도 중요할 것이고…

– 소위 ‘교리’ 혹은 ‘조직신학’의 관점에서 복음서를 읽으면, 너무 복창 터지게 답답하게 느껴지는데, 그 ‘바운더리’에 얽매이지 않고(?) 복음서를 읽으면 이게 3D 영화와 같이 느껴진다. 

그렇지만 여전히 나를 붙들고 있는 중요한 기둥은 몇가지 ‘교리’인것 같다. 

도대체 조직신학의 적절한 role은 무엇일까? 

기독교는 교리의 종교인가, 그렇지 않으면 스토리의 종교인가?

– 예전에 프란시스 쉐퍼가, 성경의 권위에 대해 언급하면서, 성경의 오류를 조금이라도 인정하기 시작하면 slippery slope 이 되어, 결국 자유주의로 추락(?)하게 되고, 결국은 기독교의 본질은 버리게 된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걸 알프스 산 꼭대기의 물 한방울이 약간의 차이에 따라 지중해로, 혹은 대서양으로 흘러가게 된다는 비유를 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요즘 가만히 보면… 어떤 경우에는 자유주의자들이 오히려 기독교의 ‘심장’을 더 잘 지켜내고 있는 부분이 많은 것 같다. 

가령, 보수주의자들은 부활의 역사성에 대해 강조하고 부활이 진짜 일어난 사건인가 하는 것에 모든 관심이 있는 반면, 자유주의자들이 오히려 부활의 의미에 대해 더 많은 고찰을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예가 좀 만족스럽지 못하다… 쩝.)

그런 의미에서, 보수주의적 관점에서 복음서를 읽지 않고, 좀 더 ‘열린'(?) 시각으로 읽어내되, 그것이 교리를 강화시키는 방식으로 내 신앙을 강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의 심장’을 제대로 느끼는 방식으로 나와 공동체의 신앙을 강화시키는 경험을 하고 싶은데… 여전히 나는 갈 길이 먼 것 같이 느껴진다.

– 그래서, 사실 우리 목사님과 교인들이 불편해할만한 질문들을 자꾸 던져보는 중이다. ^^

가령, 

예수님이 정말 동정녀에서 태어나야만 했던 걸까. 예수님이 동정녀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면 정말 기독교는 무너지나?

성경은 정말 삼위일체를 이야기하는 걸까? 삼위일체가 그토록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예수님이 신성을 가지셔야 하나? 그냥 인간으로서 메시아의 role을 하신 것이라면 성경 narrative에서 심각한 왜곡이 발생하는 걸까?

뭐… 이런 것들에 대해서, 주일학교식의 해답은 물론 있다. ^^

나도 뭐 그런 성경공부는 다 열심히 했고, 수 없이 인도도 해 보았고.

그런데… 3D로 읽어내는 복음서에서 만나는 예수께서 내게 하시는 말씀은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이 듣고 싶다고나 할까…

솔직히 내가,복음서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데…

그러나… 복음서에 좀 더 빠져보고 싶긴 하다. ㅎㅎ

쌍욕

최근에 들은 이야기.

어느 교회에서, 예수 잘 믿는 부부가, 성경공부도 열심히 하고… 그렇게 지냈다.

담임목사가, 그 부부를 견제하여, 교회에서 아무일도 못하게 만들더니,

결국은 그 부부보고 ‘이단’이라고 교회에서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면서 그 성경공부 가지 말라고…

예수 잘 믿는 이 부부는,

이걸 황당하다고 받아들여야할지, 억울하다고 해야할지, 분통이 터진다고 해야할지…

정말…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내가 이 이야기를 듣고,

중학교때 이후로 하지 않았던 ‘쌍욕’을 혼자 막 퍼부었다.

이 씨x놈, 개x끼, X같은 새끼, 찢x 죽일놈.

그래도 성이 풀리질 않아,

하나님께 그 담임목사 X새끼에게 저주를 퍼부어 달라고 막 기도했다.

그런 새끼는, 

하나님도, 심판도, 죄도, 믿지 않는게 분명하다며…

정말 혼자 쌍욕을 퍼부었다.

참람한 (신성모독의) 죄를 지으면,

구약에서는 돌로 쳐서 죽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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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대하는 상대가 너무 악할때,

내 정당함이 드러나기도 하지만…

대하는 상대가 너무 악하기 때문에,

내 악함이 드러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며…

그런 쌍욕은 하지 않기로 했다.

씨x놈… 개x끼…

오늘까지만 욕을 좀 하자.

=====

하나님,

저는 좀 화를 덜 낼테니,

주님께서 좀 화내어 주십시오.

또 다시 Dresden 출장

1.

이번주에는 또 다시 독일에 와 있다.

이번에는 지난번과는 다른 hotel에 묵었다.

그런데, 이쪽 동네도 정말 장.난.아.니.게. 예쁘다.

사진의 퀄리티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영 못마땅한 사진들이겠지만, 밤에, 전화기로 대충 찍은 사진이니… 

2.

이번 출장에는, 유난히… 정말 유난히 바쁘다.

점심 먹을 시간 찾기가 쉽지 않다.

낮에는 이쪽 일을 하고, 밤에는 미국 쪽 관련해서 conference call을 하고…

호텔 바로 앞쪽에도 한번도 나갈 기회도 찾지 못하고 있다.

아침 6시 반 아침 식사, 점심은 기회가 허락하면 간단히… 방문하고 있는 연구소에서 때우고, 저녁은 8-9시쯤 다시 호텔에서…

3.

게다가 이쪽에서의 일이 영 신통치 않게 잘 안된다.

예상하지 못한 변수가 생겨서, 실험의 일부가 실패하게 될 것 같다.

음… 아주 마음이 무겁다.

4.

그저께, 아내와 전화를 했는데, 집의 water heater에 leak이 생긴 모양이다. 그래서 물도 세탁실 쪽으로 새고… 

아내도 많이 바쁜 와중에 그걸 처리하느라 힘이드는 것 같았다.

멀리서 무슨 도움이 될 수도 없고…

정말 답답하고 우울하고…

5. 

이런 와중에 처해있는 나를 가만히 보니…

나는 참 많이 불안해 한다.

일이 잘 안될까봐. 내 아내가 너무 많이 힘들어 할까봐. water heater 때문에 많이 고생할까봐…

그리고 그것의 해결책으로, 정말 extra energy를 내어서, “해결해야해!” 이렇게 반응하며 뺑뺑이를 돈다.

이런 mode가 작동되면, 내가 문제를 해결하는데 방해가 되는 사람들은 모두 내게 ‘적’이 된다. -.-;

6.

때로 내가,

내 가족에게,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아끼는 후배들에게…

‘폭군’과 같이 대할때가 있는데, 그럴 때는 대개 내가 이렇게 ‘panic’해서 extra energy를 내고 있을 때인 것 같다.

얼른 문제를 해결해야 하기 때문에, 그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 모든 요소를 ‘제거’해야한다고 느끼고…

그러면서 그 사람들에게 ‘폭군’과 같이 대하는 것 같다.

7. 

재미 있는(?) 것은, 내가 당면한 과제가, 어떤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나 위로하는 것이라고 할 때에도, 그 사람을 도와주고 위로하는데 장애가 되는 그 사람을 거추장스럽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내 원래 동기와 정 반대의 행동을 하거나, 지혜롭지 못한 반응을 보이게 된다.

8.

눈이 덮여있는 Dresden은 참 예쁘다.

구석 구석 예쁘게 꾸며진 거리도 있고, 멋진 오래된 건물들도 많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별로 예쁘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 안에서 으쌰 으쌰 하고 있는 내 모습도 그리 예쁘지 않다. -.-;

(두개의 시리즈 글들은 다음주 계속됩니다. ^^)

후배들 화이팅~ ^^

그래도 나름대로 KOSTA를 열심히 섬겼었다.

KOSTA 생각하며 기도도 많이 했고, 울기도 많이 울었고, 기쁨도 컸다.

KOSTA일 제대로 못해내는 악몽도 많이 꿨고 ^^

생각해보면,

나는 선배들로부터 참 많은 것을 배우고 전수받았던 것 같다.

그런데, 나는 후배들에게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는 것 같다.

오늘부터,

후배들이 KOSTA 사역을 위한 모임을 갖는다.

뉴욕에 벌써 속속들이 모여들고 있는 모양이다.

늘 후배들에겐 미안한 마음 하나 가득이다.

함께 하는 것도 미안하고, 함께 하지 못하는 것도 미안하고…

우리 섬기는 후배들을 생각하며,

가슴 찡~ 하지  않게 되는 때가 언겐가는 올까?

우리 후배 간사들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