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대의 영적 우울증

내가 20-30대 청년들에게 많이 하는 말.

  1. 내가 보기에 현재 20-30대 그리스도인중 다수는 일종의 영적 우울증에 걸려 있는 것 같아 보인다.
    세상 삶을 살때는 열심히 빠릿빠릿 살다가도, 신앙의 영역에만 오면 무기력하게 행동하는 것을 자주 보곤 한다.
  2. 이런 현상은 그냥 일부의 20-30대에서 보이는 것이라기 보다는 매우 다수, 어쩌면 대다수의 20-30대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나타나는 것 같다.
  3. 그렇게 된 이유로 나는 두가지를 든다.
    첫째, 이들에게 신앙이 지나치게 개인적이다.
    신앙이 자기 자신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의 삶을 객관적으로, 혹은 초월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결여되어 있다. 신앙의 모든 기준과 중심에 ‘나’가 있고, 결국 모든 신앙이 나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신앙이 결국 내 안에서 함몰되어 버리고 있는 것 같다.

    둘째, 이들에게 신앙이 지나치게 감성적이다.
    결국 신앙의 경험이라는 것이 찬양을 부르며 눈물 찔끔 난다거나,
    내가 힘들때 누가 나를 따뜻하게 대해주는 경험 정도이다.
    그러다보니 조금 더 논리적이거나 이성적이거나 지성적인 신앙의 경험이 부족하다.
    그러니 감성의 영역에서 계속 흔들리면서 자신을 이겨내는 일이 드물게 나타난다.
  4. 나는…
    조금더 건강하고 균형잡힌 신앙은 이 사람들에게 훨씬 더 큰 활력과 삶의 의미를 제공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Anxiety, Depression, Mental health

다음주부터 교회에서 불안장애, 우울증등과 같은 정신건강에 대한 내용으로 설교 시리즈를 한다고 한다.
매우 기대가 크다.

내가 알기로 지금 20-30대에게 우울증이나 불안장애등은 거의 팬데믹 수준이다.
민우와 이야기를 해보아도, 자신을 포함해서 자신의 친구들중 불안, 우울증 등으로 고생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한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실제로 현상적으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바로 심각하게 인지하고 그것에 대한 고민을 한것,
또 그 내용에 대해서 여러가지로 연구하고 전문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contents를 만드는 노력을 한것,
또 그 내용을 전체 교회 식구들과 나누고 이야기하기로 한것.

교회의 이런 노력들에 박수를 보낸다.

에스더

에스더를 예전에 읽을 때는,
에스더의 멋진 신앙의 결단과 하나님에 대한 충성 뭐 그런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번에 에스더를 읽으면서는 다른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일단 에스더의 배경이 완전 시궁창이다. 쓰레기 같은 왕이 있고, 그 왕의 성적 노리개 비슷하게 불려가게 되는 에스더가 있고, 그 와중에 더러운 정치적 권모술수가 있는데 이게 그냥 정권을 잡고 못잡고 하는게 아니고 상대방을 죽여버리는 아주 잔인한 형태.

거기서 에스더는 어쩌면 상황을 주도할 수 없는 약자이고.

다만 거기서,
왕후께서 이처럼 왕후의 자리에 오르신 것이 바로 이런 일 때문인지를 누가 압니까? 라는 모르드개의 말처럼…
상황이 그렇게 풀렸고,
그저 에스더는 그 상황 속에서 reactive하게 반응 했던 것.

물론 에스다가 죽으면 죽으리라… 그렇게 하는 결심도 있긴 하지만,
전반적으로는 에스더는 자신의 control 밖에 있는 훨씬 더 큰 상황의 전개 속에서,
그저 반응해가며… 그 속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해나간 것.

내가 요즘 왜 이렇게 마음이 무겁고 힘들까…
나름대로 하나님께 충성되게 살아가려고 노력을 하고 있는데…
한편으로는 내가 뭔가 상황을 control 하려고 하는 생각이 크기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런데 당연히 상황이, 세상이, 심지어는 내 자신도 내가 control 할 수 없으니…
마음이 무겁고 힘든 것이지.

그저 벌어지는 상황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면서
그 속에서 내 작은 영역에서만 능동적으로 행동하는 에스더의 모습이 그런 의미에서 내게 등불이 되어준다.

정말 부럽다…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신학적 입장 때문에 아무리 생각해도 가톨릭 신자가 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리고 나는 내가 개신교인이라는 것이 감사하기도 하고 자랑스럽기도 하다.

그런데….
요즘은 가톨릭쪽이 참 부럽다.
거기서는 겸손하고, 검소하고, 사려깊고, 지혜롭고, 약자에 대한 사랑이 있는…
가난한 나라에서 오래 사역한 선교사 출신의 사제가 그 전체 교회의 리더가 되었다.

게다가 이분이 영어가 모국어이시니, 나도 이분이 예전에 했던 설교(강론)도 인터넷에서 들어볼 수 있었고,
이분이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사람이었는가 하는 것도 많이 찾아볼 수 있었다.

가톨릭을 대표하는 리더는 그런 사람이다.

개신교에서는… 그런 사람을 찾는게 정말 어렵다. 정말…어렵다.
가톨릭이 참 부럽다.

성경읽기와 기도

늘 그러면 참 좋겠는데, 당연히 늘 그렇진 않다.
그냥 성경을 읽다보면 설명하기 어려운 생명력같은 것이 느껴질때가 있다.

대부분,
기도는 내게 그렇게 작동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내가 깊은 영적 침체에 있을때 기도는 하려고 하면 잘 안되고, 집중하는데 훨씬 더 많은 에너지가 들곤 하는데,
성경은 그냥 시간을 들여서 읽다보면 바짝 마른 밭에 작은 물줄기 하나가 졸졸졸 들어오는 것 같이 느껴질때가 있다.

말하자면,
성경말씀은 내게 힘이되는 양식/음식/보양식 같은 느낌이고,
기도는 그런 생명력이 분출되면서 나를 더 생기있게 만들어주는 느낌이다.

흔히 성경말씀은 영혼의 양식이고,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라고 하는데,
성경 말씀이 그렇게 내게 작동하는 것 같긴 하지만, 기도가 내게 영혼의 호흡과 같이 작동하는 것 같지는 않다.

내 기도가 좀 잘 못되어 있는 걸까?

복음주의자?

스스로를 복음주의자라고 주장하는 어떤 목사님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내 온 몸이 거부하는 것을 느끼곤 한다.
뭐랄까… 내 온 몸의 모든 장기가 고함을 치면서 거부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이번에 새로 로마 가톨릭 교황이 되신 분이 2012년에 한 인터뷰를 들어보았다.
이분…. 거의 대부분의 내용은, 내가 따르고 좋아하고 여전히 믿고 있는 그 ‘복음주의’ 내용이다.

그리고 이야기하는 내용과 tone이 참 지혜롭다.

더 이상 잘 연락하지 않는 오래된 친구

예전에는 아주 가깝고 친했는데 언젠가부터 연락을 해도 그 친구로부터 대답이 없다.
조금 어둡고 힘든 시간을 지나가며 그 친구에게 도움을 청했는데 그 친구가 연락이 없다.
그래서 나도 그 친구에게 더 이상 그렇게 자주 연락하지 않는다.
그 친구와의 좋은 추억도 있고, 그 친구와 절연을 했다거나 그런건 아닌데….
그냥 그 친구와 관계가 서먹서먹한거다.

그 친구는 하나님이다.

사실 요즘 내게 하나님이 그렇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것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잊은 것도 아닌데,
그 하나님과 좀 서먹서먹하다.

그래서 잘 연락하지 않는 오래된 친구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하나님이 그렇게 느껴진것이 내게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다.
매우 자주, 특히 감정의 기복이 지금보다 더 심했던 20-30대에는,
하나님과 소원한 사이를 유지한채 시간을 보냈던 적도 자주 있었다.
나이가 들면서 그런 빈도가 많이 줄긴 했지만,
지금 나는 하나님과 좀 그렇다.

예전에 그렇게 하나님과 서먹서먹해졌을때,
그렇게 그렇게 살다보면 어느새 그분이 내게 가까이 계시다는 것을 다시 깨닫곤 했는데…
그냥 요즘은 하나님과 좀… 그렇다.

교회…

그래도 꽤 ‘이상적인’ 모습에 가깝다고 생각되던 교회에 다닌적이 있었다.
작은 교회였고, 나름 여러가지로 균형잡혀 있었고, 그 당시로서 건강한 신학적 신앙적 전통위에 있었다.
교회 구성원 사이의 유대가 튼튼했고, 적극적으로 reach out했다.
그러나 그 교회는 몇년이 지나면서 처음의 그 모습을 점점 잃어갔고, 결국 그 후에 다른 모습의 교회가 되어버렸다.

그후 그 당시 꽤 건강하다고 알려진 대형교회도 다녀 보았고,
새로운 교회를 세우는 일에도 참여해 보았고,
미국의 학생중심 교회, 이민 교회도 경험해 보았고,
영어를 쓰는 백인중심교회, 그리고 지금은 영어를 쓰는 다양한 민족이 함께 있는 교회에 다니고 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정말 ‘그나마 이 정도라면 다녀볼만 하겠다’고 생각되는 교회들이 정말 없다. ㅠㅠ

그래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내가 믿은 기독교가 정통 기독교가 아닌걸까?
아니면 현대 교회들이 다 그렇게 많이 망가진걸까?
원래 교회란 다 이렇게까지 형편없는 것일까?

적어도 내가 책에서 읽은 교회들은 그렇지 않은데….
정말 교회들이 영광스러웠는데…

시편 119:92

주님의 법을 내 기쁨으로 삼지 아니하였더라면, 나는 고난을 이기지 못하고 망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If Your Law had not been my delight, Then I would have perished in my misery.

이 말씀에서 딱 막혔다.

주님의 법이라는 것은 결국 율법인건데… 그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기쁨이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그분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이 정말 기쁨이라고?
그것이 삶의 방법이고, 그것이 삶의 방향이 되는 것… 그것이 기쁨이라고?

소위 내가 ‘영적 컨디션’이 좋을 때는, 정말 그렇게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을 기쁨으로 알고 살아가는 것 같다.
그러나 내 ‘영적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는, 그것이 기쁨도 아니고, 주님의 뜻대로 잘 살지도 못하는 것 같다.

내가 perish in my misery가 되지 않으려면, 그 하나님의 말씀에 나를 align해서 살아가야 하는 것

역사의 예수님과 신앙의 예수님

역사의 예수와 신앙의 예수가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은 내 믿음에서 매우 중요한 것이다.
그렇지만 역사의 예수와 신앙의 예수가 동일하지 않다는 것 역시 내겐 점점 중요한 것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요즘 내 생각은,
역사의 예수가 중요하지만,
신앙의 예수 없는 역사의 예수는 오히려 온전한 예수가 아니라는 것.

지금의 내게는,
그리고 어쩌면 이 시대의 많은 사람들에게는,
역사의 예수 이상으로 신앙의 예수가 더 중요해지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