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을 맞는 다는 것

뭐 생일을 한두번 지낸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60세 생일 같이 뭐 특별히 기념할 것도 아니고…
그저 30대 중반에 나이 한살 더 먹는건데,
생일이 뭐 그리 대수랴…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하나님께선 내 생일에 어떤 생각을 하실까…
그런 생각을 했다.

내가 처음 어머니의 뱃속에서 잉태되던 그 순간 하나님께서 가지셨을 기쁨,
처음 예정일보다 두달 빨리 나와서 인큐베이터에 있었던 어린 아이의 모습을 정말 자애로운 아버지의 눈길로 보셨을 하나님의 모습…

그런 의미에서,
내 생일은 매우 의미있는 것이겠지.

그저 매년 한번 지나는 의례적인 날이 아니고,
웃고 즐기며 케잌먹고 노는 날도 아니고,
정말 내가 내 생일을 기뻐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처음 태어나던 바로 그 순간부터 한순간도 나를 놓지 않고 지켜오셨던 그 하나님의 관심이 있기 때문이겠지.

그런의미에서,
내 생일을…. 내가 축하한다.
나의 태어남을 인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인해서.
축하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감사하기 위해서.

이런 것들은 어렵다

자신이 예쁜줄 아는 못생긴 사람에게 사실을 말해주기
자신이 노래 잘부르는 줄 아는 음치에게 노래 가르쳐주기
자신이 설교 잘하는 줄 아는 목사에게 설교 잘못 지적하기
자신이 믿음 좋은 줄 아는 현대판 바리새인에게 복음의 진수를 이야기해주기

내가 스스로,
다른 사람으로 부터 이런 지적을 받았을 때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었으면….

내게,
주변의 다른 사람들에게 그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지 않고 사실(fact)을 친절하고 자세히 이야기해줄 수 있는 지혜가 있었으면…

내 경험을 상대화 하기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경험을 절대화 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는 듯 하다.

뜨거운 물에 한번 데인 사람은, 뜨거운 것을 조심하는 것을 인생의 모토로 삼는다.
어려서 가까운 사람이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는 것을 경험했던 사람은, 무병장수가 인생의 목표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이처럼 자신의 경험을 절대화 하려는 모습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많이 발견된다. 특히 자칭타칭 믿음이 좋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그래서 아마도 생각이 조금 다른 부분을 함께 포용하지 못하고 다투는 모습들이 많이 나타나게 되는 것 같다.

가령,
기도를 통해서 신앙의 깊이를 경험한 사람은 말씀에 빠져 사는 사람들이 메말랐다고 비판한다.
혹은 말씀의 오묘한 맛을 깨달았던 사람은 기도에 빠진 사람들을 무식한 반지성주의자로 매도한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은 나이가 들어가면 갈 수록 더 심해지는 듯 하다.

나도 물론 역시 이런 면들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내 경험을 절대화해서 다른 사람들을 재단하고, 비판하는 모습은 내가 스스로 조심하려 해도 쉽게 나타나는 내 죄성이다.

바라기로는,
나는 나이가 들면 들어갈수록,
내 경험을 상대화할줄 아는 지혜를 배울 수 있으면 좋겠다.

그것은 아마도,
하나님 이외에 그 어떤 것도 절대화하지 않는 자세와 생각에서 비롯되는 것이겠지.

30대 중반을 지나 30대 후반을 향해서 가는 나이에,
정말 이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허풍떨기

내가 철 모르던 어린시절,
나는 우리집이 세상에서 제일 부자인줄 알았다.
정말 부자였냐고?
글쎄… 뭐 그리 가난하진 않았지만, 부자라고 까지야….

국민학교 1-2학년 무렵이었나….
내가 우리반 친구 하나에게,
야… 우리집 되게 크다. 우리집은 진짜 커서 우리동네에서 제일 커!

정작 그 친구가 우리집에 와서 보고나서 던진 한마디…
‘애게…’ -.-;

—–

삶의 즐거움의 어려움, 기쁨과 슬픔들을 겪으면서…
때로 나는 내가 아직도 그 어린시절의 나로부터 벗어나 있지 못함을 발견한다.

내가 겪은 기쁨이 세상에서 제일 큰 기쁨인 것으로 생각하고,
내가 겪는 어려움이 세상에서 제일 힘든 것으로 생각하고,
내가 겪는 깨달음이 세상에서 제일 값진 것으로 생각한다.

언젠가 내가 조금 더 성숙해져서,
지금 내가 겪는 기쁨이, 아픔이, 깨달음이,
참으로 ‘별것 아니었음’을 알게 될때,
내 삶의 경험으로 인해 호들갑 떨었던 내가 얼마나 부끄러울까.

그리스도안에서의 성숙함을 지니게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의 위대함과 내 경험의 천박함을 인지하고,
허풍떠는 빈도를 줄여나가는 것이 아닐까 싶다.

– 어느 허풍장이이의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