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을 긍정하는 기독교 (4)

그런데 교회에서는 흔히…

종교적 언어로 사탕발림된 욕망을 긍정해준다.

돈 많이 벌고 싶다는 욕망을, 주님의 비전을 찾는다는 언어로 표현하는 사람이 있을때,
목사나 교회의 자도자들은 그 사람이 정말 주님의 비전을 찾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그리고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들 역시, 속으로는 그래서 그 사람이 돈을 많이 벌게 해달라는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다만,
기도를 부탁하는 사람이나, 기도를 해주는 사람이나 모두,
왜곡된 종교적 언어로만 소통할 뿐,
솔직한 욕망의 언어로는 소통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쪽팔리니까. -.-;

이건 정말 좀 역겨운 일이다.

가장 바람직한 모델은 다음과 같다.
기도를 부탁하는 사람이 자신의 욕망을 욕망의 언어로 표현하되, 그 욕망을 넘어서는 거룩한 바람을 함께 이야기하는 것이다.
가령, 나는 돈을 많이 벌고 싶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이것이 내게 허락되지 않더라도, 나는 그것을 잘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그리고 물론, 기도요청을 받은 사람 역시 그렇게 투명한 언어로 기도한다.
이 사람은 돈을 많이 벌고 싶어 합니다. 혹시 그것이 이 사람을 파괴시키지 않는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허락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렇게 허락해주시지 않더라도 꼭 필요한 정도를 공급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과정 속에서 이 사람이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점차 돈보다 하나님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더 깊게 알게되길 바랍니다.

여기서는,
돈을 많이 벌고 싶다는 것에 대해 쉽게 정죄하지 않으면서도,
그보다 더 소중한 것을 구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그리고 언어가 투명하다. 욕망을 종교적 언어로 채색하지 않는다.

이렇게 하면 신앙의 피상성을 많이 피할 수 있다.

리차드 포스터가 이야기했던 것 처럼,
피상성은 우리 시대의 비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