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70인역 vs. 히브리성경)

김근주 교수님의 특강 예레미야에서 보면…

70인역의 예레미야 본문과 히브리 성경의 예레미야 본문이 많이 다르다고 한다.

히브리 성경은, 지금 우리 한글이나 영어 성경과 같이 멸망->회복의 흐름으로 되어 있는데,
70인역에서는 이 본문 배열이 많이 달라져서 멸망->회복->멸망의 흐름으로 되어 있다고.

히브리 성경은 주로 팔레스타인 지방에 남아있는 사람들이 봤던 본문이고,
70인역은 주로 이집트를 비롯해 이방지역에 흩어진 디아스포라들이 봤던 본문이라고 한다.
(쿰란 공동체에서 나온 예레미야도 70인역의 배열을 따른다고)

왜 그럴까?
팔레스타인 중심의 유대인들은, 그 땅의 회복에 대한 약속이 중요했으므로, 끝을 희망의 회복으로 맺었고,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이제 팔레스타인 중심의 시대가 끝났으므로 다시 그 땅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 그리고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것을 고대한다는 약속이 중요했으므로, 끝을 이전 시대의 완벽한 몰락으로 끝냈다고 한다.

이거 정말 아주 많이 흥미로운 분석이다.
배열상으로는 히브리성경이 더 오래 되었을 것이라고 여기는 주장이 더 많고,
그런데 70인역이 분량이 더 짧아서, 아마도 내용상 70인역이 더 먼저 쓰여졌을 것이라는 주장이 많다고.

우리 어머니

우리 어머니는 9월 29일 생이시다.
미국이 오늘은 28일 이지만, 한국은 거의 29일이 다 되었다. (as of 5am PDT)

금년 어머니 생신은 희수(喜壽)이다.
멀리서 어머니 희수에 가보지도 못하는 아들이다.

내가 만난 최초의 신앙인이었고,
내가 고등학교를 가면서 집을 떠날때 어머니는 어머니가 읽으시던 성경책을 내게 주셨다.

어릴때부터 나는 어머니를 닮았다는 얘기를 많이 듣고 자랐다.
어릴때 친가쪽에 명절때 가더라도 어른들이 전라도 사투리로 ‘너는 엄마 탁했구나’고 하셨다.
나는 그게 기분 좋았다. ^^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내가 어머니를 정말 잘 닮은 것 같지 않다.

첫째로,
내가 아는 한 가장 지혜로운 분이시다.
자신의 생각, 감정을 앞세우는 것 보다 상황을 더 긍정적으로 만드는 방법을 아주 효율적이고 효과적으로 취하신다.

잠언 31장의 ‘현숙한 여인’을 처음 읽었을때 나는 그게 우리 어머니의 모습과 매우 비슷하다고 생각했었다.
그 후에 그 잠언에 나오는 ‘현숙한 여인’이 사실은 ‘지혜’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알게 되었을때…
우리 어머니의 지혜로움이 생각났었다.
나는 참 그렇게 지혜롭지 못한데…

둘째로,
어떤 사람이 100만큼의 능력이 있을때 100만큼 혹은 150만큼 힘을 내어서 살고자 하면 무리가 따르고 힘이 달리고 부작용이 생기곤 한다. (내가 그렇다.)
그런데 어머니는 100만큼의 능력이 있을때 많이 절제하여 50만큼만 나타내며 사시는 것 같은 느낌을 늘 받는다. 그래서 어머니에게서는 안정감이 늘 느껴진다.

셋째로,
어머니는 자신을 변호하려 애를 쓰지 않으신다.
때로는 억울한 것이나 부당한 것을 그냥 삼키신다.
이것 역시 나와는 참 다르다. 나는 늘 억울한 것을 참지 못한다. 나를 어떻게든 변호하려고 방방 뛰면서 무리를 한다.

넷째로,
어머니는 함께 있는 사람을 더 돋보이게 하는 것을 탁월하게 잘 하신다.
그래서 처음에는 어머니와 함께 있는 사람이 참 괜찮구나… 이렇게 생각하게 되는데…
시간이 지나고 나면…
아… 사실은 어머니가 괜찮은 사람이었구나… 하는걸 한참 후에 깨닫게 되곤 한다.
반면에 나는 함께 있는 사람들이 너무 자주 좌절한다. 내가 돋보이고 함께 있는 사람들이 죽곤 한다.

나보고 ‘엄마 탁했다’고 했던 친가 어르신들의 이야기는 내가 50이 거의 다 되어가면서 보니…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오히려 어머니는 내가 극복해야하는 내 결정적 character flaw를 다 반대로 장점으로 가지고 계신 분인 것 같다.

어머니 아들로 50년 가까이 살았는데, 어머니로부터 이 좋은 것들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것이군…

어머니가… 죄송한 마음으로 보고싶다.

가슴이 터질 것 같은 예레미야의 말씀들

5:30-31
“지금 이 나라에서는, 놀랍고도 끔찍스러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예언자들은 거짓으로 예언을 하며,
제사장들은 거짓 예언자들이 시키는 대로 다스리며,
나의 백성은 이것을 좋아하니,
마지막 때에 너희가 어떻게 하려느냐?”

6:10-11
제가 말하고 경고한들 누가 제 말을 듣겠습니까?
그들은 귀가 막혀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전하면 그들은 저를 비웃기만 합니다.
말씀 듣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들을 향하신 주님의 진노가
제 속에서도 부글부글 끓고 있어서,
제가 더 이상 주님의 진노를
품고 있을 수도 없습니다.

6:13-14
예언자와 제사장까지도 모두 한결같이 백성을 속였다.
백성이 상처를 입어 앓고 있을 때에,
‘괜찮다! 괜찮다!’ 하고 말하지만,
괜찮기는 어디가 괜찮으냐?

=====

이런 말씀을 읽으면서 어찌 많이 애통해하고 가슴을 치지 않을수 있을까!
한편 두렵기도 하고, 한편 아프기도 하고, 한편 안타깝기도 해서… 정말 그 말씀의 무게가 온 몸을 누르는것 같은데…

예레미야의 경고가 정말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내가 지금 이 시대에 보고있는 기독교의 대부분은 성경의 여호와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닌게 아닐까 싶어진다.
물론 거짓 기독교인에는 나도 포함되어 있고.

이 말씀을 접하며 그렇게 가슴이 눌리는 누군가와 함께 좀 많이 많이 이야기해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젊은 시절 괜찮았던 어떤 목사님의 타락

함께 KOSTA를 섬기던 사람들과… 한국의 목사님 한분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어쩌다 그 목사님이 그렇게 망가졌을까 하는 것을 가지고 이야기를 나눈적이 있었다.

젊은 시절 꽤 건강했던 분이고,
중년까지도 존경을 많이 받았던 분이신데…
(사실 지금도 그분을 존경하는 분들이 많이 계시기도 하시고….)
도대체 왜 저렇게 되셨을까.

각종 분석들과 가설들을 이야기해 보았는데,
적어도 가장 타당한 분석 가운데 하나는 이것이었다.

“그분이 강남이 한참 개발되던 당시 강남에 가서 목회를 시작했다.”

결국 강남의 풍요라는 환경 속에 스스로가 갖혀버려서 보수화, 그리고 심지어는 세속화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아직도 그분이 하시는 말씀이나 설교를 들으면 참 insight가 있는 말씀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강남에 부가 쏟아져들어오는 과정과 함께 목회/교회를 성장시킨 경험은 그분에게 있어서 심각한 영적 장애, 아니… 영적인 역작용의 요소가 되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풍요, 돈, 성공 등등의 시대 정신 속에서,
그것에 정말 치열하게 저항하지 않고도 건강하게 살아남은 예를 나는 아직 본적이 없다.
풍요, 돈, 성공의 분위기에서는, 정말 절박하고도 치열하게 그것에 맞서야 한다.

이런 이야기는 사람들에게 상처가 될 거야…
조금 더 기다리면서 천천히 하자…
적당한 선에서의 타협점을 찾자…

나는, 그 context가 그리 강력하지 않은 세상 속에서는 그렇게 좀 여유를 부려볼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의 한국과 미국 사회에서… 특히 실리콘 밸리와 같은 곳에서는…
그런 느긋함과 타협은 결국 회복할 수 없는 타락으로 연결된다고 생각한다.

시대정신은 복음을 잡아먹으려 맹수와 같이 달려드는데…
그 앞에서 ‘일상의 긍정’을 이야기하며 피크닉이나 하고 있을 수는 없다.

Self-satisfaction?

창조, 죄, 구원, 십자가, 하나님의 사랑, 은혜, 하나님 나라…

흔히 복음의 기초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이런 이야기들을 주말에 한참 하고 돌아왔다.

나는 매우 자주, 이 이야기를 듣고, 듣고 또 돋고 싶어한다.
어떤땐 정말 한 3일 밤낮, 누가 내게 이 복음의 이야기를 게속 해 주었으면 하고 바랄때가 있다.

이번에 다녀온 수련회와 같이 이런 복음의 핵심 이야기를 하게될때면,
나는 내 설교를 내가 듣게 된다.

내가 설교를 잘 하고 못하도를 떠나서,
그저 이 이야기를 또 듣고, 또 생각하는 것 자체가 내겐 참 말로 다 할 수 없는 ‘만족’을 준다.

예전에는 교회에서 이런 이야기를 별로 듣지 못해서,
혼자서 아무도 없는 곳에서 차 안에서 내 스스로에게 설교를 하기도 했었다.
아마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미친놈이라고 했을 거다.

그런데 어쩌랴.
이 이야기를 자꾸만 듣고 싶기는 하고, 아무도 얘기해 주는 사람은 없고.
게다가 나는 또 이 이야기를 어떻게든 하고 싶기도 하고. -.-;

적어도 내가 혼자서 생각하기엔 학생들이 잘 들어 주었다.
그중 어떤 학생들의 반응은 매우 인상적이기도 했다.

그런데 내가 하는 고민은 이것이다.
내가 어떤 설교를 함으로써 내가 일종의 만족감을 느끼는 것이 건강한 것일까?
혹시 왜곡된 형태의 나르시시즘은 아닐까?

어쨌든 설교를 준비하면서도 많이 울컥울컥 했고,
그 설교들을 하면서도 많이 그랬다.
돌아오는 비행기 속에서는 너무 많이 피곤해서 주로 비몽사몽이긴 했지만. ^^
그 비행기 안에서도 그 울컥하는 여운이 계속 남아 있었다.

부디 그저 내가 이 귀한 학생들 만난 이 일이,
학생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면 좋으련만…

수양회

내일부터는 동부의 어느 학생들 모임에서 하는 수양회에 참석한다.
나는 대부분 이렇게 수양회에 초청을 받아서 message를 해야하는 경우에는 늘 거의 비슷한 format과 내용을 준비한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다.

그건 정말 아주 가장 기본적인 복음에 대한 이야기이다.
하나님, 인간, 죄, 구원, 하나님 나라, 은혜, 사랑, 소망, 믿음, 헌신…

이번에는 4번 설교를 하게 되는데,
이번에도 그렇게 준비했다.

이렇게 다른 곳에서도 이미 했던 내용의 설교를 또 다시 해야 할때에는,
contents를 준비하는 일은 당연히 그리 어렵지 않게 되는데…
그 내용을 온전히 내 마음에 담는 작업이 아주 힘들다.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
이렇게 기독교의 기본적인 내용을 설교라는 세팅에서 전달하고자 할 때에는,
Make truth real 이 아주 중요하다.
다시 말하면, 진리를 information으로서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진리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실제’로 다가오도록 이야기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더욱 그 내용이 온전히 내 마음에 담기는 것이 참 중요하다.

시간이 날때는 그것을 위해서 더 기도도 많이 하고, 금식을 하기도 하고… 그러겠지만,
시간이 많지 않아서 (혹은 내가 게을러서) 그러지 못했다.

그렇지만 감사한 것은 적어도 4번의 설교 내용의 많은 부분이 마음에 많이 담기고 있다.
하나님께서 많이 힘을 좀 써주시길 바랄 뿐이다.

(내일과 주말동안에는 blog가 잠깐 쉽니다. ^^ 동부 다녀와서 월요일에 다시 쓰겠습니다.)

Too Serious!

국민학교에 다닐때, 나는 ‘웃기는 놈’이었다. ^^

나는 국민학교를 다니면서 전학을 자그마치 3번이나 했다. 총 4개의 국민학교를 다녔다.

그렇게 학교를 옮겨다닐때마다 나는 ‘장기자랑’시간에 나가서 뱀 장사 흉내를 내거나 지금으로 말하자면 stand-up 코메디 같은걸 하면서 애들을 웃겼다.
잘 아는 노래를 우습게 가사를 바꾸어 부르기도 했다.
그러면서 애들과 쉽게 친해질 수 있었다.
애들과 친해지고 싶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고, 그렇게 애들이 즐거워하는걸 보는걸 좋아했던 것 같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나는 그렇게 웃기는 놈이 아니게 되었다.
언제부터 그랬는지는 정확하게 pin-point 할 수는 없는데, 아마도 20대 후반정도가 그 transition이었던 것 같다.

만일 10살때의 내가 이 블로그를 쓰고 있다면,
아마 여기에는 여러가지 농담과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가득 차 있지 않을까 싶다. ^^

가끔 생각해보기에…
심각하게 해결할 수 있는 일들이 분명 있긴 한데,
어떤땐 그렇게 심각하게 다루지 말고 그저 농담하며 웃으며 장난을 치며 해결할 수 있는 것들도 있는 것 같다.

내가 최근에 살아오면서…
나름대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슈에 대해서,
웃으면서 그것을 맞이한적이 언제였던가….

(거봐, 이 글도 결국 too serious 하게 되었지)

휴가

사실 휴가라는게 시간 내는게 그렇게 쉽지도 않고 여러가지 여유가 없기도 하다.
게다가 뭘 엄청나게 하고 싶은 게 있는 것도 아니고, 유일하게 뭔가를 하고 싶다면 가족과 함께 가서 가족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게 제일 크다고나 할까.

그래서 내가 진짜 하고 싶은대로, 쉬고 싶은대로 뭔가를 하는 휴가를 즐기는건 네게 꼭 필요한 것 같지도 않고, 그럴 여유도 없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런데…
내가 지난 주말에 여러가지를 생각해 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꽤 휴가를 많이 하고 있는 것이었다! ^^

가만히 생각해보니,
내가 누리는 휴가중 아주 큰 부분은, 출장을 갈때 왔다갈때 긴 시간 비행기를 타는 것과,
조금 여유를 내어서 반나절 호텔에서 쉬거나,
심지어는 공항에서 잠깐 그냥 빈둥빈둥 하는 것이다.
그리고 출장을 갈때 가능하면 일정을 여유롭게 잡아서, 오기 전 하루는 뭔가 buffer를 두기도 하는데… 그러면 그건 꽤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게되기도 한다.

음.. 웬 찌질하고 형편없는 휴가냐 싶겠지만서두…
생각해보니 내게는 그게 꽤 relax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 같다.
그리고 경험해보지 않은 공항이나 도시나 항공기나 라운지 등등을 경험해보는게 언제부터인가 내 ‘비밀스러운 취미(?)’가 되었다.
그래서 어떤땐 layover가 긴 connecting flight을 일부러 택하기도 한다.

비행기 안에서는 영화도 보고, 책도 읽고, podcast도 듣고… 그야말로 relax를 왕창 할 수 있다.
어쩌다 business class를 타게되면 더더욱 그렇고.
(나는 비행기에서는 절.대.로. wifi를 켜지 않고 완전히 땡땡이 치는걸 철칙으로 삼고 있다. ㅎㅎ)
나야 Star alliance gold 이니까, 공항에 좀 일찍 도착하면 star alliance의 모든 항공사의 라운지 중에서 제일 좋은 것을 골라서 들어가면 된다.

왜 이런 생각을 갑자기 하느냐고?
이번 주말에 동부에 비행기를 타고 왕복을 해야하고,
아무래도 유럽쪽에 조만간 한번 다녀와야 할 것 같다.

일종의 작은 ‘휴가’를 즐길 수 있는 chance가 생기는 셈이다.

금년엔 United는 1K 에 도달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

야고보서가 궁금하다

우리 교회에서는 요즘 야고보서를 공부하고 있다.
야고보서는 내가 따로 공부해본 적이 없었고, 야고보서에 왕창 감동을 받았다거나 그런 적이 없어서… 특별한 감흥이 없었다.

그런데 지난주에 이리저리 인터넷을 찾아가며 나름대로 공부를 좀 하던 도중에 재미있는 것을 찾아냈다.
꽤 많은 곳에서 야고보서와 외경인 집회서의 유사성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나는 당연히 집회서를 열심히 읽어본 적이 없으므로,
주말에 아주 완전 속독 비슷하게 후다닥~ 훑어 보았다. 자그마치 51장이나!

자세히 살펴보지 않았으므로 당연히 빈 구석이 많을 테지만…
내가 얼핏 받은 느낌은 집회서와 야고보서가 정말 비슷한 점이 많다는 것이다.

지혜를 구하는 것이라던가, 시련에 대한 것이라던가, 재물에 대한 것이라던가,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다던가… 말을 조심하라는 것 등등.

집회서는 BC 180년 정도에 벤시라에 의해 쓰여진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많이 읽었다고 한다.

그래서 내가 궁금한 것은 이것이다.
그렇게 집회서에 대해서 많이들 사람들이 알고 있었을텐데…
그렇게 내용이 겹치는 것을 왜 굳이 야고보는 기록을 했을까.
집회서의 summary일까?

내 현재의 가설(?)은,
야고보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님 이전의 집회서와 예수님 이후의 야고보서를 잘 비교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오셨기 때문에, (야고보와 같이) 히브리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을 사람들은,
당연히 벤시라가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더 종말론적으로 세상을 보고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역사의 마지막에 일어날 일이 이제는 예수님으로인해서 이미 일어난것으로 생각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생각하는 것은 그래서…
야고보서를 더 종말론적인 관점에서 읽는 것이 어떨까… 그런 생각을 좀 하고 있다.

야고보서를 그래서 윤리적으로 읽기 보다는, 종말론적으로 읽는 것이 어떨까 싶은 것이다.

밀린 이메일들

내가 일을 하는 방식 가운데 하나는,
중요하게 follow-up 해야하는 일들의 경우에 그 관련 email thread 전체를 모두 unread 상태로 해 놓는 것이다. 또 어떤 것들은 to-do list를 만들어서 그게 적당한 시간에 내게 다시 remind 가 되도록 해 놓기도 한다. (나는 google keep을 그런 용도로 많이 사용한다.)

그리고 그 일이 처리되고 나서야 email을 read 상태로 바꾸어 놓는다.
그리고 아주 특별한 일이 아니면 주말이 지나기 전에는 처리안된 일들을 거의 다 금요일 저녁까지 끝내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물론 모든 일들이 그렇게 주말을 맞이하면서 깔끔하게 정리되고 처리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당연히 unread email들이 내 email inbox에 밀려있게 된다.

나는 그렇게 밀린 일들, 밀린 to-do list에 대하여 거의 병적인 집착이 있다.
그래서 그걸 처리하지 않고 주말을 맞으면 정말 무지 찜찜하다.

주말이 되기 전에는 하다못해 그 밀린 일의 email thread에 내가 마지막으로 뭔가 이야기를 함으로써 공을 저쪽 court로 넘겨야 주말을 맞이하면서 마음이 편하다. (생각해보면 완전 이기적이다. 그렇게 하면 그 이메일을 받는 사람들은 자기 court에 공이 넘어온게 되는 건데 ㅎㅎ)

to-do list에 대한 거의 병적인 관리, email communication 관리에 대한 엄청난 집착은 사실 나를 매우 effective 한 사람으로 만들어준다.
왜냐하면 해야하는 일을 미루거나 delay시키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 일이 아주 여러 사람이 함께 하는 일인 경우에도, 나 때문에 delay되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런데 두어달 전부터,
의도적으로 주말이 가기 전에 email thread와 to-do list에 끝내지 않은 일들을 남겨두기 시작했다.

예전 같으면 토요일 오전에 달라붙어서라도 그 주에 꼭 처리해버려야 직성이 풀리는 일들도…
주말 내내 그냥 내 to-do list에 묵혀두기도 한다.

as of now, 내 이메일과 to-do list에는 일반적으로라면 주말이 가기 전에 끝내야 하는 item이 10개 남아있다. 그리고 오늘을 지내고 나면 아마도 그 list가 더 늘어날수도 있다.

예전같으면 찜찜해서 그걸 끝내지 어떻게든 처리하지 않고든 견딜 수 없었는데…
(그리고 지금도 그게 사실 주말 동안에도 찜찜하기도 한데… ^^)
그걸 그냥 덮어두고 주말에 쉬는 일을 요즘은 더 많이 하고 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이게 게으름인지, 아니면 내 자신에게 조금 더 breathing room을 주는 relax인지 좀 확실하지 않긴하다. 당분간은 그래도 이렇게 강제로 to-do list에 item 남기기를 더 해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