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을 긍정하는 기독교 (7)

성공/번영하고자 하는 욕망을 어떻게 볼 것인가?
나는 성공하고자 하는 욕망을 가치중립적으로 보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몇가지의 이유가 있다.

– 성공의 동기가 결국은 강한 자기애(self-love)에 기인하고 있을 가능성이 거의 100%이다.
– 어그러진 세상 속에서의 성공은 그 성공의 그림자로 인해 어떤 사람들에게 고통이 되기 십상이다.
– 성공/자기성취는 많은 경우 그 사람의 궁극적 관심을 하나님으로부터 빼앗아버린다. ‘하나님 없이도 사는 것’이 가능해지게 된다고 착각하게 되어버린다.

물론,
돈을 버는 것, 성공을 하는 것 자체를 모두 죄악시하는 것은 옳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성공이나 번영을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것 역시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성공과 번영과 명예등을 향한 욕망은 그것을 쉽게 가치중립적이라고 여기기 대단히 어렵다고 본다.

기독교 내의 건강한 영성신학자/영성가 들이 성공/번영/명예 등등에 대해 경고하고 또 경고했던 것을 생각해보면 더더욱 그렇다.

우리 시대에 돈은 가치중립적이지 않다. 돈 자체가 갖는 어떤 영적 power가 있다…
이렇게 리차드 포스터가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성공/자기성취/번영/명예 등은 정말 개인과 공동체가 지극히 조심하면서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시대, 내가 살고 있는 삶의 context에서는 더더욱 그렇다고 생각한다.

욕망을 긍정하는 기독교 (6)

“내가 무엇을 하고 싶다”는 것을 참기 힘들어 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 같다.

가볍게는, 무엇을 먹고 싶다 (craving)을 참는 것을 힘들어 하기도 하지만,
조금 더 심각하게는, 내가 무엇이 되고 싶다, 어떤 일을 하고 싶다, 어떤 lifestyle을 가지고 싶다는 것을 포기하는 것을 참 어려워한다.

가만 생각해보면,
내 부모님 세대는, 자신이 무엇을 이루겠다는 꿈이나 자신이 무엇을 누리겠다는 생각보다는 훨씬 더 우리 가족을 위해 무엇을 하겠다는 생각으로 사셨던 것 같고,
자아실현보다는 생존을 위해 사셨던 것 같다.

그러나 요즘은 생존을 위해 살기보다는 자아실현을 위해 사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그래서,
예전 같으면 흔히 직장생활 이라는 것을 그릴때, 힘들고 아니꼽고 사표쓰고 싶지만 가족을 위해 참으면서 열심히 일한다는 식의 그림이 많이 있었던 것 같은데…
요즘은 내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에 지금의 것을 포기하고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것을 추구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생존하지 못해 안타까워하고 힘들어하기 보다는 자기의 자시 자신에 대한 욕망을 충분히 채우지 못해 힘들어 하는 경우가 더 많아 보인다.

왜 그럴까.
아마도 생존의 문제가 어느정도 해결이 되니까 ‘자아실현, 자기 만족’에의 욕구가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되기 때문이겠지.

나는 자신의 욕망을 포기해가며 가족이나 공동체를 위해 헌신했던 우리 부모님 세대의 특성과,
내 꿈, 내 욕망을 채우는 것을 가장 소중한 가치로 여기는 요즘 젊은 세대의 특성,
이 두가지를 모두 다 내 안에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정말 내가 젊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주 묻기도 하고, 더 많이 묻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어떻게 네 자신의 욕망에 대한 확신을 그렇게 강하게 가질 수 있느냐는 것이다.

나는 정말 내 스스로의 판단을 신뢰하는 것이 어렵다.
특히 그 이해 당사자가 나 자신일때는 더더욱 그렇다.
왜냐하면 나는 내가 얼마나 이기적인 사람인가 하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어떤 결정을 할때면, 처절하게 이기적인 모습으로 하기가 너무 쉽고,
그런 이기적인 결정은 왜곡되고 비뚤어진 내 죄성에서 비롯되기 너무 쉽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특히 내 이해에 관련된 어떤 결정을 하려 할때는,
정말 내 의도가 얼마나 선한 것인가를 아주 여러번 점검하려 노력하고,
그렇게 한 후에도 내 판단이 충분히 선하다는 것을 정말 믿기 어려워서 힘들어 하곤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 자신의 욕망에 따라 쉽게 어떤 결정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참 이해하는 것이 어렵다.

욕망을 긍정하는 기독교 (5)

죄와 싸우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아주 큰 사명이자 특권이다.
사회적 죄와 싸울뿐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죄와도 계속해서 싸워나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가지 형태로 내 안에 들어있는 왜곡된 욕망을 잘 발견해나가는 일이 중요하다.

불편한 confrontation을 피하지 말아야 하고,
그 과정을 통해서 죄와, 왜곡된 욕망과 계속해서 싸워야한다.
그러기 위해서 왜곡된 욕망의 민낮을 보는 것이 중요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왜곡된 욕망이 폐혜를 피하기 위해서 욕망 자체를 대폭 용납하고 허용하고자 하는 생각에 동의하기 어렵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자아실현과 성화 중 어떤 것이 더 우선되는 개념일까?

나는 이 두가지가 거의 비교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당연히 성화이다.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것 같이 그 백성이 하나님을 닮은 백성이 되는것, 그리고 세상에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심을 드러내는 것이 그 부르심의 핵심이다.

그런데 현대 교회에서,
지나치게 자아실현을 높은 가치로 두면서 죄와 싸우는 성화의 소중함을 잃어버리고 있다는게 내 생각이다.
(아마 다음주에는 이와 관련된 다소 controversial한 이야기를 더 던져볼 생각이다. 아마 어떤 분들은 심지어 다소 upset할 수 있을 만한 ^^)

욕망을 긍정하는 기독교 (4)

그런데 교회에서는 흔히…

종교적 언어로 사탕발림된 욕망을 긍정해준다.

돈 많이 벌고 싶다는 욕망을, 주님의 비전을 찾는다는 언어로 표현하는 사람이 있을때,
목사나 교회의 자도자들은 그 사람이 정말 주님의 비전을 찾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그리고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들 역시, 속으로는 그래서 그 사람이 돈을 많이 벌게 해달라는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다만,
기도를 부탁하는 사람이나, 기도를 해주는 사람이나 모두,
왜곡된 종교적 언어로만 소통할 뿐,
솔직한 욕망의 언어로는 소통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쪽팔리니까. -.-;

이건 정말 좀 역겨운 일이다.

가장 바람직한 모델은 다음과 같다.
기도를 부탁하는 사람이 자신의 욕망을 욕망의 언어로 표현하되, 그 욕망을 넘어서는 거룩한 바람을 함께 이야기하는 것이다.
가령, 나는 돈을 많이 벌고 싶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이것이 내게 허락되지 않더라도, 나는 그것을 잘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그리고 물론, 기도요청을 받은 사람 역시 그렇게 투명한 언어로 기도한다.
이 사람은 돈을 많이 벌고 싶어 합니다. 혹시 그것이 이 사람을 파괴시키지 않는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허락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렇게 허락해주시지 않더라도 꼭 필요한 정도를 공급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과정 속에서 이 사람이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점차 돈보다 하나님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더 깊게 알게되길 바랍니다.

여기서는,
돈을 많이 벌고 싶다는 것에 대해 쉽게 정죄하지 않으면서도,
그보다 더 소중한 것을 구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그리고 언어가 투명하다. 욕망을 종교적 언어로 채색하지 않는다.

이렇게 하면 신앙의 피상성을 많이 피할 수 있다.

리차드 포스터가 이야기했던 것 처럼,
피상성은 우리 시대의 비극이다.

욕망을 긍정하는 기독교 (3)

그런의미에서,
이런 왜곡된 욕망의 긍정은 좀 투명해질 필요가 있다.

뽀대나는 직장에 다니고 싶은 욕망이 있을때,
그것을 내세우는 것이 뭔가 쑥쓰러워서…
주님의 뜻을 찾는다… 라던가,
비전을 주시옵소서… 기도 한다거나…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나는 돈을 많이 벌고 싶다.
나는 무슨 무슨 회사에 가서 남들이 부러워하는 시선을 받고 싶다.
나는 얼굴이 예쁜 남편/아내를 맞아 결혼하고 싶다.

이렇게 솔직하게 욕망은 욕망을 제대로 설명하는 언어로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마치 숭고한 목표라도 되는양 사탕발림을 하는 것은 상당히 역겹다. -.-;

그러기 위해서는,
욕망 자체를 추구하는 것을 너무 쉽게 정죄하지 말아야 한다.
누가 돈을 많이 벌고 싶어 한다면,
그냥 그 사람에게 돈을 많이 벌고 싶어하는 욕구가 있다는 것을 자신과 주변 사람이 그대로 보고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그 욕망 자체를 모두 긍정하라는 뜻을 결코 아니다.
요히려 여러가지 욕망들 가운데 대부분은 왜곡되고 어그러진 욕망이고, 따라서 죄의 component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명확히 해야한다.

다만,
그 욕망이 우리 모두에게 있고,
우리 모두가 다 그렇게 더럽고 오염된 욕망의 바다에 빠져있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해야 한다.

욕망을 긍정하는 기독교 (2)

교회에서 흔히 ‘기도제목을 나눈다’는 표현을 한다.
난 이 표현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

기도를 요청한다, 내가 기도하는 내용을 나눈다 등등으로 표현을 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표현일텐데 말이다.

하여간, 각설하고…

그렇게 교회에서 ‘기도제목을 나눈’ 리스트를 쭉 보면…
결국 자신이 처해있는 상황이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기에 적절하지 않을 경우, 그 상황이 바뀌어서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고 이룰 수 있기를 바라는 것들이다.

병이 낫기를 바란다거나,
좋은 학교에 진학을 하거나,
좋은 직장을 잡거나,
결혼을 하거나,
아이가 잘 크거나….

아, 물론,
교회에 오래 다닌 사람들은 이걸 그냥 내가 이걸 하고 싶다… 이렇게 저렴하게 표현하지 않는다.

주님을 뜻을 알기 원한다거나,
비전을 세우고 싶다거나,
인도하심을 구한다거나…

이런 대단히 종교적인 언어를 사용해서 자신의 욕망을 포장한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기독교의 본질이 그런 것일까?
내 욕망을 추구하여 이루는 것일까?
그걸 좀 적나라하게 추구하는 신앙을 오히려 기복신앙이다, 번영신학이다 해서 비난하고 비웃지 않는가.

현대 기독교인들에게,
그들의 욕망은 대단한 것이고,
그 욕망 자체를 종교적 언어로 정당화해서 사용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다.

설교를 통해서나 기도를 통해서, 곡조로 부르는 찬양을 통해서 모두 욕망의 추구, 욕망의 성취는 반복해서 강조되고, 조장되고, 설명된다.

욕망을 긍정하는 기독교 (1)

몇년전에 ‘욕망해도 괜찮아’ 라는 책을 읽었다.
아주 재미있었다.
재미있을 뿐 아니라, 내게 아주 깊이 공명이 있었다.
당연히 그 책은 내게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김두식 교수가 그 책을 썼던 이유를 적어도 내가 이해하는대로 정리하자면…

욕망을 규범적 자세로 억누르기만하면 그것이 왜곡되기 때문에, 그 욕망에 대해서 투명하고 정직해지자

이 정도가 아닐까 싶다.
나는 완전 동의한다.

그 책에서 구체적으로 들어있는 어떤 예(anecdote)들은 내가 일부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 것들이 있었지만, 그런 의미에서 나는 그 책에서 김두식 교수가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을 아주 많이 공감하고, 지지하기도 한다.

그러나,
욕망에 대해서 정직해지자는 것과,
그 욕망을 그대로 추구하자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그리고, 김두식 교수도 모든 욕망을 그 자체로 모두 긍정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왜 갑자기 이 책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앞으로 몇번에 걸쳐서 이 욕망과 기독교에 대한 이야기를 써보고 싶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그 이야기를 써 가면서, 내 관점이 그저 딱딱하고 고루한 18세기 청교도 윤리적 관점은 아니라는 이야기를 먼저 하고 싶기 때문이다. ^^

하나님 나라 신학 진영에 딴지 걸어보기 (11)

나는 하나님 나라 신학을 매우 좋아한다.
그리고 그것이 성경 전체를 꿰뚫는 어쩌면 가장 확실하고도 중요한 theme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나 스스로를 하나님나라 신학 진영에 속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주장하는 것은 이것이다.

내 말이 옳다고 해서, 저쪽의 말이 반드시 틀릴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 신학이 매우 convincing하고 relavant하다고 해서,
십자가 신학이 그것의 subset이라고 너무 쉽게 이야기하지도 말고,
십자가 신학이 치우쳤다고 치부해버리지도 말고,
내 주장이 저쪽보다 우월하다고 너무 쉽게 자만하지 말고…

겸손과 사랑의 마음을 가져보자는 것이다.

내 말이 옳다고 해서, 저쪽의 말이 반드시 틀릴 필요는 없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이다.

하나님 나라 신학 진영에 딴지 걸어보기 (10)

앞에서 조금 언급한 것과 다소 겹칠 수는 있겠으나…

나는 기독론이 결여된 하나님 나라 신학은 자칫 비인격적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죄를 극복해야할 현상으로 본다거나,
하나님을 의의 화신정도로 이해한다거나,
예수께서 하신 일이 통치를 선포하는 것이라는 강조에서는 기독교의 인격성이 빠지기 쉽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신다는 것,
예수께서 마지막까지도 그 사랑을 놓지 않고 고통을 감내하셨다는 것,
내 안에 있는 죄를 개인적으로 아파하고 그것과 개인적으로 싸우는 것에 대한 중요성,
하나님 나라의 가치에 헌신하는 것보다는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는 것으로서의 헌신…
등등이 자칫 하나님 나라 신학 진영에서 결여된 것 같아 보일때가 많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 신학 진영의 어떤 사람들의 신앙에는,
따뜻함이 없는 것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