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 신학 진영에 딴지 걸어보기 (9)

내가 생각하기에,
하나님 나라 신학은 기본적으로 종말론에 중심을 둔 신학 전개이다.

별로 학문적으로 깊이 고민해보지 않은 (그리고 나는 학문적으로 깊이 고민해볼 역량이 없기도 하다 ^^) 내가 보기에…
현대 하나님 나라 신학이 꽤 많이 갖추어진 형태로 정리된 것은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 이전에 주로 자유주의진영과 진보진영쪽에서 많은 이야기가 있었지만.

그리고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은 사실상 종말론에 아주 방점을 두고 있는 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자유주의 진영에서 예수가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다고 할때도, 예수를 Apocalyiptic prophet이나 개혁자 정도로 그리고 있는 경우도 많이 있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결국 하나님나라 신학의 무게중심은 종말론에 있다는 것이다.

반면, 십자가 신학의 무게중심은 당연히 기독론에 있다.

하나님 나라 신학이 십자가 신학을 포함하는 더 큰 개념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자칫,
종말론이 기독론을 포함한다고 생각하게 되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 하나님나라 신학 진영에 있는 어떤 사람들은,
기독론에 대한 강조가 이루어져야하는 상황 속에서… 무리하게 종말론적 관점을 끄집어 내어 억지로 해석/적용을 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한다.

하나님 나라 신학 진영에 딴지 걸어보기 (8)

어린이 동화를 들려주고 그것의 교훈을 이야기해보라고 하면 대부분 쉽게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게 단편소설이 되면 그것보다 살짝 더 복잡해지고, 장편소설은 그것보다 더 어려워진다.

어떤 narrative를 한가지의 theme으로 설명해내는 일은, 여러가지 유익이 있다.
그러나 어떤 narrative를 한가지 theme으로 설명하면 자칫 더 복잡하고 다양한 것을 지나치게 축소시킬 수 있는 위험이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면 환원주의(reductionism)의 함정에 빠질 수 있다.

큰 narrative를 간단한 main theme으로 정리 -> main theme을 가지고 다시 큰 narrative를 해석 -> 어쩌면 main theme이 다 담아낼 수 없었던 detail 자체를 main theme으로 무리하게 억지로 해석하는 잘못을 범함.

성경을 어떤 하나의 theme으로 정리하려고 할때는 이런 환원주의적 오류를 범하지 않는지 주의하는 것이 필요하다.
사실 하나님 나라 신학 진영에서는, 십자가 신학 진영을 향해서 지나치게 환원주의적이라는 비판을 해왔다.
(그리고 나는 그 비판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하나님나라 신학 진영에서, 자신의 신학적 tool을 가지고 똑같은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잘 살펴볼필요가 있지는 않을까.

우리의 theme은, 너희의 theme보다 더 큰 것을 이야기하고 있고, 우리가 더 큰 개념이다라고 너무 쉽게 이야기하는 것은 자칫 이성적 교만함은 아닐까.

하나님 나라 신학 진영에 딴지 걸어보기 (7)

어떤 것을 깨닫는데에는 때로 어떤 break-through가 필요한 경우가 있다.

가령, 1+1=2 라는 것을 이해하는데에는 그런 break-through가 그리 필요하지 않다.
그것은 그 ‘진리’가 여러 layer로 되어 있거나 기술되어 있는 것 이상의 다른 초월성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모님의 사랑을 깨닫는 것은 때로 일차적인 수준에서의 이해를 넘어서는 그 무엇이 필요한것 같이 느껴진다.
(때로는 그것을 ‘철이든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

마찬가지로,
죄에 대한 이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이해 등등은 흔히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 이상의 더 크고 깊은 깨달음이 필요한것 같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머리에 있는 것이 가슴으로 내려오는 것이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는 것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십자가 신학에는 그런 측면이 매우 명확해 보인다.
정말 깊이 있게 죄를 인식하고 깨닫는 것은 일차적인 논리적 이해만으로 충분하지 않은 것 같다. 어느 순간 정말 그 죄가 나와 세상 전체의 문제라를 것을 깨닫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반면,
하나님나라 신학은 조금 이해되는 방법이 다른것 같이 느껴진다.
예전에는 들어보지 못한 방식의 성경해석, 예전에는 생각해보지 못했던 방식의 신학방식이 새로 information으로 들어오면…
그것을 넘어서는 extra layer의 깨달음의 필요가 훨씬 적거나 없어 보인다.

그래서,
십자가 신학은… 논리 자체는 단순한 반면 그것을 넘어서는 초월적 깨달음의 영역이 대단히 크고,
하나님나라 신학은… 논리 자체가 다소 더 복잡한 반면, 일단 이해가 되고 나면 그 이상의 초월적 깨달음의 영역이 그리 크지 않은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십자가 신학 진영이 그런 의미에서, 신앙의 초월성을 도외시하거나 그 접근에 대해 약할 수 있겠다.
십자가 신학(만)을 이야기하는 어떤 사람의 신앙 속에서,
때로 초월성이 현저하게 결여된 것 같아 보이는 것 같이 느껴지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이상한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하나님 나라 신학 진영에 딴지 걸어보기 (6)

내 개인의 이야기를 좀 하면…

나는 ‘은혜’라는 개념에 완전히 사로잡혀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성경을 읽다보니 그 은혜라는 개념이 정말 너무나도 놀랍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은혜에 의해서 내 죄가 용서받고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만큼 감사했다.
그 회심의 기간 동안 정말 매일 한두컵씩의 분량으로 눈물을 쏟아냈다.
길을 걷다가도 하나님의 은혜가 기가막히게 감사해서 울곤 했다.

그러나 또한 나는 에베소서를 읽으면서 ‘하나님의 새로운 사회’에 대한 비전이 참 신선하고 놀랍게 다가왔다.
세상 속에서의 새로운 질서가 선언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종과 상전, 부모와 자식, 부부관계등의 언급은 이제 십자가 은혜로 구원얻은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새로운 삶의 방식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런데,
나는 87학번이다. 내가 대학교 1학년때는 전두환이 대통령이었다. 대학교 1학년때 87민주화 운동이 있었다.
그러니 당연히 사회정의에 대해 여러가지 생각과 고민이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에베소서에서 기술되는 ‘하나님의 새로운 사회’는 사회 정의에 대한 내 질문과 목마름에 시원한 냉수와 같은 역할을 했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아주 엉성한 아이디어를 조금 갖게된 것이었다.

실제로 내가 ‘하나님 나라’라는 개념을 구체적으로 접하고 배웠던 것은 그로부터 다시 몇년 후의 일이었다.

내가 그렇게 ‘하나님 나라’ 이야기를 접했을때, 그것은 내개 대단히 혁명적이고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었다.
다만, 내가 버벅거리고 잘 설명하지 못하던 그 무엇을 정말 속 시원하게 잘 설명했구나…
뭐 그런 것이었다.

그런데 만일…
그 순서가 내게 바뀌었다고 하자.
하나님의 통치라는 개념이 내게 먼저 설명되었고…
나중에 십자가, 죄사함, 보혈 등등이 나중에 설명되었다고 생각해보자.

그렇게 했어도 여전히 나는 하나님의 통치라는 첫번째 개념을 접했을때 큰 충격과 감사에 쉽싸이고,
십자가라는 두번째 개념을 접했을때…아… 참 속 시원한 설명이구나… 그렇게 느꼈을까?

아닐것 같다.

하나님의 통치라는 것은 포괄적이고 중요한 개념이지만,
하나님의 통치라는 것이 십가가의 내용을 완전히 설명해내지 못한다.

하나님 나라 신학 진영에 딴지 걸어보기 (5)

Tim Keller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한적이 있다. (정확한 wording은 잘 기억이 안남 -.-;)

“하나님 나라”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제 하나님의 통치가 임했다. 이 movement에 join해라! 라는 식의 접근을 한다는 것이다.
새로운 시대, 새로운 order, 새로운 통치..
좋은데, 그건 결국 어떻게 어떻게 살아라, 어떻게 행해라 라고 이야기하는 moral code를 제공해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

그 하나님 나라 신학을 들으면서…
나를 묶였던 사슬이 끊어졌고, 나는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나는 이제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라는 식의 고백이 나오기 어렵다는 것이다.

Tim Keller는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나라 신학이 자칫 새로운 형태의 율법주의 (new legalism)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나는 그 경고에 깊이 공감한다.

하나님 나라 신학 진영에 딴지 걸어보기 (4)

어떤 사람들은 이야기한다.
예수님은 복음서에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 이야기를 주로 했는데,
바울은 서신서에서 주로 ‘십자가’를 이야기한다.
도대체 이걸 어떻게 reconcile 해야 하는가?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바울이 예수님의 생애를 가지고 기독교를 ‘발명했다’고까지 이야기하기도 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꽤 괜찮은 설명을 N. T Wright이 한 적이 있다.
바울이 하나님 나라에 대해 그렇게 많이 언급하지 않은 것은, 적어도 그 당시 독자들의 context 안에서는 하나님 나라라는 context가 너무나도 자명하게 pre-supposition으로 share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학문적으로 이게 얼마나 적확한 argument일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나는 신앙적으로 꽤 괜찮은 설명이라고 본다.

다시 말하면,
그 당시 1세기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 나라라는 개념은 마치 일제시대의 해방/독립이나 80년대 한국에서 민주화 등과 같이 그저 아주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익숙한 개념이었다는 것이다.
다만 바울이 설명하고자 했던 것은 그렇게 다수의 사람들에게 익숙한 하나님의 통치 / 하나님의 나라 라는 개념이 어떻게 예수님과 연관이 되는지를 설명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으로부터 이런 생각을 해 볼수 있다.

하나님나라 없이 십자가를 이야기하는 것은, 배경설명 없이 소설의 결론부를 이야기해주는 것과 같고,
십자가없이 하나님나라를 이야기하는 것은, 소설의 결론부 없이 배경설명만을 하는 것은 아닐까.

나는 딱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바울이 십자가신학과 기독론을 그렇게 이야기했어야 했던 이유가 하나님나라에 대한 이야기만으로 충붆지 않았던 것이었다면… 우리도 하나님 나라 narrative가 모든 것을 포함한다고 주장하는 것을 다시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하나님 나라 신학 진영에 딴지 걸어보기 (3)

십자가 신학을 아주 제대로 받아들인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위험 가운데 하나는 그 사람들에게 하나님나라 신학이 매우 약하거나 다소 왜곡된 형태로 들어가 있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 나라 신학을 아주 제대로 받아들인 사람들이 가질 수 위험 가운데 하나는 그 사람들에게서 십자가 신학 자체가 거의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예들을 주변에서 발견한다!

흔히 하나님 나라 신학 진영에서는, 하나님 나라 신학이 십자가 신학을 포함하는 더 큰 개념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나도 그 이야기에 어느정도 동의한다.
그러나 현상적으로 보면 하나님 나라 신학은 십자가 신학을 충분히 포용하고 포함하고 있지 못하는 것 같아 보인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 신학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 신학에서 빠져서는 안되는 매우 중요한 관점인 십자가를 이야기하는 일에 성실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들이 복음의 모든 면들을 다 커버하고 터치할 필요는 없다. 특히 신학자들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러나 현실을 살아가는 신앙인이라면 정말 흔들리지 말고 붙들어야 하는 소망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다각도로 이해하고 생각하고 곱씹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일부 하나님 나라 신학 진영이 십자가 신학을 ‘옛날 것’으로 치부해버리는 것에는 매우 걱정이 크다.

하나님 나라 신학 진영에 딴지 걸어보기 (2)

적어도 내가 판단하기에 이 ‘하나님 나라 신학’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건강해 보이는 그룹의 사람들을 가만히 보면…
이들에게는 꽤 강력한 회심의 체험이 있어보이는 경우가 많다.

가령, N. T. Wright은 자신이 아주 어렸을때 예수님의 사랑이 너무 크다는 것이 갑자기 깨달아져서 혼자서 울었다고 이야기한다.
한국의 신학자그룹 중에서 하나님 나라 이야기를 많이 하는 김회권 교수님이라든지, 김근주 교수님이라든지… 이런분들 모두 개인적으로 아주 찐하고도 강력한 개인적 회심의 경험이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이 사람들의 강력한 회심의 경험은, 적어도 내가 판단하기에는, “하나님 나라”라는 거대담론에 근거한 것이라기 보다는… 십자가,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고난받으심 등과 같이 “십자가 신학”진영의 main theme들이다.

십자가 신학을 이야기하는 (적어도 범-복음주의권의) 사람들은, 매우 전통적인 십자가 신학에 바탕을 둔 회심 경험을 가지고 있고, 그것이 충분히 자신에게 잘 녹아진 사람들인데,
그것이 그 사람들에게는 물고기에게 있어서 물과 같이 너무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어서..
그걸 깊게 설명하지 않고 휙~ 지나가버리는 우를 범할 수 있다.

그리고,
일부 젊은 복음주의권의 사역자들에게서 그런 경향을 보기도 한다.

하나님 나라 신학 진영에 딴지 걸어보기 (1)

나는 “하나님 나라” 가 신구약 성경 전체를 꿰뚫는 가장 강력하고도 확실한 theme이라고 믿는다.
나는 어디에 가든지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는 강의도 많이 한다.
내가 성경을 읽는 방식을 아주 아주 “하나님나라 관점”이다.

그런데 왜 갑자기 하나님 나라 신학에 딴지를 걸어보고자 하느냐?

최근 몇년동안 적어도 내가 아는 대로라면,
소위 “하나님 나라 신학”을 지지하는 주로 젊은 복음주의권의 사람들과
“십자가 신학”을 지지하는 주로 나이든 복음주의권 사람들 사이에 일종의 ‘충돌’이 있어왔다.
이것은 내가 계속 가까이 혹은 멀리 관계하고 있어왔던 KOSTA에서도 이슈였다.

십자가 신학 진영에서는 하나님나라 신학 진영에는 십자가, 죄사함, 구령의 열정 등이 부족하다고 이야기한다.
반면 하나님나라 신학 진영에서는 십자가 신학 진영을 향해 복음의 통전성이 부족하다고 질타한다.

나는 굳이 두개중 하나를 택하라면 하나님나라 신학 진영쪽에 더 가깝다.
그리고 이 블로그를 읽어보면 하나님나라 신학의 관점에서 전통적 십자가 신학을 비판하는 듯한 어조의 글들도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번에는 작정하고 지금 현재의 하나님나라 신학 진영의 입장들에 한번 토를 달아보려고 한다.
거창하게 시작하지만 몇번에 걸쳐서 이 글을 쓸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몇개 쓰다보면 더이상 바닥이 드러나게 될 수도 있겠다.

그래도 한번 도전~

Martyn Lloyd-Jones 설교

얼마전 Martyn Lloyd-Jones를 feed 하는 podcast를 발견한 후에,
계속 그 podcast에 올라오는 MLJ의 설교를 듣고 있다.

MLJ는 내 신앙에 아주 깊은 영향을 끼친 분이시다.
그분의 생각과 신앙에 지금의 내가 모두 동의한다고 보기는 어렵긴 하지만…
그러나 그분이 제시하는 ‘신앙의 기준’은 정말 내게 크고도 큰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한주에 한편 정도… MLJ의 설교를 듣고 있는데…
그 설교가 정말 지루하게 느껴진다. -.-;

아니, 다른 설교도 아니고 Martyn Lloyd-Jones의 설교가!

이건 내가 심각하게 어떤 질병에 걸려있는 sign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좀 든다.
뭔가 특단의 대책이 필요한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