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로서 사는 이야기를 해 주세요

아주 자주는 아니지만,
그래도 심심치않게 여기저기 교회나 기독교 모임 등에서 ‘speech’를 해 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어떤땐 그것이 설교의 세팅일때도 있고, 어떤땐 강의, 또 어떤땐 간증의 형태이기도 하다.

그런데 대개…
목사님들이 내게 그런 부탁을 할때는 대개 이렇게 얘기를 한다.

“평신도 교인들이 더 많이 공감할 수 있도록 평신도로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는지 하는 이야기를 해 주세요. 그런 적용과 삶의 영역에 대해서는 목회자보다는 평신도가 이야기하는게 더 좋더라구요”

그러니까,
내가 전문가로서, 직장인으로서, 평신도로서, 크리스찬 identity를 가지고 어떻게 사는지 하는 이야기를 해달라는 건데…

나는 솔직히 그런 부탁을 받으면 대부분 거절한다.
나는 그렇게 부탁하는 분의 접근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간증은 100% 다 거절한다. 왜냐하면 내 스토리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렇게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나름대로 확신하기 때문이다. ^^

그 목사님이 그렇게 부탁을 할때 그분의 깔려있는 생각은 이렇다.

신앙의 본질, 기본, 핵심 이런 것들은 내가 다 커버한다. 그건 괜찮다. 그런데 그걸 가지고 세상에서 어떻게 사는가 하는 것은 내가 다루기 어렵다. 그러니 그건 평신도인 네가 와서 좀 나를 도와주라.

….

나는 내가 사는 삶에 대해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복음의 기초를 다 배워서 세상에서 적용하며 살지 않는다.
나는 세상을 살면서 복음이 무엇인지를 배운다.

그래서,
목회자가 자기가 복음의 중요한 내용은 다 커버하고 있으니, 네가 와서 적용 부분을 맡아라 라고 이야기하는 것에 동의하기 어렵다.

아니,
오히려 그렇게 이야기하는 목회자들 중에서 그 정말 복음의 핵심과 기초를 제대로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그렇게 많이 만나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대부분 어느 수양회 설교를 해달라고 부탁을 받거나,
시리즈 강의를 해 달라고 부탁을 받으면…
더 basic을 다루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동부의 어느 대학생 중심의 모임 수양회 설교를 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4번 설교.
이제 한주 남짓 남았다.
이번에도 완전 베이직 설교들을 할 생각이다.

예레미야의 눈물을 다시 보다

예레미야를 처음 제대로 읽었을 때 나는 엄청난 충격에 빠졌었다. 그거 벌써 20년도 넘은 일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교회에 다녔고, 그 때 나름대로 회심경험도 있었는데…
예레미야를 읽으면서 만나는 복음은 내게 대단히 낮선 것이었다.

아니, 성경이 이런 하나님을 그리고 이런 하나님의 사람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면,
내가 이해하고 있던 기독교는 정말 말로 다 할 수 없이 shallow한 것이었구나…

예레이야의 눈물을 보며 나도 많이 울었고, 이해되지 않아도 받아들일 수 있는 신비를 경험할 수도 있었다.

그 말씀을 읽으면서 가슴이 뜨거워져서 어쩔 줄 몰랐는데…
그건 가슴이 뜨거워져서 불같이 헌신하자… 그런게 아니었고,
그야말로 내 뼈가 녹는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그 뜨거움으로 인해 많이 울게 되는.

가끔은 성경을 읽으면서,
아! 이 말씀이 살아 있구나! 그렇게 느낄 때가 있는데…
예레미야서는 그때 그 말씀을 읽고 곱씹는 한달여의 기간동안 내내 그랬다.

그리고… 나는 동료 기독교인들이 보기에 “더 유별난” 사람이 되었다.
내 마음 속에 있는 그 불덩어리를 설명하려고 하면, 내가 그것을 다 설명하기도 전에, 그건 그냥 네가 그런거야… 라는 말을 듣기 일쑤였고,
내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신앙의 고민의 10% 정도만을 말로 표현하여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점점 정말 마음에 담고 있는 이야기는 할 수 없게 되었고, 나는 그저 큰 빙산의 일각만을 언어라는 제한된 수단으로 표현하는 답답함 안에 갖히게 되었다.
내 신앙을 누군가에게 이해시키는 것이 점점 더 힘들게 되었고, 결국 그것은 깊은 신앙적 외로움을 가져오기도 하였다.

한번이라도 좀 누군가에게 이 이야기를 제대로 설명해 볼 수 있다면 참 좋으련만… 싶은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별로 관심이 없다.
목회자, 신학생, 교회 리더들은 대부분 정말 관심이 없고… (오히려 자신이 이해하고 있는 기존의 frame안에서 내 고민 전체를 5분만에 정리해버리고 말고… 그러면 거기서부터 더 이상 깊은 대화는 없다.)
아주 가끔은 아예 신앙이 어린 사람들에게서 그런 진지한 고민과 궁금함을 만난다.

다시 예레이야서를 열며,
그 예레미야의 눈물을 다시 만나보고 싶다.

예레미야라면 내 영적 외로움의 이야기를 들어줄 것 같다…

약한 개를 키우며

우리집에서 키우고 있는 개는, 여러가지로 참 많이 약하다.
우리 집에 들어오기 전에 쉘터에 있었는데… 참 나름대로 힘든 삶을 살았던 것 같다.

아래 이가 시원치 않고, 많이 빠졌다.
귀도 거의 잘 들리지 않는 것 같고, 눈도 좀 시원찮다.
엉덩이쪽을 만지려고만 하면 민감해지고 긴장하고 심지어는 공격적이 되기도 한다.
남자 어른들을 보면 경계하고 무서워한다.
혀는 가운데가 찢어져 있다. 아마 쓰레기통 등에서 뭔가를 먹으려고 하다가 찢어진 것 같다.

게다가 입도 짧아서 먹는 것도 까다롭다.

예전에는 dry 사료만 먹였는데, 그걸 잘 먹지 않아서 최근에는 깡통에 들어있는 고기 요리(?)를 사서 함께 먹인다.

그런데 문제는 얘가 이가 없어서, 먹는게 어려가지로 어렵다.
뭔가를 먹을땐 혀로 핥아서 그걸 입으로 가져가서 먹는데, 다진 고기가 뭉쳐져 있으면 혀로 핥아서 잘 올라오질 않으므로 그걸 먹으려하다가 포기하고 만다.

지난주에는 내가 보다못해 손으로 조금씩 떼서 먹여주었다.
그랬더니 큰 깡통 하나를 다 그 자리에서 먹었다.
이렇게 잘 먹는데, 혼자서 그걸 먹는게 어려워서 잘 못 먹었던 거다.

그저께인가에는,
내가 또 다진 고기 깡통을 따서 밥그릇에 놓았더니,
핥아서 먹으려고 시도를 하다가는 포기하고 내 옆에 와서 앉아 나를 쳐다본다.
또 먹여달라는 거지.

그래서 손으로 또 개 밥을 조금씩 떼어서 입에 넣어 먹여주니 또 잘 먹는다.
이런 빌빌한 개에게 혼자 앉아서 개 밥을 손으로 떠서 먹여주고 있는 내 모습이 스스로도 놀랍다.

빌빌하고 연약한 개를 키우면서,
그 연약함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여러가지를 생각해보려 하지만…
연약함을 쉽게 멸시하는 못된 생각에 오염되어있는 나는 그게 쉽지 않다.

욕심이 나는 item들

어떤 사람들은 내가 별로 물질 욕심이 없는 것으로 착각한다. ^^
(심지어는 스스로 나를 잘 안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 조차도)

그런데,
사실 나는 그런 욕심이 무지 심하다. -.-;
단지, 그렇게 팍팍 돈 쓰는게 겁나서 못살 뿐.

최근 내가 이런거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item 몇개.

  • 우선, travel용 backpack: eBags professional weekender
    여행이 많은 나는, 하루이틀짜리 짧은 여행을 할때 백팩 하나만 가지고 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때가 있었는데…
    어쩌면 이게 그 해답이 될수 있겠다는 생각이.
    그게 너무 크려나… 그냥 laptop용 backpack이 더 좋을까?
    eBags의 이 가방들이 꽤 실용적으로 보이긴 하는데 좀 비싸서, amazon에서 뒤져보니 50불 남짓한 수준에서 거의 비슷한 용도의 가방이 가능해 보인다.
    다만 지금 사용하고 있는 가방들이 아직은 조금 더 쓸 수 있을 것 같아 욕심은 나지만 아마도 이걸 질러버리는 일은 없을 듯 하다.여행을 할때엔, 진짜 가방이 중요하다. ^^
    내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rollaboard도 좀더 기능적이고 가벼운 것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때도 있지만, 그건 지금 쓰고 있는게 너무 멀쩡해서 pass. ^^ 지금 쓰고 있는 건 Ross에서 70불인가에 산 것. 아마 Ross 같은 데가 아니고 그냥 멀쩡한 가게에서 샀으면 그것도 원래는 100불 넘는 것일 것 같은데.
  • 집에서 일할때 쓸 ultra wide screen monitor: LG 34″ ultra-wide curved monitor
    나는 일을 할때 monitor 크기가 매우 중요한 사람이다.
    대개 chrome의 tab이 열몇개씩 열려있을 때가 많고, 게다가 회사 컴퓨터를 쓸 때엔 chrome의 identity도 회사것과 내것으로 나누어서 열어놓기 때문에 각기 다른 chrome을 두개 열어놓고 쓸때가 많다.
    여러개의 window를 열어놓고 비교해가며 일하는 것이 많기 때문에, screen size가 크면 productivity가 많이 높아진다.
    그래서 큰 ultrawide monitor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때가 있는데,
    이게 또 워낙 비싸니까, QHD 24inch monitor 두개가 있으면 그게 더 적게 먹힐 것 같기도 하다. (내 회사 office에는 그렇게 되어 있다.)
    나는 주로 external manufacturing partner와 일을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회사의 internal meeting이 없으면 집에서 일을 해도 될때가 많다. 그런데 그럴때도 꾸역꾸역 회사에 가는 큰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런 monitor setup이 회사 office에는 되어 있기 때문.
    아마도 이건 내가 좀 꾸역꾸역 나름대로 절약해서 돈도 모으고 해서… craigs list 같은 데서 중고 모니터를 두대 사는 형식으로 추진해 볼 것 같다. 그렇게 잘 하면 위의 fancy한 모니터 1000불 가까이 들이지 않고, 300불 안쪽에서 dual monitor setup이 가능할수도…
  • 내 개인 컴퓨터 : 아마도 windows, such as Lenovo X1 yoga
    나는 회사에서 준 laptop 이외에 내 computer가 따로 없다.
    따라서 집에 와서 회사일 아닌 것으로 회사 컴퓨터를 쓸때가 많이 있다. ^^
    요즘은 워낙 많은 documentation들이 cloud에 있으므로 회사 컴퓨터를 쓰더라도 거기에 저장하는 일은 사실 거의 없긴 한데,
    가끔은 내 laptop에 음악도 저장해놓고 듣고, 내 옛날 document 같은 것도 바로바로 뽑아 보고, 때로는 내가 원하는 software도 마음대로 install해서 쓸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때가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집에오면 회사 컴퓨터 자체를 딱 닫아놓고 회사 이메일을 보지 않아야 하는데… 회사 컴퓨터로 일하다보면 그게 잘 안된다.
    SSD 500G 정도 달고 (혹은 그것보다 더 크면 좋고), 8G memory 정도.
    Lenovo X1 yoga를 그런 configuration으로 만들어보니 거의 2000불 가까운 수준까지 올라간다. -.-;
    아마 이걸 사는 일은 없을 듯. ^^

좋은 생각, 나쁜 생각

좋은 생각을 많이 하면 스스로 좋은 사람이라고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억울한 사람을 보면서 분노를 품는 스스로를 바라보면서, 자신이 얼마나 의로운가 하는 것에 감탄하는 것이다.
이게 어떤 특정 사람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다.
자신이 좋은 생각을 하거나, 심지어 그 좋은 생각을 다른 사람과 나눈다거나 (목회자와 같이), 그 좋은 생각을 가르치거나 (스승과 같이)… 그러면 정말 자신이 좋은 사람이라고 다들 생각한다.

나쁜 생각을 많이 하는 사람들이 보통 스스로를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다.
나쁜 생각을 하는 모습을 얼른 숨겨버리고 그것은 자신의 일부가 아니라고 분리해버리는 작업을 금방 하기 때문이다.
이것 역시 거의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다.

그런데…
적어도 내가 이해하고 있는 기독교의 인간 이해를 보면,
좋은 생각을 한다고 해서 좋은 사람이 아니고,
나쁜 생각을 하면 나쁜 사람이다.

흔히 사람들이 자신에대해 평가하는 것과 정 반대이다.

나는…
좋은 생각을 참 많이 하고 산다.
그러나 나쁜 생각도 진짜 많이 하고 산다.
그래서 나는 나쁜 사람이다.
죄인이다.

나는 은혜가 정.말. 필요하다.

하나님의 표정

실의에 빠져 있거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가끔 내게 조언을 구하는 이상한 족속의 인간들이 있다.
나 같은 사람에게 조언을 구하다니… 그래봐야 좋은 말 못 들을 텐데…

그럴때 나는 다음의 질문을 잘 던진다.

“그래서, 지금 너를 바라보고 있는 하나님의 표정은 어떠니?”

이렇게 질문했을때 다음의 두 부류의 사람들을 자주 만나게 된다.

첫번째는 얼버무리거나 이상한 답을 하는 것이다. 이 경우에는 아예 그 상황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 자체를 하지 않는 경우이다.
기도도 하고, (그것도 열심히)… 기도 부탁도 맨날 하는데, 막상 자신은 그 순간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는 것이다.

두번째는 그렇게 질문을 했을때 우는 사람들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런 사람들은 이렇게 질문을 할 때 까지 막상 하나님을 바라보는 일을 하지 않다가, 그 질문을 받는 순간 하나님을 얼핏 바라보게 되고, 그 하나님 앞에서 그저 서럽고 죄송해서 우는 사람들이다.

내가 어떻게 이런 질문을 생각하게 되었느냐고?
이 질문은 바로, 내가 어려움을 빠져 있을때 내 스스로에게 던지는 아주 핵심적인 질문이다.
나도 역시 그 질문에 어버어버 제대로 답을 못하거나, 그저 그 질문을 던지는 순간 눈물을 주르륵 흘릴때가 많다.

믿음의 위험성

제목이 좀 이상하긴 한데…
나 역시도 신앙인으로서, ‘믿음’이라는 것을 곰곰히 생각해보면…
너무나도 자주 내가 믿음의 대상을 믿는 것이 아니라 믿음 자체를 믿고 있는 것 같다고 느낀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나는 성경의 하나님을 믿는다. 그분이 계시다는 것과, 성경이 그분이 어떤 분이심을 드러내고 있다고 믿는다.
내가 믿는 성경에 기술에 따르면,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시고, 오래 참으시고, 공평과 정의를 원하시는 분이시다.

그런데,
그 하나님께서 정말 그런 하나님이시라는 믿음에 큰 영향을 끼칠만한 일이 생겼다고 하자.
가령 세월호 사건과 같은 대형 참사나,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난다거나, 개인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된다거나 하는…

그러면 그런 일에 대해서 하는 반응은 대개는 이렇다.
“믿자. 그 하나님을 믿자. 믿음 없음을 도와주시옵소서. 그 믿음으로 나아가자. 믿음으로 붙들자.”

음…
그래. 사실 그렇다. 그럴때 믿음은 정말 중요하다.
그런데, 위에서 하고 있는 모습은, 그 믿음의 대상이 어떠하더라도 별로 상관이 없다.
그냥 그 믿음의 대상이 돈이나 권력이나 아니면 그 외에 다른 신이라 하더라도… ‘그저 믿자’고 다짐하고 결심하는 기독교인들과 다르지 않다.

문제는 그 믿음의 대상이 어떤 분인가 하는 것을 아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그런 믿음의 위기가 왔을때, 내가 믿고 있는 믿음을 믿지 말고, 그 믿음의 대상을 믿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어떤 이들은,
시련과 어려움을 지나면서 믿음에 심한 손상을 입는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시련과 어려움을 지나면서 믿음에 큰 진보를 이룬다.

많은 경우,
시련과 어려움을 통해 믿음에 손상을 입는 사람들은 믿음을 믿으려 하는 부류이고,
시련과 어려움을 통해 믿음에 진보를 얻는 사람들은 믿음의 대상에 집중하는 부류인 것 같다.

사람들을 만나는 일

1.
나를 대충대충 아는 사람들은 내가 매우 활동적이고 외향적(extrovert)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사실 나는 대단히 내향적(introvert)이다.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내게는 대단히 많은 에너지를 쓰는 일이다.

2.
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는 일을 회사에서 하고 있다.
세계의 여러 회사들의 많은 사람들과 많이 만나고, conference call을 한다.
그래서 회사 다니면서 일하는게 더 힘들고 지친다고 느낄때가 많은 것 같기도 하다.
내가 현재 연락을 하면서 여러가지 project를 진행하고 있는 회사가 대충 20개쯤 되고, 그 회사들을 미국, 영국, 한국, 일본, 독일, 스위스에 있다.
그리고 새로운 회사들과 자꾸만 만나는 일들을 계속 해야한다.
그 일들은 내가 따로 record를 찾아보지 않더라도 그 일의 진행상황들을 머리 속에 늘 그리고 있어야 하고, 그 사람들과는 수시로 연락하여 만나야 한다.
계속해서 진행상황을 점검해가며 접촉하여 일하는 사람들의 수가 전 세계에 대략 30~40명 수준은 되는 것 같다. 일이 막 몰릴땐 그 수가 100명 이상 늘어나기도 한다. 물론 우리 회사 내부의 사람들 20명 정도는 매주 이야기를 해야하고.

3.
여러 경로로 job inquiry를 묻는 사람들도 늘 많다.
내가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들도 있고, 간접적으로 소개를 받는 경우도 있고, 아예 모르는 사람이 linkedin등을 통해서 연락을 해와서 Verily에 job 있느냐는 식으로 묻는 이메일등을 많이 받는다.
많을때는 한주에 10개 정도는 그런 inquiry를 받는다.
사실 안그래도 바쁜데 그 이메일들에 다 답을 해주고, 만나자고 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하는 일들이 쉽지는 않다. 그래도 가능하면 최대한 열심히 하려고 노력한다.
특히 정말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만나면 내가 많이 마음이 쓰여서 여러가지로 신경을 써주게 된다. 오지랖 넓게…

4.
어떻게든 알던 전 직장의 사람들이나, 예전에 함께 일하던 사람들 중에서 일종의 ‘friendship’을 만든 경우도 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가끔 점심이나 한번 먹자고 연락을 해온다.
사람 만나는 것이 내겐 에너지를 많이 쓰는 일이어서, 그런 사람들 만나는 것도 때로는 너무 많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적어도 한달에 한두번은 그런 연락들이 꼭 오곤 한다.

5.
예전에 교회에서 함께 지냈던 사람들이라던가, 성경공부를 함께 했던 사람들, 특히 내가 마음을 써서 ‘키웠던’ 사람들이 찾아오는 경우도 있다.
어떤 경우엔 오랜만에 만나서 반갑게 깊은 대화를 하기도 하고, 어떤땐 많이 변해있는 모습에 실망을 하기도 한다.
몇년만에 연락을 해 와서는, 어떻게 해도 좋으니 한시간만이라도 차한번 마시자고 애기해오면… 그런 만남을 거절하기는 참 쉽지 않다.

6.
그리고는, 내가 어떻게든 꼭 만나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내가 만나서 이야기하면서 그 사람들이 당장 처해있는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든 도움을 주고싶은 경우이다.
함께 성경공부를 하기도하고, 말씀 묵상한 것을 나누기도 하고, 그냥 잡담을 하기도 하고, 그냥 힘들어하는 얘기를 한참 듣기만 할때도 있다.

7.
그 외에도 여러가지 경로로 연락을 해서 도움을 청하기도 하고, 만나자고 요청을 하기도 하고, 조언을 구하기도 하고, 긴 debate을 걸어오는 경우도 있다. ^^
이 블로그를 통해서 그렇게 만나는 분들도 꽤 있다.
이 역시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 해서 그 분들과의 대화를 잘 해보고자 노력하곤 한다.

8.
사람 만나는 일이 힘이 많이 드는 사람으로서,
내 lifestyle이 내게 호의적이지 않다는 생각이 들때가 때때로 있다.
막상 내 얘기를 좀 할 수 있는 사람은 정말 없고, 나로부터 무엇인가를 얻으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것도 물론 참 감사하다. 내가 꼭 해야할 일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다.)

9.
나 같은 사람은,
정말 마음 잘 맞는 사람 소수와,
깊이 있는 대화를 한주에 한번 정도 나누면서… 나머지 시간엔 생각도 하고, 책도 읽고, 연구도 하고, 공부도 하고… 그러는게 좋은 스타일인 것 같다.
그렇지만 뭐 어떻게 세상을 내가 살고 싶은 대로만 살겠는가.
게다가 나는 내가 얻게된 여러가지 특권들을 어떤 형태로든 사람들에게 나누어야한다는 일종의 부채의식 같은 것에 늘 눌려있기도 하다. ^^

10.
Long weekend를 지내고 새로운 한주를 또 시작한다.
또 다시 무지하게 사람들을 만나는 한주이다.

하나님은 그 백성을 지켜주시는가

참 자주 갖는 질문이다.
과연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을 지켜주시는가.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이 주기도문의 기도는 어떻게 작동하는 것일까.

그 백성의 아픈 울부짖음,
회개의 탄식,
구원을 바라는 외침은 하나님께 어떻게 상달되는 걸까.

지난 KOSTA 주제를 묵상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보다는 하나님 나라의 미래성에 대한 강조를 많이 생각했었다.
이 땅을 살면서 마치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 것 같이 사는 나그네된 백성의 삶에 대해 많이 고민했었다.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데,
그 속에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해야하는 것에 대하 많이 생각해보려 노력했었다.
그 속에서 내가 나름대로 찾았던 일종의 keyword 가운데 하나는 피동성이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혼란스럽고 어렵다.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을 지켜주시는가.

(오늘 글이 너무 뜬금없이 두서없이 쓰여졌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을 듯 한데… 아마 며칠이 지나면 좀 더 자세히 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