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rdan Peterson의 회심

Jordan Peterson이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것이 어떤 이들에게는 꽤 큰 뉴스가 되었다.
Jordan Peterson은, 말하자면 ‘우파’ 혹은 ‘보수진영’의 이론가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 분이 결국 기독교인이 된 과정을 나름대로 복기해서 보면, 결국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가치 체계는 유대-기독교적 문화 전통을 제외하고는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으로 부터 출발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 후 개인적으로, 또 가족 구성원의 어려움을 겪으면서 일종의 ‘회심경험’을 하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다음은 Jordan Peterson이 공개적으로 그리스도인임을 이야기하는 영상 몇개를 모아놓은 것들.
과거에는 자신이 신을 믿는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꺼렸고, 그 대답에 대해 애매하게 피하면서 대답을 했는데, 이제는 눈물을 흘리면서 자신이 기독교인이라고 이야기한다.

지금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결국 서구세계의 사상적 문화적 유산에 영향을 받아 형성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는 식의 접근은 기독교계에서도 꽤 많이 이루어져왔던 것 같다.

영국의 작가 Tom Holland의 Dominion이라는 책 같은 것에서도, 기독교가 인권, 민주 등 현대 인류가 유익을 얻는 많은 것들이 결국 기독교로부터 왔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Tom Holland는 영국의 철학자 AC Grayling이 기독교가 새롭게 인류에게 제시한 새로운 사상적 innovation을 하나라도 제시해보라고 이야기했을때, 결혼제도, 자연과학의 발전, 모든 인류가 존엄하다는 생각 등이 모두 기독교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이야기했고, 무엇보다도 이 모든 것들이 universal truth로 받아들인 것 역시 기독교의 공헌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접근은 영국의 기독교 방송인 Premier 채널의 변증 프로그램인 Unbelievable에서 많이 다루어지는 접근이기도 하다.

Tom Wright도 이와 비슷한 접근으로 기독교를 변호하기도 했었고, Tim Keller도 역시 그랬다.

그래서 내가 하게되는 생각은 이것이다.
이런 접근이라면, 보주주의자들에게 있어 기독교는 매력적일수 밖에 없는 것 같다.
그렇다면 진보주의자들에게는?

Extra Nos

Extra Nos – outside of us

우리 밖에서 라고 번역할 수 있는 라틴어 문구이다.

도움이란, 밖에서 오는 것이다.
안에서 만들어 지는 것은 도움이 아니다.
안에서 만들어 질 수 있다면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 아닌 것이다.

도움이 밖에서 온다는 것은 결국 현재 상태에 대한 절망적 진단으로부터 이루어지는 것이다.

The help is coming from the outside.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길 기다리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일이 많이 없는 상태.
은혜의 빛이 갈라진 어두움을 뚫고 들어오게되는 것.

Advent를 맞이하는 생각

정치가 종교가 되어서는 안된다 (5)

내가 하고 있는 성경공부 그룹에서도, 이런 내용을 좀 많이 다루게 되었다.
나는 말하자면 약간 열을 내서,
정치적 성향과 기독교를 연관시키지 말라고 많이 이야기했다.
결국 그것은 폭력적이라고.
악에 대한 심판을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써 이루신 예수님의 방법과는 너무 다른 것이라고.

팀 켈러가 돌아가시기 몇달전에 했던 인터뷰가 있다.
1970-80년대 미국의 mainline denomination이 몰락했던 큰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 mainline denomination이 미국 민주당의 정치적 아젠다와 자신들을 동일시 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지금 미국의 evangelical denomination이 몰락하고 있는 큰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 evangelical church들이 미국 공화당의 정치적 아젠다와 자신들을 동일시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나는 깊이 깊이 공감하고 동의한다.

나는 정말 아주 오랬동안,
내가 복음주의자라는 것이 자랑스러웠고, 감사했다.

그러나 이제 나는 내가 복음주의자(evangelical)이라고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 복음주의라는 단어가 심하게 정치화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정치가 종교가 되어서는 안된다 (4)

정치는 대화와 타협이 매우 중요하게 작동하는 영역이다.
모두 자신의 뜻을 이룰수 없더라도 조금씩 양보해가며 타협점을 찾아서 일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 정치인들이 해야하는 일이다.

그러나 종교가된 정치에서는 그런 일이 용납되기 어렵다.
정치적 신념이 종교화 되었기 때문에 타협은 배교와 같이 여겨지게 된다.

양쪽 극단으로 나누어진 사람들이 서로를 잡아먹으려고 으르렁 거릴때,
결국 한표라도 더 받아서 내 뜻을 관철시키려는 정치 지지 집단의 바람으로 선거과정은 더 과열되고,
대화와 타협으로 일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51%의 다수가 소수의 뜻을 눌러버림으로써 일이 이루어지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대에 정치는,
나와 생각을 다르게 하는 사람들에게 내 뜻을 강제할 수 있는 합법적 폭력이 된다.

다시 말하면,
요즘의 정치는 폭력적 종교가 되어버렸다.

역사적으로…
폭력적 종교가 어떤 결과들을 가져왔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볼때,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정치가 종교가 되어서는 안된다 (3)

정치가 종교가 되어버리면서 나타나는 현상은 양극단화 (polarization)이다.
양 정치 진영에 있는 사람들이 열정적으로 자신의 정치집단을 지지하면서 반대 정치집단을 극단적으로 혐오하는 것이다.

정치인들은 그것을 부축이는 것이 더 자신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에,
대화하고 타협해서 함께 일을 만들어나가는 것에 집중하기 보다는,
더 대립하고, 더 선동하고, 더 혐오하는 것을 부축인다. 그리고 그들은 더 그렇게 행동하고 말한다.

그것으로 인해 정치는 더 양극화가 되고,
양쪽 정치집단을 종교적으로 따르는 사람들은 더 열성적인 종교인이 되어버린다.

계속되는 이런 positive feedback을 멈출 장치가 없을때,
정치의 종교화와 정치의 양극단화는 함께 매우 빠른 속도로 함께 극대화 되게 된다.

미국과 한국에서 매우 선명하게 보고 있는 현상이다.

정치가 종교가 되어서는 안된다 (2)

정말 지금 미국에서는, (한국도 그렇다.)
정치가 종교가 되어버렸다.

주일에 목사님이 설교에서 그 판별식을 잘 설명해주셨다.

영적인 패배와 함께 정치적인 성공을 거두는 것과, 영적인 승리와 함께 정치적인 패배를 하는 두가지 경우를 생각해 보았을때, 정치적인 성공을 포기하고 영적인 승리를 택하겠는가.

실제로 미국의 어떤 사람들은, 정치적인 승리를 위해서 자신의 신앙을 타협할 준비가 되어 있기도 하고, 이미 자신의 신앙을 타협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결국은 자신의 종교적 신념이 자신에게 가장 으뜸의 가르침 즉 종교(宗敎)가 되어버렸다는 말이다.

실제로 어떤 정파를 열정적으로 지지하는 어떤 기독교인이,
막상 주기도문이 무슨 내용인지 조차 모르더라는 말.
십계명을 학교에 계시하는 것으로 정치적인 투쟁을 벌이던 사람에게, 십계명의 내용을 물었더니 막상 그건 모르더라는 말.
이런식의 이야기들이 정치가 종교가 되어버린 현실을 잘 드러낸다.

내가 판단하기에 나이 40이상의 사람들에게있어서는 그래도 자신들이 믿고있는 종교와 새로 믿게된 정치라는 종교를 함께 따르고 있는 것 같아 보이는데,
더 젊은 사람들중 어떤 사람에게는 그저 유일한 종교가 정치가 되어버린 것 같아 보인다.

정치가 종교가 되어서는 안된다 (1)

이번 미국 대통령 선거 결과가 어떤 사람들에게는 기쁜 일이겠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절망, 패배, 좌절일 것이다.

특히 미국의 정치지형이 대단히 나누어져 있어서 (polarized) 서로를 잡아먹지 않고는 안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것이다.

우선,
어제 교회에서 들었던 설교가 참 좋았다.

이 시리즈의 글을 쓰기전에 우선 좋은 설교 한편

디모데 전서 1:7

그들은 율법교사가 되려고 하지만, 사실은 자기들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또는 무엇을 주장하고 있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디모데전서 1:7)

사변적으로 따지며 생각하고 가르치기만하고, 막상 그 말씀의 목적인 깨끗한 마음, 선한 양심, 거짓없는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을 비판하는 말이다.

한때 이 말씀을 읽으며 내가 아는 누구, 내가 어디서 본 누구에게 이 말씀을 열심히 적용했던 어리석었던 때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 말씀에서 숨이 턱 막힌다.
내가 무엇을 주장하고 있는지도 알 지 못하고 있는건데…

….

피상적으로 말씀의 깊이를 추구하기보다는,
내 인격의 깊이를 위한 말씀의 깊이를 추구하는 것이…. 최소한 지금의 내겐 정말 꼭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Your vote doesn’t count

  1. 이번 미국의 대통령 선거의 경우, 필라델피아에 살고 있는 사람의 1표와, 캘리포니아에 살고 있는 사람의 1표는 그 의미에서 차이가 매우 크다.
    캘리포니아에서는 누가 투표를 하느냐 마느냐로 크게 결과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지만, 필라델피아에 있는 사람의 표는 미국 전체 선거의 결과에 매우 큰 영향이 있기 때문이다.
  2. 또한,
    미국 사람은 미국 대통령선거에 투표를 할 수 있지만 다른 나라 사람은 그런 자격이 없다.
    그러나 미국 대통령의 영향은 미국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특히 한국과 같이 미국의 큰 영향 아래 있는 하나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러니 한국 사람들의 표는 미국 사람들의 표에 비해 현저하게 그 의미과 가치가 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3. 나 같이 미국에 살고 있는 한국 사람은, 여러가지로 투표할 자격이 제한된다.
    우선 미국에서는 전혀 투표할 자격이 없고,
    한국 선거에서도 대통령선거 같이 전국 선거만 참여할 수 있다.
    나는 현 거주지가 미국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지역구 국회의원 선거같은 것은 참여할 수 없다.
    나 같은 사람의 표는 그나마 더 의미와 가치가 낮은 것이다.
  4. 그러니 내가 미국의 대통령 선거에 대해 무슨 말을 하거나 걱정하거나 뭐 하든 그야말로 별 의미 없는 것이겠지만서도….
    이번 미국 선거는 정말 어느쪽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물론 한쪽 후보가 다른쪽 후보보다는 조금 더 마음에 들지 않긴 했지만.
    그러니… 뭐 이렇게 된거 이런 세상에서 한번 살아보는거지 뭐.

멍청함, 무능함, 은혜

대단히 무능하고 대단히 멍청한 어떤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이 험한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는 호의일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그 사람을 돌보아주고, 배려해주고, 격려해주고, 무엇보다도 포용해주어야 가능하다.

사람에 따라 얼마나 어떤 사람이 능력이 있는지, 똑똑한지 하는 것은 당연히 차이가 있다.
그러나 누구나 자신이 얼마나 멍청하고 얼마나 무능한가 하는 것을 느낄때가 당연히 있다.

어떤 사람은 그런 생각을 거의 하지 못하고 살기도 하고
(그 사람이 잘나서 그럴수도 있지만, 너무 못나서 그런 생각을 못하는 것일수도 있다.)
어떤 사람은 그런 생각을 조금 더 하면서 살기도 한다.

그렇게 한계에 도달할때,
육체적, 정신적, 감정적, 정서적, 물질적 한계에 도달할때,
결국 바라보게 되는 것은 은혜이다.

그 멍청함과 무능함에도 어떤 사람이 그 멍청함과 무능함에 의해 무너지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은,
은혜가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