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에 사람이 오지 않을 때

말씀에 사람이 다가오지 않을때,

말씀은 사람을 기다려야 하는가, 말씀이 사람에게 다가가야 하는가.

이건,

복음과 말씀의 상황화에 대한 질문이다.

나 역시도 이 문제로 계속 swing을 해왔다.

한때는,

사람들이 말씀에 다가오지 않는 이유뇬,

그들이 죄인이고, 말씀이 말씀답게 선포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을 했다가,

또 금방,

그 사람들이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기준을 낮추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어느 한쪽의 강한 주장에만 힘을 실어주기는 어렵다고 생각하고 있긴 하지만…

현실적으로 어떤 특정한 상황에서,

두가지 선택 가운데 하나를 해야할때는,

더 깊은 고민과 성찰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시편 1편

시편 1편을 보면, 순 거짓말이다. -.-;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고 오만한 자리에 않지 않고, 율법을 묵상하는 사람은,

하는 일 마다 잘 된단다.

그렇지만 악인은 바람에 흩날리는 겨와 같다고.

세상을 보면 그런가?

오히려 세상은 악인이 승리하지 않은가.

악인이 의인을 누르는 세상 아닌가.

순 거짓말…

그러나 또 한편 생각해보면,

시편 1편은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이 반복해서, 오랜 세월을 통해 애송했던 시 일테고,

이 사람들도 이게 거짓말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세상을 조금만이라도 안다면.

그.러.나.

악인의 죄를 따르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고,

오만한 자리에 앉지 않고,

율법을 묵상하면…

그런 삶의 자세를 취하면…

그런 사람이 되면…

이런 의인이 길이 사는 길이고, 악인의 길이 죽는 길이라는 것을 ‘보게’되는 것이 아닐까.

오랜 세월을 거쳐 이스라엘 사람들은,

시편 1편을 곱씹고 곱씹고 또 곱씹으며,

아.. 그래… 세상이 그렇게 악인이 승리하는 것 같아 보여도,

이렇게 눈이 열려 진리를 알게 되면… 그럼 이게 보이는 거구나…

그렇게 깨달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말 잘 듣는 사람들은 수장되고,

거짓된 어른/리더들은 자기 위치만을 생각하고,

돈을 벌기 위해 규칙을 어기는,

이런 더러운 세상 속에서도,

여전히 여호와께서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고, 선언하고, 예배하고…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지.

가슴 아픈, 너무나 가슴 아픈… (5)

마르슬라브 볼프는,

크로아티아에서 태어나서… 소위 ‘인종청소’가 이루어진 지역에서 자란 사람이다.

서로가 서로를 미워하고 죽이고 했던 그 상황에서 복음이란 무엇인가.

모두가 가해자이고 피해자인 상황에서 화해, 용서는 십자가와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 것인가.

이런 질문을 진지하게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볼프는,

결국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피해자의 아픔을 품는 것이기도 하지만, 가해자의 죄까지도 resolve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도대체 누가 선이고 악이라는 것을 구분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할정도로… 총체적으로 망가진 세상 속에서,

결국 그 사람들을 다시 구속해내고 회복해내고 화해하게 하는 것은,

십자가라는 것이다.

솔직히 개인적으로 참 마음에 들지 않는 십자가 해석이다.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런 approach 말고 다른 대안이 있을까?

나는 이런 도식을,

지금 이 상황에서 너무 성급하게 적용하는 것은 문제를 더 깊이 이해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인이라면, 

1. 이 상황에서 일어나는 내 안의 분노가 ‘공의로운’ 것이 아닐 가능성에 대해 열어두고,

2. 아픔을 당한 사람들을 향해 깊은 사랑과 관심을 보이고,

3. 이 아픔을 통해 드러난 ‘백성’들의 아픔과 눈물에 공감하며,

4. 깨어진 system이나 사람의 문제들을 잘 짚어내면서 그것이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되,

5. 재를 뒤집어 쓰고, 시대의 죄를 대표하는 사람으로써 회개하는 일들을 해야하지 않을까 싶다.

이것들은, 모두 중요한 덕목들이고,

이것들 가운데 한두가지만 했다고 해서 의인이 된 것 처럼 나대는 것은 결국 자신을 파괴시킨다고 생각한다.

이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어떤 특정한 집단이 거의 독접하다 시피 한 것 같아 보이기도 하고,

이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어디에서도 비슷한 voice를 듣기 어렵게 느껴지기도 한다.

처음 이 시리즈를 시작하면서 썼지만,

나는 이 사건에 대해 전문가적 시각을 갖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이렇게 쓰는 것이 매우 조심스럽지만…

적어도,

내 자신을 바라보면서,

내가 적용할 수 있는 삶의 자세를 정리해보고 싶었다.

가슴 아픈, 너무나 가슴 아픈… (4)

나는, 이런 상황에서 무엇이 잘못이었는지, 무엇이 문제였는지 하는 것에 대한 아주 적극적이고 활발한 discussion이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믿는다. 

그런 의미에서,

이런 상황에서 신앙을 개인적인것으로 가두어버리고자 하는 시도는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Having said that…

20-30대에는, 선과 악의 기준이, 나와 너 사이에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선의 편에 서는 것이 옳다고 여겼고, 그 반대편에 있는 악을 define하고 싸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여전히 그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이제는, 그 선과 악의 기준이 나를 가르고 있음을 본다.

돈을 더 벌기 위해 규정을 어기고 무리하게 배를 운영한 사람들,

허가되지 않아야 하는 사람들에게 허가를 내어준 사람들,

리더로서 책임지지 않고 다른 사람을 비난만 하는, 무능하고 무책임한 모습,

책임지는 일을 만들지 않기 위해 소극적으로 움직인 무능한 사람들,

아이들을 살리지 않고 배를 포기한 어른들…

등등이 정말 악한 모습이고 그것에 분노해야 하지만…

그것이 바로 ‘나’의 모습임을 인정하고,

심지어는 그것이 바로 ‘나’의 모습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 사람들과의 일종의 ‘연대의식’을 가지고 재를 뒤집어 쓰는 모습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규칙을 속여서 이익을 취하는 모습.. 바로 내 모습이 아닌가.

책임을 피하고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모습… 바로 내 모습이다.

아이들이 죽더라도 나만 살면 된다는 어른들의 욕심이 지금 이런 세상을 만들어 놓고 있지 않은가.

벌써 20년도 더 지난 일이지만,

한국의 남북나눔운동에서, 소위 ‘다니엘 기도’라는 것을 design해서 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남북 상황의 깨어짐을 만들고 있는 죄의 모습이, 

바로 나의 죄, 우리의 죄라고 인정하고 기도하라고 촉구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 그렇게 기도하던 청년들은,

신사참배가, 독재정권에 협력한 것이,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정말 ‘우리’의 죄라고, 좀 더 좁혀서는 ‘내’ 죄라고 고백하며 눈물흘려 기도했다.

그리고는 인간 띠 잇기를 하면서 우리의 개인적 신앙의 공적인 표현을 해내었다.

사회적 악을 향한 공분,

이 사건에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

이런 것들이 다 중요하고, 모두 해야 하지만…

이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만이 할 수 있는 또 한가지 일은,

재를 뒤집어 쓰는 일이 아닐까 싶다.

나는 아직…

그렇게 하자고 이야기하는 voice를 듣지 못하고 있다.

가슴 아픈, 너무나 가슴 아픈… (3)

돌이켜보면, 내가 어릴때는 사람들이 싸우고 욕하는 모습을 늘 거리에서 많이 봤던 것 같다.

내가 기억하는 시절은 결국 70년대 초반이니까, 

전쟁 후 20년이 지났지만 그로부터 회복되지 못한 세상이었다.

삶을 찍어 누르는 가난,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함…

그것에 눌린 사람들이 그렇게 서로에게 눈을 부라리며 싸우고 했던 것이었겠지.

나는,

이번에 이 사고를 접하고 사람들이 보이는 분노에 찬 반응들이,

마치 그런 것 같아 보였다.

삶 속에서 마음이 척박해져서…

그야말로 독기를 품고 증오를 표현하는…

아,

사람들이 정말 많이 힘들구나.

사람들의 마음이 정말 많이. 많이… 눌려 있구나.

일제 강점기와 한국 전쟁 이후, 지긋지긋한 가난을 겪어내던 시절,

복음은 그들이 눈을 열어 하나님 나라를 보게 해 주는 역할을 했다.

도무지 견디어낼 수 없을 것 같은 삶의 무게를 느끼는 사람들이, 예배당 찬 마루바닥에 앉아서 ‘천국복음’을 듣고 눈물로 기도하며 세상을 이겨나갔다.

지금 이 시대에,

이 아픈 사람들에게 복음이 정말 소망을 주는 것이 될 수 있을까?

그것은 단순히 개인적인 위로를 공급해주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사회적인, 공적인 복음의 영역에 대한 강조도 포함되어야 한다.

하지만 요즘은,

개인적 신앙을 강조해야할 보수 기독교는 개인적 정죄만을 남발하고 있고,

공적 신앙을 강조해야 할 진보 기독교는 사회적 정죄만을 남발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개인적 신앙을 강조해야 할 보수 기독교가, 이 땅을 초월해내는 신령한 믿음, 하나님을 신뢰하는 개인적 믿음에 대한 강조를 하고,

공적 신앙을 강조해야 할 진보 기독교가, 깨어진 세상 속에서 하나님께서 일하심에 대한 강조를 해야 하지 않나.

이렇게 많이 아픈 사람들에게….

이렇게 많이 마음이 상해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이 주는 생기가 공급되는 간절한 소망이 더 커졌다.

가슴 아픈, 너무나 가슴 아픈… (2)

이런 사건을 보고 가슴아파하지 않거나 분노하지 않는 것 자체가 아마 죄일것이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의 분노는 모두 ‘공의로운 분노’일까?

이 상황에서 그 아이들을 생각하며 울었다는 것만으로 나는 의인이 되는 것일까?

인터넷을 보면서 내가 불편한 것 가운데 하나는 이것이다.

사람들이 이 상황 속에서 많이 마음이 힘들다.

그리고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분노가 끓어 오른다.

그런데…

그 분노를 표출하는 대상은… 

그냥 평소에 자신이 미워하던 그룹이다. -.-;

그냥 ‘박근혜’를 미워하던 사람들은,

이걸 기회로 잡아 박근혜를 까는데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그리고 그것이 공의라고 믿고 있고)

이걸 바탕으로 ‘사회 기강을 흔드는 종북좌파’가 문제라고 보는 사람들은,

그 사람들을 비난하는데 총력을 기울인다.

보수 기독교가 문제라고 보는 사람들은 보수 기독교가 이 문제를 대하는 방식에 분노하고 있고,

공직자들이 문제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공직 system의 문제를 부각한다.

지금 우리가 발견하고 있는 분노는 그 대상을 정확하게 설정하고 있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정치가들에 대해 비판을 해야하고, 그들이 책임지지 않는 것에 대해 이야기해야한다.

깨어진 system에 대한 이슈를 제기해야 하고 필요한 경우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렇지만,

너무나도 황망한 사태를 만난 김에, 

내가 기존에 미워하던 그룹을 왕창 더 미워하자… 그 사람들을 많이 많이 비난하자… 는 식의 접근은 사태에 크게 도움이 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저들’을 악인으로 만들고 ‘나’ 혹은 ‘우리’를 의인으로 만들어 버리는 우를 범하게 된다.

나는, 누군가가…

“이 상황에서 분노하는 것으로 당신이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라는 이야기를 좀 해주면 좋겠다.

@ 물론 아는 사람은 알지만, 나는 한국의 현 정부에 대해 대.단.히. 비판적인 사람이다. 거의 이 정부가 ‘악하다’라고 보는 입장에 가깝다. 또 악할 뿐 아니고 무능하기까지 한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 나의 분노도 역시 대통령을 비롯한 현 정부를 향해 향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가슴 아픈, 너무나 가슴 아픈… (1)

고난주간에, 

이 뉴스를 들었을때…

나는 마음이 막막해져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나서,

곧 이어 도저히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분노’가 끓어 올랐다.

솔직히 말하면 그 ‘분노’가 무엇을 향한 분노인지, 그 분노의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인지 하는 것 조차 명확하지 않았지만…

나는 끓어 오르는 분노에 주체를 할 수 없었다.

혼자 있는 장소에서는 알 수 없는 대상을 향해 쌍욕을 내 뱉기도 하였다.

이걸 어떻게 소화하고 처리해야할지 하는 것도 분명하지 않았고,

인터넷에서 접하는 여러가지 뉴스와 주장이 그저 어지럽게만 느껴졌었다.

많은 사람들이 봤다는,

사진이나 동영상들도… 나는 차마 보지 못하고 있는 것들이 많다.

도무지 그걸 볼만큼 마음이 단단하지 못하다.

인터넷 사이트에 그저 작게 보이는 사진에 비추어진 모습들만으로도,

내 마음을 추스리기가 쉽지 않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해 절대 어떤 해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

솔직히 누가 어떤 해답이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나의 독서법 (7)

개인적으로 내 독서생활에 큰 영향을 끼쳤던 몇권의 책을 소개하면서 이 시리즈를 정리해야겠다.

1. Christian Theology by Alister McGrath
이게 보니까 최근엔 한국말로 번역이 된것 같았다. 신학이란 무엇인가 이던가…
실제로 이건 미국의 복음주의 신학교에서 조직신학 교재 혹은 부교재로 사용하기도하는데,
나는 이 책이 내가 퍼즐의 큰 그림을 그리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이 책은 어떤 특정한 신학적 입장을 주장하는 스타일의 책이라기 보다는, 다양한 관점을 소개하려는 노력을 많이 한 책이기에 그런 유익을 많이 주었던 것 같다.
특히 전반부 1/3 정도는 신학사 (history of theology)라고 볼 수 있는데, 정말 강.추. 한다.
이 책을 읽은게 10년도 더 지난 일이지만, 여전히 내 독서생활에 영향을 끼친 책 #1이다.

2.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것인가 by 프란시스 쉐퍼
1번은 내가 영어로 읽어서 제목을 영어로 썼고, 이 책은 내가 한국말로 읽어서 제목을 한국말로 썼다. ^^
프란시스 쉐퍼가 이 책에서 한 이야기를 지금은 내가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지만, 이 책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머리를 쓰는 작업을 해야한다는 요청을 내게 가장 강력하게 했던 책이었다. ^^
물론 Francis Schaeffer의 대표작이라면 Escape from Reason, God Who is There, He is there and He is not silent 같은 것을 꼽겠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나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를 먼저 접했다.
이 책을 처음 읽으면서 잘 이해가 되지 않아서… 철학책, 역사책을 사다가 옆에 놓고 함께 공부하면서 읽었던 기억이 난다. ^^ 벌써 20여년전에 읽었는데…

그러고나서 국비유학시험준비를 위해서 국사와 국민윤리를 공부했어야 했는데… 세상에, 국비유학시험준비를 위해 했던 국사와 국민윤리를 정말 재미있게 공부했었다! 완전히 공부에 재미를 들이게 한 책이다.
솔직히, 지금은 내가 다른사람들에게 이 책을 강추하지는 않는다. ^^
오히려 intellectually stimulating한 것을 읽고 싶은 beginner들에게는, 자크엘룰을 더 추천하곤 한다.

3. Gordon-Conwell NT Survey course
Gordon-Conwell 신학교에 다니던 사람으로부터 NT Survey 한학기 과목 전체가 녹음되어 있는 tape을 구해다가 들으며 공부했던 적이 있었다.
와… 나는 정말 정말 정말 정말 재미있게 들었다.
아… 이런걸 이렇게 누가 좀 설명을 해주면, 혼자서 책들고 끙끙하는것 보다 훨씬 더 좋구나… 하면서 감탄하며 들었다.
그렇게 말하자면 신학교 과목을 ‘도강’한 셈인데… -.-; 이것도 벌써 15년쯤 지난 일이다.
그 후로 나는 강의, 설교 등등을 찾아서 열심히 듣게 되었고, 예전에 신학교 강의 한학기분이 올라와 있으면 그걸 홀딱 가져다 듣는 식으로 배움의 욕구를 해결하기도 하였다. ^^
지금도 주말에 심심하면 인터넷에서 다운받은 신학강의, podcast들을 들으며 빈둥빈둥하곤 한다.

4. Across the Spectrum
이건 비교적 얇고, 쉬운 책이다.
그렇지만 여러가지 조직신학에서 다루는 이유들을 다양한 신학적 전통에서 바라보아 비교해놓은 책이다.
아마 지금 우리 교회 목사님께서 그 당시 코스타 간사들에게 추천하셨던 책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
큰 그림을 이미 희미하게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조금 더 세부적인 이슈의 discussion이 어떻게 되는지 알아볼 수 있는 좋은 책이다.

나의 독서법 (6)

나의 이러한 독서법에는 약점/limitation이 많이 있다. 그중 몇가지를 꼽자면 다음과 같다.

1. 우선, 이런 스타일의 독서법이 모든 이들에게 다 적용될 수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내게 주어진 환경 속에서 그나마 계속해서 생각과 배움의 폭을 넓혀나갈 수 있는 것으로 내가 나름대로 개발해 낸 것이고, 적어도 내게는 잘 맞는다. 
책을 빨리 읽고 소화해내는 능력이 떨어지지만, 비교적 단 기간에 많은 분량을 소화해야하는 필요에 의해 나름대로 찾아낸 방법이다.

2. 이러한 독서법은 소위 ‘꼼꼼함’이 떨어진다.
큰 그림을 잡고, 빨리 이해하는데는 유리하지만, 사상이나 생각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파고들어 분석하는 데에는 그리 적절하지 않다.
나는 이런 ‘꼼꼼함’은, 소위 전문가들의 도움을 얻거나, 주변에 꼼꼼하게 책 잘 읽는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일부 채우려고 노력한다.

3. 다른이들의 (비뚤어진) 생각에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많다.
A 라는 작가의 책들을 섭렵하려고 도전하면서, 그 A에 대해 설명해 놓은 B 라는 사람의 개괄서를 먼저 읽었다고 하자. 그러면 나는 A의 생각보다는 B가 해석해놓은 A를 접하게 된다. 그리고 사실 그것은 A를 그 후에 읽어가면서도 계속 영향을 끼친다.

만일 B의 생각이 어떤 한쪽으로 치우쳐져 있거나 비뚤어져 있다면 나는 그것에 깊은 영향을 받은 채 A를 읽게되는 우려가 있는 것이다.

나의 독서법 (5)

독서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요즘 인터넷에서 많이 돌아다니는 각종 강연/세미나 들도 큰 도움이 된다.

솔직히 말하면,
요즘은 정말 책 읽을 시간이 없어서…
괜찮다고 생각하는 강연들을 다운받아 놓았다가…. 운전중이나 운동중에 듣곤 한다.

N. T. Wright 같은 사람은 워낙 강의가 올라와 있는 것이 많아서 그것만 들어도 웬만한 책 읽은것 만한 효과를 볼때도 있다.
또한 신학교 강의들도 무료로 풀려있는게 매우 많다. Gordon Conwell 같은 학교는 아주 대대적으로 이걸 풀어서 iTunes U 에서 여러 과목들을 들을수도 있다.
Douglas Stuart가 하는 해석학 강의, David Wells가 하는 신학개론 강의등이 공짜다!

시간이 부족할때는 Audible 같은 데에서 audio book을 사다가 듣기도 한다. Audio book은 운전과 같은 다른 일을 하면서도 들을 수 있기 때문에 시간 사용에 더 효과적이라고 할수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