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를 읽으며

이번달부터 로마서 QT를 하고 있다.
원래 계획은, 로마서를 좀 꼼꼼히 공부하면서 보겠다는 것이었는데,
도.무.지. 그럴 여유를 찾지 못해서 그냥 약간 더 심각한(?) QT 수준으로 보고 있다. ^^

도대체 New perspective와 관점에서 읽어내려가는 로마서와,
전통적 관점에서 읽어내려가는 로마서는 어떻게 다를 수 있을까 하는게 내가 이번에 로마서를 읽어내려가는 가장 중요한 포인트이다.

적어도 현재까지의 내 생각은 이렇다.

– Summary: New Perspective와 전통적 관점 모두가 매우 valid한 point를 가지고 있다.

– New Perspective는 Then & There의 차원에서, 성경 본문의 역사성, 현장성, 1st hand reader 에 더 중점을 두고 읽고자 하는 시도이고, 전통적 관점은, Here & Now의 차원에서, 성경본문의 통시성, 초월성, 적용에 더 중점이 있다.
(New perspective, 유대인의 메시아, 구약 언약의 성취, 하나님 통치의 회복… .vs. 전통적 관점, 죄에 빠진 인간, 죄의 용서 등등 )

– 로마서는 유대인의 메시아가 어떻게 전 세상의 구세주가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설명하고자 하는 바울의 시도가 아닌가 싶다.
다시 말하면, New perspective의 관점과 전통적 관점을 연결시키는 다리가 될 수 있는 책이 아닌가 생각한다.
유대인의 메시아에 대한 구체적인 역사적 문화적 배경이 부족한 사람들에게, 그들의 언어로 예수가 구세주되심을 이야기하는 책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방인들에게는 오히려 더 relevancy를 가질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할수도 있다.

– 바울은, 이 두가지중 하나도 그냥 포기하지 않는 것 같다.
역사적 관점의 승리하신 메시아는, 통시적 관점의 대속 제물이 되신 예수와 통하는 것 같다.

– 이방인인 나로서는, 좀 더 마음 편하게 substitutionary atonement의 관점으로 지금 로마서를 읽어보고 있는 중이다. 나는 어차피 1세기 유대지방에 살고 있는 사람이 아니고, 유대인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지 못하므로, 내가 복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st century Judaism으로 돌아가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통시적/초월적 관점으로 풀어내 놓은 해설서를 읽는 것이 더 도움이 될 것이다. 로마서는 그런 책이 아닌가 싶다.

* 이런 것도, 누가 좀 잘 가르쳐 주면 좋겠습니다.
저보다 더 이런거 잘 아시는 분들도 많이 계실텐데…
한줄씩 좀 남겨주세요!
시간이 없어서 길게 풀어서 설명을 못했지만, 로마서를 가지고 New perspective와 전통적 관점 사이에서 갈등하며 읽어본 분들이 계실텐데 말이죠…

치열한 세상속에서.

뭐 다른 사람들도 다들 참 치열하게 바쁘게 살겠지만,

나도 그렇다.

요 며칠은 새벽 1-2시까지 깨어서 유럽쪽 사람들과 실시간으로 연락하며 실험을 하고 있고,

아침 6시에 일어나 그쪽에서 보내온 update을 읽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있다.

(어제는 그 여파로 오후에 완전히 해롱해롱하는 바람에, 아예 한 두어시간 일을 접고 쉬었다. -.-;)

일하는 템포가 대단히 빠르다.

가령, 오후 4시에 미팅을 하고, 그 다음 미팅을 그 다음날 아침 8시로 잡는다.

그리고는, 야… 우리에게는 그 다음 미팅까지 앞으로 16시간이나 시간이 있다… 하면서 사람들이 미팅을 마무리 한다.

그리고 실제로 16시간 뒤 미팅에는 다들 상당히 진전된 내용들을 가지고 들어온다.

몇십만불되는 돈 쓰는 것을,

불과 2-3분 만의 discussion을 가지고 결정해야하는 경우도 있고,

한편으로는 회의 준비를 하면서, 전화로는 독일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고, 옆의 직장 동료가 하는 일을 support하는 일을 한꺼번에 해야할때도 있다.

이런 세상 속에서,

10분의 시간에는 참 많은 일을 할 수 있고 해야한다.

정말 치열한 세상이다.

그.런.데.

한편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렇게 세상이 치열하게 사는데…

돈을 위해서도 이렇게 자신의 모든 열정을 쏟아부어 사는데…

복음을 위해 치열하게 사는 것은 왜 그렇게 잘 안되고 못하는 것일까?

크리스천들이,

좋아하는 크리스천 음악을 듣고,

좋아하는 크리스천 작가의 책을 읽으며,

내가 무슨 밥 먹었나 하는 것을 가끔 facebook에 올리는 와중에도…

세상에서는,

1분 1초를 아껴가며, 온 에너지를 다 쏟아, 

극도의 긴장감 속에서, 그렇게 치열하게 사람들이 살고 있다.

나는,

교회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과 같아지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세상의 모든 것들을 벤치마킹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다고 믿는다.

그러나,

세상은 시속 200마일로 달리고 있는데,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스카이콩콩을 타고 경치를 구경하며 가고 있다면… 

게다가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게으름이나 두려움 등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라면…

이제는 스카이콩콩을 좀 버리고, 최소한 자전거라도 타봐야 하는 것은 아닌가.

최근,

나의 교회생활 / 신앙생활을 돌아보며,

그리고 내가 속한 공동체를 생각하며,

그리고 반성하며… 해본 생각들이다.

나 스스로,

다시 신발끈을 고쳐매어 본다.

(사족 1)

아, 물론 시속 200마일로 늘 달리는 사역자들을 보기도 한다.

그런데 그중 많은 사람들은 교회라는 좁은 동네 마당 안에서 열심히 먼지를 일으키며 달리고 있지, 

저 멀리 있는 목표를 향해 달리지 않는 것 같아 보인다.

(이건 또 다른 글에서 다루어야 할 문제다. ^^)

(사족 2)

세상이 그렇게 바쁘니까,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slow down 하고, 자연도 즐기고, 가족과 시간도 잘 보내고 해야한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그 주장도 물론 옳다고 생각한다. ^^

안식은, 하나님에 대한 궁극적 신뢰의 표현이 아닌가!

그렇지만, 게으름은 7 deadly sin 가운데 하나이다.

하나님 안에서 안식하고 평안을 누리는 것과 게으름 사이에 분별해야할 fine line이 분명 있는 듯 하다.

(사족 3)

그리고,

사역자의 삶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 달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형태로든, 내 preference, comfort, privilege 등을 포기하는 일이 있어야 한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아니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과 같은 권리를, 자신이 헌신한 가치를 위해 포기하는 일을, 누군가는 해야 세상이 바뀌는게 아닐까.

 

예상치 못한 사람으로부터의 깨달음

미국에 95년에 왔으니, 이제 미국에 온지 20년이 다 되어 간다.
지난 20년 미국 생활 중, 내게 여러 영향을 끼친 소중한 사람들이 참 많이 있다.

그런데 그중 한 사람은, 참 특이한(?) 경우이다.
박사과정때 내 옆에 앉아 있던 유대인 친구인 S 이다.

이 친구는, 대단히 세속적인 사람이었다.
아주 똑똑하다는 느낌을 받지는 못했는데, 참 말 잘하고, 이익에 밝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재빠르게 움직일 줄 아는 사람이었다.
실험을 하다가 잘 안되면, F*ck! 이라며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기도 하고…
뭐 하여간 내가 다니던 학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부류의 사람은 아니었다.

졸업 후,
연구가 자기의 분야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는지…
재빠르게 분야를 바꿔서,
지금은 가끔 TV에도 나오는 주식 분석해주는 사람이 되었다.
돈도 아주 많이 벌고… 그야말로 ‘잘 나가는’ 사람이다.

그 당시 나는 아주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많이 노력하고 있었고,
한편 나는 그 친구를 경멸했다. (아주, 아주, 나쁜 자세이다!)

그런데,
한가지 그 친구를 보면서 느낀 것은…
나는 늘 하나님의 뜻, 목표, 소명, 뭐 이런 것에 ‘사로잡혀서’, 그것에 맞지 않는 주변의 모든 것들을 정죄하고 주변의 많은 사람들과 갈등하고 살고 있는데…
이 친구는 주변의 모든 사람들과 다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다.

무엇보다 그 친구를 보면서 참 많이 배운 것은,
이 친구가 자신의 아내를 대하는 자세였다.
이 친구는, 정말 그야말로… 무엇이 옳다는 어떤 신념 그런거 없고, 그냥 이익을 찾아서 움직이는 친구인데,
자신의 아내를 참 끔직하게도 사랑하고 아꼈다. 지금도 그 친구는 참 좋은 가정생활을 하는 아빠다.

그 당시 신혼이었던 나는,
내가 옳다고 생각하던 신념이 결혼 생활 속에서 compromise 된다는 생각 때문에 대단히 갈등하고 있던 차였다. (후에, 그때 내 생각이 얼마나 유치한 것인지 많이 깨닫게 되었지만.)
그저 돈되는 것이라면 뭐든 좋다…고 접근하는 그 친구는 아내와 알콩달콩 잘 살고,
하나님께 헌신했다고 하는 나는, 신앙적인 가치라는 가면을 쓴 내 신념을 아내에게 강요하고 있고…
참 많이 비교가 되었다.

그 친구와의 만남은,
내가 ‘유연한 신앙’을 생각하게 하는 중요한 단초가 되었다.

그 친구는 자신이 가진 신념이 없기 때문에,
주변의 많은 것들과 화목할 수 있었고,
나는 내가 가진 신념이 너무 크기 때문에,
주변의 많은 것들과 불화하고 있었다.

강한 신념은, 정말 갈등을 불가피하게 초래하는 것일까?
나는 깊이 고민했다.

지금 나는 그 당시보다는 훨씬 더 유연한 신앙의 자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주변 사람들은 뭐 그렇게 보는 것 같지는 않지만 서두 ㅎㅎ)

그리고 그런 유연한 자세를 통해,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이 땅에서 살아가는 법을 아직도 배워가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그런 유연한 자세를 그나마 조금 더 가짐으로써,
나 자신을 좀 더 볼 수 있게 되었고,
하나님을 더 잘 대할 수 있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그토록 사랑하시는 이 세상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나가게 되었다.

지금도 나는 S 친구와 가끔 연락을 하면서 지낸다.
그 당시 나는 그 친구를 Dr. Evil 이라고 불렀고, 그 친구는 나를 Dr. Good 이라고 불렀다.
아이러니컬하게도, Dr. Good은 Dr. Evil로 부터 많이 배웠는데,
Dr. Good이 Dr. Evil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친건 별로 없는 것 같다.

나는 지금도 배워가고 있다.

대단히 고통스러운…

나는 설교나 기독교 세팅에서의 강의를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이 아니다.

물론 아니다.

늘 설교를 하시는 분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런 준비를 할때, 상당히 ‘기복’이 있는 편이다.

어떤 땐, 정말 일사천리로 앉은 자리에서 설교 10편이 쏟아져 나올때도 있고,

어떤 땐, 아무리 쥐어짜려해도 도무지 한걸음도 나가지 않아 고통스럽게 준비할때도 있다.

뭐 그러면…

쉽게 준비된 건 늘 대박이고,

어렵게 준비된건 늘 꽝이냐… 하면 뭐 그런건 아니다.

앞으로 두주 앞으로 다가온 말씀 준비를 대단히 고통스럽게 하고 있는 중이다.

어제 저녁에는 고통스러워 하다가, 

조장들이 막 자기 소개를 쓰기 시작한 보드에 들어가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마음에 담아보려 했다.

아… 이런…. 괜히 봤나…

괜히 마음에 부담이 더 커지면서… 허걱… 더 힘들다. -.-;

하나님께서 이번엔 날 좀 힘들게 만들어가며 준비시키는 모양이다.

야속한 하나님 같으니라고….

노안 안경

나는 참 체력이 좋았다.

불과 2-3년 전만 하더라도,

한주에 30마일씩 뛰었고, (하루에 6마일씩, 일주일에 다섯번 정도)

늘 에너지가 넘쳤다.

하루에 다섯시간 조금 더 자는 수준으로 살면서도 전혀 피곤한줄 물랐다.

지금 우리 동네 와 있는 내 고등학교-대학-대학원 동창은,

대학때 나를 기억하기로…

그냥 가만히 걸어가는 길도 그냥 걸어가지 않고, 혼자서 뛰기도 하고, 괜히 계단을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에너지를 발산하면서 다녔다고 한다. -.-;

그런데,

요즘은 정말 그렇지 못하다.

뭐 워낙 시간이 부족하기도 하지만, 한주에 10-15마일 뛰면 잘 뛰는 거고,

잠도 6-7시간은 자 주어야 하루를 버틴다.

(나이가 들면 잠을 덜 자게 되는거 아니던가… -.-;)

하루 이틀 무리하면 그 여파도 오래가고,

이제 잠을 줄여서 뭘 한다거나, 몸을 혹사해서 일이 되게하는 것은 잘 안먹히는 것 같다.

—–

두주 전,

‘노안 안경’을 하나 맞췄다.

예전식으로 하면 Bi-focal 렌즈라고 할 수 있는데…

옛날처럼 아래쪽에 조그만 돗보기가 달려있는 식은 아니다. ^^

렌즈 위쪽은 먼 곳을 볼 수 있고,

아래쪽은 가까운 곳을 볼 수 있도록 된 렌즈이다.

최근 몇달간은, 

안경을 쓰고 책을 읽거나 컴퓨터를 보는 일이 힘들어서,

집에서는 아예 안경을 벗고 지내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근시 Diopter가 5가 조금 안되는 수준으로, 아주 눈이 많이 나쁜 편은 아니다. 그냥 안과 검사표에서 0.1이 잘 안보이는 수준…)

그런데,

이 ‘노안 안경’을 쓰니까…

허억… 진짜 좋다!

한 안경을 쓰고 먼곳과 가까운 곳을 다 볼 수 있다.

물론 오랫동안 책을 읽거나 컴퓨터 작업을 할때에는 reading glass를 쓰거나 아예 안경을 벗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만 웬만한 생활은 한 안경을 쓰고 계속 지낼 수 있으니… 이거 참 짱이다.

—–

나이가 들어가며,

내가 예전과 같이 살 수 없게 됨을 발견해 나가는 일은,

한편 frustrating 한 과정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내 육체의 힘을 의지하는 부분을 줄여 나가면서…

(뭐 앞으로 남은 생애 동안 계속 내 육체를 의지하는 portion은 줄어들어가지 않겠는가!)

팔팔하지 않게 사는 훈련을 해나가는 일이 내게 중요한 과제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몸에 젊은 에너지가 넘칠때는 경험하지 못했던 하나님을 경험해나가는 일이 참 풍성하게 남았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나보다 더 연배가 높은 분들이 보기엔,

그저 한참 나이도 어린 것이… 라고 생각할만한 생각이겠지만서두… ㅎㅎ

내가 하고 싶은 일, 내가 잘 하는 일

나는 물리학자가 되고 싶었다. 그런데 지금은 엔지니어가 되었다.

나는 이론을 연구하는 학자가 되고 싶었다. 그런데 지금은 생산현장을 주도하는 사람이 되었다.

나는 이론가, 전략가 타잎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론가 혹은 전략가의 역할을 해본적이 거의 없다.

나는 이해력, 판단력이 좋고, 창의력과 암기력이 부족하다. 그런데 지금은 창의력과 암기력이 많이 필요한 일을 하고 있다.

나는 한가지 일에 집중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런데 지금은 멀티태스킹이 일상인 삶을 살고 있다.

나는 큰 그림을 그리고 이해하는 것을 좋아하고 detail에 약하다. 그런데 지금은 여러가지 detail을 챙기는 일을 하고 있다.

나는 passionate하게 살고 일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런데 지금은 passionate하지 않게 살고 일하도록 요구받고 있다.

대학교 시절에, 늘 음악을 듣고 살았다. 클래식 음악, 가요, 영화 음악 등등… 그런데 지금은 거의 음악을 즐길 시간과 여유가 없다.

노래하는걸 좋아했고, 연극을 즐겼다. 그러나 노래해본적이 참 오래 되었고, 연극은…. 더더욱….

내가 참 잘하고 좋아한다고 생각했던 일들은 모두 아주 짧은 시간동안만 내게 주어졌다.

내가 30대를 다 바친(?) 코스타를 하면서도, 한번도 내가 제일 하고 싶은 사역을 해본적이 없었다. 

늘 그저 빵꾸가 난 것을 메우며 10년이 훨씬 넘는 시간 코스타를 섬겼다.

교회에서도 내가 잘하고 좋아하는 것을 할 수 있는 여건은 거의 잘 주어지지 않았다.

하기 불편하고, 하려면 많이 노력해야하고, 신경 많이쓰게되는 그런 일들… 주로 빵꾸가 난 일들만을 하면서 신앙생활을 했다.

나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내가 그런 일들을 잘하고 좋아하는 줄 안다. -.-;

그냥 다른 사람이 안하니까 어쩔 수 없이 하게된 것이 대부분이었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하나님께서는 내가 잘하는 일, 내가 좋아하는 일을 잘 허락해주시지 않는 것 같다 

잠깐 그런 기회를 주셨다가도 금방 빼앗아 가 버리신다.

언젠가는 내가 잘하고 좋아하는 일에 올인하며 살 수 있으려니 하는 꿈을 가졌으나,

이제는 그런 꿈을 거의 그냥 포기했다.

세상에 자기가 좋아하는 일, 잘하는 일을 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렇지만,

나는 그 하나님께 감사한다.

내가 하고 싶은 일, 내가 잘 하는 일을 하면서 사는 것 보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사는 것이 훨씬 더 값지다.

어버이날

민우에게 가끔 물어본다.

‘민우는 엄마가 왜 좋아?’
그러면 민우는 ‘엄마니까’ 라고 대답한다.
예전에는,
아… 부모님의 은혜가 크시고… 나를 위해 많은 것을 주셨고, 희생하셨고…
그런 생각을 하며 가슴이 뭉클하곤 했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저 부모님은 ‘아빠, 엄마’ 이니까 내가 사랑하고 좋아하고 존경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그분들이 얼마나 완벽한가, 어떤 인격을 가졌는가 하는 것 이전에 그저 아빠 엄마이기 때문에.

내가 아버지와는 35살 차이가 나고, 어머니와는 28살 차이가 난다. 

35년 전, 내가 10살때 아버지는 지금 내 나이이셨고,

28년 전, 내가 17살때 어머니는 지금 내 나이이셨다.

내가 10살, 17살때 보았던 아버지 어머니는 정말 많이 많이 많이 많이 어른이었다. (뭐 당연하지만. ㅎㅎ)

부모님과 나 사이에는 ‘넘사벽’이 있었다.

이제 내가 지금의 나이가 되고보니,

아… 아버지 어머니께서 지금 내 나이때 이런 생각과 고민을 하셨겠구나.

나는 그걸 정말 까맣게 모르고 있었는데 말이야…

하는 생각이 들어 가슴이 찡~ 해온다.

이제는 80대, 70대에 계신 아버지 어머니께서 지금 하고 계신 생각과 고민을 지금 내가 잘 이해하지 못하지만,

아마 내가 그 나이가 되어서야 이해하고 깨달을 수 있는 것이겠지. 그리고 그때 또 마음이 찡~ 해지겠지.

이 땅에서 살면서,

아버지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리며 이해하는 아들이 되는 것은 정말 포기했다.

그저 아빠니까, 엄마니까 그분들을 좋아하는 그런 아들이 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는 것 같다.

(사실 나는 10살 남짓부터 아빠 엄마가 아닌 아버지 어머니라고 불러와서… 아빠 엄마라는 표현이 영 낮설다. ㅎㅎ)

내가 좋아하는 분들을 마음에 두고,

깊이 숨을 들이마시며 기도를 해본다.

말씀에 사람이 오지 않을 때

말씀에 사람이 다가오지 않을때,

말씀은 사람을 기다려야 하는가, 말씀이 사람에게 다가가야 하는가.

이건,

복음과 말씀의 상황화에 대한 질문이다.

나 역시도 이 문제로 계속 swing을 해왔다.

한때는,

사람들이 말씀에 다가오지 않는 이유뇬,

그들이 죄인이고, 말씀이 말씀답게 선포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을 했다가,

또 금방,

그 사람들이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기준을 낮추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어느 한쪽의 강한 주장에만 힘을 실어주기는 어렵다고 생각하고 있긴 하지만…

현실적으로 어떤 특정한 상황에서,

두가지 선택 가운데 하나를 해야할때는,

더 깊은 고민과 성찰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시편 1편

시편 1편을 보면, 순 거짓말이다. -.-;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고 오만한 자리에 않지 않고, 율법을 묵상하는 사람은,

하는 일 마다 잘 된단다.

그렇지만 악인은 바람에 흩날리는 겨와 같다고.

세상을 보면 그런가?

오히려 세상은 악인이 승리하지 않은가.

악인이 의인을 누르는 세상 아닌가.

순 거짓말…

그러나 또 한편 생각해보면,

시편 1편은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이 반복해서, 오랜 세월을 통해 애송했던 시 일테고,

이 사람들도 이게 거짓말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세상을 조금만이라도 안다면.

그.러.나.

악인의 죄를 따르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고,

오만한 자리에 앉지 않고,

율법을 묵상하면…

그런 삶의 자세를 취하면…

그런 사람이 되면…

이런 의인이 길이 사는 길이고, 악인의 길이 죽는 길이라는 것을 ‘보게’되는 것이 아닐까.

오랜 세월을 거쳐 이스라엘 사람들은,

시편 1편을 곱씹고 곱씹고 또 곱씹으며,

아.. 그래… 세상이 그렇게 악인이 승리하는 것 같아 보여도,

이렇게 눈이 열려 진리를 알게 되면… 그럼 이게 보이는 거구나…

그렇게 깨달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말 잘 듣는 사람들은 수장되고,

거짓된 어른/리더들은 자기 위치만을 생각하고,

돈을 벌기 위해 규칙을 어기는,

이런 더러운 세상 속에서도,

여전히 여호와께서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고, 선언하고, 예배하고…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지.

가슴 아픈, 너무나 가슴 아픈… (5)

마르슬라브 볼프는,

크로아티아에서 태어나서… 소위 ‘인종청소’가 이루어진 지역에서 자란 사람이다.

서로가 서로를 미워하고 죽이고 했던 그 상황에서 복음이란 무엇인가.

모두가 가해자이고 피해자인 상황에서 화해, 용서는 십자가와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 것인가.

이런 질문을 진지하게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볼프는,

결국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피해자의 아픔을 품는 것이기도 하지만, 가해자의 죄까지도 resolve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도대체 누가 선이고 악이라는 것을 구분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할정도로… 총체적으로 망가진 세상 속에서,

결국 그 사람들을 다시 구속해내고 회복해내고 화해하게 하는 것은,

십자가라는 것이다.

솔직히 개인적으로 참 마음에 들지 않는 십자가 해석이다.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런 approach 말고 다른 대안이 있을까?

나는 이런 도식을,

지금 이 상황에서 너무 성급하게 적용하는 것은 문제를 더 깊이 이해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인이라면, 

1. 이 상황에서 일어나는 내 안의 분노가 ‘공의로운’ 것이 아닐 가능성에 대해 열어두고,

2. 아픔을 당한 사람들을 향해 깊은 사랑과 관심을 보이고,

3. 이 아픔을 통해 드러난 ‘백성’들의 아픔과 눈물에 공감하며,

4. 깨어진 system이나 사람의 문제들을 잘 짚어내면서 그것이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되,

5. 재를 뒤집어 쓰고, 시대의 죄를 대표하는 사람으로써 회개하는 일들을 해야하지 않을까 싶다.

이것들은, 모두 중요한 덕목들이고,

이것들 가운데 한두가지만 했다고 해서 의인이 된 것 처럼 나대는 것은 결국 자신을 파괴시킨다고 생각한다.

이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어떤 특정한 집단이 거의 독접하다 시피 한 것 같아 보이기도 하고,

이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어디에서도 비슷한 voice를 듣기 어렵게 느껴지기도 한다.

처음 이 시리즈를 시작하면서 썼지만,

나는 이 사건에 대해 전문가적 시각을 갖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이렇게 쓰는 것이 매우 조심스럽지만…

적어도,

내 자신을 바라보면서,

내가 적용할 수 있는 삶의 자세를 정리해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