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STA/USA-2014 Indy conference 후기 (1)

이번 인디 컨퍼런스에서는 정말 다양한 역할을 맡았었다.

우선, 내가 늘 편하게 생각하는 ‘간사’의 자세로 참석했다. 간사들의 모임에 거의 다 참석했고, 간사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그러나 간사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 것은 아쉬움으로 많이 남는다.)

jj 수양회와 미들그룹 세션의 강사의 역할을 맡았었다. 이 블로그에 쓰긴 했지만, 준비하면서 참 힘들었었다. 

내가 맞지 않는 옷을 입는 것 같아 많이 불편했었다.

솔직히 다시 그런 역할을 맡을 수 있을지, 맡는 것이 좋을지 지금도 자신이 없다.

몇가지 땜빵을 맡았다.

기도의 밤을 인도하는 일, 간략하게 복음을 설명하고 구원초청을 하는일까지 맡았다. (허억…)

금요일 아침에 구원이란 무엇인가 세미나도 하나 했다.

그 외에,

가능하면 중보기도실에 많이 있으려 노력했고… (이건 별로 그러지 못했다.)

몇명 학생 상담을 했었고,

식사때마다 조모임에 들어가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또,

이번에 내가 작정을 하고 달려든 일은, 책을 파는 것이었다.

어떻게든 학생들이 책을 좀 사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고 싶어, 호객행위를 하며 학생들을 모으고, 책 추천을 해주는 책방 아저씨 역할을 맡았다.

(덕분에 두란노에서 오신 분과 참 많이 친해졌다. ㅎㅎ)

그런 와중에,

내가 개인적으로 고민하던 이슈들에 대해 몇몇의 강사와 이야기를 나눌 기회 또한 갖을 수 있었다.

이번 인디 컨퍼런스를 준비하면서, 그리고 인디 컨퍼런스에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면서, 참 생각한 것들이 많았다. 

내 개인적인 문제로 부터 시작해서, 내가 섬기는 사람들에 대한 생각, 코스타에 대한 생각,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대하여, 그리고 여러 신학적 이슈, 좀 더 크게는 한국 교회, 복음주의의 미래 등등에 대한 생각도.

과연 그것들을 다 이 블로그에서 담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싶을만큼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할 수 있는 한, 앞으로 몇번이 될지는 모르지만 한번 생각을 정리해서 담아보고자 한다.

걱정, 후회, 기대

98년 보스턴에서 첫 코스타 지역 리더쉽 수양회가 열릴때부터 2009년 간사에서 은퇴할때까지,
그리고 그 이후 간사들 주변에 얼쩡거려가며 이런 저런 일들을 도우면서…
나는 ‘Chuck E Cheese’에서 생일잔치를 여는 부모의 마음으로 코스타에 참석했었다.

여러가지 초청장을 보내고, 아이가 좋아하는 탈 뒤집어쓴 사람과 풍선 인형을 만들어주는 삐에로를 섭외하고, 아이들이 좋아할만한 피자와 케익을 주문하는 일은 모두 부모가 하지만,
또 잔치가 시작되면 부모는 그 아이들이 잘 즐기도록 모든 신경을 다 쓰지만,
부모가 스테이지에 올라가서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추지는 않는다.
그저 내가 불러온 사람들이 내 아이를 기쁘게 해주면 그것으로 흡족하다.

코스타 집회 중에는 늘 뒷자리에 서서,
아니면 별로 주목받지 못하는 구석에 앉아서,
정말 Chuck E Cheese에서 잔치를 배설하는 부모의 마음으로 때로 감격도 하고, 때로 안타까워하기도 하고, 때로 울기도 했었다.

땀 범벅이 되어 캠퍼스를 지나가다가도, 삼삼오오 앉아있는 학생들을 보면… 그저 그 사람들이 온전히 하나님 깊이 경험하고 많은 깨달음 얻고 이 자리 떠났으면 바라며 기도하다가 혼자 촉촉해진 눈을 쓱 닦고 다시 땀을 흘리곤 했었다.

나는 지금도 그런 위치/자세로부터 벗어날 준비가 되어있지는 않다.
아니, 내가 그런 마음으로부터 자유로와질 날이 오게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이번에 말씀 준비를 하면서, 참 힘들었다.
내게 맞지 않는 옷을 입는 것 같아 불편하기도 했다.
괜히 하겠다고 했다며 후회하기도 했다.
또 많이 걱정도 되었다.

나처럼 겸손하지 못하고 고집세고 나 밖에 모르고 꽉 막힌 사람은,
꽤 강력하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으면 잘 듣지도 못하곤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늘 코스타를 통해서 나로부터 시선을 돌려 하나님과 세상을 보게해 주셨다.
내가 기대하고 예상했던 것보다 늘 더 크게말이다.

걱정과 후회를 많이 하며 나름 힘들게 보낸 ‘준비기간’이었지만,
또 다시 하나님께서 해주실 일들에 대해 말로 다 할 수 없는 감격의 기대를 가지고…

이제,
내일 인디애나폴리스로 떠난다.
가서 정말 소중한 사람들을 만날 기대를 가지고 간다.

(블로그도 한주 쉽니다. 갔다 와서 다시 뵙겠습니다. ^^)

매년 반복되던 루틴

매년 코스타 집회를 참석하기 전에 했던 몇가지가 있다.

우선, 청바지 하나, 티셔츠 하나를 산다.

대개 이때쯤 되면 대개 낡아서 더 입기 어려운 옷 하나를 포기하고, 새 옷을 샀었다.

머리를 짧게 깎는다.

집회기간 중에는, 잠도 잘 못자고,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에 머리감고 말리는 시간 조차도 최소화 하기 위해서이다.

대개 집회시간 한달전 쯤 부터는 ‘몸 만들기’에 돌입한다.

최대한의 육체적 능력을 발휘하기 위해서, 운동량을 늘이고, 커피를 줄이고, 체중을 약간 줄인다.

올해는,

머리를 짧게 깎는것 이외에는 다른 것은 하지 못했다. ^^

회사일이 바빠서 오히려 꽤 잠도 많이 못자고, 커피 엄청 많이 마시다가 참석하게 되었다.

어제밤, 

아… 이번엔 이렇게 준비도 제대로 못하고 가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기도를 잠깐 하는데,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아니 이건 무슨 뜬금없는 눈물이야?

왜 눈물이 나지?


가만 생각해보니,

집회 전에… 집회를 생각하며 눈물 흘리는 것 역시,

지난 십수년동안 계속된 내 루틴이었다.


올해도,

많이 기대한다. 

한국 IVF 간사회가 올린 고백과 실천 (퍼옴)

아마 많은 사람들이 보았겠지만,

적어도 내가 여태껏 발견한 한, 가장 균형잡히고 건강한 고백이 담긴 내용이라고 생각되어서 여기 공유한다.

뉴스앤조이에 가면 IVF 대표이신 김종호 목사님께서 이와 관련한 ‘뒷 이야기’도 쓰셨는데, 그 글 역시 참 읽고 생각해볼만 하다. (그 글 역시 아래에 덧붙여 올린다.)


=== 


세월호 참사를 대하는 우리의 고백과 실천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건만,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로 284명의 소중한 생명을 잃었고 20명은 여전히 실종 상태입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유족들과 대한민국 전체는 극도의 슬픔과 혼란, 분노, 죄책감, 좌절에 빠졌습니다. 사고 발생 및 구조 과정에서 드러난 거짓과 조작, 자기만 살겠다는 극단적 이기주의, 무책임, 무능, 돈을 위해 생명을 저버리는 추악한 탐욕, 그리고 관행이라는 이름의 뿌리 깊은 부패 구조는 한국 사회의 총체적 타락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냈습니다.

우리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나라 일꾼으로 부름받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하나님 형상으로 지음받은 무고한 생명을 죽음으로 몰아간 한국 사회의 참혹한 현실에 깊은 관심을 갖고 기도하며 책임 있게 행동하기로 다짐합니다.


1. 우리는 희생자 가족과 함께 애도합니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 12:15). 우리는 가만히 있으라는 말만 믿고 구조를 기다리다 차가운 물속에서 죽어 간 희생자들과 함께 웁니다. 그들이 겪었을 공포와 배신감, 그리고 마지막까지 가족과 친구를 걱정했던 순수한 마음을 생각할 때 억장이 무너지는 슬픔을 겪습니다. 가족의 죽음을 속절없이 지켜볼 수밖에 없는 유족들의 엄청난 슬픔과 무력감, 상처, 분노에 공감하며 웁니다.


2. 우리는 철저한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 그리고 재발 방지 대책을 촉구합니다.

세월호의 무리한 개조가 이루어진 배경, 지체 없이 구조에 나섰다면 대부분의 목숨을 살릴 수 있었지만 선원들을 비롯한 일부만 구조한 이유, 초기부터 장비와 인력을 제대로 투입하지 않고 늑장을 부린 이유, 피의자를 제대로 수사하지 않는 이유, 거짓 보도와 은폐와 조작을 일삼는 이유, 진상 규명과 신속 구조를 요구하는 가족들마저 모욕하는 이유, 정부 및 유관 기구들의 무능과 무책임이 철저히 밝혀져야 합니다. 분명한 진상 규명과 함께 책임자 처벌 및 재발 방지 대책을 촉구합니다. 대통령은 경기 침체 등을 언급하며 본질을 외면할 것이 아니라, 유가족들을 진심으로 위로하고 총력으로 지원하며, 정부가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국정 최고 책임자로서 책임을 다할 것을 촉구합니다.


3. 우리는 회개합니다.

한국 사회의 총체적 타락이 세월호 참사를 낳았습니다. 생명을 존중하고 탐욕을 멀리하며 세상의 소금 역할을 해야 할 한국교회와 기독인들이 도리어 악에 대해 침묵하고 타협했을 뿐 아니라, 성공주의와 물량주의까지 동원해 가며 앞장섰던 잘못을 하나님과 한국 사회 앞에 자백하며 회개합니다.


4. 우리는 함께 모여 기도하겠습니다.

전국 18개 IVF 지방회와 각종 모임은 물론 전 세계 150여개 IFES 운동체들과 함께 세월호 참사에 대해 애도하고 기도하며 희생자들의 안타까운 죽음과 유족들의 아픔에 동참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큰 은혜와 위로를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구조 작업에 힘쓰는 분들과 수습 책임을 맡은 분들, 이 일로 고통받고 있는 모든 분들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더 나아가 한국 사회 가운데 하나님나라의 생명과 정의와 평화가 임하도록 기도하겠습니다.


5. 우리는 유족들과 함께하며 섬기겠습니다.

유족들의 정당한 요구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협력하고, 언제 끝날지 모를 그들의 깊은 상처를 치유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도록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하여 실천하겠습니다. 4.16 세월호 침몰 이후 대한민국은 전혀 다른 세상이 되어야 합니다. “부디 한 명도 빠짐없이 안전하게 갔다 올 수 있도록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한 여학생의 마지막 기도를 들으며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기억합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세월호 희생자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불의와 반생명이 지배하는 한국 사회가 생명과 정의, 평화가 넘치는 사회로 거듭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헌신하겠습니다.


2014년 5월 16일 
한국기독학생회(IVF) 간사회 일동




세월호 사건이 일어난 지 한 달에 이른 시점, IVF 간사회는 ‘세월호 참사를 대하는 우리의 고백과 실천’이라는 문서를 우선은 내부적으로, 그리고 다음 날 외부적으로 공유했다. 이 과정이 이번 일로 고민하는 많은 개인과 공동체에 참고가 되길 바라는 생각에 그 경위를 나누고자 한다.

1. 객관적 뉴스에서 주관적 공감으로

세월호 사건은 SNS나 독립 매체의 영향력이 그 이전보다 훨씬 더 커졌음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과거에는 TV, 신문 등 기성 미디어가 전해 주는 소식 외에는 다른 시각과 정보를 접할 수 없었지만, 이번에는 희생자들의 메시지, 동영상, 가족들의 카톡 메시지, 독립 언론들의 활약 등으로 정말 처절하게 그 사건의 내부를 들여다보게 되었고, 이것이 막연히 남의 일이 아닌 나의 일, 나의 이웃의 일임을 공감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 사건을 방관자 관점으로 볼 수 없었다.

2. IVF 내부의 의견들

IVF 내부에서도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는 문의가 어려 각도에서 있었다. 각자 개별적인 집회 참여, 의견 개진, 봉사 참여, 조문 등의 활동들을 해 왔는데, IVF 전체 차원에서는 아무런 공식 활동은 없었다. IVF는 사회참여가 가진 중요성, 기독교 세계관이 삶의 전 영역을 포함하는 제자도를 요구한다는 가르침, 공적 신학의 필요성을 강조했지만, 이번 일이 정부와 청와대의 무능력을 공격하는 ‘정치적’ 의미를 갖게 되고, 또 그걸 이용하려는 세력들이 분명히 있기 때문에 어떤 공식적인 입장과 행동을 하기는 조심스러웠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는 사이, 내부적으로 이번 참사에 지나치게 몰입하거나 대통령 하야 등에 매달리는 것에 대한 우려도 들려왔고, 왜 적극적으로 행동하지 않느냐는 의견도 전달되었다.

3. 개인적으로 겪은 세월호 참사

나는 개인인 동시에 한 단체의 대표라서, 내가 페이스북이라는 사적인 공간에서 나누는 이야기들이 단지 개인적 의미만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조심해야 했지만, 이번 사안은 다른 정치적 이슈와는 확연히 달라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이것은 정치적 논쟁과 당리당략의 문제 이전에, 생명의 문제요, 거짓과 기만과 부패의 문제요, 눈앞에서 참담하게 확인해야 했던 생명 경시 풍조의 문제였다. 강정 이슈, 밀양 이슈, 기타 선거 등의 이슈와 달리, 이는 생명과 안전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가치를 처절하게 망가뜨린 참사였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침묵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했고, 페이스북을 통해 세월호 관련 소식들을 의도적으로 전달하고 알렸다.

4. 정치적 이슈로 번질 것에 대한 경계

한편, 나는 이번 참사가 정치적 함의를 갖는 것은 인정하지만, 자칫 이것이 정치 쟁론으로 빠지면 오히려 본질이 희석되고 훼손되면서 근본적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본다. 그래서 청계광장 시위에서 처음에 “박근혜는 책임져라”라는 구호로 시작해, “박근혜는 물러나라”는 구호로 바뀔 때, 본질이 왜곡될 수 있다는 우려가 들었다. 분명히 이로 인한 소모전이 순수한 의도를 가로막는 걸림돌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5. 고백문의 출발에서 완성까지

IVF 중앙위원회(연 4회 모이는 IVF 간사 회의 최고 의결 기구)는 지난 5.12(월)에 회의를 시작하며, 첫날 저녁 시간을 세월호와 관련된 우리의 속마음을 나누고 함께 눈물 흘리고 애도하며 각자의 생각과 의견을 교환하고 기도하는 시간으로 보냈다. 이 논의를 하면서 우리 안에 공감대가 있었던 것은 :

1) 큰 슬픔과 고통을 당하는 분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고 위로할 필요가 있다.
2) IVF 학생, 간사들도 각자 어쩔 줄 몰라 하는데, 함께 모여 그 슬픔을 내어놓고 함께 애도하며 슬퍼할 필요가 있다.
3) 이 일이 정치적으로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 정권 퇴진 운동이나 대통령 하야 촉구가 사태의 본질은 아니다.
4) 우리의 침묵도 교육이 된다. 이럴 때는 침묵이 답은 아니라고 본다. 우리의 건전한 방식의 참여와 책임과 고통을 나누려는 자세는 4.16 참사 이후의 시대를 열어 갈 학생들에게 좋은 교육의 기회가 된다고 본다.
5) 이 일은 장기적 후유증을 남길 것이다. 우리는 남은 유족들의 고통이 조금이라도 더 빨리 덜어지고 치유되는 일에 힘을 보탤 필요가 있다.
6) 이사회에는 미리 말씀드릴 필요가 있지만, 정치적 행동은 아니므로 승인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릴 사안은 아니라고 본다. 시의성이 중요하므로 이미 좀 늦은 감이 있지만 지금이라도 발표를 하자. 단, 주된 대상은 우리 내부의 간사와 학생들을 염두에 둔 고백문 성격이 크다.

그렇게 논의를 마치고, 월요일 밤에 한 사람이 초안을 작성하여 간사회 내부 페이스북 공간을 통해 의견 수렴을 시작했고, 접수된 피드백을 반영해 그 내용을 지속적으로 손보고 5.16(금)에 최종 고백문을 발표하게 되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분리되어 살지 않기에, 이런 국가적 고통 앞에 무감각하게 지낼 수 없다. 이번 일로 우리는 부패가 막연한 피해를 가져오는 게 아니라, 구체적 고통을 유발한다는 것을 너무 가슴 아프게 깨달았다. 이처럼 부패와 거짓은 심각한 사회적 비용을 유발하고, 많은 이들의 꿈과 생명을 앗아 가는 악이다. 그런 악에 저항하고 감시하고 사회적 과정에 참여하는 것은 세상 속에 발붙이고 살아가는 우리의 당연한 책임이고 소명이다.

세월호 사건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 아프더라도 직시하고 되새겨야 할 문제들이 있다. 그것들을 기억하고 고쳐 가는 것이, 세월호에서 마지막에 기도까지 하였으나 결국 차가운 물속에서 죽어 간 그 아이들의 안타까운 죽음이 헛된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 길이 될 것이다.

김종호 / 목사·한국기독학생회(IVF) 대표

강의/설교 준비

지난 주말,

정말 막판 준비에 열을 올렸다. ^^

우리가 토요일이면 늘 하는,

아내와 민우와 함께 자전거타고 노는 것도 포기하고..

정말 집중이 잘 안되었다.

뭐 내용이야 어떻게든 짜맞추는게 가능하겠는데,

정말 내 마음이 거기에 담기는 일이 잘 되질 않았다.

이럴때 내가 하기 쉬운 실수는,

이렇게 마음이 잘 준비가 되지 않을때 막 오바하는 거다.

감정적인 manipulation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내가 이야기하는 내용을 강요하는 거다.

그런 실수를 한적이 적잖이 있기에,

이번엔 작정을 하고,

그런 생각이 들때마다 막 쉬었다.

낮잠도 자고, 음악도 듣고, 탱자탱자 놀기도 하고…

주로 낮에 아주 시간을 많이 waste하고, 밤 늦게 되서야 발동이 걸리곤 하였다.

덕분에 주말에 잠도 많이 못자고, “커피는 나의 힘”을 외치며 지냈다.

몇가지 lesson.

1. 한참 강의/설교를 많이 할때는 계속 되는 모멘텀이랄까 그런게 있어서, 이런걸 이렇게 하면 좋겠다는 idea들이 계속 많이 생겼었다. 그런데 그런일을 너무 하지 않으니 그런 모멘텀이 없어지는 것 같다.

2. 생각과 마음이 정리가 되지 않는 것은, 대단히 영적인 것일 경우도 있겠지만, 그저 쫓기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이 쉬도록 놓아두는 것이 해결책이 될때도 있다.

3. 내가 지난 2-3년 바쁘게 살면서, 혼자서 하는 생각은 참 많이 하면서 사는데, 정작 섬겨야하는 사람들과 ‘함께’ 생각하고 고민하는 작업을 정말 별로 하지 않고 있다. 이것은 내게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는 것 같다.

4.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을 만날 기대가 크다. 

하나님께서 꼭 만나야 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해 주실 것이다.

1996년 처음 KOSTA 집회에 참석한 이후, 한해도 ‘공쳤다’ 라고 이야기할만한 때가 없었다.

매년 큰 깨달음을 주시거나, 감동을 주시거나, 좋은 사람들을 만나게 해주시거나, 나를 돌아보게 하시게 하셨다.

올해도 기대한다.

가만히 서서 저항하는 사람들

어제 교회에서 목사님의 설교.

Christian들이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잔치에 참여하지 않음으로써,

가만히 이 자리에 머물러 있음으로써,

저항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정말… 정말… 정말… 맞는 말씀이다!

이런 신학적 접근을 최근 나도 많이 접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이것은 대개,

초월적/신비적 영역,

성례전에의 강조

앞으로 올 시대 (내세)에 대한 소망 등과 많이 연결되는 것 같다.

지금 이 시점에서,

이 땅에서,

내가, 우리가 그리스도인과 교회로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좋은 대답을 해주는 접근인 것 같이 느껴지는데,

아직 나로선 배워야할 부분이 참 많다.

나 개인적 뿐 아니라,

공동체적으로 함께 더 찾아보고 싶은 부분이다.

임을 위한 행진곡

군사정변을 혁명이라고,

독재가 경제발전을 위해 불가피한 것이었다고,

인권유린, 각종 정치 탄압, 부패 등등이 정당화 될 수 있는 것이라고,

민주정부 수립을 갈망하는 국민의 저항을 총칼로 진압한 국가의 범죄행위를 정당한 것이라고,

그 독재정권에 협력한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향해.

약자의 희생은 경제발전을 위해 불가피한 것이라고,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은 돈 많고 힘없는 사람에비해 존엄성이 떨어진다고,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정부의 행태를 비판하는 것은 모두 빨갱이라고,

자신의 생각과 조금만 다르면 모두 다 종북세력이라고,

일베가 거칠긴해도 뭐 옳은 소리 하는 거라고.

정권을 위해 국가 조직을 정치적으로 활용하는 것은 필요악이라고,

그렇게 대놓고 이야기는 못해도 그렇게 믿고 행동하는 사람들을 향해.

그런 부조리하고 불합리하고 부정한 사람들을 그저 묵인하거나,

자신의 이익에 도움이 된다고 해서 심지어는 지지하는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나는 말하고 싶다.

나는 도무지 당신들을 이해할 수 없다.

당신들을 보면 분노가 치밀어 결딜 수 없다.

그러나 나는 당신들을 이를 악물고 tolerate 하겠다.

그러나,

나는 도저히 당신들이 옳다고 이야기할수는 없다.

언젠가, 옮음이 옮음으로 드러나는 그 날은 올 것이다. 반드시 올 것이다.

그것은 내 소망이고 신앙이다.

5월 18일.

용기있는 광주의 시민들이 정치군인들과 독재에 항거하여 맞섰던 일을 생각하며,

이제는 정부가 부르지도 못하게 하는 그 노래를 올려본다.

로마서를 읽으며

이번달부터 로마서 QT를 하고 있다.
원래 계획은, 로마서를 좀 꼼꼼히 공부하면서 보겠다는 것이었는데,
도.무.지. 그럴 여유를 찾지 못해서 그냥 약간 더 심각한(?) QT 수준으로 보고 있다. ^^

도대체 New perspective와 관점에서 읽어내려가는 로마서와,
전통적 관점에서 읽어내려가는 로마서는 어떻게 다를 수 있을까 하는게 내가 이번에 로마서를 읽어내려가는 가장 중요한 포인트이다.

적어도 현재까지의 내 생각은 이렇다.

– Summary: New Perspective와 전통적 관점 모두가 매우 valid한 point를 가지고 있다.

– New Perspective는 Then & There의 차원에서, 성경 본문의 역사성, 현장성, 1st hand reader 에 더 중점을 두고 읽고자 하는 시도이고, 전통적 관점은, Here & Now의 차원에서, 성경본문의 통시성, 초월성, 적용에 더 중점이 있다.
(New perspective, 유대인의 메시아, 구약 언약의 성취, 하나님 통치의 회복… .vs. 전통적 관점, 죄에 빠진 인간, 죄의 용서 등등 )

– 로마서는 유대인의 메시아가 어떻게 전 세상의 구세주가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설명하고자 하는 바울의 시도가 아닌가 싶다.
다시 말하면, New perspective의 관점과 전통적 관점을 연결시키는 다리가 될 수 있는 책이 아닌가 생각한다.
유대인의 메시아에 대한 구체적인 역사적 문화적 배경이 부족한 사람들에게, 그들의 언어로 예수가 구세주되심을 이야기하는 책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방인들에게는 오히려 더 relevancy를 가질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할수도 있다.

– 바울은, 이 두가지중 하나도 그냥 포기하지 않는 것 같다.
역사적 관점의 승리하신 메시아는, 통시적 관점의 대속 제물이 되신 예수와 통하는 것 같다.

– 이방인인 나로서는, 좀 더 마음 편하게 substitutionary atonement의 관점으로 지금 로마서를 읽어보고 있는 중이다. 나는 어차피 1세기 유대지방에 살고 있는 사람이 아니고, 유대인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지 못하므로, 내가 복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st century Judaism으로 돌아가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통시적/초월적 관점으로 풀어내 놓은 해설서를 읽는 것이 더 도움이 될 것이다. 로마서는 그런 책이 아닌가 싶다.

* 이런 것도, 누가 좀 잘 가르쳐 주면 좋겠습니다.
저보다 더 이런거 잘 아시는 분들도 많이 계실텐데…
한줄씩 좀 남겨주세요!
시간이 없어서 길게 풀어서 설명을 못했지만, 로마서를 가지고 New perspective와 전통적 관점 사이에서 갈등하며 읽어본 분들이 계실텐데 말이죠…

치열한 세상속에서.

뭐 다른 사람들도 다들 참 치열하게 바쁘게 살겠지만,

나도 그렇다.

요 며칠은 새벽 1-2시까지 깨어서 유럽쪽 사람들과 실시간으로 연락하며 실험을 하고 있고,

아침 6시에 일어나 그쪽에서 보내온 update을 읽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있다.

(어제는 그 여파로 오후에 완전히 해롱해롱하는 바람에, 아예 한 두어시간 일을 접고 쉬었다. -.-;)

일하는 템포가 대단히 빠르다.

가령, 오후 4시에 미팅을 하고, 그 다음 미팅을 그 다음날 아침 8시로 잡는다.

그리고는, 야… 우리에게는 그 다음 미팅까지 앞으로 16시간이나 시간이 있다… 하면서 사람들이 미팅을 마무리 한다.

그리고 실제로 16시간 뒤 미팅에는 다들 상당히 진전된 내용들을 가지고 들어온다.

몇십만불되는 돈 쓰는 것을,

불과 2-3분 만의 discussion을 가지고 결정해야하는 경우도 있고,

한편으로는 회의 준비를 하면서, 전화로는 독일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고, 옆의 직장 동료가 하는 일을 support하는 일을 한꺼번에 해야할때도 있다.

이런 세상 속에서,

10분의 시간에는 참 많은 일을 할 수 있고 해야한다.

정말 치열한 세상이다.

그.런.데.

한편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렇게 세상이 치열하게 사는데…

돈을 위해서도 이렇게 자신의 모든 열정을 쏟아부어 사는데…

복음을 위해 치열하게 사는 것은 왜 그렇게 잘 안되고 못하는 것일까?

크리스천들이,

좋아하는 크리스천 음악을 듣고,

좋아하는 크리스천 작가의 책을 읽으며,

내가 무슨 밥 먹었나 하는 것을 가끔 facebook에 올리는 와중에도…

세상에서는,

1분 1초를 아껴가며, 온 에너지를 다 쏟아, 

극도의 긴장감 속에서, 그렇게 치열하게 사람들이 살고 있다.

나는,

교회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과 같아지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세상의 모든 것들을 벤치마킹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다고 믿는다.

그러나,

세상은 시속 200마일로 달리고 있는데,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스카이콩콩을 타고 경치를 구경하며 가고 있다면… 

게다가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게으름이나 두려움 등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라면…

이제는 스카이콩콩을 좀 버리고, 최소한 자전거라도 타봐야 하는 것은 아닌가.

최근,

나의 교회생활 / 신앙생활을 돌아보며,

그리고 내가 속한 공동체를 생각하며,

그리고 반성하며… 해본 생각들이다.

나 스스로,

다시 신발끈을 고쳐매어 본다.

(사족 1)

아, 물론 시속 200마일로 늘 달리는 사역자들을 보기도 한다.

그런데 그중 많은 사람들은 교회라는 좁은 동네 마당 안에서 열심히 먼지를 일으키며 달리고 있지, 

저 멀리 있는 목표를 향해 달리지 않는 것 같아 보인다.

(이건 또 다른 글에서 다루어야 할 문제다. ^^)

(사족 2)

세상이 그렇게 바쁘니까,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slow down 하고, 자연도 즐기고, 가족과 시간도 잘 보내고 해야한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그 주장도 물론 옳다고 생각한다. ^^

안식은, 하나님에 대한 궁극적 신뢰의 표현이 아닌가!

그렇지만, 게으름은 7 deadly sin 가운데 하나이다.

하나님 안에서 안식하고 평안을 누리는 것과 게으름 사이에 분별해야할 fine line이 분명 있는 듯 하다.

(사족 3)

그리고,

사역자의 삶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 달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형태로든, 내 preference, comfort, privilege 등을 포기하는 일이 있어야 한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아니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과 같은 권리를, 자신이 헌신한 가치를 위해 포기하는 일을, 누군가는 해야 세상이 바뀌는게 아닐까.

 

예상치 못한 사람으로부터의 깨달음

미국에 95년에 왔으니, 이제 미국에 온지 20년이 다 되어 간다.
지난 20년 미국 생활 중, 내게 여러 영향을 끼친 소중한 사람들이 참 많이 있다.

그런데 그중 한 사람은, 참 특이한(?) 경우이다.
박사과정때 내 옆에 앉아 있던 유대인 친구인 S 이다.

이 친구는, 대단히 세속적인 사람이었다.
아주 똑똑하다는 느낌을 받지는 못했는데, 참 말 잘하고, 이익에 밝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재빠르게 움직일 줄 아는 사람이었다.
실험을 하다가 잘 안되면, F*ck! 이라며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기도 하고…
뭐 하여간 내가 다니던 학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부류의 사람은 아니었다.

졸업 후,
연구가 자기의 분야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는지…
재빠르게 분야를 바꿔서,
지금은 가끔 TV에도 나오는 주식 분석해주는 사람이 되었다.
돈도 아주 많이 벌고… 그야말로 ‘잘 나가는’ 사람이다.

그 당시 나는 아주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많이 노력하고 있었고,
한편 나는 그 친구를 경멸했다. (아주, 아주, 나쁜 자세이다!)

그런데,
한가지 그 친구를 보면서 느낀 것은…
나는 늘 하나님의 뜻, 목표, 소명, 뭐 이런 것에 ‘사로잡혀서’, 그것에 맞지 않는 주변의 모든 것들을 정죄하고 주변의 많은 사람들과 갈등하고 살고 있는데…
이 친구는 주변의 모든 사람들과 다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다.

무엇보다 그 친구를 보면서 참 많이 배운 것은,
이 친구가 자신의 아내를 대하는 자세였다.
이 친구는, 정말 그야말로… 무엇이 옳다는 어떤 신념 그런거 없고, 그냥 이익을 찾아서 움직이는 친구인데,
자신의 아내를 참 끔직하게도 사랑하고 아꼈다. 지금도 그 친구는 참 좋은 가정생활을 하는 아빠다.

그 당시 신혼이었던 나는,
내가 옳다고 생각하던 신념이 결혼 생활 속에서 compromise 된다는 생각 때문에 대단히 갈등하고 있던 차였다. (후에, 그때 내 생각이 얼마나 유치한 것인지 많이 깨닫게 되었지만.)
그저 돈되는 것이라면 뭐든 좋다…고 접근하는 그 친구는 아내와 알콩달콩 잘 살고,
하나님께 헌신했다고 하는 나는, 신앙적인 가치라는 가면을 쓴 내 신념을 아내에게 강요하고 있고…
참 많이 비교가 되었다.

그 친구와의 만남은,
내가 ‘유연한 신앙’을 생각하게 하는 중요한 단초가 되었다.

그 친구는 자신이 가진 신념이 없기 때문에,
주변의 많은 것들과 화목할 수 있었고,
나는 내가 가진 신념이 너무 크기 때문에,
주변의 많은 것들과 불화하고 있었다.

강한 신념은, 정말 갈등을 불가피하게 초래하는 것일까?
나는 깊이 고민했다.

지금 나는 그 당시보다는 훨씬 더 유연한 신앙의 자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주변 사람들은 뭐 그렇게 보는 것 같지는 않지만 서두 ㅎㅎ)

그리고 그런 유연한 자세를 통해,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이 땅에서 살아가는 법을 아직도 배워가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그런 유연한 자세를 그나마 조금 더 가짐으로써,
나 자신을 좀 더 볼 수 있게 되었고,
하나님을 더 잘 대할 수 있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그토록 사랑하시는 이 세상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나가게 되었다.

지금도 나는 S 친구와 가끔 연락을 하면서 지낸다.
그 당시 나는 그 친구를 Dr. Evil 이라고 불렀고, 그 친구는 나를 Dr. Good 이라고 불렀다.
아이러니컬하게도, Dr. Good은 Dr. Evil로 부터 많이 배웠는데,
Dr. Good이 Dr. Evil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친건 별로 없는 것 같다.

나는 지금도 배워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