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떤 일을 할때,
상대가 그렇게 하기를 기대하는 것.
혹은 내가 어떤 일을 하지 않을때,
상대가 그렇게 하지 않기를 기대하는 것.
뭐 그런 것이 아닐까.
그러나,
예수님의 황금률이 과연 그런 것일까 하는 것에 대해서는 의문이 많다.
상호주의(reciprocity)는,
상대의 반응에 대한 기대가 중요한 key인 반면에,
(다시 말하면 상대의 반응을 이끌어 내기 위한 수단)
예수님의 황금률은,
나의 행동이 중요한 key인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다시 말하면 내 행동 자체가 목적이 되는 것)
그런의미에서,
황금률이 이야기하는 매우 중요한 key는
자기성찰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추가 설명좀…-.-;
(요새는 독해력이 현저히 떨어짐을 느낍니다.)
아뇨, 아땅님의 독해력이 아니라
제 글쓰기가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의 상호주의는 상대로부터 무엇을 얻어내려는 것에 목표가 있다면,
복음적 상호주의(황금률)은 그것을 통해서 상대로부터 무엇을 얻어내지 못해도 그것을 지키는 것 자체로 의미가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황금률을 지키며 살아가는 삶은,
내가 다른사람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내가 나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등등의 자기 성찰이 그 핵심적인 내용이 된다는 말씀이었고요.
음…
이렇게 써놓고도,
좀 난해하게 들리네요. ^^
사실 생각이 난해한건 아닌데,
글쓰기가 부족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아, 이제 조금 이해한 것 같습니다.
저는 Servant Leadership을 보면서 비슷한 생각을 했었습니다.
세상에서 servant leadership은 리더가 되기(목표) 위해서 servant 라는 방법론을 차용한다면,
마태복음 20: 26(너희 가운데서 큰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이 말하는 포인트는 ‘리더 되기’가 아니라
‘섬김’ 그 자체에 방점이 있구나 생각했습니다. (마20:28에 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함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서요.)
상호주의에서도 그렇고 섬김의 리더십에서도 그렇고,
세상에서의 것과 성경에서의 것이 그 촛점과 목적이 다르다면, 방법론이 같고 쓰는 용어가 같다고 하더라도 ‘같은 것이라 부를수 있을까?’ 생각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