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종교적 기독교 (6)

성경에 나와있는 ‘description’과 ‘prescription’을 좀 구분하는 일을 한번 해보자.

가령,
골로새서에는, 종이 상전에게 충성을 다하라고 나와있다.
이걸 prescription으로 생각하면 이건 따라야할 명령이므로 심지어는 노예제도를 지지하는데까지 이를 수 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실제 기독교 역사 속에서 그런 오류를 범하면서 노예제도를 지지했던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다.)

그렇지만, 이걸 description으로 생각하면 이것은 노예제도가 매우 편만한 그 당시 사회 체제 속에서 새로운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된 사람들이 어떤 삶의 자세를 가져야하는가 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노예가 상전에게 충성을 다하라는 것은, 주어진 생활을 성실하게 그리고 integrity를 잃어버리지 말고 살라는 권면이다.
(눈속임 하지 말고, 주께 하듯 하고… 등등)

자칫,
몇천년전에 고대시대에 쓰여진 문서에 나타나있는 어떤 ‘스토리’들을 읽으면서,
그것에서 무리하게 우리가 따라야할 ‘명령’을 찾아내려고 하다보면,
이런 오류를 범하기가 쉽다.

그런 의미에서 description과 prescription을 잘 분별하는 일은 참 중요하다.

비종교적 기독교 (5)

어제의 예가 너무 우스꽝스러운 것이라고 생각된다면 다음의 예는 어떨까?

‘성경적 경제관’의 예를 한번 들어보자.

‘성경적 경제관’이라는 것을 이야기 하는 사람들은 흔히 ‘토지는 하나님의 것’이라고 이야기하며 19세기의 경제학자 헨리 조지 (Henry George)를 신봉한다. 아니 오히려 헨리 조지는 그래도 현실 정치가로서 조세개혁 같은 형식으로 자산 불균형이 심화되는 것을 막으려는 현실적 노력을 한데 반해, 헨리 조지의 지금 추종자들은 토지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한 아무 소용이 없다는 방식으로 주장을 하기도 한다.

혹은,
‘희년’이라는 제도가 구약에서 언급되었다고, ‘희년’에 엄청 목매는 모습을 보기도 한다. 현재 어떻게 희년을 구현할 수 있을까 뭐 그런.

(아, 성경적 경제관을 이야기하는 분들이 다 그렇다는 건 물론 아니다. ^^ 일부 어설프게 성경적 경제관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뿐이다.)

나는,
헨리 조지의 생각도 참 좋다고 생각하고, 희년의 아이디어도 아주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구약에 나와있는 토지 사유 금지 라던가 희년이 이야기를,
지금도 행해야하는 ‘원칙’으로 받아들이면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이야기가 되어버리기 쉽다.

어쩌면,
토지 사유 금지의 정신이라던가, 희년의 정신에 담겨있는,
‘함께 사는 세상’에 대한 정신, ‘인애와 정의’에 대한 정신 등등을 현대에 적용하는 다른 방법을 찾아야하는 것은 아닐까?

나는 경제학을 잘 모르지만,
21세기 경제학자들이 이야기하고 개발해놓은 많은 경제학 이론들, 현실에서 정책을 세우고 입안하는 사람들이 쌓아놓은 노하우와 경험들 등등의 차원에서 보았을때,
19세기 헨리 조지의 생각은 그 당시로는 참 좋은 생각일 수 있으나 지금은 너무 뒤떨어지고 낡은 생각일수도 있을 것 같다.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는 ‘정신’을 좀 제대로 파악하고,
지금의 전문가들이 성취해놓은 ‘세상의 지식과 지혜’를 활용하여,
현실 속에서 동작 가능한 것을 시도하는 것이 어쩌면 정말 ‘성경적’인 것은 아닐까.

다시 말하면,
성경에 나와 있는 것을 너무 prescriptive하게 볼 것이 아니라, descriptive하게 보는 일을 더 해야하지는 않을까 하는 것이다.

성경적 경제관 이야기를 들었지만,
성경적 가정, 성경적 직업관, 성경적 기업, 성경적 정치, 성경적 교육… 이런 비슷한 예는 많이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비종교적 기독교 (4)

그리스도인으로서 성경을 믿음과 실천의 중요한 기준으로 삼는 것은 마땅히 해야할 일이다.
자연스러우면서도 건강한 일이다.

그런데,
성경만을 유일한 삶의 기준으로 삼는다거나,
성경이 언급하지 않는 내용을 억지로 성경에서 짜내어서 그것을 ‘성경적’이라고 주장하는 일은 사실 좀 무리가 따른다.

좀 우스운 예를 들어보자.
성경적인 운전법 이라는 것이 있을까?

음… 뭐 있겠다.
규칙을 잘 지키고, 보행자에게 양보하고, 과속하지 않고, aggressive하게 운전하지 않고, 가능하면 연료를 아끼고, 뭐 그런 것들…

그런데,
이걸 성경을 마구 뒤져서 이것이 ‘성경적 운전법’이라고 주장할 만한 것이 있을까?

음… 옛날에는 자동차가 없었으니,
나귀나 말을 타는 예를 성경 속에서 찾아서 적용해보아야 하나?
발람의 당나귀 이야기, 예수님이 예루살렘 입성하는 이야기같은 것들?

벌써 좀 이상하게 흘러간다는 것을 당연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문제는, 그냥 ‘상식적’으로 좋은 운전자가 되는 것에대한 기준이 충분히 있는데, 그걸 억지로 성경 속에서 ‘찾아내려고’ 하는 것에 있다.

굳이 말하자면,
‘기독교적 운전법’은, 그냥 상식적으로 법을 잘 지키는 안전운행을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걸 억지로 성경에서 뭔가를 찾아서 근거를 마련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이 너무 자주,
‘억지로’ 성경에서 어떤 원칙을 찾아내려고 한다.

비종교적 기독교 (3)

우리는 신구약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음을 믿으며, 그 진실성과 권위를 믿는다. 성경 전체는 기록된, 하나님의 유일한 말씀으로서, 그 모든 가르치는 바에 전혀 착오가 없으며, 신앙과 실천의 유일하고도 정확무오한 척도임을 믿는다.

We affirm the divine inspiration, truthfulness and authority of both Old and New Testament Scriptures in their entirety as the only written word of God, without error in all that it affirms, and the only infallible rule of faith and practice

로잔언약에 이렇게 나와있다.
“그 모든 가르치는 바에 전혀 착오가 없으며 신앙과 실천의 유일하고도 정확모오한 척도”

그런데 이걸 영어로 보면 약간 어감이 다르다.
“without error in all that it affirms, and the only infallible rule of faith and practice”

말하자면 한국어로 다시 풀어보자면 이런 식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성경이 가르치는 내용들에는 착오가 없다. 그리고 유일한, 믿음과 실천의 법칙이다.

음….
그러니까, 억지로 paraphrase를 하자면 이런거다.
성경이 모든 것을 다 가르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성경이 가르치는 것들에는 오류가 없다.
그리고 믿음과 실천의 법칙들이 여러개가 있을 수 있는데, 그중 유일하게 infallible(무오한) 법칙이다.

너무 억지 해석인가?
사실은, Francis Schaeffer는, 바로 이렇게 해석할 여지가 있다는 이유로 로잔언약에 ‘자유주의적’ influence가 있다고 비판을 했었다.

그런데, 나는 내가 위에 써 놓은 것이 꽤 자연스러운 해석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글을 쓰면서는, 그런 관점을 갖는 것이 우리가 어그러진 종교성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이라고 argue 해보고 있는 것이다.

사랑이 없는 사명

지난 주말에,
후배 간사 몇 사람에게 좀 긴 이메일을 보내면서 사랑이 없는 사명에 대해 잠깐 이야기 했었다.

사랑이 없는 사명은,
자신을 dry하게 만들고, 급속히 burn-out 시킨다.

사랑이 없는 사명은,
나로 하여금 다른 사람의 인정에 매달리게하고,
쉽게 실망하게 하고,
인내하는 힘을 잃어버리게 한다.

사랑은 사명을 감당하도록 만드는 힘을 공급해 주지만,
사랑 없는 사명은 점차 그 사명을 감당할 힘을 고갈시킨다.

사랑없는 사명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보지만,
사랑은 사람들을 사람으로 대하게 한다.

사명으로인해 지치는 사람은 있지만,
사랑으로 인해 지치는 사람은 없다.

낙망하고 지치는 이유는,
사명이 흐릿해져서가 아니라
사랑에 메말랐기 때문이다.

그 이메일에다가 뭐 이런 이야기들을 좀 더 써보려고 했으나,
잔소리가 되는 것 같아 말았다. ^^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기가막히고 감탄하게되는,
그 십자가의 사랑을,
‘식상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 사역자들이 되면 참 좋겠다.

비종교적 기독교 (2)

20 여년전, ‘기독교적 세계관’ 이라는것을 공부하면서 많이 들었던 이야기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기독교적 학문’, ‘기독교적 가정’, ‘기독교적 정치’, ‘기독교적 경제체제’, ‘기독교적 기업’, ‘기독교적 자녀교육’ 등등…

그리고 나름대로 정말 내 모든 삶의 영역에서 예수의 주권을 인정하고 살기위해 몸부림쳤고,
그런 차원에서 내 삶 속에서 모든 영역에 ‘기독교적’ 혹은 ‘성경적’ 대안을 찾고 싶었다.

그런 시도는, 매우 좋은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었고, 내 개인적으로 신앙을 성숙시키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렇게 함께 노력했던 사람들은 여태껏 내게는 소중한 ‘동지’로 남아있다.

그런데,
과연 그런 모든 영역에 ‘기독교적’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시도가 정당한 것일까?
과연 ‘기독교적 xx’라고 이야기할 수 없는 영역이 세상이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식의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그냥 몹시 불경한 것일까?

비종교적 기독교 (1)

보통 ‘비종교적’ 기독교란 어떤 것일까.
종교적 의식이나 감정적 흥분에 사로잡혀서 이분법적인 삶의 자세 지양하는 기독교를 이야기한다고 쉽게 생각할 것 같다.
종교적 의식보다는 진실된 하나님과의 관계와 사람과 세상을 향한 사랑과 섬김의 기독교.
이 땅에서의 책임을 다하고, 세상과 소통하는 기독교.
뭐 그런 것들 아닐까.

사실 맞다.
그런것은 분명히 비종교적 기독교일 것이다.
(사실 내가 교회에서, ‘비종교적 기독교’라는 주제로 한 6번 정도짜리 강의 시리즈를 한번 해보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별로 원하는 사람이 없는 듯 해서, 약간 주춤하고 있긴 하다. 그 강의에서는 위에서 이야기한 그런 내용을 많이 다룰 것 같다)

그런데,
그것과는 좀 다른, 혹은 그것보다는 약간 더 큰 차원에서 비종교적 기독교를 깊이 좀 다루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위에서 언급한 비종교적 기독교는 지극히 경건주의적이고 개인의 진실됨을 많이 강조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번 시리즈의 글에서는,
신학적 측면에서 이 문제를 좀 다루어 보고 싶다.
그래서, 종교성을 탈피하는 것이 ‘개인적’ 문제이기도 하지만,
좀 다른 차원에서는 ‘신학’의 문제일수도 있겠다는 argument를 해보고 싶다.

나는 뭐 사실,
신학적 지식이 깊지 않으므로,
누가 이런 관련된 가르침들을 좀 잘 정리해서 내게 가르쳐주거나 자료들을 좀 알려주면 참 좋겠는데… ^^
특히 이렇게 혼자 이런 생각을 하다보면 늘 궁금한 것이,
과연 교회사 속에서 이런 비슷한 아이디어를 이야기한 흐름은 없었을까 하는 건데…
신학도 잘 모르고, 교회사도 잘 모르니… 뭐 그냥 이렇게 써볼 수 밖에.

Tangible한 도움을 주는 일

내가 처음 예수님을 믿고나서,
나를 몹시 힘들게 했던 것은 내가 공부하는 ‘재료공학’이 도대체 누구에게 무슨 도움이 되느냐 하는 것이었다.
이걸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확장되는데 기여한다고 이야기하기도 어렵고, 이걸 열심히 하면 가난한 사람에게 유익이 간다거나 그런것도 아니고…
내가 하는 일의 직접적인 열매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 때문에 나는 몹시 답답했다.
그래서 정말 전공을 바꾸어야 하나 하는 고민도 많이 했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한게 대학교 3학년 때 였으므로,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고, 어쨌든 여태껏 인도하신 하나님을 믿고 그냥 가보자… 이렇게 그냥 결정을 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이 일이 정말 내 적성에 100% 잘 맞는 일이라는 확신은 더 없어갔고, 석사과정 2년차때에는 그 회의가 극에 달했었다.

그때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여러가지 책도 읽고 공부도 하면서,
그 ‘하나님 나라’의 모든 tangible한 열매를 다 내가 맺도록 하겠다는 생각 자체가 어쩌면 불합리한 생각일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고,
나는 내 적성에 딱 들어맞지 않는 이걸가지고 결국 박사까지 받았다.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났고,
이제 새 직장에서 하는 일은, 정말 이 product가 직접적으로 사람들에게 유익을 끼치는 것들이다.

당뇨병, 뇌전증(간질), 심장질환, 우울증, 시각장애 등 여러 분야의 질병이나 장애를 극복하도록 돕는 일을 하고 있다.
정말 내가 만드는 이 제품이 바로 어떤 환자의 몸 속에 들어가기도 하고, 어떤 사람의 상태를 계속 monitor하는 일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예전에 그렇게도 내가 바랐던 ‘tangible하게 사람을 돕는 일’을 마침내 하게 되었는데,
그것으로인한 excitement가 내게 별로 크지 않다.

왜 그럴까?

어쨌든 내게 허락된 이 값진 일을 하면서, 그 일의 효과와 결과와 consequene들을 깊이있게 생각하는 일들을 더 해보아야 할 듯 하다.

수렁에 빠졌을 때 말씀 묵상

1.
깊은 수렁에 빠져 있을때,
그래서 혼자 나올 수 있는 상황이 아닐때,
정말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자신이 깊은 수렁에 빠져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다.

2.
혹시 그 상황을 알게 되더라도,
자신이 나올 수 있다고 착각하고 외부로부터의 도움을 거절하는 것이다.

3.
그렇지 않으면,
도무지 도움이 되지 않는 것에 희망을 걸고 엉뚱한 시도를 하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어려움에 빠져있는 대부분의 사람은 이 셋 가운데 적어도 하나의 함정에 빠져있다.

그런데,
사실 조금만 제 정신을 차리고 보면, 이 세가지를 분별해내기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나는 매일 말씀을 묵상하는 일이,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기르고,
나 자신을 좀 더 자라도록 이끌지만,
그저 좀 ‘제 정신’을 찾도록 하는데에도 큰 도움을 준다고 생각한다.

만일 내게 말씀 묵상이 없었다면,
그나마 이 정도 정신차린 나도 없었을 것이다.

말씀이 있어서… 참 다행이다.

내 새해 소망

새해에 약간 긴 시리즈의 글을 쓰느라,
새해 소망, 새해 결심 이런거 하는 글도 쓰지를 못했다. ^^

그런데 사실,
내 새해 소망은 ‘소망’이다.
혹은 ‘희망’이다.

나를 포함해서 정말 많은 이들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희망’을 깨닫게 되면 좋겠다.

어쩌면 이미 우리에게 다 주어진 그 ‘희망’을 발견하게 되면 좋겠다.

많이 부족하지만,
내가 주변의 사람들에게 그 ‘희망’을 remind 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 작년보다 조금 더, 조금 더,
우리 주님을 깊이 사랑하며 따르고 싶다.
요한복음에 나타나는 그 ‘사랑’이 유난히 마음 깊이 담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