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에 사로잡히기 (9)

희망을 갖는 다는 것은,
어떤 궁극적 이상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지금 희망적인 ‘자세’를 갖는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우리의 궁극적 희망의 근거가 ‘하나님의 통치’라면,
지금 우리 삶의 자세 역시 자포자기, 현실회피의 모습이어서는 안된다.
냉소적이거나 현실비관적 자세를 가지고 있으면서 궁극적 희망은 여전히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할수 없다.

우리의 궁극적 희망이 분명할수록,
오히려 지금 어려움의 상황에서 불꽃같이 빛나는 자세(attitude)가 있어야 한다

나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낙망하고 있는 내 후배들에게,
내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 자신에게,
내 온 몸의 힘을 다 모아서 큰 소리로 고함을 치고 싶다.

우리는 다시 옛날로 돌아갈 수 없는 사람들이다.
물질주의적 종교적 희망이나, 인본주의적인 shallow한 희망으로 다시 돌아갈수는 없다.

그렇지만,
우리 앞에 가야하는 길은, 그것과 비교할 수 없는 희망의 길이다.

함께 좀 힘을 내자.
우리 주님의 음성에 우리 모든 마음을 다 빼앗겨보자.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요한복음 16:33)

희망에 사로잡히기 (8)

자신에 대한 믿음을 갖는 것이나,
조엘 오스틴 식의 ‘긍정의 힘’을 이야기하는 것은,
결코 기독교적이라고 보기 어렵다.

이런 이야기들은,
낙관의 열매로서 결국 내가 잘되는 것을 이야기하고, 결국은 물질적 풍요나 현실적이고 즉각적인 문제 해결을 이야기한다는 차원에서, 적어도 나는 결코 기독교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러나,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meta narrative를 보면,
결국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하시고, 악을 심판하시고, 세상을 회복하시고, 결국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judge하신다는 엄청난 scale의 낙관론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이 가져야하는 (혹은 가지는 것이 자연스러운) 자세는,
낙관적인 자세이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께서 선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세상을, 그리고 나를 끔찍하게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이정도라면,
낙관적 자세를 견지할만 하지 않은가!

결국 낙관적 자세를 가지면 잘 되어서 내가 현실적으로 유익을 얻게된다는 그런 천박한 수준의 낙관론이 아니라,
결국은 그 선하신 하나님께서 지금 이 상황을 붙들고 계시다는, 깊은 믿음으로만 고백할 수 있는 그런 낙관론.

하나님께서는 때로,
그런 낙관적 자세를 통해서 그분의 일들을 이루어나가시고,
역사를 진보시키시기도 하시고,
하나님 나라를 더 넓게 선포하기도 하시고,
사람들을 세우기도 하시는 것은 아닐까.

다시 한번,
“우리 안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들을 되새겨 보고,
성경의 meta narrative를 이해해야만 가질수 있는 그런 깊은 낙관적 자세를 회복하는 것이 필요하지는 않을까.

희망에 사로잡히기 (7)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희망이 가지는 중요한 특징은 포용과 관용이 아닌가 싶다.

공격적이지 않고, 오래 참을 줄 알고, 온유하고,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음… 어디서 많이 듣던 것 같지 않은가?
결국 진정한 희망과 사랑의 속성이 매우 비슷해진다.

나는,
진정한 희망에 사로잡히기 위해서는 사랑에 함몰되는 것이 참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혹은 사랑이 진정으로 사랑으로 드러나지 않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희망을 소멸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정말 희망을 다시 보기 위해서,
그 희망이 우리 안에서 건강하게 자라나는 일을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
우리는 많이 사랑해야하지 않을까 싶다.

‘무엇이 옳은가’ 하는 질문보다는,
‘무엇이 사랑인가’ 하는 질문을 훨씬 더 많이 던지고,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많이 용납하는 일을 해야하지는 않을까 싶다.

정치적인 견해, 신앙적/신학적 견해 등등이 모두 사람들 사이에서 심하게 polarized되어 있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는데,
이런 속에서 다시 희망을 찾기 위해… 사랑에 좀 주목해보는 것이 필요하지는 않을까.

진영논리에 사로잡혀서 싸우는 일을 그치고,
내가 틀릴 수 있음을 겸손히 받아들이고,
정말 나와 다른 사람들을 용납하고 오래 참아내는 그런 사랑.

희망에 사로잡히기 (6)

미숙함은 왜곡을 초래한다.
그러므로 성숙을 향해서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해야할 중요한 자세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미숙함을 정죄할수는 없다. 미숙함을 지적하고 그것으로부터 빠져나오도록 권면하고 도와줄수는 있으나 미숙함을 정죄하는 것은 그렇게 하는 사람의 교만의 문제일 수 있다.

기복주의적 희망이나 인본주의적 희망은 모두 추구할모습은 아니다.
그러나, 만일 그것이 미숙함에서 비롯되고 있는 것이라면, 그것을 그렇게 정죄하지 말아야할지도 모른다.

나는 ‘옳은’ 신학적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진리’를 이야기하지만 ‘사랑’이 없기 때문에,
때로 그 ‘옳은’ 기준을 가지고 미숙함을 사랑없이 정죄하는 일이 너무 많다고 생각한다.

때로는 그렇게 미숙한 사람이 나이가 많은, 오래 교회를 다닌 어른일수도 있다.
때로는 미숙한 어떤 ‘시대’가 있을 수도 있다.
때로는 특별히 어떤 생각이나 가치의 흐름의 어떤 부분이 유난히도 미숙한 어떤 그룹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런 미숙함은 물론 벗어나야할 모습이지만,
그 미숙함을 지나치게 정죄하면,
그 미숙한 사람은 ‘진리’에 대해서 적개심을 갖게 되거나, 아니면 아예 모든 의지를 잃어버린채 무기력해져버릴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으로 미숙함을 견뎌주고, 그 미숙함에 머물러 있는 것을 그저 용납하여주는 것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결국 미숙함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이,
윽박지름에 대한 반응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개인, 집단, 시대에 자연스럽게 하시는 ‘일하심’에 반응해서 organic하게 이루어지도록 해야한다.

나는 다시 희망을 찾는 일을 생각하면서,
어쩌면 미숙함에서 오는 미숙한 희망을 지나치게 공격하여,
가라지와 함께 알곡을 함께 죽여버리는 우를 범하지는 말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미숙한 거짓 희망을 조금 더 참아주고, 기다려주고,
그저 꾸준히 참된 희망을 이야기하되,
거짓 희망에 대한 정죄를 좀 자제할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본다.

희망에 사로잡히기 (5)

그런데, 희망이 없으면 자칫 잃지 말아야할 다른 것들을 함께 잃어버릴 수 있다.

앞에서 이야기한대로, 내 ‘기독 청년’의 시기에, 나는 정말 열정적으로 살았다.
뜨겁게 기도하고, 열심히 성경연구하고, 열정적으로 사람들을 키우며 보냈다.
그런데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던 하나의 축은, 내가 가지고 있었던 왜곡된 희망들이었다.
(즉 기복주의적 희망, 인본주의적 희망들이었다. – 물론 기독교의 탈을 쓰고 있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참 부끄러운 생각들을 가지고 있기도 했지만,
한편 그런 왜곡된 희망들 때문에 나는 정말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갔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감으로써 오히려 내가 가지고 있던 희망이 왜곡되어 있음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내 왜곡된 희망 때문에 오히려 그 왜곡된 희망을 무너뜨릴 수 있게 되었다고나 할까.
그리고 그 모든 과정 속에는, 하나님께 죽어라고 붙어있었던, ‘하나님과의 동행’이 있었다.

내가 지금의 ‘기독청년’들을 보면서 가장 걱정하는 것은,
(아니 기독청년만의 문제는 아니겠다. 그냥 이 세대의 문제이겠다.)
이들은 이제 그런 왜곡된 희망 조차도 없이 살고 있다는 것이다.
왜곡된 희망이라도 가지고 있어야 결국 그 왜곡을 발견하는 동인도 가지게 될텐데…
그저 그런 왜곡된 희망도 없으니 그저… 축 늘어진 젖은 빨래와 같이 그저 빨래줄에 매달려만 있는 것 같아 보이는 것이다.

희망에 사로잡히기 (4)

거짓 진실이 그 거짓됨을 드러내고 왕좌에서 내려오기 위해서는,
그 거짓 진실의 바닥이 명확하게 드러나고, 그 거짓 진실에 매달리고 있던 사람들이 깊게 실망하는 일이 있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의미에서,
혹시 지금 나와 같은 사람이 경험하고 있는 이 절망은,
예전에 가지고 있던 거짓 희망의 뿌리를 뽑아내는 과정은 아닐까.

예를 들면…
나는 386 세대이다. 당연히 386세대가 공유하고 있는 그런 생각이 내게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나는 시민의 힘으로 독재가 무너지는 것을 보았다.
사회가 급속도로 투명해지고, ‘민주화’가 이루어지는 과정을 지켜본 것이 내가 20대, 30대였다.

나는 마침내 진정한 의미의 민주정부가 설립되고, 정권교체가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서 감격했었다.
그래서, 정말 건강한 시민의 힘으로 민주정부가 제대로 세워지면, 정말 민중을 위한 세상이 열릴 것으로 생각했었다. 아니 적어도 그렇게 발전해 나갈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민주정권은 수구세력에 의해 무너지고, 지금 한국의 정치판도를 보면 가슴이 꽉 막힌듯 답답하기만하다.
독재자의 딸이 전제군주인양 행세하려하고, 그런 지도자를 지지하는 한국 국민들을 보면서 정말 가슴이 터질듯 답답하다.
한국의 청년들은 소망을 잃고 자살을 하고 있는데, 그런 체제를 더더욱 견고하게 만드는 일들이 지속되고 있다.

이게… 정말 이게… 시민의 힘으로 더 나은 세상을 만들게되는 과정이란 말인가.

이런 상황 속에서 너무 지나치게 반대쪽으로 휙~ 넘어가버리는 우를 범하지 않도록 조심해야겠지만,
나는 사실 마침내 내가 지지했던 대통령이 당선되는 것을 두번 경험하고나서야,
정치가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철저하게 정치가 사람들을 실망시키는 경험을 하고 나서야 비로소…
정치가 세상을 바꾼다는 식의 생각은 결국 shallow하면서도 naive한 인본주의적 생각인것이구나… 하는 자각을 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정치나 사회도, 종교나 교회도, 개개인의 삶도…
결국 이런 식으로 깊이 바닥을 쳐야만 비로소 소망을 두지 말아야할 곳에 소망을 두고 있었던 모습을 발견하게되는 것은 아닐까.

그런의미에서,
참된 희망을 위해서는, 깊은 절망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일수도 있겠다.

희망에 사로잡히기 (3)

내가 ‘기독청년’이던 시절에,
나는 내가 어제 글에서 언급한 두가지 종류의 거짓 희망을 기독교적 신념이라고 생각하며 지냈다.

개인의 영역에서는, 결국 하나님께서 나를 잘되게 하실 것이라는 (혹은 최선의 길로 인도하실 것이라는) 기복주의적 희망을 가졌고,
공적인 영역에서는, 우리의 노력으로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이땅에 펼쳐내게된다는 인본주의적 희망을 가졌다.

그리고 이 두가지는 모두 신앙적 근거를 찾을 수 있는 것 같아 보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내 개인적인 영역에서 더 이상 ‘나를 잘되게 하시는 하나님’이 아님을 발견하게 되었고,
공적인 영역에서 오히려 역사가 후퇴하는 것과 같은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게다가, 내가 젊은 시절에 그토록 울부짖으며 위해서 기도했던 우리의 조국 교회는 처참하게 무너지고 있고,
포스트모던 세대에게 내가 속한 복음주의는 소통하는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소망이…. 소망이… 사라져 버렸다.

이것은 비단 나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나와 같은 세대를 살았던 이제는 ‘기독중년’이 된 사람들이 함께 겪은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그리고 또한 그냥 이 시대가, 이 시대의 교회가, 복음이 맞닥드리고 있는 상황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희망에 사로잡히기 (2)

기독교적 낙관론을 생각하려고 할때,
그럼 무엇이 비기독교적 낙관론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보면 도움이 되겠다.

우선, 기복주의적/물질주의적 낙관론은 비기독교적이다.
이건 뭐 이게 기독교적인 아이디어가 아니라는 이야기를 풀어내자면 그 논의 자체가 너무 유치해서 쓰기 조차 민망하지만…
불행하게도 기복주의적/물질주의적 낙관론은 자칭 기독교인들 사이에 가장 powerful 하게 작동하는 낙관론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물질적인 복을 궁극적 소망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그리고 물질적인 복은 어떤 의미에서 소망의 자격으로 충분하지 않다.
물질적인 복이 반드시 그 사람이나 공동체나 시대에게 ‘선’을 제공해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두번째로,
인본주의적 낙관론 역시 기독교적인 아이디어는 아니다.
인간에 대한 적극적 긍정을 바탕으로, 인간 이성이 결국은 세상을 유토피아로 만들게 될 것이라는 생각은 그저 매우 naive한 생각일 뿐이다.
이것은 이미 20세기에 그 한계를 드러내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1,2차 세계대전등을 통해서)

어떤 의미에서, 나는 이런 naive한 인본주의적 낙관론을 주장하는 사람은 사실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비기독교적 아이디어임을 명시해야하는 이유는, 매우 shallow한 level에서 보면 기독교적 낙관론과 인본주의적 낙관론이 매우 비슷해 보이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희망에 사로잡히기 (1)

스가랴 9:12
(9:12) Return to your stronghold, O prisoners of hope; today I declare that I will restore to you double.
(9:12) 사로잡혔어도 희망을 잃지 않은 사람들아, 이제 요새로 돌아오너라. 오늘도 또 말한다. 내가 네게 두 배로 갚아 주겠다.

12월 30일까지는 회사는 나갔고, 31일부터 1월 3일까지 나흘간 참 잘 쉬었다.
쉬는동안 나는 혼자서 Urbana의 video들을 들으며 지냈다.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하는 참 좋은 설교들과 간증들을 들으며 혼자서 훌쩍거리기도 하고, 많이 마음 아파하기도 하고, 마음 속에 작은 촛불을 켜는것과 같은 느낌을 갖기도 했다.

그중, Fuller 신학교의 Evelyne Reisacher가 했던 message가 계속 머리 속을 맴돈다.
스가랴 9:12절에 나오는 ‘prisoner of hope’이라는 표현을 빌어, 자신은 하나님께서 이슬람 세계에 하실 일들에 대한 기대와 소망을 갖는다고 했다.

음… 엄격하게 말하면, 스가랴 9:12에 나오는 Prisoner of Hope이라는 표현을 그렇게 쓰는 것은 해석상의 오류라고 생각되지만 ^^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아이디어가 계속 마음에 남는다.

내가 생각하기에,
Christian view는, 궁극적으로 낙관적이다.

물론 세상을 바라보면서 선지자적 비관론을 견지할 수 있겠고, 경우에 따라서는 그것이 합당하겠지만,
결국은 선하신 창조주께서 세상을 움직이시고 있고, 또한 사랑을 베풀고 계시다는 view는,
그분의 백성을 자처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낙관론적 시각을 갖게 한다.

나 자신과 내 주변의 사람들,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며 참 많이 무겁고 어려운 마음을 가지곤 하는데,
새해를 맞이하여 내 신앙의 관점을 좀 더 낙관적으로 전환해야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