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렇게도 불편할까?

어제는 내 생일이었다.

매년 생일에 맨 처음 축하를 해주는 것은 credit card 회사나 shopping site 같은 것들이다. ^^ 대개 며칠 전에 축하 message를 보내면서, 생일에 이왕이면 우리 shopping mall에서 근사한걸 사라 뭐 그런 message를 받는다. 나는 대개 그걸 받고서야 내 생일이 가까와 왔다는 것을 알곤 한다.

나는 생일이 뭐 대수냐 싶기도 하고, 별로 내게 관심도 없는 사람들이 괜히 어설프게 축하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멋적기도 하고, 무엇보다 괜히 다른 사람들에게 쓸데없는 부담감 같은 것을 주지 않을까 싶어 low key로 무시하고 지나가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나면 한국에서 어머니가 매년 감동적인 이메일을 내게 보내주신다. 대개는 한국에서 내 생일일때 보내시니까, 미국에서는 하루 일찍 받게 된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나는 한국에서 태어났으니, 어머니께서 이메일을 보내주실때가 내가 정말 태어난 때 이긴 한 것 같다. ^^

생일 당일이 되면 대충…
아… 오늘이 생일이긴 하지… 싶지만, 대개는 일도 많고,
내 아내랑 딸내미도 다 바쁘고 해서 진짜 아무것도 안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하곤 한다.

생일이라고 뭐 하기엔 나도 하도 바쁘기도 하니…

그런데,
난 왜 그렇게 누가 내 생일을 축하한다고 하는 것이 부담스러울까?
그냥 아무도 내 생일이라는거 기억 못하고 지나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왜 매년 하게되는 걸까?
왜 그게 그렇게 내 마음에 불편할까?

최근 두어달 여러가지로 나를 돌아보면서 새롭게 나에 대해서 발견하는 것들이 있는데 (그래서 어쩌면 이 블로그에도 한번 써볼수도 있겠지만…)
이렇게 생일을 불편하게 생각하는 것이 그렇게 자연스러운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좀 들기도 한다.

어쨌든,
별로 편하지 않은 날이 하루 후딱 지나가버려 참 다행이다. ^^

정공법? 겸손함?

어제 오후,
우리 회사의 CEO가 전 직원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어제 뜬 한 인터넷 기사에 관해서였다.

그 기사의 내용은, 회사의 top talent들이 CEO에 불만을 품고 나갔다는 내용이다.

음… 나는 뭐 CEO랑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질 않으므로,
이 사람이 함께 일하기에 그렇게 어려운 사람인지 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렇지만,
이 사람이 자신의 문제점에 대해 지적당하는 기사를 스스로 언급하고 직원들에게 돌려보게 하면서,
(그것도 말하자면 인터넷 찌라시 수준의 기사인데…)
언제든 불만이 있으면 이야기해라…
라고 이메일을 보내는 것을 보면서, 멋있다는 생각을 했다.

자신의 문제점으로 지적된 것에 대해,
그것이 적실한 지적인지 여부를 떠나,
더 공개적이면서도 투명하게 그것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자세는,
결국 그 사람이 얼마나 ‘큰 사람’인가를 보여주는 것 같다.

어제 저녁에,
나는 비슷한 이메일을 하나 또 받았다.
그것은 내가 잘 아는 분으로부터였다.

우리 CEO나,
어제 밤에 이메일을 보내신 분이나…
참 훌륭하다고 생각했다.

부활의 믿음

매년 부활절에 특별히 십자가의 은혜와 부활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된다.
내가 흔히 어떤 생각을 정리하는데 잘 쓰는 방법은, 나에게 하는 설교를 작성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틴 로이드-존스가 영적 침체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제시한 것이다.
마틴 로이드-존스는, 자신에게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설교하는 것을 배워야한다고 이야기하였다.

내가, 금년 부활절에 내게 설교한 것은 이것이다.
부활의 믿음을 가지라는 것이다.

부활의 믿음은, 궁극적으로 희망의 믿음이다.
하나님께서 결코 그분의 영광을 다른 것에 빼앗기지 않으신다는 믿음이다.
그렇기 때문에 결코 악이 승리하지 않는다는 하나님에대한 신뢰이다.
이미 하나님께서 신뢰하셨다는 믿음이다.

지금 살아가는 세상의 모습이 어떻게 보이는가에 관계없이,
하나님께서 하시고자하시는 일들이 이루어지고야 만다는 것이다.

정치적 상황이 암울하게 보여도,
사회적 정의가 사라지는 것 같아 보여도,
선의가 무시당하고 이기적인 의도가 승리하는 것 같아 보여도,
고통받는 백성에게 하나님의 손길이 더 이상 미치지 않는 것 같아 보일 때에도…

그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 부활의 믿음이다.
부활은 궁극적 낙관론을 가능하게 만드는 event이기 때문이다.

고난 주간 묵상 (금) : 요한복음 19:30

요한복음 19: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시고서, “다 이루었다” 하고 말씀하신 뒤에, 머리를 떨어뜨리시고 숨을 거두셨다.

내가 어떤 신앙을 분별해내는 판별식 가운데 하나는, 그 신앙이 ‘순교자’를 설명해낼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가령 예를 들면 이렇다.
번영신학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물질적/세속적 변영을 제공해주신다는 생각으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초개와같이 던졌던 순교자들을 설명해낼 수 없다.
따라서 번영신학은 가짜다.

이와 비슷한 이유로 다음과 같은 것들은 모두 가짜이거나, 다른 면들을 충분히 강조하지 않으면 가짜가 될 가능성이 많은 것들이다.

멜랑꼴리한 종교적 감성만을 자극하는 기독교,
자신의 문제를 해결받고자하는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기독교,
종교적 열광을 강요하거나 독려하는 기독교,
정치적 힘을 키워서 세상을 자신의 agenda로 정복해버리려는 기독교,
승리주의적 기독교,
복잡한 생각을 풀어내기만을 좋아하는 지나치게 사변적이기만 한 기독교,
자신의 진로, 장래, 관계 등등에 함몰되게 만드는 기독교,
치우친 신비주의적 기독교 등등.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폭행, 고문, 감금, 노동, 차별, 그리고 순교를 당하는 사회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 우리와 같은 사람들에게 부탁하는 것은,
그들이 고난으로부터 벗어나게 해달라는 것이 아니다.
고난이 없어지고 평화롭게 지내게 해달라고 기도를 부탁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주, 그 고난과 박해 속에서, 용기를 지킬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를 부탁한다!

이것이, 진정으로 세상이 감당해내지 못하는 기독교이다.

기독교가 이럴수 있는 아주 강력한 근거는,
우리의 주님이 이토록 처절하게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우리의 주님을 그처럼 잔인하게 거부한 세상 속에 우리가 살고 있고, 그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우리의 삶에 채운다는 아이디어이다.

만왕의 왕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처절하게 고통을 감내하신다.
극도의 고통 속에서 깊은 사랑을 나타내신다.

세상을 사랑하셔서, 나를 사랑하셔서,
우리 주님께서 땅이 흥건해지도록 십자가 아래로 피를 쏟으셨다.

그러기에,
우리의 신앙은, 결코 급진적이지 않을 수 있는 선택이 없다.

Good Friday다!

고난주간 묵상 (목) : 요한복음 13:34

요한복음 13:34 이제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시간이 지나면 지날 수록, 예수님을 주인으로 삼고 살아가는 날이 가면 갈수록,
정말 신앙이 ‘사랑’으로 수렴되는 것을 더 많이 생각하고 깨닫게된다.

모든 사람에게 다 적용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게 있어,
내 신앙을 지탱해주는 근원적인 힘은 미래에 대한 소망이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나 따라야하는 당위 등이 아니다.
그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사랑이다.

도저히 내가 담을 수도 없고 이해할수도 없고 거부할 수도 없는 그 사랑.

깊은 신앙의 침체에 빠져 있거나,
내 자신에게 실망할 때나,
장래가 어둡게 보일때나,
세상을 보며 심하게 절망할때에도…
결국 나를 신앙 안에 붙들어 두는 것은 사랑이다.

내 삶 속에서 하나님께 무릎꿇어 많이 눈물 흘리게 했던 바로 그 실체는,
결국 사랑이었다.

사람을 바꾸는 힘도, 세상을 바꾸는 힘도, 절망을 무너뜨리는 힘도, 소망을 가지게하는 힘도…
결국 사랑이다.

피상적인 즐거움에서 벗어나 깊은 joy로 이끄는 힘도, 자기기만적 성취로부터 눈을 돌려 더 깊은 진리를 보게하는 힘도,
결국 사랑이다.

나는 그래서 정말 그 사랑이 좋다.
망가져버린 세상 속에서, 내 영혼을 비추어주는 그 사랑.
그래서 그로부터 사랑을 나누도록 이끄는 그 사랑.

이 고난주간에,
다른 무엇보다 그 사랑이 나를 더 깊이 사로잡길…

고난주간 묵상 (수) : 요한복음 13:19

요한복음 13:19 내가 그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미리 말하는 것은, 그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로 하여금 ‘내가 곧 나’임을 믿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복음에는 유난히, 예수가 하나님이심을 indicate하는 내용이 많이 나온다.
또, 요한복음은 어떤 내용을 찬찬히 설명을 해준다기 보다는 뜬금없은 선언들이 많이 나온다.
그리고 또한, 요한복음은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넘쳐난다.
그것은 아마도 요한이 그렇게 ‘사랑’을 좋아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요한복음과 요한일서에 나타나있는 ‘사랑’의 이야기를 찬찬히 읽다보면… 그 사랑에 대한 개념만으로 거의 다른 종교를 하나 만들어도 되겠다 싶을 정도로 ‘색다르게’ 느껴신다.
한가지 더. 요한복음은 적어도 내가 보기엔 공관복음서보다 더 personal하다.
공관복음이 서사적 역사적이라면 요한복음은 서정적 직관적이다.

그래서 나는 몇년전부터,
요즘 ‘젋은이’들에게는 공관복음적 예수 보다는 요한복음적 예수가 더 먹힐 수 있겠다고 주장을 해왔었다. ^^

그런데,
나는 이제 더 이상 젊지 않은데도…
그렇게 시간이 지날수록 요한복음의 예수가 좋다.

너무 직관적이고 심지어는 진부하게까지 느껴지는 신앙을,
사랑과 인격이라는 매개로 개인적으로 만들어놓는 요한복음의 접근이 참 좋다.

요한이 풀어놓는 사랑의 예수가 정말 좋다.
왕으로서의 예수, 치유자로서의 예수, 혁명가, 선생으로서의 예수가 다 좋지만…
‘나를 사랑하시는 예수’가 정말 좋다.

그 예수의 사랑은 설명해내기 보다는 받아들여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객관적일뿐 아니라 오히려 주관적이어야 그 핵심에 깊이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의미에서,
신앙을 자꾸만 설명하는 것으로 그치려 하고,
신앙을 선동의 도구, 슬로건으로만 여기고,
신앙을 통해 다른 agenda를 이루려 하고,
신앙을 통해 사람들을 manipulate하고 있는,
현대에 흔히 보는 기독교에는 생명이 없다고 믿는다.

바로 그 사랑의 예수,
그 예수의 사랑이 극대화해서 드러난 십자가를 바라본다.

그 십자가가 어떤 agenda를 이루었기 때문에 감격스럽기 보다는,
그 십자가가 바로 하나님께서 그 독생자를 희생시키신 사랑의 표징이기 때문에 감격스럽다.

전혀 자격 없는 나 같은 사람을 위해,
성자 하나님께서 그렇게 고통당하셨다는 것이 말로 다 할 수 없이 감사하다.

고난주간 묵상 (화) : 로마서 5:6-8

로마서 5:6 우리가 아직 약할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제 때에, 경건하지 않은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7 의인을 위해서라도 죽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더욱이 선한 사람을 위해서라도 감히 죽을 사람은 드뭅니다.
8 그러나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이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실증하셨습니다.

자기 중심성이라는 심각한 질병에 걸려있는 사람에게 구원은 일방적으로 받는 것이어야만 한다.

세상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며 사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구원이 결국은 자신이 손해보지 않으려고 하기 마련이고,
구원이라는 deal에 관해서도, 자신이 투자한 것에 대해 reward가 더 커야만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 중심적 사람에게 있어, 적절한 타협점이라는 것이 대단히 어렵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10불을 내고 10불어치 물건을 하고 나면,
마치 자신이 지불한 10불이 새로 습득한 10불짜리보다 더 큰 가치인 것 같이 생각한다.

그래서,
9불을 내고 10불어치 물건을 사는 타협을 했다고 하자.
그렇게 하고 집에 돌아오면 처음엔 좋다가, 점점 자기 중심성의 성향이 그 마음을 control함에 따라, 여전히 자신이 손해보았다고 생각하게 된다.

다시 8불을 내고 10불어치 물건을 사는 타협을 하고,
다시 7불,
다시 6불…
결국 공짜로 물건을 가지고오기 전까지는 자기 중심적 인간에게 만족이 있을 수 없다.

구원에 있어서도 이런 원리가 적용될 수 있다.
그래서, 정말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이 아니라면,
자기중심적 인간이 그것에 관심을 갖고 받아들이기 정말 어려운 것이다.

그런 자기중심적 인간에게 해결책은,
구원을 주시는 주체가,
일방적으로 손해를 보시면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처음,
복음에 제대로 눈을 뜨게 되었을때,
나는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일방적이라는 사실에 완전히 압도되었었다.

그 사랑은,
지금도 여전히 나를 압도하고 있다…

고난주간 묵상 (월) : 누가복음 9:51-56

누가복음 9:51 예수께서 하늘에 올라가실 날이 다 되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가시기로 마음을 굳히시고
52 심부름꾼들을 앞서 보내셨다. 그들이 길을 떠나서 예수를 모실 준비를 하려고 사마리아 사람의 한 마을에 들어갔다.
53 그러나 그 마을 사람들은 예수가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도중이므로, 예수를 맞아들이지 않았다.
54 그래서 제자인 야고보와 요한이 이것을 보고 말하였다. “주님,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을 태워 버리라고 우리가 명령하면 어떻겠습니까?”
55 예수께서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셨다.
56 그리고 그들은 다른 마을로 갔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겠다고 결심하셨다는 것은 십자가를 향해 가시기로 결심하셨다는 뜻이겠다.
그렇지만 제자들에게있어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것은 승리의 입성이고, 마침내 대중선동을 통해 민중봉기를 일으키고, 이스라엘을 회복하는 것을 의미했다.

제자들에게 있어서 예루살렘은 영광의 장소였지만,
실제 예수님에게 있어서 예루살렘은 처절한 희생과 죽음의 장소였다.

흔히 이원론적 신앙의 배격이 이 시대 신앙의 중요한 모토라고 여기는 사람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영광의 예루살렘과 십자가의 예루살렘을 함께 가지고자 하는 것 같아 보인다.

그러나,
그 두가지가 정말 함께 가려면, 십자가 처형의 예루살렘을 받아들이고 그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거짓된 영광 (정치적 승리)이 아닌 참된 영광 (십자가 희생과 부활)에 도달하게 된다.

그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했던 제자들은,
그들만의 승리를 추구하지만… 예수님의 뜻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승리, 성공이라는 영광, 사람들로부터 받는 칭송과 찬사, 경제적 풍요에 목을 매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을 것 같이 느껴지는 실리콘 밸리에서,
희생의 십자가를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 것은 너무나도 absurd한 일이다.

그 absurd한 것이 너무 불편하고 어색해서,
나도 너무나도 자주, 십자가의 영광과 거짓된 영광을 함께 얻을 수 있다고 내게 최면을 걸고 있는 것 같은 깊은 찔림이 있다.

사람같은 기계, 기계같은 사람

알파고와 관련해서 이런 저런 시덥잖은 글들을 몇개 읽다가 눈에 띄는 문구 하나를 읽었다.

“사람같은 기계가 무서운 것이 아니라, 기계 같은 사람이 무섭다.”

처음엔 딱… 와… 멋진 말이다…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조금만 더 생각을 해보니,
‘정말 그럴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사람의 독창성이나 creativity, 감정이나 인격 등등이 없어 지는 것은 참 무서운 일이고 끔찍한 일이기도 할텐데…
어떤댄, 그저 사람이 그냥 기계같기만하다면 차라리 얼마나 좋을까 하는 위험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사람이 잘 만들어진 기계 같다면,
탐욕이나 이기심으로 다른 사람을 파괴시키는 일들도 없을 테고,
사랑없음이 그 자신을 갉아먹는 것을 보게되는 일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끔찍하고 잔인한 범죄,
비인간적인 전쟁이나 폭력,
극도의 이기심으로 비롯되는 불합리함 등등은 정말 너무나도 파괴적이다.

신문 기사들을 10분 정도만 보고 있으면 가슴이 터져버릴 것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잠시만이라도,
차라기 사람이 기계같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되는 이런 내 모습이 무서운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