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 주간 묵상 (금) : 요한복음 19:30

요한복음 19: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시고서, “다 이루었다” 하고 말씀하신 뒤에, 머리를 떨어뜨리시고 숨을 거두셨다.

내가 어떤 신앙을 분별해내는 판별식 가운데 하나는, 그 신앙이 ‘순교자’를 설명해낼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가령 예를 들면 이렇다.
번영신학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물질적/세속적 변영을 제공해주신다는 생각으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초개와같이 던졌던 순교자들을 설명해낼 수 없다.
따라서 번영신학은 가짜다.

이와 비슷한 이유로 다음과 같은 것들은 모두 가짜이거나, 다른 면들을 충분히 강조하지 않으면 가짜가 될 가능성이 많은 것들이다.

멜랑꼴리한 종교적 감성만을 자극하는 기독교,
자신의 문제를 해결받고자하는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기독교,
종교적 열광을 강요하거나 독려하는 기독교,
정치적 힘을 키워서 세상을 자신의 agenda로 정복해버리려는 기독교,
승리주의적 기독교,
복잡한 생각을 풀어내기만을 좋아하는 지나치게 사변적이기만 한 기독교,
자신의 진로, 장래, 관계 등등에 함몰되게 만드는 기독교,
치우친 신비주의적 기독교 등등.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폭행, 고문, 감금, 노동, 차별, 그리고 순교를 당하는 사회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 우리와 같은 사람들에게 부탁하는 것은,
그들이 고난으로부터 벗어나게 해달라는 것이 아니다.
고난이 없어지고 평화롭게 지내게 해달라고 기도를 부탁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주, 그 고난과 박해 속에서, 용기를 지킬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를 부탁한다!

이것이, 진정으로 세상이 감당해내지 못하는 기독교이다.

기독교가 이럴수 있는 아주 강력한 근거는,
우리의 주님이 이토록 처절하게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우리의 주님을 그처럼 잔인하게 거부한 세상 속에 우리가 살고 있고, 그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우리의 삶에 채운다는 아이디어이다.

만왕의 왕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처절하게 고통을 감내하신다.
극도의 고통 속에서 깊은 사랑을 나타내신다.

세상을 사랑하셔서, 나를 사랑하셔서,
우리 주님께서 땅이 흥건해지도록 십자가 아래로 피를 쏟으셨다.

그러기에,
우리의 신앙은, 결코 급진적이지 않을 수 있는 선택이 없다.

Good Friday다!

2 thoughts on “고난 주간 묵상 (금) : 요한복음 19:30”

  1. “Good Friday”다 라는 말이 와 닿는 아침입니다.
    감사합니다.

    우리식으로 표현하면 “성(聖) 금요일”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십자가에 달리신 그 날을 “성스럽게 여긴다(?)”라는 의미의 “聖’은 표현은 “Good”을 담아내기에는 필요/충분 하지 않아 보이는것 같습니다.
    세상적으로 이해하면 해골언덕, 사형, 책찍, 십자가 형, 가시관, 피를 흘림, 벌거벗김을 당함, 호흡곤란으로 숨을 헐떡거림, 고통으로 가득한 절규, 창으로 찔림. 죽음… 이러한 것에는 “눈물, 아픔, 고통, 애통”이 어울리는 말이지 정상적인 사고로는 “Good”이란는 것이 말이나 되는가?

    하지만,
    성 금요일은 고난주간의 마지막 end 이기도 하고, 우리의 모든 죄(사망)가 해결되어서 “눈물, 아픔, 고통, 애통 그리고 죽음’의 End 이기도 하여 good이기도 하지만 그 보다도 하나님이 계획하신 목표가 마침내 과녁에 정확하게 맞아서 그 계획하신 바가 성취되었다는… Good (fri)Day.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한 END의 accomplish.

    “다 이루었다” !!!!!!!

    Good Friday다!

    1. 도대체 누가 이 글을 쓰셨을까.. 많이 고민…고민… 했는데요,
      모르겠네요.
      틱~ 하고 글을 쓰신걸 보면, 제가 아는 분 같은데. ^^

      어쨌든,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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