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대한 단상들 (5)

사랑은 당연히 희생을 요구한다.
사랑을 하면 사랑을 하는 사람이 vulnerable 해진다.

어찌보면 대단히 간단한 원칙인데,
사실 이것이 사랑을 하는 가장 큰 장애물이 되기도 하는 것 같다.

결국은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
희생이나 vulnerable 해지는 것을 피하기 때문에 사랑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궁극적 희생은, 따라서 궁극적 사랑은, 그래서, 십자가에서 볼 수 있다.

사랑에 대한 단상들 (4)

사랑을 이야기할때,
보수는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강조한다.
진보는 ‘이웃 사랑’을 많이 강조한다.

둘 다 신앙에서 없어서는 안되는 중요한 항목들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 어느쪽에서도,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함에 대해 거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 같다.

헌신, 사명, 비전, 변혁 등등을 이야기하는 속에서,
정말 그 모든 행동의 core에,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담겨있어야 함을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언젠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그분의 주권 아래에 회복하시는 때가 오면,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완성이 되고,
그분을 더 깊이 사랑하지 못해 목말라 하는 그 목마름도 해갈이 되려나.

여러가지 많은 소음들 속에서,
그저 가만히 내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주님, 사랑합니다… 라고 내어뱉는 기도를 더 많이 하고 싶다.

또 다시 설교 준비

설교를 전문적으로 하지 않는 나 같은 사람에게 있어,
설교준비를 하는 것이 당연히 쉽지는 않다.

무엇보다도,
설교 준비를 위해서는 어떤 ‘리듬’을 잘 잡는게 적어도 내겐 참 중요하다.
우선 깊게 설교 본문을 연구하고, 분석하고, 또 공부하고, 다시 곱씹고… 그런 작업이 잘 되어야 하고,
그런 이후에 다시 그 본문의 내용을 다시 곱씹고, 곱씹고, 곱씹는 작업도 있어야 한다.
그리고 나선 그 내용들을 다시 잘 추스려서 ‘설교’라는 흐름으로 만드는 작업이 뒤따른다.
열심히 공부하고 묵상한 걸 다 쏟아놓는게 아니므로, 내용을 잘 추리고, 가지를 치고, 흐름을 만드는 일이 중요하다.
그리고 나선, 작은 표현이나 꼭 사용해야할 문장 같은 것들을 생각해본다.
특별히 강조해서 설명해야하는 어떤 point들은, 몇가지의 설명하는 방법들을 생각해보면서 가장 쉽고도 분명하게 전달될만한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이런 과정을 할때, 듣는 사람들을 깊이 염두에두고 해야한다.

이런 작업들을 충분히 잘 하지 않으면,
설교의 point가 분명하지 않게 되거나,
논리의 비약이 생기거나,
설교가 어려워진다.

회사 일이 많이 바쁘고,
이번주는 오늘 내일 이틀동안 학회도 가야 하고,
다음주부터는 또 출장이고…
그런데 돌아오자 마자 바로 교회 수련회에서 설교를 하나 하도록 요청을 받았다.
웬만하면 못한다고 했겠는데… 정말 별로 대안이 없는 것 같아 보여 울며 겨자먹기로 하겠다고 이야기했다.

아마 비행기 안에서 영화보고 잠자는 대신 설교준비를 해야할 것 같은데…
point도 분명하지 않고, 논리의 비약도 심하고, 어려운 설교를 하게되진 않을까 걱정이 많다.

그래도 참 감사한 것은,
하나님께서 많은 말씀과 생각들을 부어주시긴 한다. – 아마 누군가가 급하다고 생각해서 기도를 하는 모양이다. ^^

사랑에 대한 단상들 (3)

사랑은 진리를 이야기하는 도구에 지나지않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그 자체가 목적이다.

예수님의 사랑은 어그러진 세상을 구원하는 방법이 아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어그러진 세상에 대한 대안이다.

흔히,
사랑을 이야기하면서…
그 사랑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자.
사랑을 통해서 사람들의 마음의 문을 열게 하자.
사랑을 통해서.. 사랑을 통해서…
이런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그렇지만,
사랑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것과 같이 그 자체가 목적이되어야 한다.

사랑에 대한 단상들 (2)

진보도 보수도 모두 사랑을 잃어버렸다.

진보는 사랑을 이웃 혹은 약자에대한 연민과 동정 그리고 그들에 대한 자비로 치환해버렸다.
그래서 사랑의 궁극적 근원에 대한 foundation이 약화되어 버렸다.
하나님의 사랑을 너무 쉽게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연결시킴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보수는 사랑을 종교화 시켜버렸다.
사랑을 이야기하는 대신에 감동을 이야기한다.
혹은 감동을 사랑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종교적 감흥과 감동을 추구하긴 하지만, 그 사랑의 궁극적 실재에 대한 진지한 고찰과 추구를 잃어버렸다.

더 이상 기독교에서는 사랑을 이야기하지 않는 것 같아 보인다.

또 다시 business trip을

한동안 열심히 출장을 다닐 때엔 그게 그렇게 힘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연히 시차 적응도 힘들고,
가면 하루 15시간씩 일하기 일쑤이고,
출장을 간다고 해서 내 home office의 일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므로 밤에는 미국 일, 낮에는 현지 일을 해야하는 빡빡한 일정 때문이었다.
다녀오면 생활 리듬도 깨어지고, 회복하는데 또 시간이 걸리니…
출장이 만만하지 않은건 당연한 것이었다.

이제 지금 직장에서 일을 시작한지 5달 가까이 되어가면서,
내게 주어진 일 + 내가 들어와서 새로 벌여놓은 일을 합해서 유럽과 아시아, 미국 여러곳에 함께 일하는 프로젝트들을 담당하고 있다.
가능하면 출장을 가지 않으려고 미루어 오긴 했지만…

미국의 North Carolina, Swiss의 Zurich, 독일의 Dresden, 일본의 동경과 교토, 그리고 한국의 인천과 구미 등등은 더이상 미루기 어렵게 되어가고 있다.

그래서 5월 초에 일단 아시아쪽 투어를 하나 예약해놓았다.

얼핏 내 여권을 보니, 마지막으로 출장을 했던 것이 작년 늦은 봄이었다.
거의 일년만에 출장을 가게되는 것이다.

다행인건,
지금 이 직장에서는 내 autonomy가 좀 더 있어서,
아마 무리하게 진행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좀 미루어놓을 수 있는 여유가 있을 것 같다.
그러면 아마 낮에만 일을 하면 될 것 같다. ^^

또 다시 일년에 십만마일씩 날아다니는 라이프 스타일은 아닐 듯 해서,
한편 감사하긴 하다.

한참 출장 다닐땐 그렇게 많이 힘들더니만,
오랜만에 출장을 가게되니, 뭔가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들긴 한다. ^^

사랑에 대한 단상들 (1)

예전에 Love is 라고 해서 연재(?)되는 만화가 있었다.
그림도 귀엽고 내용도 참신해서 내가 어린 시절 보면서 참 재미있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금년 코스타에서는 ‘사랑’에 대해서 다루게 된다.
지난 20년간 그래왔듯이, 올해도 코스타 주제를 놓고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된다.

그래서,
앞으로 몇번이 될지는 모르지만, 가끔 혹은 자주 한번씩,
내가 생각하는 ‘사랑’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나는 사실 정말 사랑이 많이 부족한 사람이다.
그래서 사랑에 대해서 말할 자격이 참 없긴 하다.
그렇지만, 오히려 내게 사랑이 없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사랑에대해서 할말이 많기도 하다.

가능하면 이번 여름까지는 한번씩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써보려고 생각중이다.

한참 아쉬울땐 연락 없더니만…

이제 벌써 8개월 가까이 되어가는데… 나는 나는 다니던 회사에서 lay-off를 당했었다.
뭐 딱 내 잘못때문이라기 보다는, 회사가 사정이 어려워져서 팀 전체를 날려버린 것이었다.
덕분에 실직자로 몇달을 보냈고, California 주정부에서 주는 실직수당을 두주에 한번씩 받기도 하였다.

당연히 그때는 정말 정신없이 job search를 했었다.
아마 여기저기 resume를 찔렀던 것이 어림잡아 30~40군데 이상은 되었던 것 같다.
그중 지금 내가 다니고 있는 회사에서만 job offer를 받았다.

내가 아쉬워서 여기저기 연락을 할때엔 다들 뭐 별로 반응도 없더니만,
막상 나름대로 ‘번듯한’ 회사에 들어와서 일을 하니…
여기저기에서 연락들이 온다.
linkedin connection 요청도 많이 오고.

빈익빈 부익부라고나 할까.
내게 reach out해오는 recruiter들이 꽤 씁쓸하게 느껴진다…

블로그 글쓰기에 대한 생각

블로그에 글을 매일 하나씩 쓰는게 힘들지 않느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이 가끔 있는데,
사실 힘들게 글을 쓰는 날은 거의 없다.

매일 그저 하루에 5~10분, 아주 길어야 15분 수준의 글쓰기를 하는 것이고,
내가 생각하는 것 잡다한 것들의 대충 10% 정도만 글로 표현하기 때문에 글쓸 거리가 딸리지도 않는다.
오히려 글 쓸 거리가 너무 많아서 그중 글쓸 내용을 선택하는데 시간이 걸릴때가 많이 있다.

대충 하루 visitor가 100~200명 수준이라고 wordpress에서는 집계를 해 주는데,
그건 한 사람이 여러번 들어온 것을 count했기 때문이고…
내가 판단하기에 가끔 한번씩이라도 이 블로그의 글을 읽는 사람들은 rss feed를 받아 읽는 사람을 포함해서 50~100명 정도가 아닐까 싶다.

그나마 지난 두주동안 쓴 ‘시간’에 대한 글 시리즈 같은 것을 올리면,
방문하는 사람의 수가 현저하게 줄어든다. ^^
괜히 이해도 잘 안되고 딱딱하기만하고 그래서 그런 것 같다.

그런데,
사실 여기 글들이 다 그렇다.
뭐 마음이 따뜻해진다거나 희망을 갖는다거나 하기 보다는,
찌질하고 허접하고 유치하고 번잡스럽다.

가끔,
이런 글을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읽도록 facebook같은 major SNS에서 공유를 해보라고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뭐 내 글들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읽을만큼 대단하지도 않고… 완성도가 높지도 않고…
사실 노력하지 않아도 들어오는 글을 읽는 사람보다는, 노력해서 들어와서 글을 읽는 사람들과 만나고 싶어서 의도적으로 그런 방법을 피하고 있다.

그냥 10명 남짓한 사람들만 읽더라도,
내 글에서 내 호흡을 느껴주고 내게 한마디라도 던져줄 수 있는 사람들과 글을 나누고 싶어서
여기에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

그런데 요즘은 가끔씩,
이렇게 완성도가 낮은 글을 자꾸 쓰는 것이 오히려 내게 독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조금씩 하고 있다.

정치적 선호에 따른 기쁨

한동안 이 블로그에서 정치적인 이야기를 별로 다루질 않았다.
그렇지만 사실 내 개인적인 관심은 지난 몇달간 한국의 국회의원 선거와 미국의 대통령선거에 많이 빼앗겨 있었다.

나를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들은 다 알지만,나는 꽤 강한 정치적 선호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사실 한국의 국회의원 선거가 끝나고 개표를 할때에도 나는 미국 시간으로 아침 4시에 깨어서 인터넷으로 개표 현황을 볼만큼 관심이 많았다.

나는 facebook을 열심히 보고 follow하지는 못하지만, 가끔 한번씩 들어가서 무슨 글들이 있는지 보곤 한다.
당연히 한국의 선거가 끝나고 올라오는 여러가지 글들을 읽었다.
그리고 내 facebook ‘친구’들은 당연히 나와 정치적 견해가 비슷한 사람들이 더 많다.

그런데 ‘친구’들이 글을 쓴것을 읽으면서,
한편 많이 동의도 하고 공감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그리스도인 ‘친구’들이 너무 지나치게 정치에 소망을 두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이번 선거를 통해서 뭔가 ‘공의’가 일부 이루어졌다고 생각하고, ‘승리’를 했다고 기뻐했다.
그리고 적어도 내 신앙적 양심과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의 체계 속에서는 어느정도 더 ‘정의로운’ 선택이 이루어진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정말 궁극적으로 세상을 바꾸는 힘이 정치적으로 상대를 제압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걸까.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에 대한 기대와 관심을 모두 정치에 몰빵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침 4시부터 개표방송을 인터넷으로 볼만큼 열정적으로 한국의 어느 정치 그룹을 지지하는 사람이지만,
그리고 정치는 사회의 정의를 이루는 아주 중요하고도 강력한 tool이라는 것을 적극적으로 공감하고 인정하지만,
정치에 지나친 기대를 하고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좀 해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