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대한 단상들 (8)

사랑으로 가는 길에 놓인 가장 큰 장애물은 ‘나’이다.
결국은 비뚤어진 자기애, 자기중심성이 사랑을 가로막는다.

그런데, 비뚤어진 자기애나 자기중심성은 결국 자신이 충분히 사랑을 받지 못한것으로 부터 비롯되는 것 같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일방적인 큰 사랑을 우리에게 부으셨다는 스토리이다.
그 복음의 스토리를 제대로 알고 있다면, 우리에게 있는 사랑에의 hunger가 그것으로 채워지고, 따라서 그로인해 비로소 ‘나’라는 장애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게 되어야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예전에 복음을 알고 있었다 하더라도,
어느 순간 그 앎으로부터 조금 벗어나면,
금새 자기중심성에 빠지게 되고, 사랑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 같다.

끊임없이 그 사랑 안에 ‘거하는’ 일이 필요한 듯.

Google과 Apple (1)

내가 Apple에 1년 좀 넘게 있었고,
지금 있는 직장이 엄밀하게 말해서 Google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두 회사를 제한적이나마 경험해본 바,
몇가지를 좀 나름대로 시간나는 대로 써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 한번 시리즈를 시작해본다. ^^

보통 사람들이 두 회사 모두 Silicon Valley에 있고,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유명한 회사이고…
그냥 대충 두 회사가 매우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을 하는데…

적어도 내가 겪어본 바에 의하면 비슷한 점이 거의 없다고 생각될 정도로 많이 다르다.

물론 내가 겪어본 Apple과 Google이
Apple과 Google의 전부를 대변하는 것이 아닐수도 있고, (특히 Apple의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다. 그 이유는 앞으로 더 설명을…)
각각 1년과 6개월 정도밖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당연히 경험이 제한적이겠지만…

자… 그럼 한번~

열심히 살지 말기?

예전에 내가 한국에서 학교 다닐때에는 교련시간 같은 것들이 있었다.
그럴때 선생님이 좀 수가 틀리면 단체기합을 줬다.
혹은, 좀 고약한 선생님을 만나면, 교련이 아니더라도… 한반에 70명이 넘는 남자애들을 수업 시간 중간에 갑자기 운동장에 집합시켜 단체기합을 주고, 선착순을 시켰다.

나는 그렇게 선착순을 할때에도 늘 온 힘을 다해서 뛰었었다. 기합을 받을 때에도 정말 꾀부리지 않고 열심히 받았다.
주변의 친구들이, 너처럼 벌을 열심히 받는 애가 다 있느냐고 놀릴 정도였다.
나는 그렇게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이 몹시 불편했었다.

한동안 허리가 좀 좋지 않았고, 그 후에는 감기에 걸려서 골골했고, 그 후에는 천식 때문에 또 고생하고…
이래저래 운동을 좀 쉬었었다.
그러니까 체중도 늘고, 몸도 무겁고 영… 힘들었었다.

이번주 들어서 오랜만에 다시 운동을 했다. 뭐 당연히 열심히… -.-;
그런데, “열심히” 운동을 하니, 몸에 무리가 온다.
여기 저기 근육통도 있고, 다시 허리에도 좀 무리가 가는 듯 하고…

예전에 몸이 팔팔하던 시절에는,
무조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쏟아서 사는 것 이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고 생각하기도 했었다.
그래서 최선을 다하지 못하면 심한 자책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러나 점점 몸이 마음을 따라가지 못하는 일이 늘어감에 따라,
죽어라고 열심히 하지 않는 것이 때로 지혜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배워가고 있다.

그리고,
그러면서 비로소 “은혜”가 조금씩 더 깨달아지기도 한다…

이주의 명언

“성숙의 모습은 한가지이지만, 미숙의 모습은 다양하다”
– Shiker

지난주일, 몸이 골골해서 교회 예배를 빠졌다. 아파서 교회에 못간건 10년쯤 전에 한번쯤 있었던 것 같을 정도로 흔치 않은 일이었는데…
우리 목사님은 하필 내가 없는 주에 더 좋은 설교를 하셔서 내 마음을 뒤집어 놓으신다. ㅋㅋ

공동체와 은혜

우리가 개인의 결심으로 영웅적인 삶을 살면요, 그 사람이 영웅이 되고, 그 사람이 따라야 할 모범이 됩니다.
그러면 우리 신앙생활이 의지력 싸움이 되어버립니다. 누가 더 쎄게 결심해서 하나님 뜻 대로 사느냐 하는 거죠.
그래서 교회 내에 자기 자랑이 난무하게되고 공로의식이 가득차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공동체적으로 이루어지면, 그렇게 해서 어떤 일이 되면, 그건 정말 하나님께 영광이 갑니다.
사람들에게 집중하지 못하게 되고, 의지력 싸움이 아니라, 은혜의 문제로 바뀌어 버립니다.
사람이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작동한 것을 보게 됩니다.

====

가끔은, 아니 내가 생각해도 참 기특한 생각이 내게서 떠오른다… 싶을때가 있다.
위에 쓴 내용이 그렇다.

요즘 내가 공동체와 은혜에 대해 위와 같은 생각을 많이 해보고 있다.

설교가 중요하다!?

며칠 전, 내가 좋아하는 어떤 목사님 인터뷰 기사가 하나 인터넷에 뜬걸 읽었다.
그분의 모든 ‘신학적’ 관점에 내가 늘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그분의 ‘신앙’을 참 깊이 존경한다.

그분이 하신 말 중에, 예배와 설교가 대단히 중요하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러면서 심방등도 하지 않고 설교준비에만 많이 집중한다는 이야기.

나는, 그분이 그렇게 하시는 것에대해 적극적으로 좋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말 그것이 모든 목사들에게, 모든 교회들에게 다 적용될 수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다음의 이야기는, 내가 다니는 교회의 우리 목사님이 대단히 성실한 설교가이기 때문에 자신있게 지를 수 있는 이야기이다. 예전에 불성실한 설교자가 목회자로 있던 교회에 다닐땐 차마 꺼내기 힘들었을… )

내가 생각하기에,
한국 교회 목사들의 80% 이상은,
제대로 설교를 할줄 모른다.

말씀을 제대로 풀지도 못하고, 해석의 기본도 잘 지키지 않는다.
설교본문과 무관하게 자신의 (잘못된) 썰을 풀어내기 일쑤이다.

게다가…
그나마 설교를 할 줄 아는 훈련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20%의 목사들중 다수는,
그렇게 제대로 설교를 할 능력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가만히 들어보면 맞는 소리를 하는 것 같긴 한데, 그걸 제대로 전달해내는 언어능력이나 논리력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또한,
훈련도 잘 받았고,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설교를 성실하게 준비하질 않는다.
여기저기 그저 best seller에서 짜집기 하거나 다른데서 읽은 좋은 이야기를 풀어놓는 수준으로 설교를 대체한다.

이렇게 설교자와 설교의 수준이 현저하게 낮은 상황 속에서는,
설교에 많은 것을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한국교회 전체 설교자의 5%~10% 정도나 될까 하는 아주 소수 그룹의 목회자들은, 그들이 좀 더 많이 노력하고 신경을 써서 설교중심의 목회를 하는 것이 타당할 수 있다고 본다.
그렇지만 대다수의 경우에는 자칫 설교중심의 목회를 추구하다보면 온 교인이 폭싹 망해버린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현재 한국 교회가 이처럼 망한 큰 이유 가운데 하나는, 함량 미달의 목회자가 설교중심의 목회를 추구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좀 실력있는 목회자가,
설교로서 모든 것을 다 풀어내려하지 말고,
다양한 목회활동과 소그룹 모임들, 평신도들의 적극적인 활용 등을 통해서 교인 전체를 살려내는 시도를 하는 것이…
차라리 다른 교회들에게 큰 유익이 되는 모델을 세우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고 있다.

아… 참 불편하구나

출장 가기 전에 몸이 좀 골골해서 며칠 아프고,
출장 중에 몸이 좋지 않아 골골하고,
이제는 출장을 다녀와서 천식이 도져서 골골하다가,
지난 목요일 이후 또 다시 완전히 grounded 되었다.

사실 생각해보면 나는 어릴때부터 늘 감기를 달고 살았다.
게다가 일년의 1/3 이상은 천식 증상 때문에 기침을 달고 살았다.
기침을 하다가 목에서 피냄새 나는 일은 늘 흔했다.

전반적으로 약도 좋아지고,
내 나름대로 관리도 좀 더 잘 했고,
규칙적으로 운동도 해가면서,
그리고 California로 이사를 오면서,
감기-천식 증상을 한동안 크게 겪지 못하고 살았는데,
이번에 또 다시 완전 고생 중이다.

주말에 잘 쉬었더니 좀 많이 나아지긴 했는데,
오늘 중요한 meeting 몇개를 그냥 cancel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lead 하라고 넘기고 집에서 쉴까… 살짝 고민중. ^^

이렇게 건강하지 못한 시기를 경험할때마다,
건강하지 못한 것이 참 많이 불편한 것이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건강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늘 겪는 불편함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사랑에 대한 단상들 (7)

사랑의 표지가운데 중요한 것은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 어린자녀 둘을 데리고 피난을 떠나는 어머니를 생각해보자.
그 어머니는 그 아이들에 대한 사랑때문에 그 아이들에 대해 자신의 생명을 던져 책임을 진다.

그 아이들을 먹이기 위해 갖은 수모와 모욕을 참기도 하고,
추운 겨울을 보내야할때, 그 어린 자녀들을 위해서 자신의 것을 내어주면서 희생하고, 그 아이들의 생존에 책임을 진다.

물론, 연약한 어머니는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을 다하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어머니가 가지는 사랑은, ‘책임’이라는 형태로 나타나기 쉽다.

책임을 회피하는 매우 강력한 무기 가운데 하나는,
‘남탓’을 하는 것이다. – 아, 물론 남들에 의해 일방적으로 피해를 받게되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늘 ‘남탓’을 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는 것은 결국은 사랑의 부재에서 오는 것이아닌가 싶다.

열이나서 칭얼거리는 어린 자녀가 있는데도,
내가 피곤하다는 이유로 그냥 픽 자버리는 어머니라면,
그것은 무책임한 것이고, 사랑이 없는 것이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
누구 누구 때문에 이것 못해먹겠다… 는 식의 반응을 보이는 것이라면,
그 속의 정말 문제는 사랑의 부재일 수 있다.

끊임없이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늘 다른 사람을 ‘적’으로 만들고 억측과 오해를 동원해서 자신을 보호하려하는 것은,
결국 사랑의 부재 때문이다.

어떤 대상을 ‘악’이나 ‘적’으로 규정하여 그것에 대한 증오를 자신의 존재근거로 삼는 것 역시 사랑의 부재 때문이다.

‘책임’을 회피하려는 이런 모든 자세들은… 사랑없음의 모습이다.

사랑에 대한 단상들 (6)

내가 보기에 복음은,
하나님께서 깨어진 세상을 치료하는 방법으로 ‘사랑’을 선택하셨다는 이야기이다.

심판이나 정죄나 바로잡음(correction)이 아니라, 사랑이 그 방법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문제의 해결방법으로 ‘사랑’을 선택하는 것은 상당히 counter-intuitive하다.
그리고 사람의 기본적인 문제에 대한 반응은 흔히 분노/미움에 가깝지, 사랑을 자연스럽게 선택하게 되는 일은 없는 것 같다.

증오, 분노, 정죄 등은 문제의 해결책이 될 수 없다.

highly polarized되어 있는 세상 속에서,
기독교인들이 선택해야 하는 것은 어떤 정치적 입장에 따라, 정의의 이름으로 반대편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것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인간관계 속에서도,
분노나 증오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은 없어 보인다.
결국은 사랑이 진리다.

그러므로,
깨어짐 속에서 가장 아파해야하는 것은,
내게, 우리에게, 사랑이 없다는 것에 대한 깊은 자각과 인식, 그리고 그것에 대한 깊이있는 통회가 아닐까.

지난 주말에 한 설교

지난 주말에 한 설교는 시간이 많이 부족한 상태에서 속도전으로 준비한 것이었다.
그래서 당연히 전반적으로 내가 생각하기엔 완성도가 많이 떨어지는 것이었는데….

그래도 나는 상당히 작정하고 그 설교의 내용을 짜 나갔고,
어떤 순간에는 많은 영감이 쏟아들어와 정신없이 그 내용을 만들어 나가기도 하였다.

대개 이렇게 설교를 하고 나면,
아.. 좀더 잘했어야 하는데… 뭐 그런 아쉬움이 많이 남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아주 가끔은 그 내용 자체에 내가 더 깊이 빠져서 그 여운에 잠기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이번에는,
수양회 설교임에도 불구하고,
몸도 좋지 않고, 여러가지 사정이 어려워서 저녁에 가서 설교를 하고는 다시 돌아와서 집에서 잠을 잤다.
그리곤 그 다음날 아침에 다시 그 수련회장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설교를 하고 집에 돌아와서 가만히 누웠는데…
이번엔 뭐랄까…
많이 마음이 불편했다.

또 한번 설교의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면서 생각해보니,
그 내용에 가시와 독이 많았다.
의도를 선명하게 전달하려고 하다가 무리를 한 부분이 많이 있는게 팍팍 느껴졌다.

어차피 ‘우리 가족’이니, ‘내 속 이야기’를 좀 편하게 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이야기를 풀어냈지만…
아무래도 너무 심하게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부디 그 허접한 이야기에 상처를 받은 우리 식구가 있다면,
너그럽게 나를 용서해 주시길….

내가 워낙 편협하고 생각이 짧아서 그런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