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주에 일어나기를 기대하는 것들 (3)

내 신앙이 성숙해가는 속에서,
빠뜨릴 수 없는 성숙의 과정은 깊이 있는 기도였다.

도무지 변화되지 않는 한 사람을 생각하며,
가슴을 치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던 경험을 통해,
하나님의 나를 향한 사랑을 조금이나마 더 깨닫게 되었고,
하나님의 관심에 내 관심을 조금 더 맞추는 일을 하게 되었다.

내가 섬기는 사람을 향한 가슴을 찢는 기도는,
결국 나를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게 하는 중요한 매개였다.

나는,
시카고의 두개 컨퍼런스에 모이는 귀한 학생들을 섬기는 사람들에게,
바로 그런 기도가 많이 담기길 간절히, 정말 간절히 바란다.

특히…
우리 간사 후배들에게 그런 눈물의 기도가 끊이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많은 수고로 피곤한 가운데에서도,
그곳에 모인 학생들을 향한 하나님의 불붙는 사랑이 가슴에 담겨져…
기도가 그저 터져나오는 일들이 있기를 바란다.

다음 주에 일어나기를 기대하는 것들 (2)

특히 금년에 더욱 절실한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은,
아주 소수, 정말 진실된 몇 사람이 세워지길 바라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큰 소리로 찬양을 부르고,
뜨겁게 기도하고,
말씀을 들으며 열렬히 반응하는 것을 보는 것은 대단히 흥분되는 일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 정말 몇사람만 된다 하더라도,
많은 자원과 인력과 노력을 낭비해서,
그 몇 사람을 위해서 이런 집회 할 만 하다!

아니, 그런 사람이 딱 한 사람만 있다 하더라도,
그 한 사람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엄청난 자원을 낭비해가며 이런 일을 계획하실수도 있겠다.

하나님 나라의 일은,
산술적 계산이나 통계적 데이타 분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정말 때로는 너무나도 어처구니 없는 것과 같은 그분의 일방적인 은혜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시대가 어두울수록,
하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을 집단으로 변화시키기보다는,
아주 뜬금없이 한 사람, 두 사람을 세우심으로써 시대를 변화시키는 것을 하셨던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나는 바로 그것을 금년에 더욱 간절히 바란다.

다음 주에 일어나기를 기대하는 것들 (1)

예전에,
툭하면 기도하자고 내게 압박(?)을 가해오던 팽모 형님은,
96년에 내가 처음 코스타 집회 참석 등록을 하고나니, 그 집회를 위해서 기도를 해야한다며 나를 자꾸만 독려했다.
아니, 나는 뭐 코스타 관계자도 아니고, 솔직히 말해서 그 집회 위해서 기도할만큼 내 영적인 budget이랄까 그런게 넉넉한 것도 아닌데… 이 형은 그래도 기도를 해야한다고…

적어도 내가 기억하는것이 맞다면,
그렇게 해서 시카고에서 만났던 다른 형제 자매들로부터…
그렇게 이 집회를 위해 기도했다는 이야기를 심심치않게 들었었다.

아, 물론 모두가 그렇게 열심히 기도하고 참석한 것은 당연히 아니었을테지만,
그렇게 하나님께서 미국 구석구석에 나 같이 어리버리한 사람까지도 기도하게 하시면서 그 집회를 준비시키셨었다.

그 집회에서 나누어졌던 설교나 강의를 다시 생각해보면,
수준미달의, 대단히 실망스러운 것들이 물론 많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 속에서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을 이렇게 부르시고 세우신다는 것을 강하게 느끼고 경험했었다.

나는,
지금 내가 이 글을 쓰고있는 이 순간에,
미국 어디에선가…
누군가가 그렇게 기도하고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 사람이 뭐 대단히 신앙의 연륜이 대단하지 않아도 좋고,
신학적 훈련을 잘 받지 않았어도 좋다.
그냥 그렇게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그렇게 기도하게 하시고,
그렇게 이 집회로 불러오시는 일이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Google과 Apple (5)

Apple에서는 사람을 뽑을때,
내가 이 일을 좀 해야겠는데, 이걸 제대로 좀 도와서 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뽑는 것 같다.

그런데,
Google에서는 사람을 뽑을때,
내가 이 일을 할 수 없는데, 누가 이걸 좀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뽑을 때가 많이 있어 보인다.

그래서 Apple에서는 그 사람의 기능적 측면에 많이 주목해서 그 사람을 평가하고 뽑는다.
그런데 Google에서는 그 사람의 존재적 측면이랄까… 그런 걸 참 많이 고려한다.

그래서 Google에서는 직원들을 대상으로 소위 ‘interview training’이라는걸 아주 꽤 열심히 시킨다.
그래서 뽑는 사람들이 충분히 “Googley”한 사람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 같다.

말도 안되는 설교 억지로 듣기

내가 가끔 하는 practice 가운데 하나는,
인터넷에서 랜덤으로(?) 설교를 듣는 일이다.

전혀 알지도 못하는 교회의 전혀 알지도 못하는 설교자의 설교를 듣는 것이다. (한국어와 영어 모두)
아, 그리고 전혀 동의하지 않는 설교자의 설교도 가끔 듣는다. 조엘 오스틴이나, 조용기, 김홍도 같은 분들 ㅎㅎ

이건…
대단히 힘든 일이다. -.-;

새파랗게 어린 설교자가 나이든 어르신들에게 반말을 찍찍 하는 정도는 오히려 봐줄만 하다.
자기 자랑, 논리의 비약, 말도 안되는 신학, 앞뒤가 맞지 않는 스토리 전개, 조선일보식 quotation…
뭐 문장을 지나치게 길게 써서 이해하기 어렵다거나, 주어와 목적어가 맞지 않아 헷갈리게 하는 건 그저 애고정도라고 봐줘야 할까.

그나마 다행인건, 요즘 설교가 그리 길지 않다. ^^
30분 정도 고통스럽게 버티면 대충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왜 이런 일을 하느냐고?
글쎄… 고깝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설교를 들으며 고통스러워하는 동료 그리스도인의 아픔에 동참하고 싶어서이다.
혹은 그런 설교를 들어야만 하는 시대의 아픔에 동참하고 싶어서이다.

정말… 교회가 많이 아픈게 맞는 것 같다.

예수 믿는게 체질이 아닌 장점

나는 예수 믿는게 참 체질이 아니다.
정말 예수 믿는게 잘 안된다.
예수 잘 믿는게 안된다 고 써도 되겠군.

이렇게 이야기하면 어떤 사람은,
거짓된 겸손의 이야기라고 생각하는데…
난 정말 그렇다.
진짜 예수 잘 믿는게 내겐 참 힘든 일이다.
아주 체질에 안 맞는다.

예전에 스탠리 하우어워즈가 이런 이야기를 한적이 있었다.
자신은 신학자가 되지 않았다면 크리스천이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신앙이 자신에게는 자연스럽지 않기 때문에 치열하게 그것을 연구하고 나서야 믿음을 가질 수 있었다고.

완전 위로가 되는 말이다.

어떤 이들은 신앙이 아주 몸에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소화가 되는 반면,
나 같은 사람은 늘 많이 생각하고, 고민하고, 기도하고, 묵상하고, 공부하고, 노력하는 과정을 통해서 내게 맞지 않는 옷을 입는 것과 같은 어색함을 조금씩 극복해가게 되는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이 체질인 사람은 쉽게 연마하지 못하는 근육들이 연마되어,
오히려 신앙이 체질이었다면 갖지 못할 장점들을 갖게 되기도 하였다.

내겐 예수 믿는게 영 체질이 아닌데… 그것이 오히려 신앙의 강점으로 작용하게 되기도 하는 것 같다.

찬양으로만 해결될 수 있는

신앙이 자라가는데 있어…

신앙의 본질에 대한 정확한 설명,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자세한 논증,
살아갈 길에 대한 가르침 등등이 매우 참 중요하다.

그렇지만,
신앙의 어떤 영역은,
하나님을 깊이 찬양하는 것이 없이는 도달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다.

그저 다른 것 없이,
그분을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높여드리고,
그분의 영광을 찬양하고,
그 영광을 갈망하고,
그분을 깊이 사랑하는 것을 표현하는 것.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
내가 약할때 도움을 주신다…
아니.. 그런 거 말고…

그분의 위대하심, 그분의 크심, 그분의 자비로우심, 그분의 영광을 그저 깊이 찬양하는 것이다.

나는 ‘예배의 회복’을 주장하는 어떤 사람들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마치 예배의 회복이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모든 것인양 이야기하는 예배 지상주의자들의 생각과 다르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높여드리고 그분을 찬양하는 것이 현대 예배와 신앙과 심지어는 신학에서도 점점 배제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런 생각을 자주 해본다.

사랑에 대한 단상들 (12)

현대의 기독교인들에게 과연 관용(tolerance)이 필요할까?
나는 현실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관용, 똘레앙스, tolerance라는 표현은 다음의 몇가지 이유 때문에 불편하다.

1. 우선, ‘약자’는 관용을 가질 필요가 없다.
노예가 그 주인에 대해서 관용을 가질 필요가 있는가? 일등병이 소대장에게 관용이 필요한가?
다시 말하면, 관용을 이야기하는 현대의 기독교는 어쩌면 ‘파워게임’이라는 frame에 이미 타협하고 정착해버린 기독교인 것이다.
높아지지 않고 낮아지고, 군림하지 않고 섬기는 기독교의 핵심 정신과, ‘관용하는 기독교’라는 이야기는 서로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것 같이 느껴진다.

2. 기독교가 낮아져서 섬기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을 무조건적으로 받았다는 깊이 있는 자각이 부족하고, 우리가 이제 온 세상을 그 사랑으로 사랑해야한다는 생각을 잊었기 때문이다. 기독교에서 사랑이 실종되어 버리면 섬김이나 낮아짐이 사라져 버린다.
관용을 이야기하는 기독교는, 기독교의 핵심인 사랑을 잃어버린 기독교일지도 모르겠다.

3. 관용은 사랑하지 않는 것에 대한 도피일 수 있다.
연인 사이에, I love you라고 이야기하지 않고 I tolerate you 라고 이야기한다고 생각해보자.
그게 무슨 연인인가.
우리가 무슬림을, 무신론자들을 tolerate한다면 그건 우리가 그들을 love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아예 ‘hate’과 ‘discrimination’이 기독교의 norm이 되어버린 것같은 시대에는 그나마 tolerate이라고 좀 하면 좋겠지만 서두…
그리고 사랑이 정말 힘들때, 일단 tolerate이라도 좀 해보자고 이야기해볼 수 있겠지만…
그것은 결국 사랑에 대한 포기선언은 아닐까.

4. 나는 기독교가 세상에 보여주는 사랑이 변증적(apologetic)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사랑으로 인해 기독교의 본질이 보여지고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복음의 영광이 빛난던 시기마다 기독교는,
파워를 추구하지 않고 박해를 당했고,
관용하지 않고 사랑했다.

Google과 Apple (4)

Apple의 innovation은 ‘위’에서 이루어진다.
그 idea를 현실로 만드는 일을 엔지니어들이 한다.
말하자면, Steve Jobs가 멋진 아이디어를 내면, Steve Jobs를 둘러싸고있는 똑똑한 엔지니어들이 그 Steve Jobs의 아이디어를 현실로 구현해내는 것이다.

Google의 innovation은 좀 더 ‘전방위’적으로 이루어진다.
그야말로 말단 직원이 아주 파격적인 아이디어를 낼 수도 있고, CEO가 새로운 아이디어를 낼 수도 있다.
Google의 ‘윗 사람’들은 그 여러가지 idea들을 교통정리하고 솎아내는 일들을 더 많이 한다고 생각할수도 있겠다.

그래서,
Apple의 innovation은 일사천리이고, 실패가 적고, 꼼꼼하고, 일관성이 있다.

그렇지만,
Google의 innovation은 다소 어수선하고, 실패가 많고, 일관성이 적은 대신, 아주 엉뚱하고 새로운 것들이 나온다.

그래서,
Apple의 CEO는 앞으로 몇년간 Apple의 innovation의 방향이 어떻게 될지 대충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Google의 CEO는 앞으로 몇년간 Google의 innovation의 방향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부분이 많이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Google의 innovation은 그 자체가 일종의 하나의 ‘생물’이기 때문이다.

Google과 Apple (3)

Apple은 1976년에 만들어진 하드웨어 회사이고, Google은 1998년에 만들어진 소프트웨어 회사이다.
말하자면 Apple은 나와 나이가 비슷하고, Google은 민우와 나이가 비슷하다.

나는 두 회사의 문화차이가 처음 세워졌을때의 시대와도 연관이 있다고 생각한다.

Apple은 ‘상명하복’의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Meeting에서 윗사람에게 보고하는 내용이 내 일의 결과물일 경우가 많다.
그런데 Google은 상명하복의 분위기라기 보다는, 거대한 network이 회사 내에서 형성 되어서 그 network이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Apple에서는 한참 윗 사람이 한마디 하면 그것에 대해 뭐라고 토다는게 그리 쉽지 않은데,
Google에서는 윗 사람이 오히려 여러 소리들을 들으려고 많이 노력을 한다.

Apple에서 all hands meeting (전 직원 미팅)을 한다고 하면 대개, 회사의 방침을 하달하고, 높은 사람들이 방향을 제시하고 뭐 그런 것이 99%라면,
Google에서 all hands meeting을 하면, 회사 높은 사람들이 직원들의 의견을 듣고, 직원들에게 여러가지를 설명해주고 inform해주는 성격이 강하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Apple이 Google과 비슷한 것을 하려하면 잘 안되고,
Google의 Apple과 비슷한 것을 하려하면 잘 안된다고 확신하고 있다.

Apple이 만든 map software나,
Google이 만든 tablet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