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대한 단상들 (11)

사랑에 대한 대단히 잘못된 접근 가운데 하나는,
사랑을 ‘설명해 버리는’ (to explain away)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랑이 물론 이론적으로 설명될 수 있는 부분이 많이 있다.
아니, 이론적으로 꽤 잘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사랑을 설명하는 것으로 사랑을 ‘안다’고 착각해서는 안된다.
사랑은 그 본질에 ‘헌신’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그 헌신을 하지 않은채 설명을 하는 것으로는 그 사랑을 안다고 할 수 없다.

사랑이 사변적이 되어버리는 것은,
헌신없는 설명으로 사랑을 대체하려는 비겁함이 사랑을 파괴할때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후회할 짓 (2)

그렇게 그 회사에서 lay-off를 당하고나서,
나는 감사하게도 몇달 이내에 직장을 잡았지만,
그때 그렇게 어렵게 job을 잡았던 사람들은 여전히 job을 찾고 있다.
(참… 세상이 그렇다. 그렇게 어렵게 job을 잡았던 사람들 일수록 다시 지금도 또 그렇게 어려워하고 있다.)

나는 지금 이 회사에 들어와서,
그 사람들과 계속 연락해가면서…
계속해서 그 사람들 internal referral도 해주고,
혹시 내게 recruiter가 연락을 해오면 그 사람들에게 pass도 해주면서,
그 사람들 job을 찾게 해 주려고 많이 노력을 해 왔다.

그러던중,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과 매우 가깝게 연관이 있는 어떤 project의 그룹 리더를 뽑는 opening이 하나 났다.
나는 그렇게 job을 찾고 있는 예전 동료 한 사람에게 바로 연락을 했고, 그 사람 updated resume를 받아서 바로 internal referral을 했다. 그리고 그 사람은 phone interview까지도 하게 되었다.

그런데,
내가 그렇게 하는 것을 보던 우리 회사의 어떤 사람이…
“아니, 그건 네가 하겠다고 하면 좋을텐데… 그 자리는 여러가지로 visibility도 높고 욕심낼 만한 자리인데… 왜 그걸 그렇게 넘겨버리냐” 라며 내가 물어보았다.

음…
진짜 그러네. 이거 내가 하겠다고 하면 당연히 그쪽 hiring manager는 그거 잘 되었다! 라며 나보고 하라고 하겠네… 싶었다. 아니 그렇게 하면 내가 referral을 한 이 친구는…

아마 앞으로 며칠 이내에 내가 어떤 형태로든 결정을 해야할 것 같다.
혹시 내가 그걸 하겠다고 하고, 내 지금 빈 자리를 그 친구에게 넘길까? 아니… 그 친구는 지금 내 자리보다는 현재 있는 opening에 더 어울릴 만한 사람인데.

지금의 상황이,
예전에 내가 ‘좋은 자리’를 예전 직장동료에게 넘겨주었던 상황과 정말 비슷한 상황인건지…
그래서 그때와 같이 그렇게 후회할만한 결정을 또 해야하는 상황인건지…
많이 고민중이다.

뭐 어차피 나는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로도 직장에서 충분히 인정받고 있고,
더 욕심내지 않으면서 옛 직장 동료가 일자리를 얻도록 도움도 줄 수 있는 것인데…

어떤 결정이 되었건 간에, 앞으로 며칠동안 상황을 좀 더 잘 관찰해보고,
또 다시 ‘후회할 만한 결정’을 잘 해보려고 고민중이다.

그렇게 자꾸만 내 우물을 다른 사람들에게 넘겨주고,
나는 옮겨가며 새 우물을 파는 사람이 되어보고 싶은 생각이다.

후회할 짓 (1)

내가 이전 직장에 다닐 때였다.
일이 자꾸만 꼬이고, 뭔가 압박은 더해져 오고, deadline은 다가오는데 결과는 잘 나오지 않고…
아… 이러다가 이거 우리 팀 몽땅 한방에 가겠구나… 싶은 생각이 막 들었었다.
약간 약삭빠른 내 옆에 앉아있던 동료 한 사람은 재빨리 다른 직장을 알아보더니만 휙~ 나가버렸다.

그런데 그때, 남들이 다들 부러워할만한 어떤 회사의 리크루터가 내게 연락을 해왔다. 이러이러한 자리에 사람을 뽑는데 관심이 없느냐고. 나는 아주 살짝 잠깐 고민을 하다가, 그 연락을 다른 회사에 있던 내 예전 직장 동료에게 pass를 해주었다. 그 친구는 다니던 직장이 마음에 들지 않아 다른 직장을 알아보고 있던 참이어서 내가 그렇게 연결을 해 주었다.

왜 그때 확~ 옮기지 않았느냐.
뭐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한가지 이유는, 내가 그 팀에서 맡고 있는 일이 쉽게 다른 사람이 replace 할 수 없는 일이었고,
내가 그 상황에서 그냥 확~ 그만두고 옮겨버리면 그 팀에 아주 큰 타격이 될 것이 분명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 팀에는 몇년동안 job이 없다가 겨우 이 직장을 잡은 사람이 몇명 있었고, 지금 이 팀이 날라가버리면 이 사람들은 다시 어려움을 겪을 것이 분명했다.
나는 어떻게든 이 팀의 일을 마무리 짓고, 최소한 살리는데까지 살리다가 나가겠다고 결심을 했었다.
그래서 열심히 일을 했다.
그러나… 그렇게 노력한 것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고, 회사는 우리 팀 전체를 다 lay off 시켜버렸다.

그렇게 lay off를 당하고 나서,
그때 그 리크루터의 연락을 다른 친구에게 pass 한 것이 후회가 되었을까?
당연히 그랬다. 완전히 후회 되었다! 발등을 찍고 싶을 만큼 후회 되었다.

그런데…
그런 상황이 다시 된다면 나는 그때와는 다른 선택을 하게 될까?
음…
아마도 그런 상황이 다시 되더라도 나는 그때와 같은 결정을 할 것 같다.

적어도 그때 나는,
내가 이 직장에서 이렇게 많은 월급 받으면서 일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이렇게 일해서 이 어렵게 직장 잡은 사람들도 함께 살리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후회할 짓이었지만, 지금 다시 그 상황이 되어도 또 후회할 짓을 할 것 같다.

사랑에 대한 단상들 (10)

어그러진 자기애에 빠져, 다른 이들을 비난하는 것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결국 자신의 존재근거를 다른이들의 악함에 두고 있는 것이라고 할수도 있겠다.

문제를 다른 이들에게 전가함으로써 나를 정당화하는 시도는,
그 삶의 ownership을 당당히 확보하지 못하는 것이 된다.

맞서야할 자신의 한계와 어그러짐에 당당히 맞서고,
자신의 잘못을 당당히 인정하여,
결국 자신의 삶의 ownership 혹은 stewardship을 확보하고 지켜내는 것이 필요한데…
그것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나의 삶을 끊임없이 타인에게 종속시키고,
그래서 자유로움을 스스로 박탈해버리게 된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런 사람의 마음을 녹이고,
자신이 스스로의 삶에 대해 당당히 책임을 지는 사람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다.
때로 그것이 긴 시간이 걸릴 수도 있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정말 그렇게 할 수 있다.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쫓기 때문이고,
진리는 자유함을 주기 때문이다.

사랑에 대한 단상들 (9)

자기애가 드러나는 한가지 어그러진 형태는, 타인에 대한 공격이다.
자신의 한계, 자신의 어그러짐을 인정할 수 없기 때문에, 모든 문제의 근원을 ‘타인’에게 돌리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늘 상황의 문제는 ‘상대’에게 있게 되고, 나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내가 해야하는 일은 그저 ‘상대’를 비난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이것은 개인과 개인 사이에서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단체와 단체, 혹은 국가와 국가, 문명과 문명 사이에서 이루어지기도 한다.
그저 문제의 근원이 ‘저쪽’에 있다고 규정하고 그저 ‘저쪽’을 비난하고 공격하면서 자신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

늘 ‘저쪽’의 의도(intention)에 대해서는 신뢰할 수 없다고 규정하여 내가 신뢰를 주지 않으면서도,
여전히 ‘저쪽’에 문제가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소위 늘 상처를 쉽게 받는 개인이나,
자신에 대한 비판이나 비난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는 민족이나…
모두 이런 함정에 빠져 있는 것이다.

이것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는 한가지 방법은…
깊이있는 자기성찰이다.

나는,
복음을 제대로 만난 사람이라면,
깊이있는 자기성찰을 할 수 밖에 없다고 믿는다.

복음이 어떤 문화에 제대로 영향을 끼치면,
그 사회가 집단적 자기성찰을 하게되는 힘을 가지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복음이, 자기애를 넘어서 진정한 사랑으로 개인과 사회를 이끄는 방식은 이런 모습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형제

내가 대학때 대전에서 다녔던 작은 개척교회에서는,
교회에서 ‘집사’, ‘장로’ 이런 직책이 없었다..

운영위원회라는 것이 있었고, 그 운영위원회에서 행정적인 일을 담당하긴 했지만…
그분들은 그야말로 그 역할을 담당하는 분들이었고, 그나마 그 운영위원들도 돌아가면서(?) 했다.

오히려, 소그룹을 담당해서 그 소그룹을 섬기는 리더들이 계셨는데, 그분들이 교회의 영적 리더십을 담당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 같은 대학생이, 나보다 10살, 20살 많은 분들을 호칭할때, ‘아무개 형제님’, ‘아무개 자매님’ 식으로 불렀다.
처음엔 좀 이상했지만… 그분들도 그걸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나도 그게 나중에는 뭐 그냥 자연스러워졌다.

….

우리 교회에서는,
내가 목사님 부부를 제외하고는 제일 나이가 많다. ^^
그중에는 학생들도 있고, 나와 20살 이상 차이나는 사람도 (당연히) 있다.

그 사람들은, 교회에서 나를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 하는 것을 참 난감해 하는 것 같다.

어떤 사람은 나를 ‘선생님’ 이라고 부르고, 어떤 사람은 나를 ‘간사님’ 이라고 부른다.
‘선배님’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고, ‘형’ 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고, ‘형제님’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지난 주일에 교회 모임에서는,
내 호칭을 뭐라고 부르면 좋을지 몰라 다들 어려워했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20살 정도 차이가 나는데 형이라 부를수도 없는 노릇이긴 하다.

그런데,
우리 교회의 ‘젊은’ 교인들이 나를 부르는 호칭에 어려워 하는 것을 보면서…
예전에 내가 나보다 20살 많은 분들을 ‘형제님’ ‘자매님’이라고 불렀던 것을 생각해 보았다.

나는…
그때 그분들보다 교회에서 너무 무게를 많이 잡는 걸까. 그래서 사람들이 다들 그렇게 나를 부르는 호칭에 힘들어 하는걸까?
그냥 ‘오승 형제’라고 부르기엔 너무 무게를 많이 잡고 있는 걸까?

뭐 그런 생각을 좀 해 보았다.

허걱 이런…

어제 운전을 하면서 어느 목사님의 설교를 들었다.
아마 지난주쯤 했던 설교 인것 같았는데…

내가 ‘사랑’시리즈에서 하고자 천천히 풀어보고자 했던 몇가지 이야기를 후다닥~ 다 해버리셨다. ㅎㅎ
이런 멘붕…?

그렇지만,
내가 하고 있는 생각들이 이런 식으로 confirm이 될때 느끼는 묘한 안도감같은 것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외로움이랄까 서러움이랄까 이런게 확~ 거두어지는 느낌은 받곤 한다.

감사한 일이다.

Google과 Apple (2)

Apple을 Apple되게 만든 가장 중요한 culture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attention to detail’이라고 이야기한다.

사람들이 왜 Apple product를 좋아하고, Apple product를 쓰느냐?
바로 그 attention to detail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hardware가 고장나지 않도록 꼼꼼하게 design하고 그걸 또 아주 꼼꼼하게 만든다.
사람들이 쓰기 좋으면서도 모양이 예쁘도록 여러가지를 고려해서 design을 한다.
software도 쓰는 도중 crash를 한다거나 하는 일이 별로 없고, 상당히 세심한곳까지 신경을 써서, 모든 것을 intuitive하게 만들려고 최선을 다 한다.

반면에,
적어도 내가 겪어본 Google(Alphabet)은, attention to detail이 Apple에 비하면 많이… 아주 많이 떨어진다.

Apple에서는 어떤 부품을 A 공장에서 B 공장으로 이동하는데 사용하는 포장재(package) 재질 하나를 바꾸기 위해서, 3개월동안 그게 정말 문제가 없는지 실험을 해서 바꾸었었다.
그런데 Google에서는 이걸 그냥 engineer가 그렇게 하며 좋겠다…고 결정하면 꽤 허술하게 시도를 한다. – 그래서 사실 실수/실패도 많다.

그런데,
바로 그런 차이 때문에, Apple에서는 실제 일하는 engineer로부터 새로운 아이디어들이 나오기 훨씬 더 어렵다. engineer들은 아주 세심한 작은 부분들을 신경쓰느라 새로운 시도를 해보기가 대단히 어렵기 때문이다.

반면에 Google에서는 아주 crazy한 idea를 만들어 내는 일이 훨씬 더 자연스럽다.

작은 배려

내가 함께 일하는 사람중에, 그리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은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 탓을 많이 하고, 다른 사람의 영역에 문제가 생기면 높은 사람들을 잔뜩 cc 해서 이메일을 돌린다. 그러면서 ‘얘 때문에 일이 안된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broadcasting을 한다.

최근에는 내가 그 희생양이 되었다. ^^
이 사람 때문에 열받아 하는 다른 사람들을 보았기 때문에, 뭐 그러려니… 하면서 차분하게 반응하고 있었는데…

그 사람의 manager가 갑자기 나를 조용히 conference room으로 부르더니만…
얘가 이런 이메일을 보낸 것 때문에 혹시 마음이 상했으면 내게 얘기해 달라. 내가 얘에게 주의를 주겠다. 얘도 잘해보려고 하다보니 자주 의욕이 넘쳐서 그러는 것 같다….
뭐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순간,
그나마 내 마음에 남아있던 부글부글~이 사악~ 내려가는 것을 경험했다.
이미 머리로 다 알고 있었던 일이었고, 나름대로 그래서 이성적으로 잘 처리를 하고 있었지만… 뭐 그래도 기분 나쁜건 사실이었는데,
이 manager가 30초 정도 내게 해준 말 때문에 기분이 훨씬 더 나아졌다!

때로는,
아주 보잘것 없는 작은 친절이나 배려가 어떤 사람에게는 큰 impact가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