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대한 단상들 (12)

현대의 기독교인들에게 과연 관용(tolerance)이 필요할까?
나는 현실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관용, 똘레앙스, tolerance라는 표현은 다음의 몇가지 이유 때문에 불편하다.

1. 우선, ‘약자’는 관용을 가질 필요가 없다.
노예가 그 주인에 대해서 관용을 가질 필요가 있는가? 일등병이 소대장에게 관용이 필요한가?
다시 말하면, 관용을 이야기하는 현대의 기독교는 어쩌면 ‘파워게임’이라는 frame에 이미 타협하고 정착해버린 기독교인 것이다.
높아지지 않고 낮아지고, 군림하지 않고 섬기는 기독교의 핵심 정신과, ‘관용하는 기독교’라는 이야기는 서로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것 같이 느껴진다.

2. 기독교가 낮아져서 섬기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을 무조건적으로 받았다는 깊이 있는 자각이 부족하고, 우리가 이제 온 세상을 그 사랑으로 사랑해야한다는 생각을 잊었기 때문이다. 기독교에서 사랑이 실종되어 버리면 섬김이나 낮아짐이 사라져 버린다.
관용을 이야기하는 기독교는, 기독교의 핵심인 사랑을 잃어버린 기독교일지도 모르겠다.

3. 관용은 사랑하지 않는 것에 대한 도피일 수 있다.
연인 사이에, I love you라고 이야기하지 않고 I tolerate you 라고 이야기한다고 생각해보자.
그게 무슨 연인인가.
우리가 무슬림을, 무신론자들을 tolerate한다면 그건 우리가 그들을 love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아예 ‘hate’과 ‘discrimination’이 기독교의 norm이 되어버린 것같은 시대에는 그나마 tolerate이라고 좀 하면 좋겠지만 서두…
그리고 사랑이 정말 힘들때, 일단 tolerate이라도 좀 해보자고 이야기해볼 수 있겠지만…
그것은 결국 사랑에 대한 포기선언은 아닐까.

4. 나는 기독교가 세상에 보여주는 사랑이 변증적(apologetic)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사랑으로 인해 기독교의 본질이 보여지고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복음의 영광이 빛난던 시기마다 기독교는,
파워를 추구하지 않고 박해를 당했고,
관용하지 않고 사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