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rnie Sanders

예전에 이 블로그에 한번 쓴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나는 Bernie Sanders의 아이디어에 깊이 공감하고 그것들을 지지한다.
그렇지만 나는 또한 Bernie Sanders가 대통령이 되는 것 보다는 Hilary Clinton이 대통령이 되는 것이 더 좋겠다고 썼었다.

그 이유는,
내가 Sanders의 아이디어에 깊이 공감하지만,
결국 타협과 대화를 통해 이루어져야하는 정치판에서,
Sanders의 아이디어를 그나마 좀 더 이루어지게하는 현실적인 choice가 Hilary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Sanders가 대통령이 되면 막상 그분이 가진 아이디어와 미국 주류 정치가 가지고 있는 아이디어의 갭이 너무 커서,
현실적으로 일이 잘 되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내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그렇지만,
Hilary Clinton이 결국 공식적으로 민주당의 대통령후보가 되는 것을 보면서는…
참 많이 마음이 아프다.
어떤 이상주의자의 이상이 현실의 벽에 가로막혀 진보하지 못하는 것을 보는 아픔이랄까.

그리고 또,
나는 예전이 이 블로그에서,
내가 스스로 이상주의자임을 포기했다고 쓰기도 했다.
그 이유는, 현실에 대한 책임의식 때문이라고 썼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렇지만,
내가 가진 신앙은 나로하여금 이상주의를 포기할 수 없게 만든다.
여전히 이상이 현실이 되지 못하는 것이 몹시 고통스럽고,
그것 때문에 목놓아 울며 기도하게 된다.
(수요일 저녁 우리 교회 기도모임에 오는 분들은 허구헌날 내가 우는 소리로 기도하는걸 잘 안다. ^^)

신앙인으로서,
비기독교인 Bernie Sanders의 ‘낙마’를 진심으로 슬퍼한다.

이건희 회장에게 분노한다고?

이건희 회장이 성매매를 한 동영상이 떴다고 난리다.
대충 보니 참… 마음이 착잡하다.

당연히 나는 성매매를 한 것이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아주… 아주… 아주 많이 잘못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정말 이게 이건희 회장에게만 악담을 쏟아내고 이건희 회장을 비난하면 되는 일인걸까?
나는 솔직히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한국의 남자들의 술 문화,
한국 남자들의 성 문화를 생각해보면…
솔직히 말해서 이건희 회장에게 그렇게 돌던질만한 사람들이 많지 않을수도 있겠다.

벌써 몇년 된 일 이지만…
어떤 남자 한사람과 일대일로 성경공부를 했다.
한국에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미국에 공부하러 와서 신앙을 좀 갖게 된 경우였는데…
성경공부를 하면 잘 따라왔고, 어느정도 ‘성장’하는 것이 보인다고 생각하기도 해서
나름대로 기뻤다.

그러다가,
이 친구가 여름에 방학을 맞아 한국에 다녀온다고 했다.
그러면서 한국에 가면 하고 싶은 일들을 이야기했다.
맛있는 것도 먹고 싶고, 쇼핑도 하고 싶고, 친구들도 만나고 싶고…
그런데 그 하고 싶을 리스트 중에는, 소위 ‘퇴폐 안마시술소’에 가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

한국에서 친구들이,
자신이 오면 데리고 가겠다고 했단다.
그래서 그게 기대가 된다고.

허걱…
이건 뭥미.

아니… 우리 성경공부도 함께 했고, 이젠 신앙도 가졌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화들짝 놀라서 물어보았다.

아니… 그게… 신앙 양심에 괜찮느냐고…

그랬더니 그 친구가 다시 화들짝 놀라면서 내게 반문했다.

아니… 그걸 신앙과 연관시켜 생각해보지 못했다고.

남자가, 친구들과 함께 여자 나오는 술집에 가서, 술 마시고, 2차도 가고…
이게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문화이기 때문에,
그냥 당연하고도 자연스럽게 생각했다는 것이었다.

아니, 세상에… 그게 말이된단 말인가?????

한국의 모든 남자들이 다 그렇다고 이야기할수는 물론 없다.

그렇지만,
한국에서 남자들이 여자에 대하여 성적농담을 쉽게 하는 대화들을 들어보면…
그리고 술 마시고 여자들과 ‘노는 것’에 대해 쉽게 생각하는 것들을 들어보면…
아마 깜짝 놀랄만큼 많은 남자들이, 정말 돈만 있다면 이건희 회장이 했던 것 보다 더 심한 것들도 하지 않을까 싶다.

그런의미에서,
내가 나름대로 분석(?)을 해 보자면…
이걸 ‘개인적 일탈’로 이야기해버린 삼성측의 발빠른 답변은 대단히 영리한 move 이다.
왜냐하면, 그냥 ‘개인적 일탈’로 이야기해버리면… 이미 성매매 혹은 그와 비슷한 일들을 쉽게 하고 있는 놀랄만큼 많은 다수가 돌을 던지는 것을 차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뭐 남자가 그럴수도 있지….
뭐 나라도 돈 있으면 그러겠다….
심지어는 이건희 부럽다…. 는 식의 반응까지.

그래서,
뉴스타파가 이걸 공개한 것은 참 용기있는 행동이었고, 나도 박수를 보내지만…
이건 그렇게 큰 파급효과를 일으키지 못하지 않을까… 하는 조심스러운 예측을 해본다.

초대교회 시절에,
이교도들이 그리스도인들을 특징지을때 두가지를 언급했다고 한다.
하나는 자꾸 모인다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아무하고나 난잡한 성관계를 하지 않는다는 것.

이건희의 ‘개인적 일탈’, 한국 남자들의 ‘2차 문화’…
과연 한국의 기독교는 무엇이 다를까?

어렵지 않아서 힘든 신앙 (5)

사실 나는 신앙생활이 참 외롭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엄청나게 많이 타협하면서,
하나님이외에 너무 많은 것들을 우상으로 두고 살고 있는데,
아무도 내게 이 우상에 대해 고함을 쳐주는 사람이 없다.

오히려,
너무 별나게 신앙생활하지 말라는 충고를 듣거나,
그건 그저 네 신앙스타일이지.. 라는 식으로 담을 쌓는 이야기들은 참 많이 듣는다.

어쩌다 하나님을 따르는 것에 대해, 헌신에 대해,
한참 tone을 다듬어서 부드럽게 이야기하면,
그렇게 쎄게 이야기하면 부담된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나 같이 엉터리로 믿고 있는 사람에겐,
공동체가 곤장도 치고 (물론 상징적으로 ㅋㅋ)
누군가는 조용히 다가와서, “저 정말 그렇게 살면 안된다”고 이야기해주어야 하는건데…
아무도 그렇게 해주는 사람이 없다.

사실 내 개인적으로는,
이런 의미로,
어렵지 않아서 힘든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어렵지 않아서 힘든 신앙 (4)

소위, ‘공동체’를 많이 강조하는 어떤 교회들에서,
많이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스탠스를 취하면서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을 강조하는 모습을 보는 경우가 자주 있다.
나는 그런 교회들이 해야할 일이 분명히 있다고 믿는다. 그런 교회들이 잘못이라고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내가 불편한 것은… 그런 nice한 교회가 그렇게 nice하고 soft하게 가면서… 자신들을 스스로 ‘대안공동체’라고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나는 ‘대안공동체’를 추구하는 교회라면,
급진적인 주되심의 고백, 타협하지 않는 헌신, 세상과의 처절한 싸움 등등이 수반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아무도 견책하지 않고, 도전하지 않고, 그런 도전이 벅차게 느껴지는 그런 일이 없는 공동체라면 결코 대안공동체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신앙의 성숙을 자아실현이나 자기 성숙 정도로 이해하는 공동체에서는,
결코 대안공동체의 모습을 기대할 수 없다.

어렵지 않아서 힘든 신앙 (3)

신앙생활을 하다가 정말 힘든 것이,
소위 ‘세상과 싸우는’ 것일까?
뭐 그렇다고 할수도 있겠다.

그런데, 이건 어떤가?

내가 세상과 열심히 싸우는데, 주변의 다른 사람들이 아무도 그 싸움에 동참하지 않고 있다면?
혹은,
내가 싸우다가 타협하면서 질질 끌려가고 있는데, 주변의 동료 신앙인들이 아무도 나를 책망하지 않는다면?

이런것들… 정말 많이 힘들지 않겠는가?

신앙 생활을 하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낙심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 생활을 하는 것이 너무 쉬워서 낙심하는 사람들이 혹시 많이 흩어져 있지는 않을까?
(솔직한 내 바람이기도 하다..)

어렵지 않아서 힘든 신앙 (2)

Tony Campolo가 예전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들은 적이 있다.

젊은이들은, 기독교가 너무 어려워서 신앙을 저버리지 않는다. 우리가 기독교를 너무 쉽게 만들었기 때문에 떠나는 것이다.

나는 정말 많이 공감한다.

그래서 기독교가 더 깊이 있는 철학을 더 이야기하고, 더 복잡한 논리가 필요하고…
그렇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런 것들이 정말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기독교에 지금 정말 필요한 것은, 타협하지 않는 헌신, 사랑의 급진적 실천, 죄와의 끊임없는 싸움, 하나님에대한 절대적 신뢰… 뭐 그런 것들은 아닐까.

그래서 사도행전에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 대해서 기술되어있는 것 처럼, (행 5:13)
그 사람들을 참 좋다고 생각하긴 하지만, 막상 그 그룹에 join하는 것은 망설여 지는.. 그런 모습이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어렵지 않아서 힘든 신앙 (1)

소위 seeker friendly church 라는 것이 유행을 했던 적이 있었다.
아, 물론 지금도 그 십수년된 그 개념을 여전히 붙들고 뒤쳐져 있는 교회들이 많이 있지만…

그것 내용은 결국 이것이다.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와서 불편하지 않게 느낄 수 있는 교회의 분위기를 만들어서 그 사람들이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배려해준다는 것이다.

그 내용 자체로는 결코 나쁘지 않다. 오히려 권장할 만한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함으로써, 공동체가 함께 추구하는 신앙의 깊이가 얕아져버린다는데 있다.

요즘과 같이 기독교 신앙 자체가 조롱거리가 되어버린 세상 속에서,
과연…
진입장벽이 너무 높아서 기독교 신앙에 들어오지 않는 사람들과,
그 신앙이 추구할 만한 가치가 없다고 느껴서 신앙에 들어오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
어떤 쪽이 더 많겠는가?

이 시대에 정말 교회가 더 뼈아프게 고쳐고 추구해야 하는 것이,
cool한 문화와, 시류에 어울리는 음악과, fancy한 presentation을 더 추구해서 seeker들이 편하게 느끼도록 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천박하고, 이기적이고, 자기모순적인 값싼 모습을 벗어버리고, 오히려 더 counter-cultural한 모습을 추구해야 하는 것일까.

진입장벽이 높아지는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더 깊이있는 것을 추구해야하는 시대인 것은 아닐까.

도무지 이상한 글을 쓰는 사람들

인터넷에서 보면,
부지런히 자신의 생각을 글로 표현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난다.
그중에는 아주 유명한 분들도 계시고…
내가 여러 경로로 ‘follow’하는 분들은… 당연히(?) 기독교인들이 많은 편이다.

어떤 글들은 읽으면서 마음에 공명을 주기도 하고,
깨달음이나 고민을 던져주기도 한다.

그렇지만, 어떤 글들은…
어휴… 이분은 글을 좀 안쓰시는게 차라리 낫겠다… 싶은 경우도 있다. -.-;
그중 어떤 분들은 ‘follower’들이 많이 있다.
거의 fan club 수준의 follower 들이라고나 할까.

논리적으로 잘 맞아떨어지지 않는 이야기를,
발전도 없이 몇년씩 똑같이 하는 분들도 있는데…
음… 정말 보면 안타깝다.

그런데,
사실 내가 그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요즘 좀 많이 든다. -.-;
나야 그렇게 유명한 사람도 아니고,
내 글에 깊은 영향을 받는 사람도 없으리라 생각하지만,

누군가는 내 블로그를 가끔씩 보며,
얘는 맨날 이렇게 말도 안되는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 자빠졌네….
하지는 않을까.

하나의 씨앗교회 7월 추천 도서

7월 추천도서는 다음과 같다.

– 중동의 눈으로 본 예수 (케네스 베일리)
– 일상 기도 (폴 밀러)
– 생각하는 신앙 (박영선)
– 한나의 아이 (스탠리 하우어워스)
– 나의 사랑하는 책 로마서 (김도현)

덧붙이는 이야기 몇개

1.
이번주 주일에 이 책 소개를 하려고 열심히 준비를 해서 교회에 갔는데…
허걱. 김도현 교수님이 거기 와 계신 거다!

완전 놀랐다.
어쩐일로 오셨느냐고 여쭈어 보았더니 우리 목사님이랑 요세미티쪽 등산을 하러 오셨다고.
그래서 김도현 교수님 책은 오히려 쫄아서 소개를 잘 못한 듯.

2.
두달에 다섯권씩 책 소개를 하니까,
사람들이 내가 이 책들을 다 읽는줄 안다. -.-;
당연히 아니다. ㅎㅎ
나는 책 읽는 속도가 늦어서, 한달에 책 한권 읽을까 말까 한 수준이다.
책 리스트도 나 혼자 만드는 것도 아니고, 여러분들이 좋은 추천을 해주셔서 만드는 것이다.

다만, 여러 경로로 그 책에대한 평가를 수집하기도 하고, 그 책의 저자를 좀 알고 있으면 그것으로 그 저자를 믿고 소개를 하는 경우도 있다.

일상과 헌신

어제 주일 예배에는,
오랜만에 만나는 민동식-한지은 선교사 부부가 왔다.
한지은 선교사가 설교를 했는데, 설교 내용도 물론 참 좋았지만…
그 설교를 들으면서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설교중 참 내 마음을 많이 울렸던 것은, 기억을 되살려서 quotation을 하자면 이런 것이었다.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일상적인 일을 하면서 과연 이것이 선교일까 하는 고민을 한다”

선교사가 해주는 참 삶이 담겨있는 말이었다.

나는,
흔히 기독교 써클에서 ‘일상성’이라고 이야기하는 표현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일상성을 이야기할때 흔히 우리는 일상을 하나님께 헌신하지 않은 내 comfort zone으로 기술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수련회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간다는 표현을 할때,
수련회때 많이 ‘은혜 받았지’만, 이제는 들뜬 마음 다 가다듬고 원래상태로 복귀한다는 말인데…
사실 수련회를 제대로 했다면, 원래 상태로 복귀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같은 삶의 현장으로 돌아가더라도, 살아가는 일상이 더 이상 예전과 같은 일상이 될 수 없음을 깨달아야 한다.

나는…
내 욕망을 추구하는 것을 ‘일상’이라는 언어로 순화시켜서 이야기하는 요즘 기독교의 어떤 흐름이 대단히 불편하다.

젊은 한 선교사가 ‘일상’의 무기력함을 느끼면서도 그것이 선교임을 이야기하는 것이,
제국의 모든 안락함을 누리면서 일상이라는 이름으로 헌신을 피해가는 것과 같을 수는 없다.

젊은 선교사의 고민은,
이렇게 헌신 했으나, 마치 내 열심으로 더 나아갈 수 없을 것 같은 답답함, 그 속에서 마치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것과 같은 무거음을 ‘일상’이라고 표현한 것이 아닐까.

두 어린아이를 남편과 함께 키우면서 타국에서 고군분투 하는 젊은 여자 선교사가 일상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과,
제국의 안락함을 조금 더 누려보고자 버둥거리면서 자신의 욕망을 더 채우는 것으로부터 한발짝도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이야기하는 믿음은,
어쩌면 본질적으로 다른 믿음일지도 모르겠다.

일상성이 건강해지기 위해서는 헌신이 전제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