뜬금없는 geeky한 생각 (10)

Hyper Calvinist들이 주장하는 극단적 예정론이나,
믿기만 하면 천당에 간다는 구원파적 구원론 같은 것들은 모두…
성경 전체의 맥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빠지는 오류이다.

그렇지만 내가 여기서 설명하려고 노력했던 것과 같이,
물리학적 시간에 대한 이해를 조금 더 깊이 해보면,
그런 비뚤어진 생각들이 얼마나 shallow한 것인가 하는 것이 조금 드러나는 것 같기도 하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깊게 이해하기 위해서,
나 같은 geek의 묵상도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면 좋겠다.
(뭐 적어도 내겐 이런 생각이 참 많이 도움이 된다. ^^)

뜬금없는 geeky한 생각 (9)

산상수훈에 대한 이해도 그런 식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산상수훈이 도덕/행동 강령이냐 아니면 다다를수 없는 이상을 이야기한 것이냐 하는 논쟁과 관련해서…

내 생각에 산상수훈은, 그냥 ‘하나님 나라의 백성됨’에 대해서 뭉뚱그려서 설명을 하고 있는 설교이다.
그래서 그게 언제 이루어지는 건데? 하는 것은 그 산상수훈의 관심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상황이나 경우에는 따라야할 행동윤리로 이해해야 더 적절할수도 있고,
어떤 상황이나 경우에는 다다를 수 없는 이상이 되기도 한다.

혹은 산상수훈의 어떤 부분은 지금 좀 더 구체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것이 있는 가 하면,
어떤 부분은 도저히 지킬 수 없어 보이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 모든 것이 합쳐져서 하나님 나라 백성됨을 이야기한다.

깍두기와 콩나물국이 다 합쳐저서 저녁식사가 되듯이,
A(t1), A(t2), A(t3),… 등등이 다 합쳐저서 A라는 사람의 삶이 되듯이 말이다.

뜬금없는 geeky한 생각 (8)

나는 가령,
회심은 천당을 가는 ticket을 확보하는 것이고, 그 후의 성화 과정은 optional이라고 생각하는 관점이라던가…
성화 없는 구원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관점은 너무나도 이런 시간 개념을 단편적으로 이해해서 그렇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성경을 보면,
하나님 나라 백성됨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않으면 구원이 없다는 식으로 기술되는 것들이 참 많다.
특히 예수님은 아주 짤없고도 강력하게 행함에 대해 많이 말씀하신다.

아니 그럼… 성화를 이루어야 구원을 얻는단 말인가?
성화 하지 못하고 죽으면 지옥가나?

뭐 이런 유치한(?) 걱정과 고민을 해보게 되는데..

구원이라는 것은,
앞에서 이야기한 것과 같이
A(t1)부터 A(t2), A(t3)… 로 이어지는 전체 과정을 이야기한다.

우리의 관심사는…
그래서.. 어디까지 해야 구원을 얻는건데? 믿기만 하면 되는 거야? 그것대로 살아야 하는 거야?
뭐 이런 식의 크로노스적 시간 개념에 따른 설명이지만…

성경의 관심사는
‘구원’ 전체를 그냥 하나의 덩어리로 보고 그 안에 회심, 성화 등등의 내용들을 다 설명하는 것에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래서 성경에서 구원이라는 주제에 관해서 읽다보면,
어떤때는 믿기만하면 구원을 얻는 것 같아 보이다가도… 어떤때는 완전함에 이르지 못하면 구원을 얻지 못하는 것같이 보인다.

이것을 가지고,
이신칭의냐 행위구원이냐의 논쟁을 하는 것은,
결국 시간 개념은 너무 평면적으로 보기 때문인 것은 아닐까.

다른 예를 들지만,
내가 저녁식사를 하는 ‘event’를 생각해보면,
많은 경우 내가 저녁 식사를 할때 어떤 시점에서 콩나물국을 떠 먹었고, 어떤 시점에서 깍두기를 먹었는지 하는 것이 저녁식사를 기술하는데 중요하지 않다.
그 저녁식사에는 깍두기와 콩나물국이 있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뜬금없는 geeky한 생각 (7)

성경에서 시간을 기술하는 방법은 물리적 시간 (크로노스)을 따르기 보다는 사건적 시간 (카이로스)을 따르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크로노스적 시간 개념으로는 내가 아침 8시에 아침 식사를 하고, 오후 1시에 점심 식사, 저녁 7시에 저녁 식사를 한다…는 식으로 내 하루를 기술할 수 있다.
그렇지만 카이로스적 시간 개념으로는 내가 일어나서 아침 먹고 점심 먹고 저녁 먹는다…는 식으로 하루를 기술한다.

크노로스적 시간 개념을 사용할 경우, 내가 오후 1시에 점심을 먹는 것과 오후 2시에 점심을 먹는 것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지만,
사건중심적 카이로스 시간 개념을 사용할 경우, 내가 오후 1시에 점심을 먹건, 오후 4시에 점심을 먹건 간에… 아침 식사를 한 이후에 바로 다음의 event는 그냥 점심 식사이다.

이런 식으로 예수님을 재림을 생각하면 더 이해가 잘 된다.
주님께서 마치 바로 재림을 하실 것 같이 말씀하신 것 같아 보이기도 했는데…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안오고 계신다.
아니 주님께서 우리 바람 맞히시는 건가.

이게 크로노스적 시간으로 보면 그렇게 보인다. 2000년이나 지났는데 아직까지 안오시니 말이다.
그런데, 카이로스적 시간으로 보면 다르다. 비록 오랜 시간이 지나고 있지만, 주님의 부활-승천 이후에 바로 다음에 나타나는 event는 재림인 것이다.
그러니… 계시록의 마지막에 나오는 것 처럼, ‘내가 속히 가리라’ 하시는 것이 말이 된다.

마치 아침을 새벽 4시에 먹고, 점심을 오후 5시에 먹으면…
크로노스적 시간 개념으로는 새벽 4시는 밤참인 것 같고, 오후 5시는 이른 저녁 식사인 것 같아 보이지만,
카이로스적 시간 개념으로는 새벽 4시 아침 식사 이후에 다음 event가 그냥 오후 5시인 것이다.

A라는 사람과 B라는 사람이 시간을 따라 살아가는 속에서,
물리적 시간에 bound되어있는 인간이 보기에는 A(t1)다음에 A(t2)가 오고 그 다음에 A(t3)가 오는 식으로 진행되어야 하고 설명도 그렇게 해야만 합당하다고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심지어는 과거-현재-미래의 관점 조차도 가변적일수 있고 상대적일 수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크로노스적 시간 개념만이 정확한 기술인 것도 아니고, 오히려 크로노스적 시간 개념으로는 잘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뜬금없는 geeky한 생각 (6)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시간 개념은 때로는 많이 헷갈리게 보일 때가 있다.
가령, 마태복음 24장에서 예수님께서 ‘마지막때(?)’에 대해 경고하시는 내용들을 보자.
여기서 보면 마치 AD 70년의 예루살렘 함락의 사건과 예수님께서 다시 재림하시는 사건이 섞여 있는 것 같아 보인다.

3절부터 14절은 예수님 재림때를 이야기하는 것 같아 보이고,
15절부터 28절은 예루살렘 함락 사건을 이야기하는 것 같아 보인다.
그리고 또 다시 29절 이후는 예수님 재림때를 다시 이야기하고 있다.

내가 보기엔, 때로 성경에서 어떤 하나의 ‘event’를 기술하면서 그 event의 내용을 시간순서대로 배열해서 설명하지 않는 것 같아 보일때가 있다.
도무지 순서를 뒤죽박죽으로 해 놓고서는 그게 다 한덩어리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아 보이는 것이다.
위의 마태복음 24장 (그리고 그 마가복음13장과 과 누가복음 17장의 그 병행구절들도 마찬가지)이 대표적으로 그런 것이다.

아니, 왜 이렇게 헷갈리게…

한가지 이번 시리즈에서 정리한 물리학적 개념을 살짝 곁들여 생각을 해 보자면,
사실 ‘시간 순서’라는 것이 그 시간에 bound 되어 있는 인간들에게는 무진장 중요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진리’를 기술하는데에는 그렇게 효과적이지 않은 경우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닐까.

뜬금없는 geeky한 생각 (5)

이런 시간에 관한 개념을 염두에 두고, ‘예정론’이라던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의 문제등을 한번 생각해보자.
좀 다르게 보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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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와 같은 제한된 사람에게도,
얼마나 빨리 움직이느냐 하는 것에 따라서 과거-현재-미래가 다르게 ‘정의(define)’되고,
나의 과거가 다른 사람의 미래가 되기도 하고 나의 미래가 다른 사람의 과거가 되기도 하는 우주에 우리가 살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그런 과거-현재-미래를 ‘동시에’ 보고 계시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렇게 어렵게 느껴지지만은 않을 수도 있겠다.

우리같은 시간에 의해 제한되는 사람에게도,
운동(movement)의 상태에 따라서 ‘현재’가 달라지게 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어떤 ‘계획’이 있으셨다는 표현을 생각할때 그저 전통적으로 시간적으로 오래 전에 하나님께서 계획을 하셨다는 식으로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shallow해 보이는가!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과 ‘계힉, 진로, 배우자 등등’이 있어서 그것을 찾아내기위해 기도해야한다는 것이 얼마나 유치하게 보이는가!

물론,
좀 더 풍성한 시간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할 초등학생에게는 그런 유치한 설명을 해주는 것이 살짝 도움이 될수 있을 모르겠지만,
조금 더 성숙한 이성과 지각능력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이 그렇게 shallow하지 않다는 것을 좀 더 이야기해야하는 것은 아닐까.

뜬금없는 geeky한 생각 (4)

이게 괜히 번잡스럽게 설명했지만, 사실 이게 아인쉬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나름대로 쉽게 풀어서 설명해본 것이다.
나도 뭐 물리학자가 아니고, 상대성이론을 수식으로 풀어서 이해한다거나 그런 수준이 아니기 때문에 그냥 이렇게 개념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런데,
어제 마지막으로 사용한 그림을 다시 생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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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가 운동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따라서 A가 보는 B의 ‘현재’가 달라진다.

그렇다면,
내가 어떤 운동을 하느냐에 따라서 지금 내 현재는 다른사람의 과거가 될수도 있고, 다른 사람에게 미래가 될수도 있다.
내가 경험하고 있는 ‘현재’는 다른 사람이 경험하고 있는 ‘현재’와 같다고 이야기하기 대단히 어렵다.

물론, 이런 시간의 tilt(틀어짐)는 대단히 적기 때문에 일상생활에서 알아차릴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빛의 속도에 가깝게 아주 빨리 여행을 하지 않는한 이런 틀어짐을 실제로 ‘경험’할수는 없다.

그렇지만 재미있지 않은가.
어떤 사람의 현재가 다른 사람에게는 미래나 과거가 될 수도 있다니!
지금 현재가 ‘real’인 것 처럼, 과거나 미래도 역시 그와 같이 ‘real’이라는 이야기가 되기도 한다!

뜬금없는 geeky한 생각 (3)

또 한가지 흥미로는 생각을 한번 해보자.

A라는 사람과 B라는 사람이 우주에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해보자.
A라는 사람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시간별로 쭉 배열하고, B라는 사람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시간별로 쭉 배열해보자.

그러면 다음과 같은 그림을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image_3

A와 B가 시간 t1부터 t8까지 지내면서 일어나는 일들을 모두 시간 순서대로 나열을 한 것이다.

만일 A와 B가 모두 정지해 있다면, A의 ‘현재’와 B의 ‘현재’는 평행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A(t1)과 B(t1)이 동시에 일어나고, A(t2)와 B(t2)가 동시에 일어나게 된다.
다시 말하면 ‘지금(now)’라는 시간의 slice가 다음의 빨간 line과 같이 표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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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만일 A가 빠른 속도로 B로부터 멀어지면서 움직인다고 생각해보자.
그러면 A에게는 시간이 더 늦게 가고, B는 시간이 더 빨리 간다.

그러면 A가 빠른 속도로 움직일때 A가 보기에 ‘현재’는 B가 보는 ‘현재’와 다르게 된다.
다시 말하면 ‘현재’라는 slice가 다음 그림과 같이 비틀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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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하면, A가 움직이지 않을때는 A(t4)와 B(t4)가 같은 ‘현재’에 있었다면,
A가 움직이기 시작하니까 A(t4)와 B(t3)가 같은 ‘현재’에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A가 빠른 속도록 B쪽으로 다가가는 경우에는 그 틀어짐이 반대 방향이 된다.
다음과 같은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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뜬금없는 geeky한 생각 (2)

물리학에 문외한인 사람도, 움직이는 물체에게는 시간이 천천히 간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았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이 빛의 속도로 여행을 할 수 있다면, 그 사람에게는 시간이 정지된다는 이야기도 들어보았을지 모르겠다.

그것을 그림으로 설명을 하자면 다음과 같다.

우선, 어제 잠깐 설명한 것과 같이 북쪽으로 움직이는 사람과 북서쪽으로 움직이는 두 사람의 대비를 먼저 다시 기억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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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비슷한 생각을 남북과 동서의 축에서 생각하지 말고, 시간(과거-현재)와 공간(동서)의 축에서 생각을 해보자.
그러면 다음과 같은 그림을 그려볼 수 있다.

이 그림을 위의 남북-동서의 그림과 같은 방식으로 이해하고 설명해보자.
위에서는, 사람이 정북으로 가지 않고 동쪽으로 위치를 함께 이동하면서 북쪽으로 가면 (다시 말하면 북동쪽으로 가면) 결과적으로 북쪽으로 덜 진행하게 된다.
아래의 그림에서 보면, 사람이 움직이지 않으면서 시간을 따라 가면 일정한 시간을 지내게 되는데, 동쪽으로 움직이면서 (위치를 이동하면서) 시간을 따라 가면 결과적으로 시간을 덜 보내게 된다. – 다시 말하면 움직이는 사람에게는 시간이 천천히 가게 된다!

뜬금없는 geeky한 생각 (1)

이 시리즈 글의 전체 결론은 이것이다.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하시는 분으로, 시간축에 하나님을 놓고 생각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못하다.”

자, 이제 결론을 미리 썼으니 지금부터 풀어놓는 geeky한 이야기에 관심 없는 분들은 며칠동안 이 블로그에 관심을 샥~ 꺼버리시면 되겠다. ^^
(하지만, 중학교 과학을 배웠다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써보려고 한다.)

Here you go~

내가 북쪽으로 시속 4 km로 걸어가고 있다고 하자.
그러면 북쪽에 있는 목표물 입장에서 보면 나는 북쪽으로 매 시간당 4 km씩 가까워지고 있다.

그런데,
만일 내가 북동쪽 45도 방향으로 시속 4 km로 걸어가고 있다고 하자.
그러면 나는 여전히 시속 4 km로 걸어가고 있긴 하지만, 내가 북쪽으로 나아가는 속도는 늦어진다.
왜냐하면 내 ‘운동’이 북쪽과 동쪽으로 나뉘어져서 내가 북쪽으로 가는 성분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그걸 그림으로 그려보면 다음과 같다.

image_1

 

여기까지는 꽤 쉽다. ^^

X-Y-Z 세개의 공간 축에서 생각했을때 이런 논리가 적용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걸 시간의 축을 또 하나 포함시켰을때에도 비슷한 설명이 가능하다.
(사실 아인쉬타인의 상대성원리를 설명하고자 하는 건데… 좀 쉽게 해보려고 시도를 해보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