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대단히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산다고 이야기할수는 없지만,
적어도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게서 발견하는 절망은 심각한 수준이다.

젊은이들에게 있어 희망이란 어떤 특권층만이 누릴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중년들에게 있어 희망이란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사치이다.
노년층에게 있어 희망이란 예전에 있었으나 지금은 잃어버린 옛 이야기이다.

빈익빈 부익부, 각박한 현대 사회, 인간 관계의 깨어짐… 이런 이야기들을 하고 듣는 것은 전혀 낮설지 않다.
우리가 맞닥드린 절망의 상황을 어떤 이는 신자유주의의 탓으로 돌리기도 하고,
기술 발전에 따른 자동화에 돌리기도 하고,
정의롭지 못한 정치에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하고,
아니면 개인이 충분히 부지런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이중 무엇 하나가 절망의 모든 원인이라고 이야기할수도 없을테고,
이중 무엇 하나도 절망의 원인이 되지 않는다고 이야기할수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기에 더 답답한 것은,
기독교가 이 속에서 희망을 이야기하는 법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주일 설교에서, 함께 하는 소그룹 성경공부에서, 아니면 다른 어떤 교회 프로그램 등에서,
이런 세상 속에서의 희망이 무엇이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어본 것이 언제였던가.

내가 나중에 더 풀어낼 수 있으리라 보지만,
나는 절망의 상황 속에서 기독교가 무기력한 이유는 대안적 희망을 이야기할 동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본다.
기독교인들중 어떤 사람들이 목에 핏대를 세우고 악악거리며 외쳐대는, 사람들의 공감을 얻지 못하는, 억지 희망이 아니라…
절망의 사람들이 다시 고개를 들게하는 희망에 대한 이야기가.. 기독교 써클에서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 내게는 더 큰 절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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