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백성으로 사는 사람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산다고 이야기하자면 마치…
거창하게 살아야 할 것 같다고 느끼곤 한다.
Shane Clairborne같이 살아야 한다거나, 직장을 때려치고 자선활동에 매진해야한다거나… 뭐 그런.

그런데,
막 전국구로 유명하거나 그렇지는 않지만,
막상 그 사람이 살아가고 있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듣다보면,
아… 이 사람은 정말 하나님 나라를 살고 있구나…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이라고 해서 뭐 당연히 완벽하진 않지만,
그럼에도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영역 속에서,
충실하게, 그렇지만 많이 고민하면서, 또 새로운 시도를 해 가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두주전이었던가,
그런 사람중 한 사람과 짧게 전화통화를 했었다.

그 사람과의 짧은 전화통화가 마치 내 영혼을 맑게하는 것 같은 효과가 있었던 것 같다.
그 사람과의 짧은 전화의 약발이 내게 생생하게 살아있다.

참 고마운 일이다.

일을 잘하기를 기대하기, 일을 잘 하면 감사하기, 일을 잘 해도 그저 그냥 그렇게…

어떤 직업이나 자리나 위치는, 그 일을 잘하더라도 뭐 그냥 그저 그렇게 여겨지는 경우가 꽤 많다. 어떤 의미에서 대부분의 직업이 그런것 같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종사하는 대부분의 직업들은 대개 그렇다.

어떤 직업이나 자리나 위치는, 그 일을 잘 하지 않으면 안되는, 그래서 잘 못하면 크게 비난을 받거나 어려움에 처하거나 큰 책임을 지게된다.
가령, 정치인, 많은 리더들, 나라를 지키는 사람들, 의사 등등은 그런 부류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직업이나 자리나 위치는, 그 일을 잘하면 크게 주목을 받고 박수를 받기도 한다.
특별히 용감하게 일을 한 소방관이나 경찰관, 어려운 환경 속에서 일하는 응급실 staff들 등등.

그런데,
어떤 직업이나 자리나 위치는,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든 그 사람이 그 일을 잘 한다고 칭찬할 모든 준비를 다 하고 기대하기도 한다.
가령, 세상의 모든 자녀들은 자신의 부모들이 좋은 부모이길 간절히 바라고, 웬만하면 자신의 부모들이 좋은 부모라고 생각하고 싶어한다.
거의 대부분의 신자들은 자신의 교회의 목사님은 좋은 목사님이길 간절히 바라고, 웬만하면 그 목사님이 좋은 분이라고 생각하고 싶어한다.
꽤 많은 경우, 학생들은 자신의 선생님이 좋은 선생님일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어한다.
이런 부류에는 삶의 길을 인도해주는 멘토, 자기가 아끼고 따르는 선배, 유난히 자신을 챙겨주는 친척 어른 같은 사람들이 될수도 있다.
많은 경우 자신의 배우자에게도 그런 기대를 갖게되기도 한다.

나는…
모든 사람은 어떤 형태로든 네번째 부류의 위치를 가지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만 그 사람은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제대로 발견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만일,
어떤 부모가, 어떤 선생님이, 어떤 목사님이, 어떤 선배가, 어떤 멘토가,
나는 그런 부모나 스승이나 목사, 선배, 멘토가 되지 않겠다고 선언해버린다면…
그냥 그런 사람은 소망이 없는 거다.
그리고 그로인한 고통은 그 개인에 머무르지 않고, 아주 많은 사람들에게 퍼지게 된다.

나는,
어쩌어찌하다보니 아버지가 되었고, 정말 좋은 아버지일까 하는 고민을 해보지만 사실 그렇게 자신은 없다.
어찌어찌하다보니 남편이 되었고, 정말 좋은 남편일까 하는 고민을 해 보지만 그 역시 자신이 없다.
때로 ‘가르치는’ 사람이되어 성경을, 하나님의 마음을 나누며 살기도 하지만 그것도 전혀 자신이 없다.

어제 하루 Juneteenth라는 휴일이었다.
어제 나름대로 이번 KOSTA 준비들을 몰아쳐서 하려고 했는데,
이런 무거운 마음에 막상 별로 하지도 못했다.

그들은 율법교사가 되려고 하지만, 사실은 자기들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또는 무엇을 주장하고 있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디모데전서 1:7)

내가 그런 부류의 사람이지는 않은건지…..

시차

한동안은, 다른나라로 출장가는 것을 참 좋아했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적어도 출장가는 비행기 안에서는 일하지 않고 좀 쉴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나름대로는 비행기 안에서는 웬만하면 일하지 않는다는 나름대로의 규칙을 가지고 있었다.

예전에는 시차적응도 빠르게 하고 졸린것도 커피 엄청 마시면서 견디어내곤 했는데,
나이가 들면서는 그것도 더 힘들고 해서,
내가 잘 쓰는 방법은 도착해서 그 당일에 조금 일찍 약을 먹고 잠자리에 드는 것이다.

내가 이럴때 잘 쓰는 약은 CVS에서 나온 Sleep-Aid Chewables 이다.
이걸 먹으면 이럭저럭 한 7-8시간 정도는 잠을 자게 되고, 그 다음날 아침 커피 잘 마시면 내 sleep cycle이 잘 reset 된다.

주일, 집에 돌아와서, 지난 이틀 약먹고 잘 잤다.
앞으로 한 3주 정도 미친듯이 보낼 준비 잘 되었다!

Metanarrative, 기독교 세계관

어제의 이야기에 살짝 더 이어서,
나는 사실 그 metanarrative에 쉽게 설득되기도 하고, 그것에 의해 잘 움직여지는 세대의 사람이다.
내 20대의 metanarrative는 성장, 민주화였고, 실제 내 동시대 사람들중 어떤 이들은 그 metanarrative에 자신의 젊음을 다 바치며 헌신하기도 했다.
그러니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metanarrative가 세상이 이야기하는 metanarrative의 대안이라고 이야기할때 어쩌면 내 세대에게 기독교가 더 이해하기 쉬운 것이었을 수도 있겠다.

대충 90년대 후반, 2000년대 초반,
한국의 ‘복음주의권’에서는 소위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비판적 반성들이 많이 나왔다.
80-90년대 기독교 세계관을 그렇게 많이 이야기해 왔는데, 막상 그 내용과 열매가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20대 초반에 탐닉했던 기독교 세계관은 metanarrative였고, 그 보다 더 자세한 각론이 빠져있는 것이었다. 그러니 metanarrative에 의해 설득되던 세대에게 기독교 세계관은 매우 매력적으로 보였겠지만, metanarrative만으로 설득되지 않는 사람들에게 기독교 세계관은 다소 공허해 보였던 것이었겠다.

metanarrative에 관심없는 사람들에게 결국 그 metanarrative를 설득해서 보여주는 매우 효과적인 방법은, 그 스토리의 ‘example’ 혹은 ‘anecdote’를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 metanarrative를 전달하고자하는 화자가 얼마나 그 metanarrative에 이미 충실해서 살아왔는가 하는 그 개인의 history에서 나오는 힘이 설득력을 좌우하는 매우 중요한 key factor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LGS: The Story

금년 KOSTA 주제인 The Story라는 내용을 잘 나눌 수 있는 LGS 성경 본문을 정하는게 쉽지 않았다. 그 이유는,

한시간 남짓 되는 제한된 시간 내에 본문의 내용을, 전문적인 신학적 도움 없이, 효과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 본문을 찾는게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면서도 그 내용이 하나님나라 라는 큰 주제와 연관이 되어있어야 하고

내가 그 본문의 내용을 다각다로 많이 고민해서, LGS 성경공부 도중 나오는 여러가지 생각과 질문들에 효과적으로 잘 대응할 수 있기도 해야한다.

그런데 요즘 하게되는 더 큰 고민은,
지금 20-30대가 meta narrative에 큰 고민이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 라는 주제는 결국 성경이 meta narrative라는 중요한 흐름 속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인데, meta narraive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 그 meta narrative를 설명하려하는 것이 참 쉽지 않은 것이다.

    웃겨봐~

    코메디언에게 갑자기, 너 한번 웃겨봐 라고 하는게 제일 짜증난다고 한다.
    가수에게 갑자기 노래한번 불러봐라고 하면? 음… 그건 좀 덜 짜증날 것 같기도 하지만 그래도 좀 무례한 것일수는 있겠다.
    목사님에게 갑자기 설교해봐~ 라고 하면… 음… 그건 목사님에 따라 다를지도?

    나는 한국에서 대학교 1학년때 입영훈련, 2학년때 전방입소 훈련을 했던 마지막 세대이다.
    2학년 전방입소때에는 정말 전방에 있는 부대에 가서 한주동안 지내게 되는데,
    어느날 밤에 작은 콩크리트로 만들어진 초소 비슷한 곳에서 보초를 서는데, 내가 어떤 학교 학생이라는걸 알던 그 사람은 내게 갑자기 내 IQ가 얼마냐고 물었다.
    나는 내가 얼마라고 대답을 했고, 그 사람은 깜짝 놀라면서 그러면 책 보면 보는대로 다 외워지고 그러냐고…. 숫자 100개 불러주면 그거 다 외울 수 있냐고… 물어보았다.
    음… 그런거 못한다고 하니 그 사람이 몹시 실망한 표정을 지었던 기억이 난다.

    만일,
    다소 무례한 천사 한분이 내게 와서,
    “오승아 너 이거 한번 해봐” 라고 한다면…
    내게 그렇게 요구할만한 것은 무엇이 있을까?

    어려운 수학문제를 풀어보라던가,
    노래를 불러보라던가,
    무거운 것을 들어보라던가…

    정말… 정말….
    ‘너 깊게 사랑하는 모습을 내게 보여줘봐” 라고 이야기할만한 그런 사람이 되면 참 좋지 않을까.

    AI?

    정말 AI 때문에 다들 난리다.
    요즘 start up들도 AI가 들어가지 않으면 아예 funding 자체가 잘 안된다고 하기도 하고,
    웬만한 회사나 회사 내의 웬만한 팀들도 다 AI 비스무레한것을 끼워서 자기들이 그런걸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나는 개인적으로 지금 AI가 좀 과대평가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결국 Chat GPT때문에 지금의 AI 붐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데, 실제로 AI가 어떻게 돈을 벌 수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한 좋은 모델이 아직 없다.
      Chat GPT 혹은 Google Gemini 써보면, ‘cool’하긴 한데, 그래서?
      이런 회사들이 이 서비스들을 유로로 내어 놓으면… 그게 정말 충분히 큰 사업기회가 되는 걸까?
    2. AI가 너무 돈이 많이 든다. 실제로 사람들이 아주 편하고도 자연스럽게 쓸 수 있는 수준의 AI가 되려면 적어도 현재로서는 너무 많은 computing power가 필요하고, 그것을 위해서는, 매우 고 성능의 반도체, 대용량의 데이터 센터, 엄청난 양의 전기 등등… 너무 많은 투자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게 돈을 지금 많이 들여서 꽤 단기간에 수익을 낼 수 있어야 할텐데, 그럴 수 있을지…
    3. Data는 충분한가?
      나는 잘 모르지만 들리는 말에 따르면 벌써 Data가 부족하다는 이야기를 한다고 한다.
      더 자연스러우면서도 powerful한 AI를 위해서는 더 많은 양의 Data가 학습되어야하는데, 지금 학습 가능한 Data만으로 그것이 가능할까하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심지어는 AI가 만들어낸 Data로 다시 AI를 학습시켜야한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다고…

    내가 박사과정을 마칠때 쯤,
    소위 nanotechnology라는게 엄청 hot 했었다.
    그래서 웬만한 사람들은 자신의 resume에 어떻게든 nanotechnology라는 단어를 억지로 넣어서 자신을 어필하기도 했었다. (나도 그랬고)

    nanotechnology라는게 정말 그 후로 필요없게 되었느냐… 하면 그건 아닌데,
    마치 온 세상을 바꿀 것이라고 이야기했던 nanotechnology의 새로운 기술들 (그래핀 같은)은 지금은 그냥 아주 일부의 사람들이 조금씩 쓰는 물질정도가 되었고,
    소위 nanotechnology의 메인스트림은 조금 더 큰 사업분야, 가령 반도체 같은 쪽에 자연스럽게 흡수되어가기도 했다.

    나는 어쩌면 AI도 그렇게 되어가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보고 있는 중이다.

    완전 비 전문가의 생각.

    YOLO

    YOLO는 You Only Live Once 의 약자로, 인생 한번만 사는데 잘 즐기면서 살자는 구호다.지극히 포스트모던적인

    내 딸을 포함해서, 20대, 30대, 그리고 40대를 만다보더라도 많은 사람들에게 그런 생각들이 많이 있는 것 같다. 이 젊은 시절 다시 오지 못하는데 이때 즐길 수 있는것을 즐기면서 살자는.

    그런데,
    삶은 단절되어 있는 매 순간, time slice를 살아가는 것이기도 하지만,
    연속되어 있는 시간의 흐름, time continuum을 살아가는 것이기도 하다.

    만일 젊은 시절을 time slice만을 생각하면서 살아간다면, 나이가 들어서 time contiuum을 살지못한 안타까움이 크게되지 않을까. 젊은 시절에 뿌려야만하는 씨앗이 제대로 뿌려져야, 나이가 들어서 그 열매가 맺혀질 수 있는 것인데.

    그건 미래의 성공을 위해 희생하면서 준비하라는 고리타분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젊은 시절의 진정한 YOLO는 즐기는 것이 아니라 성장에 두어야하지 않느냐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다.

    가령,
    젊은 시절부터 더 성숙하고 너그럽고 사랑할줄 아는 사람이 되기위한 씨앗을 계속 뿌려온 사람만이 나이가 들어서 그런 사람이 되어가는 즐거움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만일 젊은 시절에 즐기는 것을 최상의 가치로 놓고 살아간다면, 나이가 들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그저 과거를 그리워하는 것 뿐.

    통치자들과 권세자들 (5)

    끝으로 말합니다. 여러분은 주님 안에서 그분의 힘찬 능력으로 굳세게 되십시오. 악마의 간계에 맞설 수 있도록, 하나님이 주시는 온몸을 덮는 갑옷을 입으십시오. 우리의 싸움은 인간을 적대자로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자들과 권세자들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을 상대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시는 무기로 완전히 무장하십시오. 그래야만 여러분이 악한 날에 이 적대자들을 대항할 수 있으며 모든 일을 끝낸 뒤에 설 수 있을 것입니다.

    에베소서 6:10-13의 내용을 그런 관점에서 읽어보면,
    어쩌면 이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통치자들과 권세자들은, 그냥 그야말로 정치권력 자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보면 훨씬 더 자연스럽게 본문이 읽혀진다.

    Tom Wright이 정치에 대해 자주 하는 말 중에는 이런 말이 있다.
    요즘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들이 어떤 정치집단을 지지하는가 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지만,
    막상 누군가가 선출되면 그 사람이 실제로 그 권력을 어떻게 사용하는가 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별로 하지 않는다.

    Tom Wright의 이 말은,
    결국 교회가 하는 중요한 역할은, 어떤 정치 집단의 agenda를 분별해서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형태로든 존재하는 정치권력에 꼿꼿하게 맞서 비판하고 견제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 같다.

    “기독교는 세상을 뒤집는 힘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기독교는 민중의 아편이 되어버렸다.”
    라고 이야기하는 자크 엘룰의 말은 정말 옳다.

    나는 그렇게 된 큰 이유 가운데 하나로,
    절대반지를 추구하는 통치자들과 권세자들중 누구와 한편을 먹어야 하나를 고민하는 기독교를 생각해보고 있는 중이다.

    통치자들과 권세자들 (4)

    자크엘룰에 따르면
    기독교는 기본적으로 정치권력에 어떠한 정당성도 부여하지 않고 오히려 정치권력을 근본적으로 문제삼는다. 하나님 이외에 다른 모든 것들을 trivialize해버리면서 돈, 정치, 종교, 도덕, 문화를 다 뒤집어 버린다. 그런데 문제는 현대의 기독교가 돈, 정치 ,종교, 도덕, 문화에의해 뒤집혀져 버렸다.

    나는 깊게 공감하고 동의한다.

    사람들은 역사속에서 교회가 돈에의해 타락하는 모습을 비판하곤 한다.
    현재 교회에 있는 배금주의를 비판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마찬가지로 교회가 권력을 추구하는 것을 비판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설교라는 이름으로 정치적 선동을 하는 것을 용인하고,
    ‘성경적’이라는 딱지를 붙여서 특정한 정치세력의 agenda를 교회의 agenda로 받아들여 버린다.

    Tim Keller는 돌아가시기 얼마전에 했던 인터뷰에서,
    1980-90년대 미국의 mainline denomination 몰락은 그쪽 교회들이 ‘liberal’의 agenda를 교회 안으로 수용해서, mainline church = 민주당 지지라는 등식을 만들어버린데 그 이유가 있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지금 급속이 일어나고 있는 evangelical denomination의 몰락은 그쪽 교회들이 ‘conservative’의 agenda를 교회 안으로 수용해서, evangelical church = 공화당 지지라는 등식을 만들어 버린데 그 이유가 있다고 분석했다.

    복음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권력을 뒤집는 것이니, 권력에 순응하거나 권력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