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절망한다

요즈음 인터넷의 ‘젊은 세대’를 보면… 대략 두부류로 나누어 지는 것 같다.

첫번째 부류는, 모더니즘적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이다.
미국의 Northeastern liberal들과 매우 비슷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다.
정치적으로는 중도 혹은 중도 좌파의 성향을 가지고,
문화적으로는 개방적이며,
윤리적으로는 비교적 건전하고 (적어도 표방하는 자세로는)
종교적으로는 무신론이다.
이들이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은 다소 낙관적이고, humanitarianist 들이라고 할 수 있다.

두번째 부류는, 포스트모더니즘적 사고방식을 가진사람들이다.
정치적으로는 무당파,
문화적으로는 매우 개방적,
윤리적으로는 구속을 싫어하고,
종교적으로는 무신론보다는 무심론(無心論:관심이 없음)에 가깝다. 때로 다신론적 입장을 취하기도 한다.
‘I don’t care’가 이들을 표현하는 key point이다.

나는 이 시대의 이런 흐름들에 절망한다.
적어도 현재의 성향이 5-10년정도 지속된다면 한국교회는 지금의 유럽교회만도 못해질지도 모른다.

왜 이 모양이 되었을까?

그 이유에 대한 분석이야 이미 많이들 되어 있으므로 내가 따로 여기에 늘어놓는 것은 크게 의미가 없을 듯 보이나…
정말 더 마음을 짓누르는 것은… 앞으로 5-10년 이내에 이런 trend를 뒤집을 가능성이라도 볼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어떤 큰 일을 행하신다면 모르겠으나…
적어도 내가보기엔 매우 희박하다.

내 딸 민우가 대학생이 되었을 때에는,
born-again Christian 친구와의 fellowship을 누리며 인생의 계획을 나누느라 밤을 새우는… 그런 모습을 기대하기는 어려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절망한다…

누가복음 7:31-32
31 또 가라사대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꼬 무엇과 같은고
32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을 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비판쟁이

나무가 어떤 나무인지 알려면 그 열매를 보라고…

나의 경우엔, 나에게서 깊은 신앙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특히 최근으로 들어올수돌 더?) 많이 …
‘비판’적 시각을 갖는 것 같다.

비판이 갖는 건강한 순작용이 있고,
특히 어떤 사안의 경우엔 비판이 아니고는 도저히 스스로 정화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없는 경우도 있거니와 (그 비판의 수용여부는 물론 별도의 문제이다.)
비판이 때로 어떤사람의 ‘시각’ 자체로 고정되어 버리면 그 사람을 ‘비판쟁이’로 만들어 버리는 것 같다.

어떤 이들은,
‘교회’ 라는 이야기만 나오면 일단 비판할 거리들을 늘어놓는다.
그것이 자신이 속한 지역교회이건, 한국교회이건, 일반적인 우주적 교회이건 간에.

어떤 이들은,
‘요즈음 학생들’ 이라는 이야기만 나오면 핏대를 세우는 것으로 대화를 시작한다. 세속의 가치관에 물들어버려 소망이 없다는 둥, 비지성적이라는 둥…

이 ‘어떤 이들’에는 물론 나도 포함되어 있다.
나도 매우 ‘비판쟁이’이니까 말이다.

비판쟁이들은…
어떤 이야기를 꺼내도…
일단 비판부터 하고 보고…
그래서 너의 personal한 삶에서 그 이슈가 어떻게 영향을 주느냐는 질문을 하고 보면… 그냥 대화가 막힌다.

비판하는 이야기는 늘 구체적이기 보다는 추상적이고,
개인적 dimension에서의 적용이 빈약하다.
비판을 하며 가르치는 주제로는 이야기거리가 쌓여있지만,
그것을 위해 섬기는 action은 극도로 빈약하다.

비판의 소리들을 다시 분석하여 또 다시 반문하고 캐물어보면,
이들의 비판 역시 ‘들은것’ 일뿐.. ‘체득한것’은 아니다.

언제부터인가,
내가 스스로 정한 기준이 있다. 그것은…
내가 어떤 대상을 위해 섬기는 크기가 그리고 기도의 크기가 그것에 대한 비판의 크기보다 항상 더 커야한다는 것이다.
그 대상이, 어떤 개인이건, 단체이건, 지역교회이건, 한국교회이건, 이 시대의 젊은이이건, 목회자이건… 누구건 간에.
그리고 내가 섬기지 못하는 중에 비판의 생각이 혹시 떠오르더라도, 그것이 내 입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단속하고… 그 생각을 스스로 정화시키려 노력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로부터 신앙적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비판쟁이’의 모습을 자꾸만 갖는 것을 보면,
내가 스스로 정한 기준을 내가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가슴을 칠 일이다…

빌립보서 2:5-8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누가복음 6:39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

원리적 기도와 관계적 기도

다른 사람들이 인정을 할른지 하지 않을른지는 모르겠으나,
예수님을 처음 믿으면서 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나는 ‘모범생’이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늘 내 기도가 ‘올바른 기도’여야한다는 부담을 가지고 지내왔던 것 같다.
소위 ‘정욕으로 쓰려고 잘 못 구하는’ 기도를 하지 않으려 했고…
‘내 뜻 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시도록 기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내 스스로 많이 되뇌었다.

그리고, 그렇게 ‘원리적’기도를 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얼마나 경멸했는지 모른다. 바로 저런 사람들 때문에 기독교가 욕먹는 거라고.

그런데,
요즈음 나를 바라보면서,
내가 스스로 ‘원리적 기도’를 하려고 노력하는 그 자세가
‘관계적 기도’를 막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민우가,
어떤 장난감을 가지지 못해 몹시 마음이 상해 있을때,
그것을 나와 나누지 못한 채…
그저 ‘원리적’으로…
그 장난감 욕심을 내는 것이 합당하지 못하다는 당위와 자신의 욕심 사이의 간극(gap)을 나와 이야기하지 않은 채 스스로 메우려고만 한다면…
나는 무척이나 마음이 상할 것 같다.

일단,
민우의 생각이 정리되어있지 않아도 좋으니…
나와 이야기하면서 ‘원리’ 혹은 ‘정답’을 찾아가기를 원하는 것이 아빠된 마음이다.

내가… 하나님을 정말 내 ‘아버지’로 생각한다면,
하나님께 어떻게 기도해야한다는 ‘당위’를 앞세우기 전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대회를 해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한다.

내가 혼자 다 고민해서 하나님과는 전혀 상의도 하지 않은 채… 정답만을 가지고 하나님께 간다면…
그것이 ‘원리적 기도’이기는 하겠으나…
‘관계적 기도’는 아닐 것이다.

다른 이들에게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내겐… ‘관계적 기도’의 강조가 필요한 것 같다.

참된 ‘관계적 기도’를 하게 되면 결국은 ‘원리적 기도’를 하게 되지만,
‘원리적 기도’를 반복한다 해도 ‘관계적 기도’를 하지는 못한다.

KOSTA/USA-2004를 다녀와서

지난 한주동안 코스타에 다녀왔습니다.
이번이 여덟번째 코스타였으니… 이제는 제법 여러가지 일에 익숙해지기도 할만도 한데… 여전히 제게는 새로운 깨달음과 많은 숙제거리를 제공해준 코스타 였습니다.

1. 이번에 사실 저는… 제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많은 기도를 하지 못한 채 코스타에 참석했습니다.
이 말은… 예를 들면… 마라토너가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연습을 별로 하지 못하고 참석을 했다고 말하는 것이나…
가수가 콘서트를 하면서 노래 가사를 외우지 못한 채 무대에 선다는 것 이상으로 ‘엽기’임을 압니다. 그래서 더더욱 제겐 마음의 부담이 큰 코스타 였습니다.

2. 그와는 달리 코스타에 현지에서 기도는 대단히 energetic 했었습니다. 그 기도가 얼마나 powerful 했던지… 영적으로 매우 둔감한 제게조차도 그 힘이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3.
코스타의 프로그램을 기획하는 사람가운데 하나로서, 제가 성실하게 코스타에 임하지 못한 여러가지 ‘증거’가 나타났습니다.
여러군데에서 프로그램이 원래 의도하지 않은대로 진행되는 것이 감지되었고, 전체 집회를 비롯해서 곳곳에서 발을 동둥 구르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이 일의 대부분은 ‘기획’의 미숙에서 나타난 것들이었습니다.

4. 그런데, 그 와중에서도…
100명에 가까운 사람이 새로 예수님을 개인의 구주로 영접했습니다. 그리고 60명에 가까운 해외 선교 헌신자들이 나왔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치유’를 경험했다고 고백했는지 모릅니다. 자신의 죄를 기도중에 쏟아내는 일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저도, 그 와중에… 하나님께서 하시는 놀라운 일들을 경험하면서… 그저 눈물을 펑펑 쏟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한번은 집회 중에 맨 뒤에 서서 눈물을 흘려서… 제 신발이 젖을 정도로 울었습니다.

5. 매년 코스타를 섬기면서 경험하는 것이지만, 준비하는 사람의 미숙함과 그 부족한 그릇을 사용하셔서 당신의 ‘실속’을 챙기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이번 코스타에서는 더욱 두드러졌던 것 같습니다.

것은 아마도… 코스타를 준비하며 섬기는 저같은 사람이야 말로 정말 하나님의 touch가 필요한 사람들이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부족한 섬김위에 당신의 은혜로서 넘치게 하셨던 것 같습니다. 마치 작은 간장 종지위에 나이아가라 폭포가 쏟아지는 것
같은…

6.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족한 섬김의 부분을 더 연구해서 채우는 일들은 계속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좀 더 성숙한 모습으로 코스타를 섬기고자 하는 열망을 더욱 주시는 것 같습니다.

7. 특별한 일이 없다면, 내년에도 저는 코스타에 참석 하겠지요. 참석해서 하루에 3-4시간씩 자면서 땀 범벅이 되어 뛰어다니겠지요. 또 다시 눈물을 펑펑 쏟으며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겠지요.
그러나, 내년에는 좀 더 나은 모습으로 섬기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는 소망을 가져봅니다.

8. 그리고… 아마도… 제가 좀 더 나은 모습으로 섬기는 사람이 되는 것은 코스타 기간 중이 아니고 코스타가 끝난 후의 제 삶의 모습에서 더 잘 드러나게 되겠지요.

그래 가자, 집으로 가자

그래 가자, 집으로 가자.
거기 우리 집에선 우리 아버지께서 기다리고 계실테고,
거기 우리 집에선 이런 서러움 따윈 없을꺼야…


한 6년 쯤 전에(-.-) 제가 제 이메일(?)의 시그니처로 썼던 문구 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유학 생활이 그렇게 힘드냐고…
뭔 시그니처가 그렇게도 서럽냐고 하더군요.

유학생활이 힘들기도 하거니와,
사실… 정말 ‘거기 우리집’ 이외에 정말 ‘서러움’ 없는 곳이 어디 있겠습니까.

여러가지 일로 눌리고 스트레스 받고 불안할 때,
역시 유일한 안식처는… ‘내 아버지’ 뿐이라는 생각이… 나이가 들수록 더 깊어지네요.

이제야 조금씩 철이 드는걸까.

불사이자사(不思以自思)

不思以自思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스스로 생각이 난다.

김교신 선생이,
예수님을 마음에 품고 살고자 했으나, 무의식 중에서도 끊임없이 그분을 묵상하는 것이 되지 않음을 한탄하던 중,

어느날, 자신도 모르게 예수님을 생각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리고는,
그날의 일기에, 기쁨이 넘쳐서
不思以自思 라 쓰고 그 기쁨을 마음에 새겼다.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저절로 예수님을 생각하게 되는 것…

꿈 속에라도 예수님을 만나기를 기대하며 잠들고,
아침에 깨서 첫 생각이 예수님이기를 바라며…

텔레토비는 사탄적인가

세상에 사탄적이지 않은 것들이 있는가?!?!?!@#!$!@#%


화 속에서 뉴에이지, 혹은 사탄 문화의 성분을 구별해 내는 일은 어떤 의미에서 재미있는 일입니다. 한때 저도 우리가 즐기는
컴퓨터 게임들이 얼마나 사탄적인가에 관하여 여기 저기에 기고를 하고, 사람들과 나누며 열을 낸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시각으로 세상을 보면 세상에 사탄적이지 않은 것들이 거의 없습니다. 심지어는 교회 내에서 행해지는 많은 일들도 바로 이러한 사탄적인 요소들을 많이 내포하고 있는 듯 보였습니다.


리는 어찌 되었건 이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성경적 세계관으로 보아 ‘공중권세 잡은 자’가 아직은 지배하고 있는 그러나
그리스도의 주권이 “already but not yet” 선포된 이 세계에서 문화는 어찌되었건 ‘사탄적’인 것에 적어도 조금은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문화 전체를 싸잡아서 ‘사탄적’이라고 말할수도 없는 일입니다.


령 아무 영화나, 어린이 프로그램이나, 아니면 음악, 미술작품 어떤 것이든지 뽑아 그 안의 ‘사탄적인’ 것들을 찾아내자고 해서
잘 ‘짜내면’ 충분히 그럴듯한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가령 또다른 어린이용 프로그램인 세서미 스트리트에서
사탄적인 것을 찾아내라고 해 봅시다. 아마도 20가지 이상은 쉽게 찾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세서미 스트리트가 사탄적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반적인 문화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저는 낮은울타리 식의 연구와 분석이 분명히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도 사탄적이고 저것도 뉴에이지고 식의 몰아세우기는 결국 기독교와 문화를 분리시켜 복음전파를 가로막는 결과를 낳게 될 것입니다.


화속에 숨겨져 있는 잘못된 것을 조심스럽게 찾아 충분한 연구와 검토를 거친 후에 (정말, 이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많은
식자들은 제대로 알지 못한채 어디에서 한마디 들은 것으로만 ‘대책없이 달려드는 무식한’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고개를 설래설래
흔듭니다.) 매우 절제된 언어로 이야기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텔레토비에 비성경적인 요소들이 분명히 있을 수
있습니다. 어쩌면 다른 어린이 프로그램보다 더 많이 있다고 여기질 수도 있습니다.(개인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지만) 그러나 텔레토비
자체를 ‘사탄적’으로 몰아세우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비성경적인 요소들에 대하여 수정을 통해 더 좋은 프로그램을
만들수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문화를 대하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가령 텔레토비로부터, 다른 어린이용 프로그램에서 보기 힘든 ‘성경적인 요소들’을 찾아보라고 해도 역시 많이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특별히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춘 점이라던가.)


리가 가진 복음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시각장애인이 눈을 뜨게되고, 청각장애인이 듣게되는… powerful한
복음입니다. 왜 이것도 사탄적이고 저것도 악마적이라며 피해야만 합니까? 적극적으로 세상문화의 좋은 점들을 인정하고 더 성경적인
모습이 될 수 있도록 연구, 발전시켜야 하지 않을까요?

제가 살고있는 미국 보스턴 근교에는 Salem이라는 작은
도시가 있습니다. 미국 이민 초기에 마녀사냥이 이루어졌던 곳입니다. 무고한 사람들을 마녀로 몰아 끔찍한 방법으로 처형함으로
‘영적 순결함’을 찾고자 했던 그 장소가 지금은… ‘마녀 박물관’이 세워지고, 해마다 Haloween이 되면 각종 마녀 관련
행사들이 치루어지는 ‘마녀의 도시’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잘못된 시각으로 문화를 마녀로 몰아세울때, 문화는 영영 사탄의 것이 될 것입니다.

기독유학생의 엘리트주의

유학을 한다는 것, 전혀 다른 문화와 환경 속에 자신을 던져 더 나은 학업환경을 찾아 나선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모험을
감수하는(risk-taking)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유학을 나온 유학생들 가운데에서 그러한 모험 감수(risk-taking)를
하고서도 자신이 원하고자 하는 바를 찾아나선, 적극적, 진취적, 모험적 엘리트들을 더 많이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그러한 허들을 뛰어 넘어 어떤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성향을 가진 유학생들이기에
그들이 보이는 삶의 방식과 태도도 그들만의 독특한 특징이 있다. – 그것은 그들이 매우 목표 지향적이고 성공 지향적이며 행동
지향적이라는 것이다. ‘학위’로 상징되어 질 수 있는 어떤 ‘성공’을 바라보지 않고서 대부분의 유학생들에게 이러한 모험 감수는
그 자체로 절대로 매력적인 것일 수 없다.

이러한 이들의 삶의 방식은 매우 자주 그리스도인 유학생들 사이에서도
발견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힘든 유학 생활 도중에 만난 사람이건, 이미 유학을 오기 전에 그리스도인이었건 간에 이들의 신앙
행태는 매우 진취적이고 적극적이며 목표 지향적이고 성공지향적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회심 이전에 자신이 가지고 있던 기질이나 성품
등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나, 그러한 기질과 성품도 분명히 ‘거듭나야’함을 생각해 볼 때 유학생들의 일반적인
신앙의 모습들은 한번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1. 목표 지향적 자세의 문제

긍정적인 목표
지향적 자세의 모델은 성경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사도 바울은 ‘푯대를 향해 달려가는’ 모습(빌립보서 3:14)을
그리스도인의 모델로 제시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목표 지향적인 자세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문제는 그 목표가 어디에서
기인했느냐, 그리고 그 목표의 내용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거의 모든 기독 유학생들의 ‘목표’는 비기독 유학생들의
목표와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저 ‘공부 잘 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는 허울 좋은 합리화를 한다는 것을 굳이 차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을까.

이러한 목표 지향적 자세는 또 다른 문제를 가지고 있다. 목표를 학문적/직업적 성취로 설정해
놓고 있는 유학생들에게 신앙 훈련/신앙 교육의 필요를 인식시키는 것이 무척 어렵다는 것이다. 이런 유학생들에게는 아주 기본적인
신앙 훈련이나 성경공부도 자신의 목표를이루는 장애물로 여기지기 십상이다.

2. 성공 지향적 자세의 문제


역시 소위 ‘성공’에의 기준과 동기가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그 자세의 건강함 여부가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역시 이
경우에도 세속적 가치관에 근거한 성공주의와 전혀 다르지 않은 성공 지향적 자세들이 유학생들과 같은 소위 ‘엘리트’ 그리스도인
사이에 편만한 듯 보인다.

대부분 이러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에게 있어, 노력(성실함)과 성공(성취) 사이에
하나님의 자리는 없다. 모든 노력을 기울여 성실하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은 분명 하지만, 모든 성실함이 언제나 성공으로
이끌어 지는 것은 아니다. 그 사이에 하나님의 간섭하심과 인도하심이 분명히 있다. 그래서 신실하게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노력을
했음에도 성공에 이르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리고 그것도 선하신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나 세속적 성공주의에 물들어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 그러한 사람들은 실패자이자 낙오자일 뿐이다.

또한 이러한 세속적 성공주의에 물들어 있는
사람들은 소위 ‘고지론’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 자신의 성공을 하나님의 뜻으로 합리화하는데 사용한다. 그리고 자신의 성공을
가로막는 모든 장애물들을 “기도와 믿음으로 담대히” 물리치기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3. 행동 지향적 자세의 문제

“40
일 금식기도 3회” 어느 ‘부흥사’의 명함에 이런 ‘경력’이 써 있었다고 한다. 40일 금식기도를 몇번 했다는 것이 신앙의
이력에 들어가는 것도 우습거니와, 어떤 신앙인의 모습이 어떤 일을 행했는지로 판단되는 모습은 더욱 실소를 자아내게 한다. 그러나
그러한 모습은 소위 ‘엘리트’ 기독 유학생들 사이에 너무나도 많이 발견되는 모습들이다. ‘예수를 믿으면 이런 것들은 해야지’
하면서 여러 가지 신앙의 행동들을 시도해 보는 모습들. 그래서 흔히 ‘헌신’의 핵심을 ‘행함’에 두는 모습을 흔히 발견한다.
교회에 다니면서도 어떤 일을 할 것인가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어떤 그리스도인이 될 것인가에는 별 관심을 갖지 않는 안타까운
모습들이 너무나도 자주 눈에 뜨인다. 지역교회에서도 당장 이처럼 눈에 띄는 ‘일’을 감당하는 사람들을 ‘일꾼’으로 여기기
마련이고 이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장성한 분량에 진정으로 이르는 길은 점점 더 멀어지게 되는 것 같다. 그러다 보면 쉽게 지치게
되고, 고갈이 되고, 상처를 받게 된다.

금년 코스타의 주제를 “회복되는 하나님의 나라, 치유되는 자아”로 잡은
것은 어찌보면 매우 일반적으로 보이는 이러한 유학생들의 성향에 매우 반대되는 것처럼 보인다. 앞에서 언급한 비정상적이고
비성경적인 (기독) 유학생들의 흐름이 이번 코스타 한번으로 완전히 바뀔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은 다소 비상식적인 낙관적
기대이겠으나, 적어도 소수의 사람들이 이번 코스타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유학생 문화의 “회복”에 대한 소망을 품게
되었으면 한다. 그리고 언급한 유학생들의 문화 속에서 상처를 받고 고갈된 많은 영혼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풍성한
“치유”를 경험하는 일들이 있었으면 한다.

하나님께서 또 다시 크게 일하실 코스타를 기대해 본다.

@ 이 글은 eKOSTA http://www.ekosta.org 에 실렸던 글입니다.

세살 반 딸래미와의 대화

민우 : 아빠, 민우 지금 자전거 타고 싶어요

아빠 : 민우야, 지금은 밖에 비가와서 자전거를 타러 나갈 수 없어요?

민우 : 어, 왜요?

아빠 : 비가올때 민우가 자전거 타러 나가면 민우 옷이랑 머리랑 자전거랑 다 물에 젖어 척척해 지잖아.

민우 : 어, 왜 비가와?

아빠 : 음… 그건, 하늘의 구름에서 물들이 뭉쳐서 땅으로 내려오는 거예요.

민우 : 어, 왜요?

아빠 : 만일 비가 땅에 오지 않으면, 나무들도 다 목말라 하고, 민우도 먹을 물도 없고 그렇게 되잖아.

민우 : 어, 왜요?

아빠 : 음… 그건 나무랑 사람들이랑 민우랑 다 물을 마셔야 살 수 있거든

민우 : 어, 왜요?

아빠 : 그런 나무랑 사람들이랑 민우랑 다 살아가는데 물이 필요하도록 만들어져 있어서 그래요.

민우 : 어 왜요?

아빠 :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셨어요.

민우 : 어 왜요?

아빠 : …

민우 : 아빠, 왜 그래요? 응?

아빠 : ….

민우 : 아빠아~ 왜 그래요?

아빠 : (다른 곳으로 관심을 돌리며) 민우야 그럼 아빠가 민우 아이스크림 줄까?

민우 : (까맣게 잊고) 예에~ ^^

********

몇가지 교훈

1. 최종 근원을 ‘하나님’이라고 그냥 말해버리는 것이 옳은 것이긴 하지만, 일종의 논리적 도피일수도 있다.

2.
그러나 최종 근원이 ‘하나님’ 이라는 것도 일종의 ‘전제’이다. 마지막에 “그냥 자연이 그런거야” 라는 자연주의적 대답을 한다고
해도 대화 흐름의 형태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물론 전혀 다른 결론에 이르는 것이긴 하지만.)

3.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세계관의 기초 전제를 ‘하나님’으로 이야기하면서 언젠가 내 사랑스러운 딸이 스스로를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인정하게 되는 것을 소망하는 것은 아빠로서 해야할 의무이다.

4. 세살 반짜리에게 과학과 신앙의 통합은 어려운 주제이다. 아이스크림이 훨씬 더 attractive 한 주제이다.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3부)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3부)
이 시대는 기독교로 인해 망한다
권오승

어느 목사님의 글 가운데 ‘고려는 불교의 타락으로 망했고, 조선은 유교 때문에 망했고, 만일 이제 대한민국이 망한다면 그것은 기독교 때문이다’는 말을 읽은 적이 있다. 기독교가 이 사회에 대해 그 책임을 다 하고 있지 못한데 대한 자책의 변이었으리라.

최근 인터넷을 통해서 한국의 지도적인 모 목사님의 각종 부정(?) 사례들이 TV 방송에 보도된 것을 접하고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그 내용인즉 그 목사님의 축재 수준이 수십억대에 이르고 교단 내의 선거에서 일인당 수백만원에 이르는 돈을 뿌리며 부정 선거를 자행했으며 심지어는 불륜도 있었다는 내용이었다. 그 내용의 진위를 떠나 그러한 보도내용이 많은 사람들에게 특히 비그리스도인들에게 상당히 설득력있는 내용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이 필자에겐 더욱 더 큰 충격이었다. 사실 우리 주변에서 그리스도인들의 낮은 도덕적 수준을 비난하는
이야기들을 많이 들어왔고 그때마다 구원은 선행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얻는 것이라는 교리를 내세우며 방어해왔던 우리에게 과연 그러한 방어전술이 얼마나 먹힐수 있을 것인지하는 생각에 약간의 패배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물론 우리의 구원이 100%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라는 것은 필자 자신의 신앙고백이자 신념이다.)

지난 3월 24일 동아일보에 실린 기사를 또 살펴보자.
‘아말렉작전.’ 구약성서에 나오는 성전(聖戰)이 북풍유도 작전의 암호명이었다. 기독교 장로인 권영해(權寧海)전안기부장은 스스로 이 특급비밀작전의 이름을 짓고 지휘봉을 잡았다고 털어놓았다. 아말렉족은 사막지역에서 거주하던 고대유목민족. 이집트를 탈출하는 히브리족을 공격했다가 모세가 훗날 후계자로 지명할 정도로 총애했던 여호수아에게 크게 패했다. 무찔러야 할 적(敵)의 상징이 바로 아말렉족이 되고 말았다.
-( 중략 )-
윤씨 기자회견을 아말렉작전이라고 이름 붙인 이유는 뭡니까.(신부장검사)

윤씨 기자회견은 각 당의 지나친 대북연계활동에 대한 경종이자 좌익세력에 대한 경고였습니다. 구약성서에 모세가 여호수아를 내세워 아말렉족을 물리친 이야기가 나옵니다. 제(모세)가 부하들(여호수아)을 시켜 좌익세력(아말렉족)을 물리치려 한 상황과 유사하지 않습니까.(권전부장)

대통령 선거전 와중에 특정후보(당시 김대중후보․DJ)를 비방하는 허위 기자회견이 좌익세력과의 전쟁입니까. 당신은 결국 구여권을 여호수아로 내세워 DJ를 아말렉으로 삼고 싸운거 아닙니까.(신부장검사)

말을 함부로 하지 마시오.(권전부장)
신부장검사와 권전부장은 몇시간 동안 아말렉논쟁을 거듭했다.

-( 중략 )-

밤샘 조사는 오전 4시에 일단 끝났다. 조서에 대한 확인과 몇군데의 수정작업이 뒤따랐다.
이어 오전 4시40분. 조사실에 수사관 1명만 남은 것을 확인한 권전부장이 화장실로 들어갔고 5분 뒤 요란한 파괴음과 함께 비릿한 피냄새가 문 밖으로 퍼져 나왔다.

위의 기사는 한국에서 각종 선거가 있을 때 마다 대표적 부정선거의 방법으로 사용된 소위 ‘북풍’ 혹은 ‘공안 정국’의 진상을 밝히는 과정에서 그 책임자였던 권영해 전 안기부장에 관련된 기사이다. 위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그 책임자는 기독교 장로였다. 주위에서 대형 부정 비리 사건이 터질 때 마다 그 사건의 핵심에는 항상 그리스도인들이 ‘포진’하고 있는 것을 보게되는 것이 이제는 별로 충격으로 받아들여 지지도 않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왜 이렇게 까지 되었나…

우리는 이러한 일이 터질 때 마다 기성세대를 비난하며 손가락질 한다. 그리고 이 세대를 한탄한다. 그러나 더 심각한 문제는 이것이다. : 과연 앞으로는 나아질 수 있을 것인가. 만일 우리 세대가 저 자리에 서면 그런 일이 없게 될 것인가.

우리라고 다르지 않다. 우리도 여전히 남을 위해 사는 것 보다는 나를 위해 사는 것을 더 좋아하지 않는가. 우리도 여전히 같이 배고프고 힘들 때 내배부터 채우려 하지 않는가. 우리도 여전히 함께 커가는 것 보다는 내가 크기를 원하지 않는가. 우리도 여전히 돈에 연연하며 살아가지 않는가. 우리도 여전히 큰집에 살기를 좋아하고 좋은 차 타며 좋은 옷 입는 것을 내 희생보다 더 높은 우선순위를 두고 살아가지 않는가. 우리의 목표가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한 것이라거나 민족과 시대와 역사를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내 자신의 편안함과 부요함에 있지 않은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사회에 뛰어들었을 때 우리는 과연 영적인 순결함을 지켜나갈 수 있겠는가.
과연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부정한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그런 환경에서 나만 홀로 독야청청(獨也靑靑)하며 그 부정한 ‘체제(system)’을 대항하여 싸울 힘과 용기와 동기(motivation)가 자연스럽게 나를 인도하겠는가? 우리도 이 상태로 그 자리에 가면 전혀 시대와 역사를 복음으로 바꿀 힘이 없는 나약하고 부정(不貞)한 세속적 그리스도인(worldly christians)이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이대로 간다면 이 시대는 기독교로 인해 망하게 될 것이다. 단순히 썩어가는 세상에 대해 그것이 잘못이라고 지적하지 못한 것만이 책임이 아니라 (물론 그 역할 조차도 제대로 못하고 있지만) 그 썩어가는 세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래서 우리의 청년적 열심이 무엇을 향한 열심이어야 하는지를 연구하고 공부해야 한다. 하루 하루의 삶을 말씀에 비추어 생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성경이 일관되게 말하고 있는 것들을 찾아 우리 삶의 목표와 소망으로 삼아야 한다. 말씀의 힘이 아니고는 우리는 결코 세상을 이길 수 없다. 그리고 말씀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바를 그대로 타협하지 않고 지키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깨어있지 않으면 우리는 이
시대를 타락으로 이끄는 주범들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

우리가 믿는 복음과 같은 복음을 믿었던 일제시대 청년 김교신이 부르짖었던 슬로건이 생각난다. ‘조선을 성서위에’. 우리는 이 시대와 민족과 역사를 성서위에 세우는 일을 위해 부름을 받았다.

우리가 그 일을 감당하지 못할 때 이 시대는 기독교로 인해 멸망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