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본 한국 교회, 내가 본 코스타 (우종학)

*이 글은 코스타의 웹진인 이코스타(www.ekosta.org)에
2001년 8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내가 본 한국 교회, 내가 본 코스타

To generalize is to be an idiot. – William Blake

1. 한국 교회와 한국 사회: 신병 교육대와 전투지


떤 분께 이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 정신에 반하는 커다란 문제가 발생했을때, 그것이 윤리의 문제이든,
문화의 문제이든, 가치의 문제이든, 그 문제에 대해 기독교적인 목소리를 낼수 있는 각 분야의 전문가를 찾기가 너무나
어렵다는(cf. 김연종 ‘흔들리는 한국 교회’). 나는 이것이 매우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반기독교적 흐름을 상대할
기독교적 파워가 없다는 게임의 논리에서도 그렇지만 ‘아군’이라고 분류하는 한국 교회의 정체성 자체에 대해서 의문이 가기
때문이었다.

“한국 기독교의 가장 큰 문제가 무엇입니까” 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잘 모른다” 라고 대답하는 것이
가장 솔직한 대답일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뚜렷한 관측적 사실은 한국 교회의 성장 또는 그 규모와 한국 사회에 대한 교회의
영향력 사이에 별다른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안점식, ‘한국 교회와 기독교 세계관의 문제’). 이러한 현상은 교회 성장주의,
유교적 권위주의, 기복주의(박성호, ‘한국 교회 그렇다면 무엇을 개혁할 것인가?’) 등과 감성적, 개인적 성향에 맞춘 교회의
목회 전략, 사회에 대한 교회의 침묵(권오승, ‘세상으로 복음의 영광을 주목하도록’) 등, 쉽게 관측되는 요인들에 의한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요인들 위에, 혹은 이런 요인들의 다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한 가지 요인을 덧붙이고 싶다. 그리고 나는 이것이 보다 근원적인 문제이며, 위에서 지적된 요인들을 극복하는 교회
개혁으로만은 해결되지 않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바로 ‘현장의 기독교인’의 부재이다.
반문화(counter-culture)를 주요 특징으로 하는 근본주의(fundamentalism)적 경향이 많은 한국 교회 안에
짙게 깔려 있음으로 인해 교회의 안과 밖을 철저히 나누고 교회의 벽을 높이 쌓는 이원론적 경향이 팽배해 있다는 것, 바로 그것이
‘현장의 기독교인’들을 사라지게 만든 근원적인 이유라고 생각한다(cf. 정진호, ‘부흥을 가로막는 장벽들, 이원론의 문제를
진단한다-(2)’). 1920년대 미국에서 세속 문화에 대한 대항으로 일어났던 근본주의운동의 경향이 복음주의권 안에도 깊이
들어와 미국 사회의 여러가지 문제들에 대해 복음주의자들을 침묵하게 만들었다는 지적은 90년대의 미국 복음주의권에서도 넓게
논의되었던 이슈 중 하나였다 (Mark Noll, ‘The Scandal of the Evengelical Mind’).


는 ‘신병 교육대와 전투지’의 비유가 ‘왜 현장에 그리스도인이 없는가’를 잘 설명해 준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강제 징집이 아닌
사랑과 섬김으로써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이 이방인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도록 돕는다. 그리고
이때부터 그들의 삶에서 치열하게 시작될 영적 (지적·감성적·의지적) 전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먹으며
말씀 안에서 성장해 갈 수 있도록 교회는 그들을 ‘신병 훈련’으로 돕는다.

이제 신병 교육대에서 기초 훈련을
마친 그리스도의 전사들은 가끔씩 (한 주에 한 번이든 세 번이든) 후방으로 돌아와 쉼을 얻기도 하고 사기의 재충전을 받기도
하지만, (시간적으로는 복음을 받아들임과 동시에) 그들은 전방, 전투지에서 그들의 대부분의 삶을 보내게 된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그것은 바로 그들이 기본적인 신병 훈련 외에 실전에서 사용될 전투 훈련을 받은 적이 없이 홀로 전투지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부정과 미움, 하나님의 질서를 반하는 어그러짐으로 물들어 있는 직장, 인간 관계, 사회 구조, 문화 속에서
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현장에서 일어나는 끊임없는 공격은 그들의 삶이, 우리의 일이 예배가 되지 못하게 한다.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유지해 가는 것만해도 사실 기적과 같은 일이다. 이들이 배치될 전선의 부대는
어디에 있는가? 이들보다 먼저 전선에 들어와 실전을 통해 전투 능력을 갖추고 있는 각 분야의 그리스도인 전사들은 어디에 있는가?
이들에게 전선의 상황을 알려 주고 공격 목표를 주지해 주며 전술을 가르치고 함께 작전을 펼치는 소대장, 병장들은 어디에 있는가?
나의 제한된 판단으로는 현장에 대한 부르심에 뜨겁게 헌신한 소수의 정예들은 고전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전사들은 혼자서 살아남는
일에 급급하여 숨어 있으며 그나마 뜨거운 열정을 가진 전사들은 도로 신병 교육대로 돌아가 버렸다. 세상 일에는 흥미를 잃은
반면에(김연종 ‘예수 이름으로 가진 병’) 신병을 모으고 교육하는 일이 그래도 하나님 나라에 대한 그들의 열정을 채워 줄 수
있으니까. 전선의 병력이 정예 부대여야 하고 다수여야 하는데, 내 눈에는 몸집 큰 신병 교육대만 보인다고 하면 과언일까?
신교대는 커진 몸집을 굴리느라 더 많은 교관을 필요로 하고 그러다 보면 전선으로 나오는 전사들은 당연히 적어진다.


는 교회가 성장하는 것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가 커지는 만큼 전선에서 활동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아져야 한다는 것이다.
신병 교육대만 커진다면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신교대인가? 교회가 커지는데 사회가 그대로 변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다면 그 사회
속의 그 교회가 진정한 교회인가를 되물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만일 교회가 제대로 된 교회이고 각양의 그리스도인들이
각자의 현장에서 주님의 가르침 대로 하나님의 질서 대로 살고 있는데도 아직 하나님의 때가 되지 않아 우리 사회의 모습이
그대로라면, 우리는 하나님을 앞서 가는 우를 범하지 않고 기다려야 하겠지만, 현재의 내 좁은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만은 않는다.

나는 또한 현장의 그리스도인이 없다는 것으로 교회의 교육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목회자의 역할은 목회
전문가로서 복음을 전하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성도들이 자랄 수 있도록 도우며 교회 공동체와 예배를 통해 끊임 없이
그리스도인들을 복음으로 재충전 시켜주는 일이며 이것은 타락된 창조계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시작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또한 전투는
실전 경험을 통해 전선에서 배우는 것이기에 신교대에서 해 줄 수 있는 훈련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다 많은 현장의 문제들이 교회에서 다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전투지의 그리스도인들의 전투 경험이 신병교육 훈련의
내용에 보다 많이 포함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장의 문제들에 대해 현실적으로 다루고 이에 대해 체계적으로 훈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많은 캠퍼스 선교 단체에서 학부 시절 뜨겁게 헌신하던 리더들이 졸업 이후에는 대형 교회의 대예배 좌석에 숨어 버리는
일도 나는 이러한 맥락에서 비롯되었다고 이해한다. 그룹 성경공부를 인도하고 영혼의 성장을 돕던 리더십이 부정과 악이 팽배한
직장에서 통전적인(wholistic) 그리스도인의 삶을 자동적으로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

우리에게는 현장의
그리스도인들이 필요하다. 교회는 전사들을 소총으로 무장시켜 개인적으로 전선에 내보내는 무책임함을 넘어서 이들이 현장의
그리스도인들과 연결되도록 구조적으로 도우며 전선의 전력 증가를 위해 신교대에 투자하는 이상의 노력과 자금을 현장에 투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채플과 교목실을 두는 정도로 구색을 맞추는, 이름 뿐인 기독교 대학이 아니라 학생들이 기독교적으로 사고하는
일을 구체적으로 돕는 커리큘럼을 갖춘 진정한 기독교 대학을 세우는 일, 생명의료 윤리, 개별 대중문화 등, 사회와 문화의
문제들을 사안 별로 연구하고 결과물들을 낳아 교회 교육에 내용을 제공할 수 있는 연구 단체나 프로젝트 등에 지원하는 일 등을
예로 들 수 있겠다. 기독교라는 이름을 걸지 않더라도, 사회 속에서 기독교적 가치와 하나님의 나라 회복을 위한 사역들에 보다
적극적으로 지원할 수도 있다. 교회 내적으로는 교회 봉사의 순번제 같은 제도를 만들 수 있다. 다시 말해, 교회의 상황에 따라
헌신된 성도들 중에서 20~50%는 2-3년을 주기로 주일 학교나 성가대등 교회 봉사를 쉬게 하고, 대신 직업과 현장의 문제에
집중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는 것이다. 교회 ‘운영’에 지장이 있을 거라는 우려가 있겠지만 이들이 2-3년 후에 다시 교회
섬김으로 돌아올 때는 교회 자체가 새로운 공급을 맛 볼 것이며 또한 끊임없이 현장으로 그리스도인들을 보냄으로써 전선은 점진적으로
강화될 것이다. 수요 예배 가지 않는 대신에, 주일 학교 봉사하지 않는 대신에 같은 시간과 노력으로 직장에서의 삶과 신앙이
부딪히는 문제, 청소년을 어떻게 기독교적으로 양육할 것인가의 문제에 매달려 기도하고, 배우고, 연구하고, 나누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목회 전문 목회자가 현장의 전문가들과 함께 팀사역으로 목회를 하는 교회들에 관한 소식을 듣는
일은 매우 고무적이다. 예배당 중심의 신앙 생활(?)이 믿음의 잣대가 되는 교회의 분위기가 바뀌지 않고는 세상은 그리스도 없음의
축복(?)과 축제를 계속 만끽할 것이다.

그러나 지역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다. 특별한 한계
상황이 아닌 이상, 신교대가 신병 교육을 제쳐두고 전투지에 뛰어들 수는 없는 일이다. 참으로 중요한 일은 전투 부대가 세워지는
일이다. 현장의 그리스도인들이 연합해야 한다. 물론 현장에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아쉬운 점이 있다면,
(속단하건대) 현장의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은 많은 경우, 또 다시 신병 교육대의 역할만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 예배당 중심의
신앙생활을 간과한다는 오해를 받더라도 전투지에 헌신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더 많아져야 한다. 우리가 부끄러워 하지 않는 복으므이
능력이 각 현장에서 면면히 드러나도록 세상속의 그리스도인들이 세워져야 한다. 각 현장의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
답이 내게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각 현장의 상황에 맞게 연합하고 답을 찾아가야 한다는 원론 외에는. 그리고 나 자신도 나의
현장의 문제에서 답을 찾는 묵묵한 노력을 하고 있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나는 코스타를 이런 시각으로 본다. 지역 교회가 할 수 없는 일, 신병 교육대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일, 현장의 그리스도인들을 키우는 일, 이것을 코스타가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너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내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하나님의 창조 명령과 통하는 그리스도의 지상 명령은 ‘제자를 삼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데까지,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다시 이루는 데까지, 그의 나라가 타락된 온 창조계에서 회복되는
데까지 이르는 것이다(정진호, ‘두 집 내기’).

2. 내가 보는 코스타 (미주 코스타)

최근의
통계를 볼 때, 코스타의 참석자 중 매년 70% 정도가 코스타에 처음 참석하는 사람들이다. 매년 새로운 사람들이 코스타를 접하고
간다는 면에서 코스타를 매우 효과적인 사역으로 볼 수도 있지만 반면에 한 번 온 사람들 중 70%가 다시 코스타에 오지 않는다는
얘기도 되는 셈이다. 이 통계 자료가 말해 주는 것은 무엇일까? 다른 평가 자료나 의견(feedback)들을 참조하여 이것을
해석해 보면 코스타는 ‘한 번으로 만족되는 수양회’, 혹은 ‘매 년 똑 같은 수양회’ 라는 얘기로도 볼 수 있다. 한 번으로
만족되는 수양회라는 평가가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에 대한 결론을 이 자체만으로는 내릴 수 없다. 당연히 코스타 수양회의 목표가
무엇인지를 묻고 그에 준하여 이 평가가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코스타의 목표가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리스도인으로 결단케 하는 것이라면 ‘한 번으로 만족되는 수양회’라는 것이 부정적 평가는 아니다. 그리스도를 두
번 영접해야 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코스타의 목표가 복음화된 유학생들에게 기독교 세계관과 가치관을 확립하게 하는 것이라면 약
4박5일의 수양회를 통해 기독교 세계관과 가치관이 얼마나 확립될 수 있는가를 평가해 보아야 한다. 코스타의 목표가 유학생들의
기독교적 세계관에 입각한 학문 연구와 신앙 생활을 격려할 뿐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삶의 현장에서 선교적인 활동과 봉사의 삶을
살도록 한다는 것이라면 일주일의 수양회를 통해서 이 목표의 성취가 어떻게 가능한지를 평가해야만 한다. 사실, 위에 언급한 세
가지 모두는 코스타의 사명이자 핵심 정신(core value)이다 (미주코스타, ‘코스타란?’).

독자들 스스로
평가를 내리겠지만, 복음화의 목표를 제외하고는 한 번의 수양회를 통해서 나머지 목표들을 성취한다는 것은 턱도 없다. 일주일 내내
‘여러분 기독교 세계관과 가치관을 가져야 합니다!’ 라고 외쳐대는 것만으로는 되지 않는 일이기 때문이다. 감성보다는 지성,
설교보다는 강의에 촛점을 두고 교육을 위주로 하는 수양회로 완전 탈바꿈한다고 하더라도 한 번의 수양회로는 달성하기 쉽지 않은
목표이다. 나는 코스타가 복음전도 집회만으로 구성된다고 하더라도 비난할 생각은 전혀 없다. 복음을 전하는 일만큼 중요한 일을
말하라고 한다면 할 말이 없을 정도로 복음 전도의 우선성이라는 복음주의의 기본 입장에 어느 정도 동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코스타가 복음전도 집회만을 하는 수양회라면 나는 한 번 이상 가지는 않겠다. 내가 복음을 모르는 영혼들을 섬기겠다는 결정을 하여
섬기는 이로 가지 않는 이상. 나는 수양회에 2번 이상 참석하는 30%의 사람들중에는 이렇게 섬김의 마음으로 와서 헌신하는 많은
분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섬김을 통해서 배우는 제자도는 매우 귀중한 배움이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한 번 이상 오지 않는
수양회’가 된 것은 한국 교회의 신병 교육대적인 성격이 최근의 코스타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복음 전도하는 것 이외에는 별 내용이 없는, 교회에서도 들을 수 있는 복음의 진수를 더 효과적으로 그리고 강렬하게 다시 듣는 것
이외에는, 어떤 참석자들의 보다 신랄한 표현을 빌리면, ‘화끈한 영적 샤워’로 끝나 버리는, 혹은 어느 정도 현장의 문제를 담긴
하지만 한 번 수양회 참석으로도 다 소화해 낼 수 있는 내용의 수양회… 코스타의 시작부터 세워졌던 목표들은 좋지만 지금
코스타의 모습은 처음의 그 목표들과는 거리가 먼 것이 아닐까 라는 반성이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은가?

3. 대학원생을 대상으로 하는 수양회


음화된 대학원생 유학생들을 돕는 가장 중요한 안건은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첫째는 “전공 속에서 혹은 전공을 통하여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인가?” 라는 안건이고 둘째는 “캠퍼스와 지역 교회에서 어떻게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며 섬길 것일까” 라는
안건이다. 코스타의 모든 프로그램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학생들을 복음화하는 일에 병행하여 이 두 가지 실제적인 안건을 중심으로
짜여져야 한다. 예를 들어 오전은 강의 중심으로 전공과 현장의 문제들을 다루고 저녁은 설교 중심으로 복음과 좁은 의미의 제자도를
다룰 수 있다. 오후의 세미나 트랙의 경우도 ‘구도자의 트랙’, ‘제자도의 트랙’, 그리고 ‘전공과 현장의 트랙’으로 분류 상
세 단계로 나누고 각 트랙에서도 내용의 깊이에 따라 레벨화하는 등 커리큘럼을 체계화할 필요가 있다. 강사에 따라 내용이 바뀌기
보다는 ‘체계화된 내용에 따라 강사를 선정해야’ 한다. ‘신앙과 학문의 통합’이란 말이 나의 전공영역에서는 도대체 무슨 뜻인가에
대해서 학생들이 생각하도록 돕고 답을 찾도록 구체적으로 도와야 한다. 이러한 일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대학원생 사역을
이해하고 유학생들의 상황·현실에 따라 코스타 전체 프로그램 구조와 세미나의 커리큘럼을 짜기 위한 연구 계획을 세우고 이를 위한
연구팀을 구성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렇게 커리큘럼이 체계화된다고 가정하고 단순화된 예를 들어 보면,
(편의상의 구분에 대하여 독자들의 이해를 바란다.) 복음을 모른던 학생이 첫 해에는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를 받아 들이며, 둘째
해에는 제자로서의 삶에 대해 배우고 익히고, 셋째 해 이후부터는 자기의 전공을 통해서 어떻게 하나님을 위해서 살 것인가를 목표로
코스타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복음을 받아들인 학생이라면 최소 두 번 이상 참석하여, 한 번은 제자로서의 헌신의
문제를, 그리고 두번째 해부터는 전공과 직업의 문제를 고민하고 돌아갈 수 있다. 또한 보다 헌신된 학생의 경우에는 처음부터
전공과 현장의 문제들을 목표로 하여 동역자들을 만나고 현장의 삶을 함께 준비하는 코스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지속적으로
복음의 핵심을 들으며,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감격을 되새기면서 말이다.

두번째로, 강사로부터
학생으로 주입되는 일방통행(one-way)의 설교·강의 흐름에서 학생들이 함께 참여할 수 있는 상호적(interactive)인
흐름으로 바뀌어야 한다. 학부생들과 달리 대학원생들은 강의도 하고 세미나도 발표하고 그룹 토론에도 참여한다. 대학원생이라는 것은
학생이기도 하지만 하나의 직업이다. 즉, 대학원생의 수준이 높기 때문이라기보다 이들에 맞는 형식을 찾아야 한다는 얘기이다.
이들을 학부생들처럼 일방적으로 앉혀 놓고 듣게 하는 것은 코스타에서 다뤄지는 내용과 참여자들의 질을 떨어뜨릴 수 밖에 없다.
설교를 제외하고 전체 강의를 포함한 모든 강의에서 학생들의 질문과 토의 시간을 10-30분 정도 배정해야 한다. 이런 과정 없이
관중의 열기나 웃음 소리만으로, 혹은 구매자가 누구인지 정확히 파악되지 않는 강의 테잎의 판매량으로 강의의 효과를 평가할 수
없다. 학생들이 그 내용을 되새길 수 있는 다른 방안이 마련되지 않은 채 쉴새 없이 쏟아붓는 것은 교육적 효과면에서 결코
바람직하다고는 할 수 없다.

더구나 현장의 문제를 다룰 때 각 현장의 문제를 어느 정도 겪고 있는 학생들의
생각과 고민은 매우 중요한 원동력이 된다. 이런 고민들이 던져질 때,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원론에서 그치지 않고 현장의 문제들,
각론에 대한 해답을 끌어낼 수 있으며 최소한 학생들로 하여금 보다 현실적인 준비를 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 학생 때부터
생각하고 고민하고, 나누고 함께 찾는 일을 하지 않으면 막상 현장에 나갔을 때, 그 고민이 지속되고 연합이 지속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울러 학생들이 참여할 수 있는 장이 넓어져야 한다. 다양한 현장의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전공에 속한, 혹은 전공을 통한 문제들에 대한 고민과 결과물들을 발표하고 나눌 수 있는 장이 마련되어야 한다. 전공과
관련된 한 가지 구체적인 문제를 연구한 논문 혹은 포스터 발표라든가, 전공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섬기는 팀 프로젝트라든가,
예술 작품이라든가, 문화 현상를 기독교적 시각으로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해 보는 보고서라든가, 각 전공에 따라 얼마든지 창조적인
참여가 가능하리라 본다. 기독교적 색깔이 전혀 없더라도, 학문의 논리에 충실한 결과물도 우리가 함께 나눌 수 있으리라 본다.
이런 참여를 격려하는 것이 학생들을 현장의 그리스도인으로 구체적으로 준비 시키는 전투 훈련이 아닐까.

셋째로,
보다 연구하는 코스타가 되어야 한다. “아니 학업에 지친 몸을 좀 쉬러 왔는데 기독교 모임에서까지 왠 골치 아픈 소리요” 라고
한다면 대답할 말이 없다. 그러나 “전공마다 다르겠지만, 대학원생의 삶의 가장 기본은 연구하는 자세인데 왜 무엇보다 중요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는 문제에 대해서는 연구하지 않는가” 라고 되묻고 싶다. 조용한 방청객으로 남아있기 보다, 밤을 새우는 토론과
나눔으로 현장의 문제를 건드리는 초기의 코스타 분위기로 돌아가기를 바란다. 대학원생 모임은 자기 비판을 통한 자정 능력이 뛰어날
수 있다. 그런데 코스타에 대해서는 건설적인 비판의 목소리가 상대적으로 적다는 것이 나에게는 무척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뜨거워 할 말을 잊은 것일까? 생각 있는 사람들은 ‘이 운동은 아니다’ 라고 다 떠난 것일까? 나는
각각 자기의 전투지에서 고전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여력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스타가 전도 집회만이 아니고 또한 선교동원 운동만이 아니라면, 그러면 어떻게 유학생들의 다양한 필요를 채울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다방면의 연구가 필요하다. 현재 강사와 참여자, 그리고 내용의 폭을 봤을 때 아직 지엽적이라고 평가될 수 있는 코스타가
미국 유학생이란 커다란 사역 대상을 폭 넓게 품기 위해서는, 캠퍼스선교 운동과 선교동원 운동을 넘어서는 도약이 필수적이다.
그리고 이것은 수 년에 걸친 체계적인 연구와 모델링을 거치지 않고서는 기대할수 없는 일이다. 미주 내에 캠퍼스와 지역 교회의
사역을 파악하려고 막 시작되고 있는 코스타의 HOC 프로젝트는 이러한 노력의 아주 좋은 예이다. 뿐만 아니라 코스타에 무엇을
담을 것인가를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연구 위원 혹은 연구 간사와 같은 장치도 꼭 필요하리라 본다.

수련회를
평가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진행에 대한 평가도 중요하지만 내용에 대한 평가는 필수적이다. 체계적인 평가자료를 개발하여
참석자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이 자료를 토대로 향후 계획을 세워야 한다. 더불어 이 자료를 공개하여, 코스타라는 이름보다는
코스타에서 담는 내용을 중심으로 수양회 참석을 유도하고 코스타의 현재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한다.

4. 맺으며


는 코스타를 잘 모르면서 편파적인 얘기를 썼는지도 모릅니다. 혹은 다들 아는 얘기를 장황하게 썼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한국에서
동료 대학원생들과 함께 고민했던 몇 년의 시간을 통해서 주께서 우리들에게 주셨던, 삶과 신앙과 학문의 통합에 대한 외줄타기와
같은 균형에 대해 그저 스스럼 없이 나누었다고 생각합니다. 코스타를 중요하게 보는 한 사람의 대학원생으로서의 관찰과 생각을
나누었습니다. 이러한 나의 관찰과 생각들은 많은 일반화와, 때로는 기도보다 앞서는 운동성의 위험을 내포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스타가 어떤 ‘Monument’가 아니라 하나의 ‘Movement’라면, 나는 이 운동을 현재의 나의 삶에
주요한 하나님 나라의 운동으로서 받아들이기 때문에 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독자들의 날카로운 비판과 가르침을 기대해 봅니다.

귀족 크리스천

인간의 사회는 어느 곳이 건 ‘계층’이 존재한다. 필연적으로 발생하지만 부정적이지 않은 부류의 계층도 있으나 그 계층의 존재
자체가 그 사회 혹은 공동체에 악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우리가 접할 수 있는 더 흔한 경우인 것 같다. 성경은 이러한 계층의
존재에 대해 어느 정도 인정하고 수용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로마서 13:1) 적극적으로 막힌 담을 헐어버릴 것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 (에베소서 2:14)

계층은 우리가 속한 지역 교회, 신앙 공동체에서도 흔히 발견할 수 있다.
때로 이러한 계층은 교회의 건전한 성숙을 이루는 좋은 프레임이 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을 끼친다. 그러나 교회 혹은 신앙
공동체에서 특정 ‘계층’을 이룬 사람들이 성경적 공동체를 이루는데 큰 제약이 되는 경우를 우리는 자주 보게 된다. 나는 이들은
‘귀족 크리스천’이라고 부른다.

그러면 이들 ‘귀족 크리스천’들은 어떠한 사람들인가?

이들은
‘교회 문화’에 익숙한 사람들이다. 오래 교회 생활을 했거나 종교 생활의 연륜이 오래 되어서 예배의 한 순서가 끝나면 그 다음
순서를 의식하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행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대개 신앙의 ‘레벨’을 교회 문화에 익숙한 정도로 평가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얼마나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나오는 십자가의 감격에 의지해서 사느냐 하는 것보다는 종교적 행위, 교회 봉사 등에
의해 사람을 평가하고 그 평가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을 멸시한다. 이때의 멸시는 물론 겉으로 잘 들어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이들 ‘귀족 크리스천’들은 건덕(健德: 덕을 세움)을 중요시하는 교회 문화에 익숙하기 때문에 덕이 되지 않는
말은 입에 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음에는 담는다.) (마가복음 7:6-23)

이들은 또한 대부분
‘가르치는 일’에 익숙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어떠한 경우가 되건 가르치려 한다. 10여명이 모여서 삶을 나누는 성경공부에서도
이들은 다른 사람들이 내어놓은 삶의 구체적 고민들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마치 유일한 성경적 정답인양 30분씩 충고를 해 준다.
어떤 의미에서 설교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 수도 있다. 대개 이들은 어떤 상황에서든 ‘가르칠’ 준비를 해야 한다는, 그리고 자신이
모든 상황에 대해 해답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 잡혀 살기 때문에 주변의 사건에서 겪은 일들이나 인상 깊은
설교로부터 가르칠 거리들을 잘 준비해 놓기 때문이다. 어려움이나 고민을 겪는 당사자의 이야기는 이들에게 그저 한
사례(case)로 입력되어 자동적으로 해답을 출력한다. 당사자가 개인적으로 하나님 안에서 겪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상황에는 그리
관심이 없다. 어떠한 깨달음이나 가르침으로부터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돌이키는 것보다는 다른 이들을 향하여 무차별적으로 종교적
원론을 남발하는 것이 이들에게는 큰 기쁨이다. (디모데전서 1:5-7)

이들은 자신의 생각을 결코 꺾는 일이
없다. 자신이 한번 결심하고 결정한 것은 무조건 ‘옳은 것’으로 여기고 모든 타협과 충고와 협력을 거부한다. 그리고 이러한
타협과 충고와 협력을 거부하는 것을 신앙의 절개로 여기고 흡족해 한다. 따라서 이들과 함께 동역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고
이들이 리더가 되지 않는 한 이들은 어떤 공동체에 남아 있으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흔히 이들이 보이는 전형적인 행태는 지극히
율법적이고 종교적이다. 때로는 아무런 의미 없는 율법적 혹은 종교적 행위를 반복하면서 모든 다른 사람과의 동역을 거부한다.
(에베소서 4:1-3)

이들은 매우 사역 중심적이다. 지역 교회를 비롯한 신앙 공동체에서 이들은 탄탄한
종교행위의 이력을 바탕으로 많은 자료들과 인력을 동원해 사역을 진행시켜 나간다. 이들에게 있어 한 영혼의 구원과 양육, 성장,
치유 등의 개념보다 우선하는 것은 집단적 성장을 위한 계획, 전략, 추진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다른 이들과 동역 하는 것은
보기 어렵다. 자신의 생각과 계획을 따를 ‘추종자’만이 요구될 뿐이다. 때로 자신이 거의 혼자 관리하기 어려울 정도의 사역
계획을 수립해 놓고 이 일들을 이루어 나가는 것이 신앙의 성취이자 진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들의 이러한 성향은 ‘일꾼’을
찾는 많은 지역교회의 목회자들이나 리더들에게 인정을 받기 마련이고 소속된 신앙 공동체에서 단기간 내에 요직을 차지한다.
(누가복음 10:38-42)

이들 ‘귀족 크리스천’들은 대개 실패의 경험이 없는 ‘성공한’, 혹은 그 과정에
있는 사람들이다. ‘좋은 학교’를 졸업하고 ‘좋은 직장’에서 일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아니면 ‘좋은 학교’를 다니고 있는
학생인 경우도 많다. 그들에게 있어 이처럼 좋은 배경은 자신의 신앙적 자존심을 한껏 높이는 데에 한몫을 한다. 실패 혹은 좌절의
경험이 거의 없거나 전혀 없기 때문에 실패나 좌절은 당사자의 잘못쯤으로 여기고 정죄하기도 한다. 진정으로 낮아지는 섬김의 모습을
이들에게 찾아보기란 힘들다. 이들에겐 그저 성공을 향한 전진이 최상의 목표이다.

귀족 크리스천, 그저
이름만으로도 씁쓸한 웃음을 지어내게 하는 말이다.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 두 단어가 한 절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가 속한 신앙 공동체에서, 이러한 귀족 크리스천은 흔히 발견된다. 목회자들 사이에서, 교회 평신도 지도자들 사이에서, 캠퍼스
모임 리더들 사이에서 어쩌면 귀족 크리스천은 더 강한 연대를 가지고 계층을 형성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특히 어쩌면 ‘특권
계층’으로 여겨질 수도 있는 유학생들 사이에서 귀족 크리스천은 더욱 쉽게 발견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자신을 철저히 비우시고 털어내시며 우리를 섬기시지 않았는가. 세상의 가치관을 뒤집으시며 왕이 종으로
섬기시는 모습을 몸소 보이시지 않았는가. 죽으시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용서하신 그분은 이제 너희가 나가서 사람들의
발을 씻으라고 우리를 보내고 계시지 않은가.

“낮아지신 예수, 섬기는 그리스도인” 이라는 주제로 열리는 KOSTA/USA-2001은 그래서 그 제목을 보는 것만으로도 세상의 가치관에 대한 반란으로 느껴진다. 금년 코스타가 유난히 더 기대된다.

@ 이 글은 eKOSTA http://www.ekosta.org 2001년 5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자격시험(Qualifying Exam)에 실패한 후배에게

사랑하는 성철아,

지난 박사과정 자격시험에서 네가 실패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너는 하나님 안에서 매우 성실한 사람이고 또 열심히 준비했으므로 별 문제 없이 합격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네 불합격소식은 내게도 무척 충격적인 것이었다.

글쎄, 내 짧은 편지가 네게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알 수 없지만, 내 나름대로 너의 이번 실패를 두고 생각하는 것들을 좀 나누어 볼게.


도 미국에 ‘푸른 꿈’을 가지고 와서 (요즈음엔 이걸 비전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으면 시대에 뒤떨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더라) 정말
열심히 해 봐야지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단다. 비교적 적응도 잘 되어가는 듯 했고 수업도 그럭 저럭 따라갈 수 있었기 때문에
그저 별 문제가 없으면 사오년 안에 학위를 따고 날개를 활짝 펴고 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지. 그런데 내게 문제가 생겼다.
입학한 지 거의 일년이 다 되어 어렵게 찾은 지도교수가 갑자기 재정지원을 끊은 것이었어. 하루에 10시간이 넘게 열심히 일하며
어떻게든 잘 해보려고 몸부림치던 내게 그건 큰 충격이었어. 갑자기 지도교수를 잃어버린 나는 원래 보게 되어있었던 박사과정
자격시험을 볼 기회도 갖지 못한 채 석사과정 학생으로 ‘강등’이 되었지. 한 학기에 만불이 넘는 학비를 자비로 충당하는 건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 하고, 내가 다시 석사를 끝내고 박사과정 자격시험에 응시해서 합격을 한다 해도 다른 사람들보다 삼년 이상
늦어질텐데, 이럴 바엔 짐을 싸서 다시 한국으로 들어가거나 다른 학교로 옮기는 것이 낫지 않을까도 심각하게 기도했었어. 어느
아침에는 일어나서 ‘그래, 오늘은 부모님께 말씀을 드리고 한국에 다시 들어가겠다고 하자’고 결심했다가도, 그날 저녁엔 다른 학교
홈페이지를 뒤적이며 전학(transfer)용 원서들을 다운로드 받았고 자기 전엔 ‘내일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며 잠자리에
누웠지.

게다가 그땐 내가 청년부에서 회장을 맡고 있었던 때였고 그때 막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는 청년부를 돌보는
데에도 많은 힘을 쏟고 있을 때였어. 정말 아침엔 청년부 한 지체 한 지체를 생각하다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일어나 새벽기도를
가곤 했던 때였지. 어떻게 하면 새로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을 잘 양육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성경공부 모임들을 잘 세워나갈
수 있을까를 많이 고민하였고.

나는 하나님께 아주 절실하게 여쭈었어. 도대체 내가 잘못한 게 뭐냐고. 도대체
내게 무슨 문제가 있어서 이런 ‘고난’을 주시는 거냐고. 게다가 나는 유학생들과 복음을 나누고 복음으로 양육하는 중요한 일을
지금 하고 있지 않느냐고. 내가 특별히 학문적인 능력이 현저히 뒤떨어지는 것도 아닌데 왜 괜히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시느냐고.
어떤 땐 하나님께서 응답을 주실 때까지 한발작도 움직이지 않겠다며 교회의 한 골방에 들어가 금식기도를 하기도 했고, 어떤 땐
어떻게든 정신을 차려 이 사태를 수습할 방법을 찾아보자며 뛰어다니기도 했고, 어떤 땐 그저 앉아서 구름을 보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어. 중학교때 몰래 다른 아이 일기장 훔쳐 본 것까지 생각해 내며 ‘회개’를 하고 이젠 좀 풀어달라고 기도해보기도 하고.
그런데 하나님은 아무 말씀도 없으시더라.

그런데 답답한 마음 중에 나는 출애굽기를 묵상했었어. 사십년 간 광야를
돌았던 이스라엘 백성들과 나를 동일시하면서 말이야. 워낙 잘 아는 이야기들이고 그저 상투적인 표현들로 가득해 보였던 출애굽기가
내게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어. 정말 살아 꿈틀거리는 생생한 이야기로. 사십년 간 돌고 돌고 또 돌면서, 어떤 때엔
구름기둥/불기둥이 며칠씩, 몇달씩 움직이지 않았던 때도 있었을 거라 생각했어. 그러면 백성들은 아침에 일어나서 오늘은 구름기둥이
움직일 기색이 조금이라도 있나 하며 천막 밖으로 목을 빼곤 했겠지. 하나님의 ‘침묵’에 답답해 하면서도 그저 그것 외에는 의지할
것이 없으므로, 그래도 눈물을 빼면서 하나님의 인도를 구했겠지. 그러면서 나는, 하나님께서 사십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시면서 말씀하시고자 했던 것은 어쩌면 ‘가나안’이라는 땅에 가는 것 보다 더 소중한 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라는 것,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것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 이러한 깨달음은 그저
‘시뮬레이션’으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몸으로 부딪히고 온 삶으로 겪어야만 내 것으로 체득되는 것이니까.


늘도 나보다 이년 더 늦게 우리 과에 들어온 어떤 사람이 마지막 박사논문발표(final defense)를 한다는 이메일을
받았어. 이런 이메일을 받는 박사 6년차의 기분이 어떤지 넌 아니? 그래, 나는 아직도 그때 하나님께서 내 삶 속에 던져놓으신
‘돌맹이’로 인한 파장을 다 수습하지 못한 채 그 안에서 허덕이고 있어. 그리고 이렇게 장학생(長學生; 오래 공부하는 사람)으로
남아 있지. 그리고 아직도 하나님께서 왜 그때 그렇게 하셨는지 완전히는 이해할 수 없어. 물론 나를 더 멋진 사람으로 만드시기
위해, 공부를 향한 나의 인간적 욕심을 다루시기 위해 등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생각해 볼 순 있지만 말이야.

하지만 성철아,

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확신할 수 있는 건, 이 모든 ‘고난’과 ‘실패’의 경험이 있기 때문에 난 유학오길 잘했다는 거야. 젊은
시절에 경험하는 이 ‘광야생활’이, 비록 나를 ‘가나안’으로 인도하지 못할 지라도, 내가 목숨을 걸고 사랑하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더 절실히 의지할 수 있는 멋진 영적여정(Spritual Journey)임을 알기 때문이지. 지금 내 은행계좌엔
584불이 남아 있어. 앞으로 한달 동안 나와 내 아내와 우리 두살난 딸이 함께 살아야 하는 돈이지. 학문적, 경제적 압박들이
늘 나를 짓누르고 있고, 미래에 대한 불안과 또 다시 닥쳐올지도 모르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언제나 내 삶 속에 흐르고 있지만,
그래도 이런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을 더 깊이 알 수만 있다면 한번 해 볼만 한 일 아니니?

성철아,
이번의
실패로 마음이 답답하면 울어. 먼 산을 쳐다보며 멍하게 있어도 보고. 나도 어떻게 어려움과 아픔들을 견뎌야 하는지 잘 몰라.
그냥 나도 그렇게 울고, 그렇게 기도하고, 그렇게 멍하게 있곤 하거든. 그래도 우린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믿는 사람들
아니니.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같이 바보같은 사람들을 사랑하셔서 십자가에서 온 몸을 찢어 돌아가셨잖니. 그 예수님의 사랑에 한발
더 깊이 빠져보자. 그것 외엔 길이 없으니까.

언제 전화 한번 해라. 내가 네 푸념 들어주면서 네가 좋아하는 육개장 오랜만에 한국음식점 가서 사줄게.

2001년 4월,
주안에서 함께 형제된, 경호형이

@ 이 글은 eKOSTA http://www.ekosta.org 2001년 4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기도문 – 99년 12월, FKCC

하나님, 예수 믿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예수 그 이름을 알지 않고서는 도무지 누릴수도 생각할 수도 없는 기쁨과 감격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그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으로도 그저 저희에게 벅찬 감격이 됨을 고백합니다. 도무지 저희에게 구원받을 만한 무엇이 전혀 없는데도 불구하고 십자가에서 온 몸을 찢으신 예수님의 사랑을 인하여 찬양하고 감사드립니다. 또한 지난 일년간 저희를 인도하여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참새 한 마리까지 먹이시는 주님의 도우심이 아니었다면 저희들은 단 한끼의 식사도 먹을 수 없었음을 인정하고 저희 삶의 모든 순간에서 저희를 지켜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주님, 저희 교회를 위하여 기도합니다. 저희로 하여금 십자가의 감격을 회복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어떤 종교적인 행위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피묻은 십자가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고 감격해하는 복음의 핵심으로 돌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여러 가지 화려한 장식이나 프로그램이나 아니면 외모보다도 지옥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영혼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하는 것을 저희로 다시 기억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가 모였을 때 보다 흩어졌을 때 더 powerful한 교회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각자 자신의 직장에서, 학교에서, 가정에서 예수그리스도의 피묻은 십자가의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내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중 장부를 만드는 일을 그치고, 부정한 방법으로 학교 성적을 올리는 일을 멈추고, 뇌물 주고받는 것을 가증스럽게 여기고, 그 누구보다도 성실하고 정직하게 세상을 하나님의 법이 흐르는 세상만드는 그런 공동체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죄를 죄로 인식하지 못하고, 거짓을 거짓이라 이야기하지 않는 이 세상을 바라보며 ‘하나님 조금만 더 참아주시옵소서, 저희가, 우리 젊은이들이 이제 조금만 있으면 하나님과 이 시대와 민족과 역사의 소망이 되는 때가 올것입니다.’라고 하나님께 이야기할 수 있는 그런 공동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저 잠시만이라도 이 교회를 거쳐갔던 모든 사람들이, 그리고 이 교회를 떠나가는 모든 사람들이 이곳에서 나누었던 많은 사랑과 vision으로 가슴 뜨겁게 살아갈 수 있는 그런 교회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은혜 베풀어 주시옵소서.
저희가 누리고 쓰는 것 보다 다른이들에게 베풀고 나누는 것이 훨씬 더 많은 교회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북한의 형제들이 굶고 있는데, 그저 무슨 밥그릇에 밥먹을지를 고민하는 그런 교회 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복음을 한번만 듣기만 하면 주님앞으로 돌아와 영광스러운 주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 사람들의 외침, 단 한 덩어리의 빵이 없어 죽어가는 어린아이를 품에 안고 애통해하는 어머니의 눈물, 전쟁의 포성 속에서 지하에 숨어 두려움에 떨고있는 어린이의 공포에 싸인 눈, 아버지 저희로 하여금 이것들을 기억하게 하시옵소서.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아픔을 보시며 가슴아파아시는데 저희는 그저 어떻게 하면 좀 더 좋은 반찬에 밥먹을까만을 고민하는 그런 싸구려 인생들되지 않게 저희를 도와주시옵소서.
이번주에 예배에 몇 명이 참석했나 하는 것보다 우리중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복음의 감격을 가지고 살고 있는가에 관심이 있는 교회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번주에 헌금이 얼마 들어왔나를 세는 것보다 어느곳에서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하는가를 찾을줄 아는 교회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보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가를 치열하게 고민하는 교회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하나님,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세상을 보시옵소서. 죄를 죄라고 외칠 때 왕따가 될 수밖에 없는 이 땅을 보시옵소서.

하나님의 자리를 찬탈해버린 돈, sex, 권력, 쾌락의 우상들을 보시옵소서. 오 아버지, 저희들은 하나님의 긍휼을 간절히 필요로합니다. 우리의 죄악들을 용서하여 주시고 이 땅을 고쳐 주시옵소서. 지금도 지옥의 목구멍으로 넘어가고 있는 수많은 영혼들을 위하여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을 알려주시옵소서.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영광스러운 교회의 원래 모습을 되찾을 수 있는지 알려주시옵소서. 하나님 우리에게 가득한 우상들을 태우실 성령의 불을 보내주시옵소서. 물이 바다 덮음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온땅에 가득하게 될 부흥을 저희에게 주시옵소서. 저희 교회로 하여금 그 부흥의 도구가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특별히 이 시간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하나님, 그 사람들에게 바로 이 자리가 당신을 경험하는 자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무리 교회에 오래 다녔거나, 직분을 가졌거나, 배경이 어떻다 하여도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 사람의 주가 되지 않는 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음을 알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으로 나아오는 시간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얼마나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사랑하시는가를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사람의 말솜씨와 기술로는 불가능하더라도 하나님께서 하시면 가능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아주 잠깐만이라도 그 마음에 닿으면 바로 그가 예수님 영접할 수 있게 될 줄 아오니 이 자리가 그런 영광스럽고 기쁜 자리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마음에 상처가 있거나 어려움과 고통 속에서 그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위로만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주님 그들에게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큰 소리로 말씀하여 주시옵소서. 내가 너를 사랑하여 십자가에서 내 몸을 찢었노라고, 너의 삶을 내가 전적으로 책임지고 있노라고 하나님 도저히 부인할 수 없는 음성으로 말씀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사역자로 서 있다가 침체에 빠진 사람들, 열정을 잃은 사람들, 더 이상 싸울 힘도 사랑할 힘도 없는 사람들에게 주님 다시한번 하나님의 나라와 그 영광을 위하여 일어서게 하여 주시옵소서. 다시 일어서 주의 용사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세상을 바라보며 가슴을 찢어 기도하는 용사들로 다시 세워주시옵소서.

아버지 저희는 어떤것도 하나 제대로 깨달을 수 없는 자폐아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저희에게 기쁨도 감격도 진리를 깨달음도 행함도 아무것도 있을 수 없사오니 주님 저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저희로 주의 자녀들 답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이 예배를 받아주시옵소서. 하늘 문을 여시고 이 가운데 폭포수와 같은 은혜를 부어주시옵소서.
바로 이 시간 저희가 하나님의 영광을 갈망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사모합니다. 저희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시옵소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예배가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사람의 테크닉이 아닌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가 있는 예배가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죄가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에 비추어지고, 저희가 그 죄의 무게를 인식하며 그 죄를 십자가 앞에 내어 던지는 구원의 감격이 넘쳐나는 예배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 주님, 예수 믿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그 좋은 것들을 마음껏 누리고 축하하는 예배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에게 복음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 모든 말씀 역사의 주인이신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하였습니다. 아멘

십자가를 바라보면 눈물이 난다, 청년부를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십자가를 바라보면 눈물이 난다, 청년부를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1997년 10월 1일
권오승

1996년 봄 이전

자가는 언제나 바라만 보고 있어도 눈물이 나게 하는 힘이 있다. 도저히,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하심으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었는데, 살만한 가치가 전혀 없는 사람이었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처절한 죽으심으로 날 구원하셨다는 사실에 그
어찌 감동이 되지 않겠는가!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을 만났을 때 나는 수 개월 동안을 눈물로 보내야만 했을 만큼 그
분의 십자가는 언제나 나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 한다.
1990년에 처음 예수님을 영접하고 – 그러나 나는 그 이전에도
21년 동안 ‘모태출석교인’(‘모태신앙’이 아님)이었다! – 1991년 초에 성경공부를 비교적 체계적으로 시작하면서 내게는
이상하리 만큼 크게 하나님께서 주신 꿈이 있었다. 그것은 복음으로 젊은이들이 서는 것이었다. 1990년이면 내가 대학교 4학년,
누가 봐도 나도 그들 “젊은이” 가운데 하나였는데도 젊은이들이 모여 기도하고 있는 모습을 단지 보기만 해도 가슴이 뭉클해지며 이
젊은이들을 통해 세상이 바뀌는 날이 있게 되리라 하는 기대를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처음 예수님을 믿을 때부터 막연하게나마
젊은이들에게, 복음이야말로 젊음과 인생을 다 걸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는 것을 이야기 해주는 사람, 또 내 삶으로 그 사실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사람이 되리라고 생각하고 기도해 왔다. 그리고 실제로 그 청년 사역을 위해 훈련받고 공부하였다. 말씀
묵상(QT) 훈련, 성경 해석 훈련, 기도 훈련, 소그룹 인도 훈련, 말씀 암송, 찬양, 친교 등에 training을
받았다.(혹은 스스로 했다.) 교회에서 청년부 회장으로부터 시작해서 각종 임원을 했었고, 성경공부 리더로 봉사했었다. 교회
밖에서도 소그룹 성경공부와 book sharing 모임, 과(科) 성경공부 모임, 일대일 전도 성경공부 등 여러 모임을
참여하였고, 인도하였다. 이러한 훈련은 여러 가지로 내게 유익이 있었지만 특히 청년들에 대한 vision을 구체화시키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아마 내가 우리 청년부를 보면서 가슴이 뭉클해지고 눈물이 나는 것은 그런데 이유가 있으리라.

1996년 봄
1996
년 봄부터 여름은 내게 개인적으로는 영적인 암흑기였다. 1996년 초부터 청년부 일들에 많이 관여하게 되면서 청년부 내에 의외로
‘뒷 얘기’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그로 인해 상처를 주고받고 있음을 보았다. 청년부 겨울 수련회 도중에
일어난 사고로 그 문제들이 더욱 돌출 되는 듯 하더니 당시 청년부 담임 목회자이셨던 피전도사님께서 갑작스럽게 사임하셨다. 교회에
와도 기쁨이 없고 터놓고 말을 할 사람 하나도 없어 나는 개인적으로는 매주 ‘이번 주까지만 이 교회 나가고 나도 다음주부터는
이놈의 교회 때려치우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공개되지 않는 ‘소문’만 무성하고, 성경 공부에서도 힘을 얻지 못하고, 실제로
많은 사람이 교회를 사교클럽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 아마도 그것은 내 영적 상태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교회에서 부정적인 것들만을 크게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내겐 ‘이놈의’ 청년부는 말라죽기 일보 직전의
청년부였다. 교회를 나가는 것이 힘들어 교회만 다녀오면 한숨을 쉬며 울었다. 나는 그러나 처음 보스턴에 올 때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vision이 ‘유학생’들을 대상으로 사역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냥 무작정 그만두고 미국교회로 옮길 수는 없었다.

1996년 여름

나님께서는 내게, 그리고 청년부에 놀라운 일을 행하시기 시작하셨다. ‘오순절 특별 새벽기도회’로부터 시작된 새벽기도가 어찌된
일인지 조금씩 불이 붙기 시작하였다. 청년들이 하나둘씩 새벽에 나와 무릎을 꿇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6월말에 있었던 KOSTA.
내게는 개인적으로 큰 영적인 회복을 준 계기가 되었다. 얼마나 KOSTA에서 울었는지 모른다. 집회 때마다 감사해서 울고,
서러워서 울고 그리고 회개를 하며 울었다. ‘부흥의 불길을 온 땅위에’라는 주제로 집회가 진행되었는데 그 이전부터 참된
‘부흥’에 대해 동국이형으로부터 이야기를 들으며 정말 그런 부흥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바라 정말 이 KOSTA를
통해 부흥이 있었으면 하고 기도했다. 실제 참된 ‘부흥’의 집회가 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내게는 부흥에 대한 소망을 더욱 크게
부어주었고, 그 소망과 우리 청년부를 연결시켜주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나도 새벽마다 무릎을 꿇고 부흥에 대해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정말 이 청년부에, 이 교회에… 19세기 후반 바로 이 보스턴에 있었던 그 부흥이 다시 한번 일어날 수 있다면…
아, 부흥!

1996년 늦여름
영적으로 많이 회복을 시켜 주셨고, 기도의 영(靈)도 하나님께서 부어주셔서
기도하게 하셨지만 아직도 내가 사역할 곳이 바로 ‘이 청년부’인 것에 대한 확신은 없었다. 그러던 와중에 혹시 다음 학기
총회에서 내가 청년부 임원 가운데 한 사람으로(어쩌면 회장으로) 사역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워지기 시작하였다. 실제로
애착도 크지 않은데다가 여러 가지로 상처가 있는 공동체에서 그것도 담당 목회자가 계시지 않는 상태에서 임원이 된다는 것은 여러
가지로 두려운 일이었다. 나는 그냥 무작정 피하고 싶었다. 그냥 이대로 있다가는 이 청년부에서 아무런 열매도 없이
burn-out될 것이 확실해 보였다. 당시 청년부 회장으로 있던 석영이에게 가을이 되면서부터 리더를 그만두고 교회를 옮기겠다고
이야기했다. 석영이는 약간 당황하며 같이 기도해 보자고 했다. 그러나 내 생각은 비교적 흔들리지 않을 듯 보였다. 더 이상 이
공동체에서 상처받으며 버티고 싶지 않았다. 나도 내 살 길을 찾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1996년 총회
청년부
총회 날까지도 나는 내가 교회를 옮겨 미국 교회로 갈 것인지 결정을 하지 못했다. 다만 총회 전까지도 성호를 비롯한 몇 사람들을
만나며 청년부 회장으로 봉사할 것을 고려해 보라고 설득해 보았지만 잘 되지 않았다.(나는 어떻게든 청년부 회장이 되는 것은
피하고 싶었다. 그리고 나를 잘 아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나는 청년부 회장으로는 참 부적절한 사람이다.) 총회 당일, 나는
교육관에 내려가지 않고 1층 사무실에 있었다. 그냥 어떻게든 피하려고 했다. 꽤 시간이 지난 것을 생각해 이 정도면 사람들이
거의 뽑혔거나 최소한 후보 추천 정도는 끝났으려니 생각하고 늦게 교육관으로 내려갔는데, 아직 시작도 하지 않고 있었다. 얼마 안
있어 후보 추천이 되었고, 개표한 결과 성호와 동수 득표하여 제비뽑기를 통해 내가 회장이 되었다. 나는 눈 앞이 깜깜해 졌다.
그냥 ‘이건 아니야’라며 외치고 뛰어 나가고 싶었다. “하나님, 전 이 청년부가 싫어요! 그리고 전 이 청년부에 아직 동역자도
제대로 찾지 못하고 있고, 전… 여기 계속 있다가는 저 혼자 burn-out 될 것 같아요!!! 사랑하지도 않는 공동체에서
어떻게 회장을 할 수 있어요?”

1996년 가을학기 초반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놀랍게 역사 하시기
시작하였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첫 번째 생각은 이 청년부가 영적인 성숙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사람 수만 많아져서 그로
인한 부작용이 많다는 것이었다. 우선 우리 청년부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끔 하는 것이 가장 급하고도 중요한 일이라는 생각을
주셨다. 그 당시 QT 말씀도 consistent하게 그것을 말씀하셨고, 이상하리 만큼 읽는 책마다 그런 생각들을 더욱 크게 해
주었다. 우선 성경 공부를 바로 세우는 것이 가장 급한 일이었다. 성경공부에서 아무도 와서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지 않는
성경공부는 힘이 없었다. 성경공부에서 삶이 나누어지고 하나님께서 각자의 삶을 통해 역사 하시고 승리하시는 모습들이 나누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직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네 개의 성경공부 조를
만들고 조장들을 세웠다.(지금은 이 글을 읽는 분들이 알다시피 신입조를 포함해서 모두 11개의 성경공부 조가 있다.) 그리고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은 죽은 영혼 살리는 것이라 믿고 첫사랑 조를 만들어 세웠다. 청년부 금요 모임은 그냥 모임이나 ‘집회’가
아니라 하나님을 진심으로 예배하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 아래, 찬양으로부터 시작해서 맨 마지막에 ‘우리는 주의
백성이오니’를 손잡고 부르는 순간까지 하나님께 focus가 맞추어지도록 모임을 인도했다. 그리고 매주의 모임이 하나님 안에서의
‘잔치’가 되도록 하였다. 가능한 모든 곁가지를 없애고 말씀과 기도라는 본질에만 집중하고자 노력하였다. 96년 KOSTA에서
어느 목사님이 말씀하신 대로 청년부 예배를 마치고 돌아가는 사람들이 ‘울던지 웃던지 둘 중의 하나는 할 수 있는’ 모임이 되도록
하자는 것이 하나님께서 그 당시 내게 주신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생각과 기대는 실제로 이루어져 나갔다.

새벽기도

년부가 살아나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은 기도의 힘이었다. 8월부터 한 두사람이 새벽기도에 나오기 시작하더니 조금씩 늘어
나중에는 서로 ride를 받아 새벽에 나오게 되었다. 점차로 사람이 늘었고, 다른 교회의 사람들도 소문을 듣고 새벽마다 기도하러
왔다. 새벽마다 청년들이 모여들었다. 가을이 지나 겨울로 가면서 날씨가 추워지면서 오히려 더 많은 청년들이 새벽에 와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우리 교회 van이 ‘터지길’ 기도하면서 이 기도의 불길들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셔서 정말 큰 일을 행하실
것에 대한 기대감들이 커져갔다. 컴컴한 새벽에, 밤늦게까지 공부에 ‘지친’ 몸을 이끌고 청년들이 모여들었다. 그것은 정말
감동적이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었다. 이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은 1년 동안 엄청나게 벌어졌다.

주학선 목사님

쩌면 우리의 모임이 조금씩 살아나면서 우리가 가졌던 첫 기대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하는 가슴이
뜨거운 청년부 담임 목회자를 보내주시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실 나는 조금 불안하기도 하였고 걱정도 되었다. 이렇게
막 피어나기 시작하는 청년부의 불길을 정말 일으킬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어야 하는데… 사실, 워낙 청년부 모임에 대한
기대감들이 청년부 내에서 크게 확산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걱정도 매우 컸다. 정말 하나님의 사람을 보내달라는 기도를
하면서도 정말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차라리 이대로 좀 더 오래 끌어도 괜찮겠다는 생각마저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내
믿음이 부족함을 바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셨다. 10월 첫째 주부터 청년부를 맡으신 주학선
목사님을 처음 뵙고, 사실 그분과 깊은 대화를 나누기도 전에 ‘어, 정말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 인 것 같다.’는 확신을
하나님께서 주셨다. 실제 주학선 목사님은 우리 청년부에 가장 적절한 시기에 오신 가장 적절한 분이셨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렇게
기가 막히게 보내셨는지…. 지금도 그 생각을 하다가 혼자 무릎을 탁하고 친다. 그후로 지금까지 주목사님을 통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었다. 그리고, 기도하고 믿기로는,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큰 일들을 주목사님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 청년부에 행하실 것이다.

1996년 가을 이후
나는 금요일에 앞에 나가 광고를 하기 전엔 언제나 얼굴
하나 가득히 눈물과 콧물 범벅이 된걸 허겁지겁 닦고 나가야 했다.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불길은 대단한 것이었다. 실제로 모임에
임하는 사람들의 표정이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찬양의 강도가 달라졌다. 성경공부에서 자신의 이야기들을 나누기 시작하였고, 각자의
삶을 통해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찬양하였다. 주목사님의 잔잔하지만 power있는 message에는 매주 하나님께서 역사
하셨다. 새로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는 일들이 나타났다. 세례를 받는 사람들을 우리는 뜨겁게 사랑하고 축복해 주었다.
떠나는 사람마다 눈물을 글썽이며 이 공동체에서 받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찬양하였다. 또, 청년들이 조금씩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들도 들렸다. 사실 이때쯤부터 청년부 리더들이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의 수에 비해
새로 오는 사람들과 막 예수님을 믿고 성장해 가는 사람들이 늘어나 리더들 care가 부족하다는 것이 문제로 대두될 정도였다.
정말 하나님께서 하시는 놀라운 일들을 찬양하였다. 그리고 정말, 하나님께서 무언가 이 공동체에 이루시겠구나 하는 기대감들이 더욱
커져갔다.

1997년 겨울 수련회 – “우리는 주의 백성이오니”
수련회를 위하여 거의 두달동안 새벽기도때
마다 기도하였고, 준비가 본격화되면서는 모두 한 방에 모여 기도하였다. 주학선 목사님을 강사로 모시기로 하였고, 이 수련회가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복음이 전해지고, 신앙의 회복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다시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은혜를 느끼는 수련회가
되도록 기도하였다. 또한 이 수련회를 통해서 이 공동체가 진정한 의미로 ‘한 몸’이 되도록 기도하였다. 성령 안에서 하는 기도의
힘에는 참 놀라운 힘이 있다. 우리는 기도하면서 정말 어쩌면 이 수련회에서 하나님께서 무언가 하실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마음이
설레게 되었다. 수련회 당일은 눈이 왔다. 이 눈으로 인하여 기도했던 것이 수포로 돌아가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을 많이
하였다. 그 많은 사람들이 수련회를 위하여 금식하며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 청년부에게 주신 이 기대를 꺾으실 리가 없었다.
모든 사람들이 수련회장까지 안전하게 도착하였고, 이틀동안의 수련회가 진행되었다. 찬양과 기도, 말씀. 모든 시간 시간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고 계심을 느낄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모임의 힘은 대단한 것이었다. 결국 마지막 날 저녁 성찬식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 공동체가 참으로 하나임을 보여주셨다. 그 순간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뛰어 견딜 수가 없다. 형제,
자매들의 얼굴이 다 눈물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렇게 아름다운 모습들을 좀처럼 찾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하나님 안에 있을 때 우리 청년들이 가지는 아름다운 power – 할렐루야!

1997년 겨울
1997년
초는 내게 개인적으로 무척 힘든 기간이었다. 지도교수가 fund를 끊어 내가 학비와 생활비를 대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더니
곧이어 박사과정 oral qualifying 시험을 볼 수 없게 되었고 바로 지도교수가 더 이상 project를 같이 할 수
없다고 이야기 해왔다. 이렇게 어렵게 처한 상황 속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학교를 transfer 할
것, 한국으로 돌아갈 것 등 여러 가지를 놓고 기도하며 생각하였다. 하나님께 갈 길을 가르쳐 달라고 기도하며 매달렸다.
하나님께서는 청년부를 떠올리게 하셨다. 제비뽑기라는 ‘이상한(?)’ (그러나 성경적인) 방법으로 회장이 된 것을 상기시키셨다.
그 동안 하나님께서 이 청년부에 행하신 일들을 보이셨다. 그리고 아직 내가 이 곳에서 할 일이 더 있음을 보여주셨다. 그리고 이
힘든 일들을 통해 평생의 동역자가 될 자매(!)와도 맺어지게 하셨다. 어렵고 힘든 가운데에서도 청년부는 분명 내게 등대와도 같은
것이었다.

1997년 봄
청년부는 더욱 성숙해 갔다. 더욱 성장해 갔다. 약간의 기복이 있긴 했지만 점차로
성장해 나가는 청년부의 모습은 매우 벅찬 것이었다. 비교적 본 궤도에 올라 청년부에 요구하는 것도 많아지고 더 탄탄한 ‘조직’의
필요성도 대두되었다. 폭발하는 듯한 힘이 다소 수그러든 것 같은 생각이 들때도 있었다. 개인적으로, 나도 매너리즘에 빠져
전심으로 기도하고 금식하는 일에 게을리 하였다. 약간의 잡음과 의견의 대립(?)도 간간이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그런
것들에 대해 적절하고 지혜롭게 반응하지 못한 적이 많았다.

1997년 여름
많은 지체들이 한국과 그외에
집을 방문하고 그 때문에 좀 혼잡한 느낌을 줄 수 있는 기간이었는데도 청년부는 참 탄탄하게 모였다. 오히려 성경공부의 깊이가
더욱 깊어지고, QT가 더 많이 확산 되었다. 다만 새벽기도는 조금 주춤 줄어드는 경향을 보였다. 하나님께서 다시 청년들을
새벽에 깨우셔서 다시 한번 van이 터지도록 새벽마다 모이는 모습이 있게 되기를 소망한다.

1997년 가을

제 몇 주전에 또 다시 청년부 총회가 있었다. 기대감을 가지고 새로운 임원들을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것을 보았다. 바로 일년전
떨떠름한 표정으로 회장이 되어 얼떨결에 하나님의 손길에 의해 사정없이 인도되어진 모습들이 머리속에서 지나간다. 참으로, 지난
1년은 청년부가 크게 성장한 해였고, 그 덕분에 나도 그 안에서 같이 성장 할 수 있었던 한 해였다. 청년부의 입장에서 보면
별로 그렇지 않겠지만(?), 내 개인적인 입장에서 보면 참 청년부 회장하길 잘했다. 하나님께서 부어주신 vision들과 열정들
때문에 행복한 1년 이었다. 다만 부족한 사람을 청년부 회장으로 둔 탓에 더 크게 역사하실 하나님의 능력들이 많이 제한되었음을
느껴 고개를 들기가 참 부끄럽다. 그러나, 심지어 나와 같은 사람을 사용하셔서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면 참
위로가 되고 위안이 된다. 내게 있는 이런 위안을 다른 형제, 자매들도 함께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

1997년 가을 이후

나님께서 지난 1년동안 우리 청년부에 행하신 일들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었다. 영적인 장님들이 눈을 뜨고, 영적인 중풍병자들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자기 침상을 들고 가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보았다. (나도 사실 그런 환자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아직 기대감들을 부어주고 계시고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우리 청년부를 사용하셔서 당신의 큰 일들을 이루어 나가실
것이다. 참으로 “썩을” 세상이라고 사람들이 한탄을 한다. 한국과 한민족은 희망이 없다고 말들을 한다. 그러나 우리가 시대를
역행하여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사람들이 되어진다면 이 “썩을” 세상도, 앞이 캄캄한 것 같아 보이는 한국의 미래도 우리들로
인하여 희망의 가질 수 있게 될 것이다. 소돔과 고모라가 망했던 것이 의인 10명이 없어서 였던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이
사회를 지탱하는 의인들이 될 수 있을 것이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위해 젊은 시절부터 불러서 훈련시키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결심하면, 하나님께서 10년동안, 20년동안 이 세상을, 이 나라의 참담함을 우리로 인하여 참으며 기다려 주실 것이다! 우리
손을 사용하셔서 하나님께선 이 땅을 고치실 것이다. 1890년대 후반에 바로 이곳 보스턴에 있었던 ‘부흥(Revival)’,
하나님께서 그 부흥을 바로 우리에게 주신다면, 그래서 우리가 교회의 영광을 회복하여 이 땅을 고치는 일들을 감당하며 살게 된다면
우리로 인하여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때 우리는 진정으로 우리
뿐 아니라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를 보며 눈물을 흘리고, 우리 청년들을 보며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볼 수 있으리라. 부흥은
이 마지막 시대의 마지막 소망이다.

끝으로 청년부 회장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기도로 동역해준 많은 형제
자매들에게 감사드리고 목사님을 비롯한 리더와 임원들에게 감사드린다. 특히 많은 기도와 조언으로 도와주며 동역해준 동국이형에게
감사하고, 이런 목회자를 한번 만났다는 사실 만으로도 행복할 주학선 목사님께 감사드린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날 위해 많은 기도를
‘뿌린’ 수영이에게도…. 그리고 누구보다도, 무엇보다도…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는 예수님이 참 좋다. 그리고 청년들이 좋다. 그래서 나는 십자가를 바라보면 눈물이난다. 청년부를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성냥팔이 소넌 – play

1994. 12.
성냥팔이 소년
권오승 극본

나오는 사람 :
해설 (남자, 30-40代, 정장차림)
성냥팔이 소년 (남자, 10代, 남루한 차림)
사람1 (행인, 대덕제삼교회 성도)
사람2 (행인, 대덕제삼교회 성도)
사람3 (행인, 대덕제삼교회 성도)
사람4 (노인, 정제재활원 원장)
사람5 (연인, 남자)
사람6 (연인, 여자)
사람7 (야속한 행인)
사람8 (걸인)

무대, 암전 상태. 무대 중앙이 차츰 밝아지면 해설자 무대 한쪽으로부터 등장, 관객을 향해 정중하게 인사한다.

설 : 저희 청년부의 뛰어난 연극, 성냥팔이 소년을 관람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여주신 여러분들께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바야흐로 세계는 세계화, 국제화라는 커다란 흐름을 타고자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그러한 세계화의 추세가 우리 나라, 그중에서도 이
대전, 그중에서도 바로 이 대덕제일교회 안이라 할지라도 예외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저희 청년부에서는
international한 감각의 연극을 마련했습니다. 제목은 성냥팔이 소년. International한 연극이니만큼 앞으로
진행되는 대사들은 international language인 영어로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배우들 : (한쪽 구석에 모여 있다가 매우 놀라며 항의한다.) 뭐? 말도 안돼. 우리 아까까지만 해도 그런 얘기 없었잖아?
해 설 : 아, 아, 뭐 꼭 주어 동사 다 맞아야 영어가 됩니까? 그저 수준껏, 재주껏 하세요.
배우들 : (소란스럽게) 아, 그래도 그렇지 그게 어디 되나?
해 설 : (잠시 배우들의 소란을 잠잠하게 한 뒤) Now, ladies and gentlemen, this is… this is… um… Ok. Start!(퇴장)
소 년 : (한쪽에서 등장하며) Wow, it is cold! (지나가는 사람1을 보며) Hey!
사람1 : (돌아보며) Me?
소 년 : Yes, you.. you. This, This,
사람1 : This what?
소 년 : 아니 그러니까… (혼잣말로)성냥이 영어로 뭐지? I sell this. You buy this. Ok?
사람1 : Not OK.
소 년 : Please,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가 안되겠는 듯) Go. Goodbye. Merry Christmas!
사람1 : (빙긋 웃으며) Merry Christmas! (퇴장)
소 년 : (가슴을 치며 해설자 쪽을 바라보면서) 아니, 누가 영어로 하자고 그래서…
해 설 : Don’t speak Korean!
소 년 : Who… English speaking?
사람2,3 : (등장) Ra La La…
소 년 : Hey, please…
사람2,3 : (소년쪽을 바라본다.)
소 년 : I sell this. You buy this. Ok?
사람2,3 : (고개를 갸우뚱하며, ‘돌았나봐’하는 시늉을 하며) 다른쪽으로 퇴장.
소 년 : (사람2,3이 나가는 쪽을 향해) You보세요, You보세요.
이때 해설.손뼉을 두번 치며 다시 등장. 해설이 손뼉을 두번 치면 모든 사람들 그 자리에 마네킹처럼 멈춰선다.
해 설 : 이거 아무리 세계화도 좋지만 이러다가 성냥팔이 소년하나 굶어 죽이겠습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려서 그냥 우리말로 해야겠네요.
해설, 손뼉을 다시 두번 친다. 해설이 손뼉을 치자 배우들은 빠른 동작으로 이미 한 동작들을 역동작으로 보여주고 해설은 tape 거꾸로 빨리 돌리는 소리를 낸다. 다시 해설이 무대 중앙에 등장하고,
해 설 : (해설이 계속되는 듯이)…제목은 성냥팔이 소년.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취지 하에 우리말로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퇴장)
소 년 : (한쪽에서 등장하며) 어휴, 추워. 이거 Christmas eve인데 날씨가 정말 춥네. (사람들을 향해) 성냥 사세요. 성냥 좀 사세요.
사람4 : (소년을 향해 다가가며) 잠깐만 학생.
소 년 : 성냥 사세요.
사람4 : 아니, 난 성냥을 사러 온게 아니고, 뭐 좀 물어볼게 있어서.
소 년 : 뭔데요?
사람4 : 내가 아까부터 저쪽에서 계속 봤는데 이거 성냥팔이 소년 연극 맞지?
소 년 : 예, 그런데요.
사람4 : 그러면 이거 학생이 아무리 팔려고 해도 사람들이 Christmas 기분에 들떠서 관심도 안갖는거 그거 맞지?
소 년 : 예,예. 그렇긴 한데…
사람4 : 그러면 그 내용은 여기계신 사람들이 다 알아요. 그러니까 쓸데 없이 긴 부분은 빨리 돌려서 보내버리고 시간도 부족한데 필요한 부분만 보여주라구.
소 년 : 아니, 그래두 어떻게 그렇게…
사람4 : 어허, 그렇게 하라면 그렇게 하는거지 뭐 그렇게 말이 많아! (소년머리에 군밤을 한방 먹인다.) 또 한방 안먹으려면 내가 하라는대로 해!
소 년 : (머뭇거린다)
사람4 : 이거 안되겠구만, 어이, 해설자!
해 설 : 예.
사람4 : 어여 박수 세번 쳐.
해 설 : (머뭇거린다.)
사람4 : 어여 쳐!
해 설 : 예,예…

설이 박수를 세번 치자 사람들이 빨리 빨리 지나간다. 소년은 성냥을 팔려고 하다가 사람들로 부터 계속 외면만 당한 채 쓰러진다.
잠시 무대 어두워진다. 이어서 한쌍의 연인이 관객을 보고 앉아 영화를 보고 있다. 소년은 한쪽 구석에서 연인을 보고 있다.
소 년 : 어, 여긴 영화관이잖아?
사람5 : 역시 영화는 야해야 제맛이야.
사람6 : 어휴, 응큼하긴. 어머나! (눈을 가린다. 그러나 손가락 사이로 다 본다.)
사람5 : 영자야. (어깨에 손을 올린다.) 크리스마스를 같이 보낼 수 있어서 얼마나 좋은지 몰라.
사람6 : 나도.
사람5 : 어, 벌써 끝났네. 야, 우리 가서 한바탕 흔들면서 젊음을 한번 발산해 보자.
사람6 : 좋아, 가자.
사람5,6 일어나서 무대 옆쪽으로 가서 춤을 춘다. 이어 사람5.6이 정지, 소년이 나온다.
소 년 : 저 사람들에게는 크리스마스가 데이트하면서 야한 영화 보는 날인가보지?
무대 다시 어두워진다. 소년은 다른 쪽으로 이동한다. 무대 다시 밝아지면 사람8이 사람7의 바지를 붙잡고 사정하고 있다.
소 년 : 여긴 연구단지 사거리네.
사람7 : 아, 글씨, 없어요오오.
사람8 : 제발 부탁입니다. 불쌍한 이 사람을 좀 도와 주세요. 콜록,콜록,콜록.
사람7 : 아, 글씨, 안돼요오오.
사람8 : (갑자기 연극에서 나와서) 야, 이거 해도해도 좀 너무 하는거 아니야? 아무리 연극이지만 이건 좀 심하다.
사람7 : (갑자기 당황하면서) 어, 이건 대본에 없는건데…
사람8 : 대본에는 당연히 없지. 이건 내가 그냥 하는건데. 관객으로부터 주목 좀 한번 받아보려고. 사실, 내 대사가 별로 없잖아?
사람7 : (황당한 표정으로) 야, 그러면 어떻게해!
해 설 : 야, 뭣들 하는거야. 어서 원위치해!
사람8, 투덜거리며 제자리로 돌아온다. 다시 연극이 진행된다.
사람7 : 어어, 어거 참. 오늘 구리수마수 파티에 입고 갈 옷인데 다 구겨졌어어. 재수에 옴붙었네.
사람8 : 여보세요, 제발…
소년, 등장하자 배우들은 정지동작.
소 년 : 저 할아버지의 크리스마스는 왜 저렇게 비참해야만 할까? 아! 저기 불우이웃을 돕는 사람들이 오네.(퇴장)
사람1,2,3 등장. 이들은 손에 라면 상자를 들고 있다.
사람1 : 야, 저기가 정제 재활원인가봐.
사람1 : 야, 그런데 크리스마스라고 해서 우리가 여길 꼭 가야돼냐?
사람3 : 누가 아니래. 나도 사실 별로 가고 싶지 않은데 그냥 가는거야. 이거 끝나고 애프터가 기가 막히다고 누가 그러던데.
사람2 : 그래?
사람8 : 이 불쌍한 사람을 좀 도와주세요.
사람1 : (사람4를 발견하곤) 야, 저기 저 사람 좀 봐. 우리 이거 좀 주고 갈까?
사람3 : 야, 너 돌았냐? 이거 가지고 가서 사진 찍어야지. 우리 대덕제삼교회에서 왔다갔다는 증표가 되지.
사람1 : 하긴 그래.
사람2 : 야, 야, 저런 사람 앞에 오래 있으면 괜히 크리스마스 기분 잡치기 딱 알맞다. 어서 가자.
사람1,3 : 그래, 가자.
사람4 : (이번에는 재활원 원장으로 등장) 어서 오세요, 대덕제삼교회 성도 여러분. 저희 재활원에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람1,2 : 자자- 우리, 우선 사진부터 찍고요.(사람4를 잡아 끌어 환하게 웃으며 악수하는 포즈를 취한다.)
사람3 : (재빨리 사진을 찍고나서) 자, 우린 이제 가 봐야지.
사람4 : 아니, 벌써 가시려고요?
사람3 : 예, 다음 스케줄이 있어서요. 그럼…
사람1,2,3, 재빨리 퇴장. 사람4는 허탈한 듯 이들을 바라본다. 이어 사람들 모두 동작 정지되고, 소년 등장한다.
소 년 : 야, 참 너무한다. 너무해. 저럴걸 뭐하러 재활원엘 가나?
무대, 어두워 진다. 무대 다시 밝아지면 소년은 누워있다가 일어난다.
소 년 : 내가 성냥을 팔다가 잠시 잠이 들었네. 참 이상한 꿈이었어. 에에, 크리스마스인데, 오늘은 그만 팔고 집에 들어가서 특선방화나 봐야지.
무대, 어두어지고 해설자 등장.

설 : 여러분, 어떻게 보셨습니까? 크리스마스란 과연 무엇을 하는 날일까? 데이트하고 즐기는 날? 아니면 고아원 가서 사진찍는
날? 제가 얼핏 듣기엔 누군가의 생일이라고 들었는데, 왜 사람들은 그 주인공은 쪽 빼놓고 자기들끼리만 어울리는 걸까요? 듣자하니
여기 대덕제일교회에서도 크리스마스여서 무언가를 한다고 하는데, 여러분은 크리스마스의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 아시나요?
암전.

하계봉사를 다녀와서

1994년 7월

너의 영혼 통해 큰 영광 받으실…
– 하계 봉사를 다녀 와서

권 오 승 형제

“때로는 너의 앞에 어려움과 아픔 있지만
담대하게 주를 바라보는 너의 영혼
너의 영혼 우리 볼 때
얼마나 아름다운지
너의 영혼 통해
큰 영광 받으실
하나님을 찬양, 오 할렐루야!”

축복송은 언제 들어도 언제 불러도 가슴 뭉클한 감동이 있다. 맨 끝의 「너의 영혼 통해 큰 영광 받으실 하나님을 찬양」은 특히 그러하다.

지난 7월 30일 부터 8월 1일 까지 하계 봉사를 다녀왔다. 준비 기간도 짧았고, 계획도 완전하지 못했을 뿐더러 경험도 없었던 터라 걱정, 불안감만 잔뜩 안고 우리는 7월 30일 아침, 송덕 교회로 향했다.

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속에서 송덕 교회에 도착해서 목사님의 환영을 받으며 교회로 들어갔다. 점심을 먹고, 여름 성경 학교를
시작하는 것 까지는 잘 되었다. 그 다음이 문제였다. 4시부터 시작되는 중․고등부 성경공부 시간에 한 사람도 나오지 않은
것이다. 그 때 문득 떠오르는 생각. “아, 준비가 부족한 것이 이런 것에서 나타나는가 보다.” 그런데, 내가 절망적으로 느끼는
것과는 달리 중․고등부 선생님을 맡은 형제들은 희망을 버리지 않는 것 같았다. 그 선생님들의 믿음 때문이었을까? 저녁 때 영화
상영 시간에는 6 명의 중․고등부 학생이 나왔다. 정말 얼마나 기뻤는지! 그 다음날, 그리고 마지막 날인 그 다음날에도 계속
나와서 마지막 날엔 11 명의 학생들이 나왔다. 꼭 사람 수가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중․고등부
선생님들은 더욱 바쁘게 움직이고, 그런 모습을 보면서 박 모군은 한 쪽에서 울면서 기도하고… 정말 아름다운 모습들이었다.


는 주일학교 5․6학년 반을 고운이와 함께 맡았는데 그 아이들과 이야기 하면서 느낀 건 그 아이들이 사랑에 많이 굶주려 있다는
것이었다. 5․6학년 아이들 모두 자기 생일을 알고 있지 못했다. 나는 어릴 때 내 생일날 받을 선물 목록을 아버지 어머니께
드리고 손꼽아 내 생일을 기다리곤 했는데… 그래서 복음을 100% 받아들이지 않는 아이들의 모습이 더욱 안타깝게 느껴졌다.
이 아이들이 예수님의 사랑을 듬뿍 받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세상 그 어느곳에서도 받을 수 없는 큰 사랑을 이 아이들이
깨달을 수 있다면…

그곳에서 있는 동안 가장 불편한 것 가운데 하나는 물이 귀하다는 것이었다. 설걷이할 물조차
부족한 실정이어서 양치질, 세수만 겨우 할 수 있었고,(그나마 몇명은 그것도 못했지만) 머리를 감는 것 등은 생각도 할 수
없었다. 형제들이야 그냥 참을만 하다고 해도 자매들은 참 힘들었을 꺼다. 그런데도 얼굴을 찡그리거나 불평을 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유치부, 유년부 선생님들은 꼭 자기 아이들을 돌보는 것 같이 (아직 시집, 장가도 안 간 사람들이!) 사랑을
가지고 아이들의 투정을 받아 주었고 유년부, 초등부 선생님들도 모두 아이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전해주는 데 열심이었다. 또
중․고등부 선생님들도, staff들도 모두 밝은 표정으로 아이들을 섬겼다. 교사끼리도 서로 위로해 주고 격려해 주는 모습도 많이
볼 수 있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에 빛진 자가 아니면 이런 일들이 가능했을까! 역시 우리 하나님은 참 멋진
분이다.

마을 사람들은 복음에 대해 크게 배타적이지 않았으나 쉽게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마을 사람들이 움직이지 않는
모습을 보며, 저녁 기도 시간에 우리 전도사님, 송덕 교회 목사님, 우리 교사들, staff들 모두가 눈물을 흘리기도 하며 아픈
마음으로 기도했지만 결국 어른들 중에 교회에 나온 사람은 맨 마지막 날 마을 잔치에 나온 1 사람 뿐이었다. 매우 실망스러웠지만
어느 분인가가 기도하시던 것이 생각이 났다. “하나님께서 이 송덕 마을을 이미 하나님의 장중에 두신 것을 믿습니다.” 그렇다.
우리는 겉으로 나타나는 결과가 어떻든 우리는 승리자이다! 우리가 하는 작은 일들로 인해 마을 사람들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움직였다면, 언젠가 그들 마음 속에서 복음의 싹이 나고 자라서 커다란 나무가 되겠지…

마지막 날, 마을 잔치
시간에 교사들이 모두 나와 찬양하는 시간이 있었다. “예수 믿으세요.”, “하늘나라 놀라운 곳”, “축복송” 이렇게 세 곡을
했는 데 특히, 맨 마지막 축복송을 부를 땐 눈물을 참느라 참 힘들었다. 다른 선생님들도 그런 것 같았다. 이 아이들이 언젠간
예수님을 만나게 되길, 그리고 이 아이들을 통해 우리 아버지께서 큰 영광을 받으시게 되길 기원했다. 3일간 머리를 못 감아서
머리에서 윤기(?)가 흐르는 박 모 선생님, 잠이 부족해서 약 먹은 병아리 같은 눈을 한 김 모 선생님, 우리 모두는 정말 큰
소리로 그들을, 그 마을을, 그 교회를 축복해 주고 싶었다.
“너의 영혼 통해 큰 영광 받으실 하나님을 찬양, 오 할렐루야!”

PS
1> 처음에 불안한 마음으로 출발했는데 다녀와 보니 구석구석 우리가 준비하지 못한 부분을 하나님께서 채워주셨음을 느낀다.
우리 하나님은 역시… 기도로 후원해주시고 마지막 날 오셔서 힘이 되어 주신 장년 어른들, 정말 감사합니다.
PS 2> 우리가 주고 온 것 보다는 우리가 얻어온 것이 훨씬 더 많은 것 같다. 우리 하나님은 어쩌면 그렇게 멋진 분이실까? 내년엔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갈 수 있었으면…
PS 3> 하나님 저희같은 사람들하고 일하시느라 참 힘드셨죠? 감사합니다. 우리 아버지! (원이형의 말)

직장인-to-be

1994. 4.
직장인-TO-BE
대덕제일교회 청년부
권 오 승

1. 나의 실패작 : 직장 생활

이제 나도 `직장 생활’이라는 것을 시작한 지 벌써 14개월이 넘었다. 대학원 석사 과정은 사실 반은 학생, 반은 직장인 쯤 되니까 그런 의미에서 산술적으로 계산하면 2년 정도의 직장 생활을 한 것이 된다.
사실 난 나의 환경이 변화할 때마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충분한 준비가 없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 생활을 시작할 때도 그랬고, 대학원에 입학할 땐 더더욱 그랬다. 그래서 나의 새 생활은 실수와 실패 투성이였고, 아직도 수많은 실수와 실패로부터 벗어나지 못해 허덕이고 있는 것들도 있다. 이제 14개월+2년의 직장 생활+대학원 생활을 되돌아 보면, 준비가 부족함으로 인해, 그리고 나의 미성숙으로 인해 내가 겪었던 수 많은 실수들이, 내가 좀 더 잘하지 못했던 그리고 더 잘 하고 있지 못하는 모습들이 안타깝게 느껴진다.(물론, 한편으로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좋은 훈련 코스였다는 생각이 들지만…)
우리 교회의 청년부형제, 자매들은 이미 직장 생활을 시작했건 아니건 간에 가슴속에 그리스도라는 엄청난 power를 소유한 사람들로서 멋있는 직장생활(대학원 생활을 포함해서)을 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음은 내가 christian의 직장 생활에 대해 생각한 것을정리한 것이다. 난필이나마 다른 이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2. 직장 생활

2-1. 직장은 `전도의 밭’이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하루 중 직장에서 보내는 시간은 다른 어떤 시간보다도 많다. 우리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시간을 직장에서 보내도록 사회에서 요구받을 것이다. 따라서 직장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이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사람들이고, 그들과 이야기하는 시간이 가장 많을 것이다. 하루 세 번 식사 가운데 두 번은 직장에서 직장 사람들과 하게 되고, 어떤 때는 같이 밤을 새거나 같이 잠을 자기도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왜 이러한 기회를 주시는 것일까? 예수님의 지상 명령인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하신 말씀과 연관시켜 보면 그 이유는 자명해 진다. 내가 있는 이 직장이 바로 내 선교의 장인 것이다. 참 잘 하기 어렵고, 선뜻 내키지 않는 때가 많지만,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이것은 우리가 이미 그 중요성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문제는 `행함’이다.

2-2. 직장은 하나님의 공의를 생활 속에서 나타내는 곳이다.

“이끈다는 것은 단지 고백한다는 것이 아니라 산다는 것입니다. 어린이들은 그들이 싸워서는 안된다는 것을 배우기 위해 주일학교에 가야 합니다. 왜요? 그 아이들의 아빠와 엄마가 집에서 툭하면 싸우기 때문입니다. 아빠가 직장에서 쓰던 볼펜을 마음 대로 집에 가지고 와서 쓰기 때문에, 아이들은 주일학교에 가서 도둑질은 절대로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배워야만 합니다….”
후안 까를로스 오르띠즈 목사님의 “주님과 동행하십니까” 라는 제목의 책에서 따 온 글이다.
나는 처음 직장에 들어와서 매우 놀란 사실이 있다. 우리 부에 약 40명 가량의 연구원이 있는데 christian이 2-3명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우리나라 인구의 1/4 가량이 christian이라던데 그 많은 christian들은 다 어디에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한두 달의 생활을 하면서 좀 더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 하면서 나는 `어, 이 사람도 교회에 다니쟎아?’, `어, 이 사람도?’ 하는 상황들에 맞닿게 되었다. 어쩌면 그렇게 티 안나게 신앙 생활을 하는지… 정말 놀라울 정도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티 나는 그리스도인으로 살기란 정말 쉽지 않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가 내게 무척 심각하게드러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는다. 나에겐 아직 내 모습을 보고 배울 자녀가 없지만, 만일 있다면 그 아이는 정직이나 공의에 대해 특별 과외를 시켜야 할지도 모를 정도로 내 생활 속에서 드러나야만 하는 하나님의 공의는 무기력하기 짝이 없다.
나는 교회의 일을 한다는 핑계로 엄청난 분량의 찬양 악보를 과(科) 복사실에서 대량으로 복사를 하기도 했고(누가 볼까 봐 밤에 몰래), 내 개인적인 목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연구 계정에서 값나가는 여러 물건들을 구입하기도 했다.
되지도 않은 실험을 마치 된 것처럼 연구 보고서를 쓰기도 했고, 엉터리 연구 proposal을 몇 시간내에 뚝딱 만들어 내기도 했다. 왜냐하면 남들도 다 하는 일이니까. 그러나 나는 남들이 다 믿지 않는 예수님을 믿고 있는데…
얼마 일을 하지 않고서 많이 일한 것 처럼 꾸며 보려던 나의 욕심과 상사에게 주께 하듯 순종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같이 생각해 볼 때, 또 다들 하는 일이니까 하면서 쉽게 가짜 영수증을 만들던 내 모습과 정직하라고 내 양심을 때리는 성령님의 음성을 같이 떠 올려 볼 때, 학점을 잘 받기 위해 슬그머니 남의 보고서를 베껴 내던 내 모습과 정직이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기 위해 온갖 수난과 고통을 당했던 신앙의 선배들의 이야기를 같이 생각해 볼 때, 내 모습은 초라해지기 이를 데 없다.
직장 생활에서 실종되어 버린 하나님의 공의, 적절한 합리화를 통해 이제는 잘못조차도 정당화 시켜 버리는 모습… 이러한 모습들을 보시며 하나님은 내게 아모스 5장을 다시 한번 상기시킨다.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 지어다.’

2-3. Christian은 열심히 일해야 한다.

내가 지난 1년 여 간 직장 생활을 하면서 거듭 거듭 느끼고 깨닫게 되는 건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스울 만큼 당연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이야기 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정말 그렇게 열심히 일하고 있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내가 얼마만큼 열심히 일해야 하는가 하는 것에 대해 사실 난 무척 혼란스러웠다.
내가 찾은 일하는 원리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일하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천지와 인간을 창조하신 후에 인간에게 땅을 정복하고 다스릴 것을 명하셨다. 다시 말하면 일을 하라고 명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6일간 열심히 `일하시고’ 하루 쉬신 것을 생각해 보자. 우리의 창조주께서도 열심히 일하셨다. 그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우리 인간이 열심히 일해야 하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 아닐까? 바울 사도는 일하기 싫은 사람은 먹지도 말라고 강경한 어조로 일할 것을 명하였다.
둘째, 열심히 일하는 것이 미덕인 우리 사회에서 열심히 일하는 모습은 역시 아름다운 모습이다.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여 준 사람들이 우대받고 존중받는 사회이다. 그들의 발언에는 그만큼 무게가 실리게 되고 사람들이 경청하게 된다. 심지어는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은 인간성도 좋다고까지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배경에서 생각해 보면 우리가 가진 복음, 이 메시지가 설득력 있게 전달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 함께 주위 사람들의 눈에 비쳐져야 한다. 열심히 일하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전도의 작은 출발이다.
셋째, 앞에서도 언급되었지만 열심히 일하는 것은 삶에 그만큼 충실함을 의미한다. `땡땡이’ 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열심히 일하는 것은 나 자신과 사회에 대해 정직한 생활을 하는 것이다.
넷째, 직장은 자기 성숙의 장이다. 분명 열심히 일을 하다 보면 많은 문제들에 부딪히게 된다. 시간은 없는데 할 일은 많고, 성경 공부 모임이 오늘 있는데 내일까지 결과는 내야하고, 가만히 있으면 별 문제가 되지 않을 일도 열심히 일을 하다 보면 많은 사람들과 부딪혀서 기분도 상하게 되고… 어쩌면 그러는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의 성품을 아름답게 훈련시켜 나가시는 것이 아닐까 싶다. `장성한 그리스도의 분량’에 이르는 것을 목표로 삼고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직장은 정말 훌륭한 자기 성숙의 장이 된다. 골방에 홀로 쳐 박혀 있으면 부딪힘도, 아픔도 성숙도 없다.
분명 직장 속에서의 일은 `세속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 안에서 하나님과 동행하고 하나님으로부터 공급 받는 다이나믹한 관계가 있는 오히려 `거룩한’ 것이다.

3. 우리, 직장을 준비하자.

앞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나는 직장에 대한 사전 지식도, 준비도 없이 직장 생활에 뛰어든 탓에 `거의 속수무책으로 당한 일들’이 상당히 많다. 변명 같지만, 나의 아버지는 소위 자유업으로 분류되는 일에 종사하고 계시기 때문에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들로 부터 직장인이 된다는 것에 대해 조언이나 충고를 거의 듣지 못했다. 따라서 직장 생활을 시작하기 전에 약간의 기도를 하기는 했지만 추상적이고 형식적인 수준에 머물렀고, 무엇을 어떻게 준비하고 기도해야 하는지도 잘 몰랐다. 사람들이 보통 숲에서 나와야 숲이 보인다고 들 말한다. 나 역시 학생 신분을 떠나 직장인이 되고 보니 나의 학생 시절이 제대로 보이는 것 같다.
학생 시절에 대해 내가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학생 시절이 우리 christian들에게는 가장 좋은 훈련의 기회라는 것이다. 아침 QT 모임, 소그룹 성경 공부 모임, 찬양 모임, 수련회, MT, 각종 봉사 활동 등 이 모두가 학생 때를 지나고 나면 훈련을 받기가 매우 어려운 모임들이다. 직장에서는 훈련이라기 보다는 훈련 받은 것을 써먹어야 하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 교회에서는 많은 형제, 자매들과 만나서 서로의 생각을 나누고, 어른들께 조언을 구하며 성장할 좋은 환경들이 갖추어져 있다고 생각된다. 비록 서로가 부족하고 서로가 미완성이지만 서로의 생각이 나뉘고 전달되고, 같이 기도할 때 두 세 사람이 있을 때 그 가운데 계신 주님의 인도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직장 생활이 먼 장래의 꿈이 아니라 내가 곧 뛰어들게 될 가까운 현실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기도할 필요가 있다. 사실, 주위에서 곧 자신에게 `사실’로 다가오게 될 직장 생활에 대해 심각하게 기도하고 준비하는 사람을 나는 전혀 보지 못했다. 자신이 하루 24시간 가운데 짧게는 9시간, 길게는 17시간 이상을 보내게 될 직장 생활인데도 말이다. 물론 자신이 어느 직장으로 가는 것이 좋은지를 하나님께 물어 보는 경우는 자주 있다. 그러나 그 직장에서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를 기도하고 준비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는 말이다. 분명히 하나님께서 나에게 직장 생활을 통하여 이루고자 하시는 것이 있을 것이므로 하나님의 뜻을 묻고 그 뜻대로 행하는 훈련을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바르게 살고자 노력하는 christian에게 직장 생활은 각종 어려움으로 가득 차 있는 곳이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움을 그냥 견뎌 내어야만 하는 것으로만 인식하기 보다는 비뚤어지고 어그러진 직장 생활 속에서 기독교적 대안을 제시하고, 실천함으로써 모범을 보이는 자세가 절실히 요구되는 현실인 것 같다. 우리가 성경을 진리로 믿는다면 그 성경 말씀은 교회 예배
시간에만 진리인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의 가장 작은 부분에까지도 적용할 수 있는 구체적 진리이어야 한다. 무엇이 진리인지를 바르게 인식하지 못하고 그저 하루 하루를 보내는 `평범한’ 직장인들에게 충격적일 만큼 분명한, christian만이 지닐 수 있는 vision을 보여 주는 것이 정말 필요한 때이다. 전투 준비를 하는 마음으로, 진리를 소유한 사람으로서 그 진리를 바탕으로 세상을 인식하고 그 진리로 부터 벗어난 상한 이 세상을 향해 외칠 수 있도록…
우리, 직장을 준비하자!!

※ 한 마디 덧붙이자면, 이 글은 제가 1994년 4월, 한국전자통신 연구소에 근무할 때 쓴 글입니다.

평형

1994. 3.
평형 (Equilibrium)대덕제일교회 청년부
권 오 승

0. 창조주 하나님
하나님은 분명 창조주이시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작품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땅, 하늘, 물, 공기, 동식물 등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것들만을 창조하신 것은 아니다. 와 같은 물리 법칙을 세우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Avogadro’s number를 6.02×1023으로 정하신 분도 하나님 이시다.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시며 천지 창조의 첫 tape를 끊으시던 그때, 하나님께서는 혼돈의 우주에 광자(photon)을 만드셨고, 양자역학적으로만 설명이 되는 빛의 이중성을 빛에게 부여하셨으며 빛의 속도를 2.997924590×108 m/sec으로 정의하셨다. 하늘의 해와 달, 별들을 말씀으로 창조하시던 그 순간, 하나님께서는 만유인력의 법칙을 이 우주에 설정시키셨고, 이땅에 동식물을 종류대로 지으신 그 순간부터 유전인자인 DNA의 구조는 이중 나선 구조로 결정되었다.
평형이란 어떠한 system의 가장 안정된 상태를 말한다. 모든 자연계는 이 평형을 향하여 흘러가고 있다. 여러 자연 과학의 법칙이 그렇듯이 평형 상태를 맨 처음 정의하시고 사용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다.

1. 완벽한 평형 – 하나님의 창조
창세기 1장에서 계속 반복되어 나오는 말 가운데 하나는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는 분명 하나님이 보시기에 정말 좋은 것이었다. 다시말하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계는 걸작품이었다. 완벽한 법칙들이 우주를 지탱하도록 세심하게 설계되었다. 예를 들어, 만일 중력 상수(G)의 값이 6.67×10-11 m3/s2․kg에서 조금만 벗어났어도 태양과 지구와의 거리가 달라져 지구가 지금보다 훨씬 더 덥거나 추웠을 것이고 우리 사람들을 비록한 여러 피조물들이 살 수 없었을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최초로 설정시켜 놓으신 평형 상태이다. 하나님의 평형 상태는 완전한 평형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최초 하나님의 세심한 손길에 의해 창조된 인간은 완전한 평형의 일부로서 그 평형 가운데서 평안하고 즐겁고 아름다왔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은 그러한 평형을 깨뜨렸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기뻐하는’ 평형 상태로 부터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뛰쳐나온 인간은 이제 하나님과의 교제도 할 수 없는 존재로 전락해 버렸다. 자연이 인간에게 베풀어 주고 인간이 자연을 다스리는 평형 상태가 아닌, 인간은 자연을 정복하여 고갈하고 자연은 인간에게 천재 지변등을 통해 보복하는 비평형 상태가 되어 버렸다. 질병과 아픔과 고난이 있고, 전쟁과 시기와 질투가 있게 되었다.

2. 활성화 에너지(Activation Energy) – 예수 그리스도
A라는 물질과 B라는 물질이 화학 반응을 일으켜서 AB라는 화합물을 만드는 것이 자연스러운(spontaneous) 반응이라면 물질 A와 B는 화합물 AB를 만들어 존재하는 것이 평형 상태이다. 그러나 그러한 평형 상태가 반드시 이루어 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두 물질이 화합하여 새로운 물질을 만드는 데에는 활성화 에너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활성화 에너지는 어떤 반응이 일어나게 하는데 필요한 에너지 이다.
가령 예를 들어 유리를 보자. 유리는 비정질(amorphous)라고 불리우는 비평형 상태의 물질이다. 모든 물질은 고유하게 존재하는 특별한 결정 구조가 있는데 우리가 보는 유리는 SiO2와 그밖에 약간의 불순물들이 그러한 결정 구조를 이루지 못하고 엉겨붙어 있는 형태이다. 그러나 유리를 가만히 놓아둔다고 해서 쉽게 결정화(crystallization)하여 고유한 결정 구조를 가지게 되지 않는다. 그렇게 하는 데에는 충분한 열을 가함으로써 분자 구조가 재배치되는데 필요한 활성화 에너지를 공급해 주어야 한다.
죄로 인한 피조 세계의 비평형 상태는 피조 세계 스스로 극복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유리가 스스로 활성화 에너지를 제공하여 결정화 할 수 없듯이 인간을 포함한 피조 세계 스스로는 최초 하나님께서 만드셨던 아름다운 그 피조 세계로의 회복을 기대할 수 없었다. 다만 하나님으로부터 제공되는 활성화 에너지가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실을 잘 아시고 계셨다. 그래서 하나님 자신이 활성화 에너지의 제공원이 되기로 결정하셨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혼돈과 갈등으로 가득한 피조 세계에 내려 오셔서 피조 세계의 회복을 직접 이루어 가시기 시작하였다.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공해 주시는 활성화 에너지 – 그것만이 전 피조 세계가 회복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다.
전 세계의 회복은 이미 선포되었고 시작되었다. 건초 더미에 불이 붙어 타기 시작한 것처럼 이러한 전면적 회복은 대세이다.

3. 우리 안에서의 평형
다행히도 예수 그리스도로부터의 활성화 에너지를 받은 우리들 안에서는 평형상(平衡相 : equilibrium phase)으로의 회복 반응이 이미 시작되었다. 아직은 불완전하지만 그리고 때때로 그 반응의 불꽃이 거의 매우 미약하여 느낄 수 없지만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의 평형이 어떤 ‘맛’이라는 것을 부분적으로 느껴본 사람들이다. 엄청난 평안, 기쁨, 안정감… 이러한 것들은 하나님 안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그리고 전 피조 세계가 바로 그러한 평형 상태를 기준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때때로 하나님 이외의 것으로부터도 이 비슷한 것을 얻을 수는 있지만 그것은 평형상의 흉내를 낸 것일 뿐이다. 마치 유리가 평형 결정상의 흉내를 내고 있는것 처럼.  이제 평형 상태로의 회복이 시작되었다. 우리의 회복은 예정된 완성이다. 회복은 대세이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 주위에는 스스로가 결정화된 평형 상태에 있다고 믿고 있는 비평형상들이 있다. 이제 그들에게 활성화 에너지를
전해줄 매개체들이 필요하다. 하나님 안에서의 평형 상태만이 인간에게 진정한 삶의 의미를 제공해줄 수 있음을 그들에게 전해야 한다. 우리, 몸을 태워 예수 그리스도라는 활성화 에너지의 불길을 전하는 일들을 하자. 우리 주위에서부터 시작하자. 우리가 경험한 평형 상태를, 그 엄청난 평안을 소개하자. 예수 그리스도의 활성화 에너지, 회개라는 격렬한 반응, 그리고 구원및 회복의 완전한 평형. – 그래, 바로 이거다!

나는 개미?

1994. 3.
나는 개미?

권 오 승

코끼리 한 마리가 누워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 옆을
지나던 개미 무리가 갑자기 자기들의 앞 길에 커다란 회색 장애물이 생긴 것을 보았다. 그들 가운데 한 놈이 ‘이게 그 말로만
듣던 코끼리구나.’ 하고 직감하였다. 그 개미는 아마도 개미들 가운데서는 꽤나 똑똑한 놈이었나 보다. 개미들은 호기심에 코끼리가
어떻게 생긴 짐승인지 알아보기로 하였다. 그래서 가만히 살펴보니 코끼리의 콧구멍이 보였다. 개미들이 보기에는 크고 긴 두 개의
터널이었다. 개미들은 ‘코끼리는 크고 긴 두 개의 터널’로 규정지었다.
다음날 그 개미들 가운데 한 마리가 또다시 커다란
회색 장애물을 만났다. 이번에 본 회색 장애물은 그냥 길다란 끈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코끼리의 꼬리였다. 개미는 몹시
혼란스러웠다. 자기가 알고 있는 코끼리의 모습이 두가지라니… 세상에는 여러 다른 모양의 코끼리가 있는 걸까? 아니면
코끼리라는 짐승은 개미와는 달리 변신을 자유자재로 할 줄 아는 것일까? 그 똑똑한 개미의 머리로도 도저히 설명이 되지 않았다.
그 다음날 또 다른 개미는 또 다른 회색 장애물을 보았는데, 그것은 몹시 넓고 두꺼운 양탄자 같은 것이었다. 코끼리의 귀였다.

미들은 마을로 돌아와서 회의를 하였다. 도대체 코끼리의 정체는 무엇일까? 터널일까, 노끈일까, 아니면 양탄자일까? 여러 그룹으로
갈려 열띤 토론을 했지만 결론은 얻을 수 없었다. 그 개미들 가운데 몇은 자기들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며 코끼리란 전설 속에서만 존재하는 한낱 우상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들은 일종의 환상을 본 것이라고 했다. 다른 개미들은
코끼리에는 원래 여러 모양이 있는데 그들은 서로 다른 종류의 코끼리를 본 것이라고 했다. 또 일부는 그런 복잡한 문제는 생각도
하기 싫다고 하며 자리를 떴다. 그러나 일부는 자신들의 이성으로는 그 정체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지만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알지 못하는 ‘그 무엇’이라고 했다.

개미가 코끼리의 모습을 제대로 관찰할 수 있는 방법에는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코끼리가 개미만큼 작아지던가 개미가 코끼리만큼 커져서 둘의 크기가 비슷한 정도가 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개미가 코끼리의
dimension이 무시될만큼 먼 거리만큼 떨어져서 코끼리를 한 눈에 관찰하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보려면 역시
두가지의 방법이 있다. 하나는 하나님이 사람만큼 작아지던가 사람이 하나님만큼 커져서 둘의 크기가 비슷한 정도가 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이 하나님의 dimension이 무시될만큼 먼 거리만큼 떨어져서 코끼리를 한 눈에 관찰하는 것이다. 그러나,
무한하신 하나님이라면… 유한(有限)한 사람이 무한(無限)한 하나님을 제대로 관찰할 수 있을까?

다행히도 우리에겐
그 무한하신 하나님께서 주신 스스로를 보여주신 성경 말씀이 있다. 그래서 그 말씀 속에서 우리가 완벽하게 우리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을 볼 수 있다. 그래서 만일 성경 말씀을 사실로 믿는다면, 더 이상 우리는 하나님을 찾기 위해 쓸데없는,
그리고 실현 불가능한 노력들을 할 필요가 없다. 우리 주위에 누군가가 개미는 아닌가? 그런 사람들에게 ‘요플레를 떠먹이는
심정으로’ 성경 말씀이 사실임을 전해야 하지 않을까? (요플레를 떠먹이는 심정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는 사람은 (042)
861-1490 권오승에게 연락 바랍니다. Non-christian 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