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안적 희망 (3)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는 질문을 예전에 하면,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따를만한 가치를 가진 사람들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자신도 그 가치를 가지고 살아가도록 그 사람이 자신에게 동기부여를 하기 때문에 존경한다고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반면,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는 질문을 요즘 하면,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부러워할만한 성취를 한 사람들을 이야기한다.
돈을 많이 벌거나, 많은 영향력을 가지고 있거나, 많은 권력이나, 대단한 업적을 이룬 사람들이다.

예전에는 자신이 길을 찾기위해 훌륭한 가치를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자 했다면,
요즘은 자신이 길을 찾기 위해서 성공한 사업가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한다.

이것은 현대인들이 추구하는 것, 혹은 바라는 것이 가치가 아니라 성취라는 것을 보여준다.

가치는 누구든지 소유할 수 있는 것이지만,
성취는 누구나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가치를 추구하는 사회는 그 사회 내에 희망을 가질 여유가 더 많이 있다.,
그렇지만 성취를 추구하는 사회는 그 사회 내에서 희망의 자리가 지극히 좁다.

대안적 희망 (2)

내가 대단히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산다고 이야기할수는 없지만,
적어도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게서 발견하는 절망은 심각한 수준이다.

젊은이들에게 있어 희망이란 어떤 특권층만이 누릴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중년들에게 있어 희망이란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사치이다.
노년층에게 있어 희망이란 예전에 있었으나 지금은 잃어버린 옛 이야기이다.

빈익빈 부익부, 각박한 현대 사회, 인간 관계의 깨어짐… 이런 이야기들을 하고 듣는 것은 전혀 낮설지 않다.
우리가 맞닥드린 절망의 상황을 어떤 이는 신자유주의의 탓으로 돌리기도 하고,
기술 발전에 따른 자동화에 돌리기도 하고,
정의롭지 못한 정치에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하고,
아니면 개인이 충분히 부지런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이중 무엇 하나가 절망의 모든 원인이라고 이야기할수도 없을테고,
이중 무엇 하나도 절망의 원인이 되지 않는다고 이야기할수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기에 더 답답한 것은,
기독교가 이 속에서 희망을 이야기하는 법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주일 설교에서, 함께 하는 소그룹 성경공부에서, 아니면 다른 어떤 교회 프로그램 등에서,
이런 세상 속에서의 희망이 무엇이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어본 것이 언제였던가.

내가 나중에 더 풀어낼 수 있으리라 보지만,
나는 절망의 상황 속에서 기독교가 무기력한 이유는 대안적 희망을 이야기할 동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본다.
기독교인들중 어떤 사람들이 목에 핏대를 세우고 악악거리며 외쳐대는, 사람들의 공감을 얻지 못하는, 억지 희망이 아니라…
절망의 사람들이 다시 고개를 들게하는 희망에 대한 이야기가.. 기독교 써클에서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 내게는 더 큰 절망이다.

대안적 희망 (1)

대안적 희망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해보려고 한다.
내가 여기에서 하는 희망 이야기는
THE HOPE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A HOPE에 대한 이야기이다.

나는 당연히 희망에 대하여 뭔가 끝판왕의 이야기를 풀어낼만한 능력이 되는 사람이 아니다. ㅠㅠ

그러나, 희망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희망에 대한 갈망은 어느때보다도 깊은데,
희망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찾아보기 어렵다.

희망을 간간히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게 어째서 희망이야 싶은 것들도 많다.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희망들도, 자주, 이거 희망이야., 그러니까 받아들이고 믿어… 이렇게 종교적 억압으로 비쳐지기도 한다.

그래서 희망에 대한 이야기를 더 해보고 싶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대안적 희망의 가능성이 있는 많은 것들 하나가 될까 말까 한 것이다.
이것이 유일한 대안적 희망이다.. 뭐 그렇게 거창하고 대단하게 이야기하는건 절대 아니다.

평신도 (18)

도대체 나의 부르심은 무엇일까 그런 생각을 많이 한다.
나는 세상에서 엄청나게 영향력이 있는 사람도 아니고,
성경이나 신학적 지식을 가지고 좋은 가르침을 주는 사람도 아니고,
세상의 약자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삶은 헌신해서 사는 사람도 아니다.

나는 그냥 2021년에 실리콘밸리에서 살고 있는 엔지니어다.

내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이 모습은 그냥 크게 의미가 없는 것일까.
도대체 지금 이 시점에 내가 있는 이 자리에서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의미는 무엇일까.

이것이 내가 하는 고민의 요체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렇게 10년도 훨씬 넘게 거의 매일 이 블로그에 글을 써오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것을 위해서 나름대로 책도 읽고, 말씀 묵상도 하고, 사람들과 나누기도 하고, 다른 의견들을 듣기도 한다. 글도 쓰고, 강의도 하고, 토론을 하거나 설득을 할때도 있다.

그런데,
적어도 내가 생각하는 것은…
지금은 다른 어떤때보다 평신도가 살아가는 것이 중요한 때라는 것이다.

예전에 기독교가 assume하던 전제들이 세상에서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이때,
세상의 발전속도가 너무 빨라 기독교가 이제는 한참 뒤쳐져 있는 이때,
하나님 나라의 컨텐츠 자체가 세상을 해석해낼 기능을 상실해버렸다고 느껴지는 이때,

평신가 살아가는 삶은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적용하는 장이 아니라,
하나님나라 복음의 컨텐츠를 만들어내는 장이 된다는 것이다.

나름대로 생각도 많고, 쓸 이야기도 많은데,
거의 지난 한달동안 이렇게 쓴 것이 많지 않은 독자들에게 잘 전달할만큼 잘 정리된것 같지는 한다.

그리고 아마도 내가 살아가면서 이 내용들도 더 계속 update이 되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일단 이 이야기는 이 정도에서 정리를 해보려 한다.

평신도 (17)

교회는 여러 삶의 정황속에 있는 평신도들이 세상과 소통한 결과들이 모이는 곳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1. 교회에서 복음이 세상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하는 것에 대해 함께 나누고 배운다.
  2. 그 내용을 가지고 각자 자신의 삶의 영역에서 세상과 소통한다.
    이것은 일방적으로 내가 옳다고 주장을 하면서 외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겸손하게 세상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야 한다.
  3. 2번에서 세상과 소통하면서 얻어진 결과들을 개인적으로 반추해보고, 그것들을 다시 교회로 가지고 온다.
  4. 함께 모여진 다방면의 삶의 영역에서의 경험과 깨달음을 바탕으로 교회가 세상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하는 내용 자체를 update 한다.
  5. 다시 1번으로 돌아가서 그 내용을 서로 나누고 배운다. 그 후 1~5번을 계속해서 반복한다.

나는 이런 과정을 아주 많이 많이 많이 많이 많이 많이 많이 많이 거쳐야만 비로소 지금의 기독교의 무지를 조금이라고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위의 1번에서 이야기하는 내용이 “하나님나라 복음의 내용” 이라고 한다면 교회 공동체는 반복해서 그 “하나님나라 복음의 내용, 컨텐츠”를 계속 만들어나가는 작업을 해야한다.

그런 의미에서 평신도의 삶의 정황은 하나님나라 복음을 적용하는 장이 아니다.
하나님나라 복음의 컨텐츠를 만들어 내는 장인 것이다.

평신도 (16)

아주 창의적이면서도 자유로운 생각을 가진 예술가에게 기독교가 이야기하는 예술에대해서 어떤 인상을 가지고 있느냐고 물으면 뭐라고 할까?

하루 12시간씩 일을 하면서 프로젝트를 성공시키지 못하면 도태되고 낙오되는 치열함 속에서 살고 있는 월스트릿에 있는 사람에게, 기독교가 이야기하는 경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할까?

3주앞으로 다가온 product launch에 맞추기 위해서 밤 늦게까지 컨퍼런스 콜을 해가며 아시아에 있는 공장과 이야기를 하고 아침 7시부터 다시 그 아시아쪽의 데이터를 분석해가며 전략을 짜야하는 엔지니어에게, 기독교가 innovation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할까?

도시의 빈곤문제와 범죄에 대해 연구하면서 제한된 resource를 어떻게 분배해야하는가 하는 것을 치열하게 연구하는 공무원에게, 기독교가 빈곤과 범죄에 대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이냐고 묻는다면 그 사람은 어떻게 대답할까?

아주 난감하지 않은가?

기독교는 그냥 무식하다.ㅠㅠ

기독교가 이렇게 무식한 이유는, 소통할줄 모르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문제들에대해 기독교가 종교적 입장에서 해답을 줄 필요는 당연히 없다.
그렇지만 세상의 문제들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한채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이야기하는 교회의 이야기에 누가 귀를 기울이겠는가?

그러니 기독교는 다음과 같은 사람들에게만 그나마 믿을만한 종교가 되는 것이다.
삶이 치열하지 않아서 그런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
절박함 속에서 초월성이라는 곳으로 피신하지 않으면 위안받을 곳이 전혀 없는 사람들,
삶과 기독교를 철저히 분리해서 사는 사람들,
기독교를 자신의 유익을 취하는 도구로 이용하는 사람들…

기독교는 사람들의 삶과 세상을 해석해내는 기능을 잃어버린 것이다.

평신도 (15)

르네상스맨 (한국어로는 르네상스형 인간이라고 하나?)이라는 표현이 있다.
르네상스 시대에 한 사람이 다양한 분야의 일을 다 할 수 있었던, 다재다능한 사람을 이야기한다.

그런 르네상스맨이 지금도 가능할까.
아주 불가능하다고 단정지어서 이야기할수는 없겠지만, 예전보다 훨씬 더 힘들것 같다.
왜냐하면 각각의 분야가 너무 급격히 발전을 해서 그 내용을 이해하는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그래도 공학을 오래공부했으니,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나 정도쯤 되면 물리학에 대해 뭔가 좀 잘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수도 있겠으나…
가끔 책이나 다른 글들을 읽으며 깜짝깜짝 놀랄때가 있다.
아… 내가 예전에 학교에서 배웠던 물리학의 지식으로부터 이제는 꽤 많이 더 발전된 것들이 있구나…

교회가 세상과 소통하기 위해는 그래서 다양한 분야에서 다양한 소통 채널이 필요하다.
조금 더 뛰어난 사람이라면 자신의 전문분야로부터 조금 더 확장해서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넓은 분야에서 여러 지식과 경험들을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기도 하겠지만,
일반적으로 아주 뛰어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한 사람이 커버할수 있는 영역이 그렇게 넓지 않다.

잘 알지 못한 채 뭔가 아는척 하면서 이야기하다보면…
똥볼을 차는 경우가 꽤 많다. ㅠㅠ
(이런거 요즘 정말 많이 보게되지 않은가!)

가령 예를 들어서…
나는 그냥 엔지니어다. 엔지니어중에서도 요즘 많이 뜨는 소프트웨어 엔지니어가 아니고, 어떤 물건들을 만들어내는 엔지니어다.
그런데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들과 대화를 해보면, 그 사람들이 생각하는 아주 독특한 방식이 있다. 그리고 그 안에서만 형성되는 논리도 있고, 문제도 있는데… 그것이 나 같은 사람에게는 별로 잘 적용되지 않는 것들이 많이 있다.

또, 내가 하는 일이 medical device를 만드는 일이다보니, 의료계에 종사하는 분들과 접촉할 기회들이 조금 있는데, 이 분들은 또 사고방식이 나 같은 엔지니어와는 아주 다르다!

그러니, 예를 들면 예술가, 음악가, 육체노동자, 유치원 교사, 역사학자 등과 같이 내가 살면서 많이 접하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과는 얼마나 사고방식이 다르겠는가.

문제는 이 세상은 이 모든 사람들이 함께 만들어 가고 있고,
세상은 (정치, 기업, 경제, 문화) 이 많은 사람들이 함께 만들어 가는 복잡한 것을 그래도 꾸역꾸역 해석해가며, 분석해가며, 이용해가며, 그 속에서 살아남고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복잡성을 제대로 이해하고 해석하지 못하면 그 사람들은 도태되니까. 생존을 위해서라면 죽어라고 힘들지만 그걸 해야하는 거다.

그런데 교회는 그러지 못한다.. ㅠㅠ

평신도 (14)

나는 바로 여기에서 지금 평신도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지금 교회는, 기독교는, 세상을 해석해낼만한 힘 자체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세상을 해석해내는 힘은, 기독교가 그것을 해석해낼만한 충분한 컨텐츠 자체를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금 기독교인들이 세상을 살면서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 매우 크고 심각한 이유는 도대체 그 ‘말씀’이라는게 무엇인지, ‘말씀대로’라는게 무슨 뜻인지 하는 것 자체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만 하더라도…
지금 2021년 이곳 실리콘 밸리에서 엔지니어로서 살면서,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교회에서 가르쳐주지 않는다.
그건 내가 다니는 교회가 형편없는 교회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냥 지금 기독교가 그걸 가르쳐줄 컨텐츠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이전의 전제들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세상,
그나마도 매우 급속히 바뀌고 있어서 그냥 그것만을 따라가는 것도 벅차게 느껴지는 세상…
그 속에서 교회는, 복음은, 기독교는, 그냥 멍하니 무기력하게 손을 놓고 있는 것 같이 느껴질때가 많다.

(쓰고 싶은 이야기가 정말 무지무지하게 많은데, 하루에 10분남짓씩 시간을 내어서 쪽글로 이렇게 시리즈로 글을 쓰다보니 뭔가 흐름도 자연스럽지도 않고, 논리적 정합성도 떨어지는 듯한 느낌이다. 그럼에도 할 수 있는한 이 이야기를 계속 조금 더 써보려고 한다. 다음주에 계속)

평신도 (13)

그것은 우리가 세상의 흐름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어야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아마도 레슬리 뉴비긴이 했던 말로 기억하는데…
세상과 소통한다는 것은,
세상이 복음을 비판/평가하도록 내버려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복음이 세상을 비판/평가하는 것이 주된 것이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복음으로 세상에서 돌아가는 것을 해석해낼 수 있어야 하고,
그래서 그 문제가 무엇인지를 진단하기 평가하고 비판하는 것이 가능해져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
기독교는 세상을 해석해내는 힘을 사실상 다 잃어버렸다. ㅠㅠ

가만히 생각해보라.
사회적으로 중요한 담론이되는 이슈들…
사회적 불평등, 성적 불균형, 정치적 대립, 환경문제, 인종문제, 정의(justice)의 문제, 혁신(innovation), 현대 사회의 불안의 문제, 하다못해 지금 세계가 모두 함께 겪고 있는 팬데믹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기독교가 이런 것들에 대해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기독교계에서 무슨 이야기가 전혀 나오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대부분 기독교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은, 기독교적 관점에서 세상을 해석하고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기독교인이 이미 가지고 있는 사회적/정치적 입장에 따라 기독교의 옷을 입고 비판을 하는 것이다.

그러니 정치적으로 보수인 기독교인들은 보수가 기독교의 가치라고 외치고,
정치적으로 진보인 기독교인들은 진보가 기독교의 가치라고 외치는데…
그 속에서 기독교는 없고 그냥 정치 사회적 외침만이 있을 뿐이다.

이렇게 된 이유는 기독교가 세상을 해석할 힘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지금은 다시 그 힘을 찾아야 한다. 세상과 소통해가며 다시 그 힘을 찾아야한다.

평신도 (12)

세상과 소통하면서 하나님나라의 컨텐츠를 만들어간다는 모델이 특히 더 중요해지는 때가 있다.
그것은 세상의 흐름이 매우 빠르게 바뀌고 있는데 교회가 그것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을때이다.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 기독교는 지난 2000년동안 꽤 성공적으로 그런 작업을 해 왔다.
사실 고대, 중세, 근대, 현대를 거치면서 사회와 소통하며 그 컨텐츠 자체를 잘 update해온 종교는 기독교 이외에는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렇게 세상의 사상과 흐름이 바뀌는데에는 물론 기독교가 영향을 끼친 부분도 당연히 없지 않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는 지난 2000년동안 계속해서 세상에 영향을 주기도 하고, 그 세상의 모습을 보면서 수용,비판등을 거듭해왔던 것이다. 왜 그런데 지금은 우리가 그것을 멈추어야 하는가?

오히려 지금이야말로 그런 작업을 더더욱 적극적으로 해야할때가 아닌가 한다.

왜냐하면, 내가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세상은 생존을 위해서 미친듯이 여러고민을 하여 그 흐름을 바꾸어가고 있고,
그래서 세상이 아주 빠른 속도록 바뀌어가고 있는데…
교회가 그 흐름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이야말로, 세상을 바라보고, 그 세상과 소통하면서,
지금 이 시점에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가,
지금 이 시점에 교회가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를 아주 깊게 고민하여 그 내용(contents)를 만들어 나가야할때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