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습

요즈음은,
내가 예수님을 믿고 나서 ‘배웠던’ 기초 개념들을 복습하곤 한다.

그런데,
얼마나 내가 그 중요한 것들을 잊고 살고 있는지 깜짝깜짝 놀란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것,
내 인생을 하나님께서 조절하셔야 내가 안전하다는 것,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것…

내 삶이 나를 지치게 만들때,
내가 돌아가 휴식할 유일한 ‘그곳’은…
결국은 하나님의 사랑임을 자꾸 깨닫는다.

그것 없이… 세상을 뒤집겠노라고,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헌신 하겠노라고,
다른 사람을 섬기겠노라고… 방방 뛰는 것이 얼마나 공허한지…

1990년에 나를 만나주신 예수님의 바로 그 모습을 꼼꼼하게…
‘복습’ 할 기회를 더 많이 가질 수 있으면…

주일예배가 주는 의미

주일 예배는,
내가 생각하기엔… celebration 이어야 한다.
주일(일요일)을 안식일(토요일)을 대신하여 기념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예수님의 부활을 기뻐하고 기억하기 위해서가 아니던가.
초대교회 성도들은 주일에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라고 인사하면서 서로 감격했다고…
주일의 예배는 바로 그런 것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주일 예배는 ‘안식일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는 의미로서 드리는 것이 아니다.
주일을 성수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시는 것과 같은 그런 개념이 아닌, 정말 승리의 주님을… 비록 현재의 삶에서 모든 것이 승리하는 것 같이 보이지 않더라도… 기뻐하고 축하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또,
주일 예배는 설교를 듣고 교육을 받기 위한 것도 아니다.
물론, 설교를 통해 도전을 받고… 양육을 받고… 공급을 받는 것이 중요하긴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설교를 통해서 별로 공급을 받지 못해도, 정말 celebration이 되었다면 주일 예배를 제대로 드린 것이 아닐까 싶다.

조금 교만한(?) 이야기일지 모르나…
사실… 예수님을 제대로 믿고, 매일 말씀 묵상하고, 성경공부 하고, 개인 성경연구 하고… 하는 일들을 한 10년 정도 하고나면…
왠만한 설교를 가지고는 ‘공급’을 얻지 못한다!
너무나도 자주… 아침의 QT 말씀이 설교 말씀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주일 예배가 정말 celebration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전제조건이 있어야 할까. 내 생각에는 두가지 정도가 있는 것 같다.

1. 예수님의 부활이, 하나님의 통치가, 그리스도인의 삶이… 정말 ‘celebration’ 할 만한 것이어야 한다. 그것의 핵심적인 내용은 물론… 구원 얻는 백성으로서의 기쁨이다!

저 아무것도 없이… 한시간 내내… 서로 인사하고 부둥켜 안으면서… 우리 주님께서… 죽음의 모든 사슬을 끊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더이상 내게는 죽음이 두려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삶은 정말 다릅니다! 라는 고백이 함께
이루어 져야 제대로 주일예배가 드려지는 것일 것이다.

2. 함께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 간에…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지체의식이 있어야 한다.
서로 자신의 것을 내어놓고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고…
정말 다른 사람의 영적,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 재정적 상태에 대해 깊은 관심과 배려를 가지고 섬기며…
내가 아끼는 바로 그 사람을 위하여 금식을 하면서 기도할 수 있는 사랑이 있어야만 비로소 진정한 의미에서의 예배가 될 수 있다.
만일 이런 것이 정말 있다면… 설교가 그날 ‘꽝’ 나도… 찬양을 부르는 도중에 마이크 사고가 나도, 함께 하나님 앞에 나와서 개개인이 아닌 ‘우리’로서 celebration 하는 감격과 기쁨이 있을 것이다.
나보다 훨씬 노래를 못하는 사람이 찬양을 해도, 나보다 훨씬 설교를 못하는 사람이 설교를 해도,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스타일의 기도를 해도… 정말 그 예배가 하나님께 올려지고 내게 기쁨이 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 주일 예배를 점검해본다.

나는… 정말…
입만 살아 있는… 말만 살아있는 그런 부류의 사람임에 분명하다.

2004 올림픽 (김수영)

저녁 8 시부터 중계된 2004 올림픽 개막식을
난 청소하면서 대충대충 보고, 민우는 아주 열심히 봤다.

각 나라 입장 할 때 한국이랑 미국이랑 나올 거니까 잘 보라고 하니까 민우는 고개를 빼고 기다린다.

미국이 먼저 등장했다.
집에 있던 작은 성조기까지 들고 “예! 예! 미국이다. (영어로)” 하면서 환호성이다.
한국이 등장했다.
한국팀이 민우가 알고 있던 “Korean flag” 태극기를 안 들고 있으니 의아한 모양이다. 왜 Korean flag를 안들고 있냐고 따진다.

음… 한국은 지금 South Korea 하고 North Korea 로 나눠져 있는데,
민우 할머니 할아버지,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사시는 곳이 South Korea 야.
그런데 두 Koreas 가 서로 다른 flags 를 가지고 있어.
South Korea 는 민우가 알고 있는 Korean flag 를 가지고 있고,
North Korea 는 또 다른 flag 를 가지고 있지.
올림픽에서 두 Koreas 가 같이 나오면서 South Korea flag 를 들면
North 가 기분나쁘겠지, 그리고…

여기까지 말하니까 민우가 말을 끊는다.
“아, 그래서 새론 flag 를 들었구나!”

그래서 난 또 뒤적뒤적 인터넷을 뒤진다. 다행히 한국팀이 등장한 후 몇 분도 안지났는데 사진이 떴다. 그 중 “새론 flag” 가 잘 나온 사진을 찾아서 민우에게 보여준다.

봐봐.. 그래서 Korean map 이 그려진 flag 를 들었지?
이 쪽이 North 고 이 쪽이 South 고.
빨간 옷 입은 사람들이 South 사람들이고 파란 옷 입은 사람들이 North 사람들이야.

민우는 다 이해한 표정이다.

하지만 민우가 앞으로 자신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미국과 한국..
또 북한과 남한을 어떻게 이해해 나갈지…

지금 민우는 그런 이해보다는 불꽃놀이가 더 재밌나 보다.
새벽 1 시가 다 된 지금, “왜 opening ceremony 더 안해?” 하다가 겨우 잠들었다. 내일이 토요일이니까 늦잠자는 거 봐준다. ㅎㅎㅎ

(김수영의 글)

어떤 사람을 존경하고 따른다는 것

내가 믿음안에서 여태껏 어떤 기간을 통해 깊이 존경하고 따랐던 사람들 (나와 개인적인 관계가 있고 없고에 관계없이)을 쓰자면 매우 많다.

Steve Chang 전도사 (지금은 목사)
이준행 전도사 (지금은 목사)
김인수 교수
Francis Schaeffer
Jams I Packer
대천덕 신부
John Stott
김교신 선생
홍정길 목사
Martin Lloyd-Jones

또.. 누가 있나…
그런데…

가령 Francis Shaeffer의 예를 들자면,
나는 어떤 사람의 신앙이 건강한지 그렇지 않은지 하는 여부를 Francis Shaeffer의 입장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는 것에 따라 판단할 정도였다.
거의 2-3년 동안 그 사람의 책을 탐독하면서 그 사람이 제공해주는 frame으로 성경을 읽고, 그 사람의 말을 철저히 따랐다.

김교신의 경우에도,
참 철저하고도 열심히 김교신의 생각과 신앙에 동의했었다.
책을 읽으며, 인터넷에서 자료를 찾으며… 때로는 신학 논문을 찾아 읽으면서 까지 김교신에 심취했었다.

한때는,
대천덕 신부님 계열(?)의 대전의 작은 기도모임에 가면서…
성령운동에 참 깊은 관심을 가졌었다.
그리고 대천덕 신부님이 이야기하는 ‘토지는 하나님의 것’이라는 말에 완전히 푹 빠져서 그 관련된 책들을 모아 읽고, 그쪽 계열 뉴스레터(?)도 받고… (통일논단 이라고 하는…) 하여간 그랬다.

한국에서 남서울 교회에 1년간 다니면서는,
홍정길 목사님의 설교에 홀딱 빠졌었다.
정말 단어 하나하나에 빠져서 어떻게 하면 저런 설교가 나올 수 있을까 감탄했었다.

한동안은 마틴 로이드 존스의 성령론, 부흥 등에 심취했었다.

흥에 관련된 역사적 자료들을 나름대로 찾아다니며… 책을 읽으며… 로이드 존스는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에 깊은
관심을 가졌었다. 이 시대에 진정 필요한 유일한 사상이 있다면 로이드 존스가 가졌던 standard였다고 생각했었다.

지금은?

내게 그런 사람이나 사상이나 조류는… 없다.

어찌보면 안타까운 일일 수도 있으나…
가만 생각해 보면 참 다행이다.

어떤 한 사람의 설교에,
어떤 한 사람의 주장에,
어떤 한 사람의 역사에 대한 평가에,
어떤 한 사람의 삶에,

내가 믿고있는 하나님에 대한 평가를 모두 의지하는 것이 얼마나 나를 위험한 사람으로 만들었었나 하는 것을,
지난 내 경험을 통해서 알기 때문이다.

어떤 한 사람의 삶과 사상과 가치와 주장에 어느 기간 깊이 심취해서 연구하고 유익을 취하는 것은 매우 좋을 일이지만,
그 사람만을 내 삶과 신앙과 인생의 스승으로 모시고 사는 것 만큼 내 안의 하나님을 제한시키는 일도 없는 것이 아닐까 싶다.

돌이켜 보면,
내가 스스로 fan이되어 열광했던 믿음의 선배들의 그 주장들 가운데 매우 많은 부분은…
그저 그 사람의 생각이거나,
어떤 특정 상황 속에서만 적용되었어야 할 사상이거나,
매우 제한된 하나님에 대한 이해이거나,
심지어는 오류/잘못 임을 점차로 배워나가게 되기 때문이다.
(물론 그 사람에 심취해 있을 당시에는 주변에서 내게 무엇이라고 말하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