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의 쇠사슬 자랑

노예가 노예로서의 삶에 너무 익숙해지면
놀랍게도 자신의 다리를 묶여있는 쇠사슬을 서로 자랑하기 시작한다.
어느 쪽의 쇠사슬이 빛나는가, 더 무거운가 등.

그리고 쇠사슬에 묶여있지 않은 자유인을 비웃기까지 한다.
하지만 노예들을 묶고 있는 것은 사실 한 줄에 쇠사슬에 불과하다.
그리고 노예는 어디까지나 노예에 지나지 않는다.

과거의 노예는, 자유인이 힘에 의하여 정복당해 어쩔 수 없이 노예가 되어버렸다.
그들은 일부 특혜를 받거나 한 자를 제외하면
노예가 되더라도 결코 그 정신의 자유까지도 양도하지는 않았다.
그 혈통을 자랑하고 선조들이 구축한 문명의 위대함을 잊지 않은 채, 빈틈만 생기면 도망쳤다.
혹은 반란을 일으키거나, 노동으로 단련된 강인한 육체로 살찐 주인을 희생의 제물로 삼았다.

그러나 현대의 노예는, 스스로 노예의 옷을 입고 목에 굴욕의 끈을 휘감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놀랍게도, 현대의 노예는 스스로가 노예라는 자각이 없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노예인 것을 스스로의 유일한 자랑거리로 삼기까지 한다.

By Amiri Baraka, formerly known as Leroi Jones

Silicon Valley에 있다는 사실이 부끄러워질때

가끔은, Silicone Valley에 있다는 것은,
창기(prostitute)가 되는 것과 같다고 느껴질때가 있다.

더 멋진 옷과 화려한 화장을 하고 더 높은 값을 쳐주는 사람에게 몸을 파는 것이나…
더 많은 교육과 경력을 쌓아 더 많은 돈을 주는 회사에 모든 것을 던져 헌신하는 것이나…

이런 TED talk은 정말 내가 그런 창기와 같은 사람은 아닌가 여러가지로 생각하게 한다.

‘Generosity’에 대한 아땅님의 글

지난 금요일, 아땅님이 댓글을 써서 올리셨는데, 함께 생각해보기에 좋은 내용인 것 같아 허락을 받아 올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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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 코스타 주강사님들 마르바 던 교수님과 김병년 목사님 말씀 기대합니다. (참석은 못하지만 음성파일로라도 들을 수 있기에^^)

근데 두분 글들을 읽으며 들었던 질문들이 있었습니다. 개인에게 책임이 돌려지는 ‘약함의 문제’였습니다

마르바던이나 김병년 같으신 분들은 거의 틀림없이 한 개인에게 귀책되지 않는 사유로 약함의 자리에 서게 됩니다. 개인적 육신의 질병, 그리고 가족의 아픔으로 찾아오고 감당해야 했던 어려움과 아픔의 일들이었죠. 이런 것들은 제럴드 싯쳐의 경우도 마찬가지고 하우워워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분들도 비슷한 상황을 걸어갔고 그것을 다양한 측면에서 나눠주셨던 것 같습니다.

근데, 제가 가진 질문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개인으로 책임을 돌리는 문제들에 대해서, 그것에 귀인한 약함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말씀하신 게으름과 개인의 잘못된 선택이 가장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이런 사유는 니가 책임져야 하는 consequence예요.’ 라고 말해야 하는 것인가요?

————

제가 가지는 첫번째 포인트는, 흔히 우리가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개인의 consequence로서의) 약함이 진짜 개인의 책임으로만 간주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보통의 상식으로는 머리 나쁜 사람에게 “넌 머리가 나쁘니까 니가 그 결과를, 그 짐을 평생 지고 가야 한다, 머리 나쁘니까 가난하게 살아라.” 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또 “ 넌 머리가 좋으니까 잘먹고 잘사는 것이 당연해.”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머리가 좋고 나쁜것이 바꿀수 없는 선천적 요인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한 개인이 바꿀수 없는 생래적 요소에 대해서는 그 책임과 결과를 개인에게 물을 수 없다라는 것이 어느 정도 합의된 생각이 아닐까 싶습니다.

게으름에 대해서는 어떤가 생각해봅니다. 

게으른 사람에게는 “넌 게으르니까 니가 그 결과를, 그 짐을 지고 평생 살아야 한다. 게으르니까 가난하게 살아라” 음…대놓고 말하지는 않지만 은연중에 동의합니다. 그걸 부드럽게 말하면 ‘각자가 뿌린 씨앗의 consequence니까…’ 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면 게으름 혹은 삶의 태도는 은연중에 선천적인 것이 아니고, 그리고 게으름과 부지런함은 언제든 노력하면 바뀔 수 있다는 전제를 깔고 있기에 그러한 이야기가 가능한 것 같습니다. 

진짜 그럴까? 이런 한 개인의 삶에 대한 태도도 개인에게 책임을 지울 수 있는 어떤 것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그럴수 밖에 없는 상황 가운데 산 사람이라면, 그런 상황가운데 처한 사람이라면, 어떠한 삶의 목표나 동기도 주어지지 않는 가운데 있던 사람이라면, 그래서 그 사람의 삶에 대한 태도가 그렇게 굳어진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개인에게 “니가 책임져야해, 넌 게으르니까” 라고 말하는 것이 정당한가? 

그가 그런 게으름 때문에 약함 가운데있게 된 것이라면, 

우리가 말하는 “약함의 신학”에서는 ‘미안하지만 당신을 위한 자리는 없습니다. 당신의 게으름 때문이거든요.’ 라고 말해야 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들이 막 머리속을 돌아다닙니다. 

(물론 저도 모.든. 못남과 어그러짐을 사회나 시스템의 탓으로 돌리려는 시도들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

개인적으로는 모든면에서 뛰어나고 탁월한 분들이 격는 ‘약함’을 들으며, 

혹시 이 약함의 고백이 사실은 (저자들이나 강사님들의 의도와는 전.혀. 관계없이) 또다른 강함을 추구하는(보여주는) 메세지로 들리지 않을까

 (e.g. 이런 분들 스토리는 TV에 나와도 정말 많은 분들에게 감동을 줄 것 같거든요. 

##(개인이 가진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불굴의 의지와 인내와 노력과 인격으로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아무개… 그분 참 훌륭하다.)

또 지금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청년들과는 어디서 접점을 찾을까 고민하다가 대답도 없는 곳에서 해메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그렇게 탁월하지 못하고 제가 격는 많은 약함들이 저에게 귀인하거든요…-.-; )

Stanley Hauerwas의 요즘 무신론자(atheist)들에 대한 언급

최근, Christopher Hitchens나 Richard Dawkins와 같은 무신론자를 보면, 얼마나 Secularist(세속주의자)들이 멍청해졌는지(dumb) 알 수 있다.

그것은 일정부분 우리(그리스도인)들에게 책임이 있다. 흥미로운(interesting) 무신론자를 만들어낼 만큼 우리(그리스도인들, 기독교)가 흥미롭지 못한 것이다.

근심하라

지난 주말에는,
내게 기도를 가르쳐준 한 선배와 참 갚진 이메일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아래는, 그 형이 내게 보내준 이메일의 일부이다.
참 멋진…
(형, 허락없이 공개해서 죄송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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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찬양예배 본문이 고후 7:9-11 말씀이었고, 제목이 ‘근심하라?’였다.

 
너와 나, 그리고 우리 주위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을 하고 있는 것이길 기도할
뿐이다.
나와 너를 포함한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지금 이 시대에 godly sorrow로 가득차는 것이
전염병처럼 번지길 소망한다. 우울증 환자로 분류해도 되었을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처럼….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함께 기도했던 그 일의 시작일텐데….특별히 이 시대에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 그런 godly sorrow로 간절함과 변증과 분함과 두려움과 사모함과 열심과 벌에 대해 뼛속까지 느끼고 경험하여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룰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네 말대로 함께 사막의 모래바람을 막는 어찌 보면 무모하고 불가능한 일을 각자의 환경과 배경에서 해
보자. 혼자는 절대 할 수 없는 일이지만 함께라면 그리고 성령께서 인정하시고 인도하신다면 능치 못할 일이 없겠지. 우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면서 말이다.
 
 7:9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7: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7:11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내가 받은 이메일 하나

내가 한국에서 직장생활을 할때 알았던 한 분이 이메일을 보내오셨다.

연구원으로 일하시다가… 지금은 메노나이트 목사님이 되셔서 버지니아 작은 마을에 살고 계신데…

이 이메일을 읽으며 참 많은 것을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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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가운 오승 형제

 

나는 지금도 오승형제를 생각하면 ETRI 3연구동을 생각합니다.

그립고 순수했던 날들이 그곳에 있었지요.

젊디젊은 청춘들이 꿈을 가득 가지고 있었던…그런데 지금 그 꿈들이 모두 영글어서 열매를 맺고 그 열매들이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이런저런 모습으로 귀하게 쓰여지고 있음을 봅니다.

기억나나요? 내가 오승형제 거의 졸업 무렵에 한번 전화했던거…MIT 졸업을 얼마 남기고 있던 때였을겁니다. 그리고는 종적을 감추었지요. 연락도 안되고…그 후에 한번 더 그 전화로 전화를 했더니 전화가 끊겼던가 했습니다.

그랬더니 서부로 개척하러 갔던 것을… ^^

그 때 내가 메노나이트 신학교를 다닌다고 말했지요. 이곳 버지니아 해리슨버그라고 하는 곳에서 2001년에 와서 2006년에
교회를 시작했지요. OO자매에게 아직은 교회 교회 홈페이지를 만드는 중이니 홈페이지는 알려주지 말라고 했는데 건축중이어서 아직은
이런저런 치울 것도 많고 올려야 되는 글은 많은데 다 올리지 못하고…그럽니다.

테크니션으로 일을 합니다.

이곳은 미국 시골입니다. 그동안 선교헌금에 의지하여 사역을 했는데 아무래도 내가 일을 해야 할 것 같아서 작년 10월부터
일을 합니다. 셀폰을 개발하고 인터넷 트랜시버 특허를 가지고 있는 공학박사가 시골의 작은 회사에서 전자장비를 고치고 있는
테크니션의 삶을 세상의 눈으로보면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온 것이지만 영적인 눈으로 보면 감히 주님께서 천국
보좌 버리시고 지상의 낮고 낮은 곳에 내려오신 것을 묵상하면서 감사합니다.

지금 다시 일하러 가야 하는 새벽입니다.

다녀와서 다시 연락할께요.

전화 언제든지 한번 주세요. 아니면 내가 하던지…

OOO  형제 드림

이원론과 세속화

2-3년전부터,
내가 내 주변의 사람들에게… (특히 내 또래의 사람들에게)

우리가 80년대 90년대에 배웠던 ‘기독교적 세계관’이 out of context인 가장 핵심적인 이유로…
이제 우리가 싸워야 하는 주된 싸움이 이원론이 아니라 세속화이기 때문으로 이야기해 왔었다.

그래서 제자도(Discipleship)을 이야기할때, 이원론 극복에 대한 강조보다는 Lordship에 대한 강조가 훨씬 더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해왔는데…

최근 김기현 목사님의 글이… 내가 고민했던 것을 잘 정리해주신 것 같아 기뻤다.

여기 클릭

코스타는 참 맛난 찌개

코스타는 참 맛난 찌개다??

그냥, 여러가지 재료 엉성하게 썰어넣어서, 맛이 제대로 나올까 고민하고 있는데, 은혜의 육수 한번 부워주시면, 단번에 맛있는 찌개되어버리는… 그런 느낌이랄까??^^

근데, 하나님의 일을 음식에 비유해도 되나요,,,? ^^

어쨌든, 코스타는 참석만해도, 조장으로 섬겨도, 간사로 엉성함을 나타내도 그래도 하나님의 동행하심을 느끼게 되는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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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함께 섬기는 어떤 동역자게 보내온 이메일이다.

내가… 이렇게 엉성하게 일해도 하나님께서 일하시는거 보면 참 신기하지요?
라고 이메일을 보냈더니  정말 어찌 이렇게 멋진 표현으로 reply를 받았다.

내가 금년에 들은 최고의 설교

지난 주말에는 보스턴에 가서, Grace Chapel의 예배에 참석했다.

나는 설교를 들으면서,
한편 마음을 면도날로 찢어내는 것과 같은 아픔을,
한편 막힌 것을 뻥하게 뚫어내는 것과 같은 시원함을,
한편 답답하게 보이지 않던 것을 드러내는 것과 같은 명쾌함을 경험할 수 있었다.
나는 울었다. 마침 손수건을 가지고 가지 않아 마음껏 울수 없었지만… 정말 울었다.
생각 같아선 그 자리에 앉아 좀 더 울고 싶었다.

http://gc.reelworship.com/gc/audio/GC_111608.mp3

Grace Chapel은, 보스턴 근교의, 백인 중심의 town에 있는 교회이다.
경제적으로 풍요한 사람들이 주로 다니고 있고,
‘목사들의 무덤’이라고 불리는 New England에서 든든하게 건강한 복음주의의 명맥을 지켜내고 있는 교회이다.

그런 context 속에서… 이 설교를 들어보라.

그런 대중들 앞에서 이런 설교를 할 수 있다는 것 자체로서도,
나는 이 교회와 목사님이 존경스럽다.

그리고,
이것은 역시 미국내의 한국인들,
한국의 ‘주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적용되는 이야기인 것으로 생각된다.
바로… 내게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었다!

다음 몇 문장들은 설교에서 따 온 것들이다.

Is the American church willing to just listen to Latin American brothers and sisters?
미국 교회들은, 남미의 형제 자매들의 이야기를 그저 듣기만 할 의사는 없는 건가?

Stop acting as if the salvation is in the hands of Americans.
마치 구원이 미국인들의 손에 있는 것 같이 행동하는 것을 그쳐라.

One of the biggest hindrances is the negative perception of the American Church
(세계선교에 있어서) 최대 장애물 가운데 하나는, 미국 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미지)이다.

Fellow believers around the world see the American Church as shallow, weak, and compromised.
전 세계의 동료 그리스도인들은, 미국 교회가 천박하고, 약하고, 타협한다고 본다.

The American Church is more American than Biblical.
미국 교회는 성경적이라기 보다는 미국적이다.

We have confused the Kingdom of God with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and allowed individualism, materialism and pragmatism to poison the church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미합중국과 혼돈해왔다. 그리고 개인주의, 물질주의 그리고 실용주의를 허용하여 교회가 독에 물들게 했다.

Do we have the courage to speak out to stand out in the face of an ever-more-corrupting culture?
우리에게는 용기가 있나? – 계속해서 더욱더 부패해가는 문화에 맞서서 소리치고 일어설 그런 용기가 있나

Do we have the discipline to cultivate a vibrant authentic spirituality?
우리는 살아있는 진정한 영성을 형성해 갈만한 훈련이 되어있나?

If we can’t capture the attention and  the imaginations of our neighbors across the street with our distinctive attractive life style, how will we ever win the respect our neighbors around the world?
만일 우리가 우리의 다르면서도 매력적인 삶의 방식으로 우리 이웃의 관심과 상상력을 이끌어 내지 못한다면, 어떻게 전 세계 이웃의 존경을 받을 수 있겠는가?

We are Christ-followers first, and then Americans second, and our brothers and sisters around the world want to know that.
우리는 먼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 후에 미국인들이다. 전 세계에 있는 형제 자매들은 그것을 알기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