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KOSTA 이야기 (2008년 글)

1.
내가 KOSTA 라는 것을 처음 들은 것은 91년.
당시 한국의 대덕 연구단지에서 작은 교회에 다니고 있었는데,
대덕 연구단지의 특성상,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분들이 많이 있었다.
그분들로 부터 KOSTA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그 당시, 송인규, 서재석, 방선기 같은 분들이 편집위원이었던 계간지 “그리스도인과 학업” 이라는 잡지도 참 흥미롭게 보았다.

92년엔가…
그 당시 ‘복음과 상황’이라는 잡지에 KOSTA에 대한 기사가 실린 것을 매우 흥미롭게 읽었던 기억이 있다. 오죽해야 그 기사를 몇부 copy해서 몇사람들에는 나누어주기도 했고… 나 자신도 잘 간직했었다.

그런데 내가 이렇게 그 KOSTA를 섬기게 될 줄이야…

2.
95년 8월20일에 난생처음 미국땅을 밟았다.

나는 스스로 ‘학생사역자’라고 자처하고 있었고 (지금 생각하면 참 그렇게 이야기했던 것이 참 부끄러울 정도의 수준이었는데)
미국에 오기 전 한국에서 같은 교회에 다녔던, KOSTA 초기 시작에 연관이 있으셨던 어떤 유학생 출신 선배님이 보스턴에 가면 자신이 섬기던 성경공부인 Gate Bible Study 라는데를 한번 가보고 섬겨봐라, KOSTA에도 가면 좋겠다 는 말씀을 하셨다.

솔직히 나는 KOSTA에는 큰 관심이 없었고, 어쩌어찌하다가 Gate Bible Study도 그 당시에 바로 join하지는 않았다.

미국에서 보낸 첫 일년, 많은 감사한일들이 많았지만, 영적으로는 참 고갈되는 느낌이 있었다.
뭔가 자꾸 내가 진이 빠지는 것과 같은 교회 청년부 섬김, 나의 얄팍한 신앙의 깊이 등등의 이슈가 내게 있었다. 그리고 참 영적으로 외로웠다. 동역자를 잘 찾지 못한채 많이 지쳤다.

그러던중 96년 여름에 처음 참석한 KOSTA 집회는 내게 사막에서의 오아시스와 같은 것이었다.

96년 집회에 참석하기 전, 당시 내가 많은 신앙의 도움을 주던, 내 믿음의 형이자 동역자인 팽동국 형과 함께 미리 집회를
마음으로 준비하면서 금식도 하고.. 기도도 하고… 주제를 미리 묵상하면서 관련된 이야기들도 나누고 그랬다.

일주일간의 집회 내내 거의 한순간도 그치지 않고 울었다.
나의 부족함이 답답해서 울고, 외로움이 서러워서 울고,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해서 울고, 여전히 나와 이 시대를 붙들고 계시는 하나님의 손길에 감격해서 울고, 이렇게 많은 동역자들이 있구나 하는 사실에 흥분해서 울었다. 아예 전체집회 장소에는 큰 세수수건을 가지고 들어가서 그것이 흠뻑 젖도록 울었다.

이것이 내가 KOSTA를 처음 개인적으로 경험한 것이었다.

3.
96년 집회 이후,
내 안에는 정말 ‘불덩어리’가 있는 것 같은… 그런 사람이 되었다.

새벽기도에 나가 기도를 하면서… 한시간씩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하나님께서 이 시대를 회복하시도록 땀을 뻘뻘 흘리면서 기도하였고… 정말 지치지 않았다.
사람들과 함께 기도를 시작하고 말씀 공부를 시작하면서… 내가 속한 공동체에서도 참 아름다운 일들이 많이 일어났다.
도무지 변화될 것 같지 않던 사람들이 변화되었고, 모임에 생명력이 급속히 생겨났다.
불과 15명 남짓 되는 모임이 1년이 조금 넘는 기간동안 70명 수준의 모임으로 커졌고, 사람들이 모임에 참여하는 표정이 달라졌다.

아침에 학생들이 새벽기도를 하러 모이는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나는 새벽기도 밴 운전을 했고, 그 당시 함께 했던 사람들 중에는…
팽동국 교수,
박성호 목사,
이용규 선교사
등등이 있었다.

모임을 섬기면서, 나의 부족함에 답답해서 참 많이 울었다.
그리고 간장종지같이 부족한 내 믿음에… 나이아가라 폭포같이 쏟아지는 은혜에 감당할 수 없어 정말 많이 울었다.

97년에는 몇몇사람들이 바람을 잡아…
내가 섬기던 교회에서만 60명 정도의 사람이 함께 시카고의 집회에 참석했다.

그 후, 섬기던 청년부는 더 생기를 얻었다.

4.
함께 같은 교회에 다니던 분중,
지금은 인하대 교수로 가신 송순욱 집사님이라는 분이 계셨다.

이분은 DC의 지구촌교회 출신이었고, 당시 워싱턴 지구촌교회는, KOSTA 운동을 주관해서 섬기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니던 교회였다.

이분과 연결이 되어서 “Boston 팀”에서 KOSTA VOICE를 맡아서 하면 좋겠다는 이야기가 나왔고, KOSTA newsletter인 KOSTA VOICE를 만드는 일에 1997년부터 참여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에는 집회 중에 발간되는 KOSTA VOICE와, 집회 전후로 발간되던 KOSTA VOICE update 라는 두종류의 newsltter가 있었다.

99년이었던가… 98년 이었던가에는…
그 KOSTA VOICE update 라는 것을 web에서 띄워서 web에서 사람들이 볼 수 있게 하자고 정하고.. html로 딱 한페이지를 만들어서 web에 띄웠었다. 이것이 지금 eKOSTA (http://www.ekosta.org) 의 시작이다.

98년에는 KOSTA에서 처음으로 ‘지역 리더쉽 훈련 program’이라는 것을 시도한다고 했다.
Boston이 첫 대상이었고, 자연스럽게 나는 그 일에 연관이 되었다. (이것이 제 1회 gpKOSTA 이다.)
내가 집에서 가지고 있던 ink-jet printer로, 그당시 전 참석자의 교재를 print하고… 하나씩 바인더로 만들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때 Boston에서 황지성, 강동인, 지금은 한국에 가신 이동헌… 이런 분들과도 인사를 할 기회가 있었다.

98년에는 그 당시 총무간사로 섬기던 황지성 간사님이 내게 전체집회에서 ‘코스탄의 현장’ 간증을 해 줄것을 요청했었다. 나는 깊이 고민하였는데… 지도교수가 허락을 하지 않아서 결국 그해에 집회에 참석하지 못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그때 딱 한번 빠졌다. ^^)
너무 죄송해서… 그때 황간사님에게 직접 이야기했는지… 내가 속으로 생각했는지는 확실치 않은데… “이 한몸 부서지도록 열심히 대신 노가다라도 할께요…” 그랬다… (뭐 사실 그 ‘결심’은 현실화 되었고… ㅋㅋ)

나의 KOSTA 섬김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5.
KOSTA를 섬기면서 나는 정말 말할 수 없는 blessing을 경험했다.

우선,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에 편승해서… 거의 최전선에서 그것을 목격할 수 있는 특권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섬기고 있는 사람들, 특히 훌륭한 선배들을 만나면서 그분들의 통찰과 인격, 신앙과 꿈들을 매울 수 있었다.

함께 잠을 자지 못하고, 씻지도 못하고, 때로는 콩크리트 바닥에서 쪽잠을 자면서 그렇게 섬기는 내 사랑하고 존경하는 우리 전우들, 동료와 후배 간사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만한 blessing을 또 없을 것이다.

내가 사랑하고 아끼는 많은 사람들이 KOSTA를 통해서 하나님을 새롭게 알게되고,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renew하고, 생명의 빛을 얻고, 삶의 방향을 정비하는 일들이 있었다. (사실 이거 하나만으로도… 내가 평생 KOSTA에 그 빚을 다 갚을 수 없을 만큼 나는 KOSTA에 큰 빚을 졌다. 내가 몇년씩, 몇십년씩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던 사람들이 KOSTA를 통해서 새로운 세상을 경험했다.)

이제 내일이면 또 KOSTA 집회를 섬기기 위해 비행기를 탄다.
지난 10년여간 KOSTA를 섬기면서 하나님께서 내게 부어주신 그 은혜를… 내가 어떻게 조금이라도 갚을 수 있을까… 그런 생각으로 KOSTA를 섬기고 집회를 섬기지만… 매년 내게 그 빚은 늘어만 간다.

이제는, 내가 그 빚을 갚을 생각 자체를 포기했다. 그저 하나님께 감사하고… 나 같은 사람도 하나님께서 예쁘게 보아주셔서 이렇게 감당할 수 없는 은혜를 주신 것을 뻔뻔스럽게 누리기로 했다.

노예의 쇠사슬 자랑

노예가 노예로서의 삶에 너무 익숙해지면
놀랍게도 자신의 다리를 묶여있는 쇠사슬을 서로 자랑하기 시작한다.
어느 쪽의 쇠사슬이 빛나는가, 더 무거운가 등.

그리고 쇠사슬에 묶여있지 않은 자유인을 비웃기까지 한다.
하지만 노예들을 묶고 있는 것은 사실 한 줄에 쇠사슬에 불과하다.
그리고 노예는 어디까지나 노예에 지나지 않는다.

과거의 노예는, 자유인이 힘에 의하여 정복당해 어쩔 수 없이 노예가 되어버렸다.
그들은 일부 특혜를 받거나 한 자를 제외하면
노예가 되더라도 결코 그 정신의 자유까지도 양도하지는 않았다.
그 혈통을 자랑하고 선조들이 구축한 문명의 위대함을 잊지 않은 채, 빈틈만 생기면 도망쳤다.
혹은 반란을 일으키거나, 노동으로 단련된 강인한 육체로 살찐 주인을 희생의 제물로 삼았다.

그러나 현대의 노예는, 스스로 노예의 옷을 입고 목에 굴욕의 끈을 휘감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놀랍게도, 현대의 노예는 스스로가 노예라는 자각이 없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노예인 것을 스스로의 유일한 자랑거리로 삼기까지 한다.

By Amiri Baraka, formerly known as Leroi Jones

이상의 시대는 갔다?

사회학자이자 침례교 목사인 Tony Campolo는 University of Pennsylvania 에서 여러해 교수로 섬겼다.
언젠가 들은 그의 설교에서 특별히 학생들의 저항정신이 가득하던 1960년대에 사회학교수였던 것이 무척 exciting 했다고 이야기했다.

강의실에 들어가면 세상이 돌아가고 있는 모습에 불만을 가득 품은 젊은이들이 ‘기성세대’인 Tony Campolo를 향해 분노의 질문들을 쏟아부었다. 그 젊은이들은 비록 매우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은 것이었지만, 자신들이 세상에 나가면 세상을 바꾸어 보리라는 꿈이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Bobby Kennedy, John F Kennedy, Martin Luther King Jr. 등 새로운 사회로의 이상을 이야기했던 사람들이 모두 살해당하는 일들이 일어났고…
그것과 같은 시기에 학생들은 점점 “me-generation”이 되어갔다고 회상했다.
(이 사람들이 취했던 정치적인 입장에 동의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떠나, 이들은 적어도 그 시대에 ‘더 나은 세상’을 향한 꿈을 제시했던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비뚤어진 세상을 향해 분노를 품는 것을 중지한채, American pie에서 어떻게 하면 더 큰 조각을 차지할 수 있을까 하는 것에만 관심을 갖는 세대가 점차로 등장했다는 것이다.

한국도 다르지 않다고 느껴질때가 많다.
그렇게 되면 안되는데… 정말 안되는데…

헌신의 특권

(2009년 5월 21일 글)
작년인가 재작년인가…
KOSTA 간사들이 간사 수양회를 할 장소를 물색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장소를 찾지 못해 걱정을 많이 하고 있었는데…
선배중 한분이, 큰 집을 소유하고 있는 어떤 분께 말씀을 드려서 자신의 집을 간사들 수양회 장소로 제공하도록 arrange 해 주셨다. (정말 어마어마한 저택이었다! 집 이쪽 끝 부터 저쪽 끝 까지 가는데 한참~이 걸리는)

그때 그 선배님은 그 집 주인에게…
“당신의 집에서 KOSTA 간사들이 수양회를 할 수 있도록 기도하십시오.”
라고 말했다고 한다.

참 황당한 접근이다!
아니… 자신의 집을 내어 놓는 희생과 헌신을 그렇게 ‘뻔뻔스럽게’ 요구하다니.

이 선배님은 주변에 돈이 많은 분들의 마음을 움직여 그 돈을 가치있게 사용하도록 하는 일도 아주 멋지게 하신다.
KOSTA를 위해 헌금하도록 설득하면서… 헌금을 하는 것이 얼마나 그분에게 커다란 기쁨인지 하는 것을 말씀하신다.

헌신은 자신의 것을 억지로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더 높은 가치에 자발적이고 기쁘게 하는 것이라는 당연한 원칙을 당당하고 떳떳하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런 선배님과 함께 있다보면…
정말 나의 재물과, 시간과, 열정과, 재능과 땀을 드려 헌신하는 것이 얼마나 큰 특권인지를 자연스럽게 깨닫게 된다.

동기와 열정이 없는 사람 vs. 동기와 열정이 잘못된 사람

동기와 열정이 없는 사람과 동기와 열정이 잘못된 사람…
이 두 부류의 사람중 어떤 부류가 더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할까?

만일 그 사람을 쉽게 쳐낼 수 있는 회사라던가… 사회 조직의 경우에는 잘못된 동기와 열정을 가진 사람의 해악이 더 크지 않을까 싶다. 왜냐하면 그 사람을 잘라낸다 하더라도 그 ‘열정’에 악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므로.

그러나…
그 사람을 포기할 수 없는 공동체라면,
그리고 사랑과 신뢰에 기반을 둔 공동체라면…
동기와 열정이 없는 사람을 보고 있는것이 훨씬 더 힘든 일인 것 같다.

그냥 요즘 내 머리를 채우는 생각중에… 한조각.

내가 다른 누구에게 role model이 될 수 있을까.

내 삶이 다른 어떤 이들에게 “message”가 될 수 있을까.
내 성공과 성취, 승리와 기쁨 뿐 아니라,
내 실패와 좌절, 패배와 슬픔 까지도

점점 나이가 들면서,
이제는 내 삶의 모든 contents가 다른이들에게 “message”가 되는 삶을 살지 않는다면,
내가 말로, 내 얄팍한 passion으로, 섬긴다고 돌아다닌다는 것이 그저 공허한 장난에 지나지 않게 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가정과 직장과 내 개인의 삶이 모두 건강하게 integrate되어 있지 않으면,
더 이상 내 말이 진실하지 않은 것임을 깨닫는다.

내 얄팍한 열정이 오히려 다른이들을 파괴하는 무기가 됨을 깨닫는다.
내 신앙의 피상성을 나도 참을 수가 없다!

성급한 자아비판의 오류

나는 자아비판을 즐긴다.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매우 성숙한, 자기 성찰을 잘 하는 사람으로 보이지만, 사실 내가 자아비판을 즐기는데에는 몇가지 문제가 있음을 본다.

1. 자기 방어이다.
내가 내 스스로를 비판함으로써 다른이가 나를 비판할 여지를 사전에 차단하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다소 치사한 자기방어라고 할 수 있다.

2. 게으름이다.
겸손, 혹은 자기성찰 이라는 건강한 가치를, 깊이 생각해보지 않고 나와 내 주위의 상황에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내 스스로 건강한 가치를 지킨다는 자긍심도 지키게 되고 스스로의 만족감도 느끼면서 부지런히 나와 내 자신을 살피는 귀찮음도 피할 수 있다.

3.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무지이다.
최근 어떤 형과의 대화를 하면서, 내가 그 형에게 내 사역의 열매가 얼마나 거짓이 많은지, 나의 manipulative한 성향 때문에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조작하여 만들어낸 사역의 열매가 많다는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러자 그 형이 내게 이렇게 말했다.
“너는 네 자신을 과대평가하고 있는 것 같다. 하나님께서 그 열매를 그렇게 맺으셨는데… 과연 네 능력으로 심지어는 아주 얄팍한 수준의 사역의 열매라도 맺을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니?”
내 자신에 대한 반성이 지나쳐 하나님의 일하심을 덮어버리는 우를 범한 것이다.

지금 이 글도 그릇된 자아비판은 아닐지…

열등한 사람과 함께 지내기

치열한 경쟁사회 속에서,
나보다 열등한 사람과 함께 지내야 한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그 사람을 위해서 slow-down 하면서 그 사람을 섬기는 것이 합당할까.
그렇지 않으면 나처럼 해봐라… 하면서 열심히 뛰어가는 것이 좋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내가 성취한 유익들을 그 사람과 나누겠다는 마음과 목표로 살아가야 할까.

그러나 그것도 그 사람이 스스로가 열등하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거나,
심한 열등감에 이미 빠져 있거나,
헛된 망상을 가지고 있거나,
막연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다면..?

경쟁구조 속에서 살아남기에 적절하지 않은 사람이,
경쟁구조 속에서 허덕이고 있을때…
그런 사람들과 더불어 가고자 하는 마음을 품는 것이 쉽지 않지만,
더불어 가고자 해도 어떻게 해야할지 하는 것을 찾는 일은 더 어려운것 같다.

그리고,
스스로 엄청난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이 문제를 풀어내지 못하면 세상의 조류에 휩쓸려 버릴 수 밖에 없다는 두려움이 있다.

극심한 경쟁구조는,
가진 사람도 가지지 못한 사람도 모두 망가뜨리는 듯 하다.
경쟁구조 속에서도 건강한 영성으로 살아내는 사람들을 보고 싶다.

@ 물론, 내가 열등한 사람일 경우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하는 고민은… 이것과는 다른… 또 다른 커다란 묵상의 문제이다. 그러나 두가지 고민이 동전의 양면과 같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사람에 대해 포기하지 않기

내가 존경하는 어떤 형의 이야기.

이 형이 1년동안 자신이 살고 있는 지방을 떠나 다른 지방에서 지내야 할 일이 있었다.
이 형은 신문에 나거나 할 정도로 널리 알려진 사람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학문의 세계에서 성실하게 일하고 있고, 그리스도인으로서도 알수 있는 사람에게는 알려진 정도의 사람이다.

이 형이 임시로 있어야하는 그 지방에 있는 어떤 대형교회에 1년동안 나가게 되었다.
그 교회의 담임목사님도, 이 형을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정도는 아는 정도였다.

그런데,
이 형이 1년동안 다닌 이 교회의 담임목사님께서 아주 치우친 번영신학의 message를 반복해서 이야기하였다.

처음 몇번은 그러려니 하면서 지나쳤는데,
나중에는 매우 힘들게 그 message들을 들었다고 한다.

이 형은 그 교회의 젊은 부목사님들과 대화하면서,
우선, 그 젊은 부목사님들이 그 번영신학의 message에 동의하는지 조심스럽게 여부를 물었다.
그리고 그 번영신학의 message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는 다는 것을 알게 되고는, 그 부목사님들에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고 한다.

“만일, 당신이 그 목사님을 정말 사랑한다면… 당신의 job security를 포기하고서라도 그 목사님에게 고언을 해야 합니다. 그 이야기를 그 목사님이 수용하고 수용하지 않고는 둘째 치고라도, 그 고언을 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당신은 후에 그 책임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 후, 이 형은 그 교회의 담임목사님에게 진정으로 사랑어린 충고를 결국은 하였다. 그 목사님을 얼마나 개인적으로 사랑하고 존경하는지, 그 목사님으로부터 얼마나 큰 신앙의 도움을 학생때 받았는지 하는 것을 이야기하면서 그러나 목사님의 현재 message가 치우쳐져 있다고. 목사님에 대한 사랑의 마음은 전혀 변하지 않았으나 목사님의 message를 매우 안타깝게 들어왔다고.

이 형과 이런 대화를 나누면서,
나는 참 많은 것을 생각했다.

어떤 사람에 대하여 나는 너무 쉽게 포기하고 마는 듯 하다.
그냥 어떤 사람이 ‘이러이러한 사람’이라고 생각되면 나는 그냥 거기서 멈추어 더 이상 어떤 노력을 하려 하지 않는 듯 하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한이 있어도,
그 사람이 변하지 않을 가능성이 많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사람의 변화를 위해 기도하고 고언하고 충고하는 그 형의 모습을 보면서 정말 부끄러웠다.

사람을 포기하지 않는 다는 것…

리더쉽… self-realization

조직/모임/공동체를 힘들게 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없는 리더쉽을 있다고 착각하며 주장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것 못지않게 조직/모임/공동체를 정말 힘들게 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있는 리더쉽을 없다고 부인하며 피하는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나 자신에게, 지금 이 시점에 주어진 리더쉽은 어떤 것일까.
나를 과대평가하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힘을 얻어 나 자신도 나를 과대평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가 감당해야할 리더쉽을 회피하며 직무유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성경묵상을 하며, 회사 생활을 하며, 성경공부를 섬기며, 세상을 바라보며, 나 자신을 돌이켜보며…
이런 저런 생각들을 해 보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