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다른 사람을 보는 것, 다른 사람이 나를 보는 것

얼마나 내가 성숙했는가 하는 것을 판단하는 기준 가운데 하나는,

내가 다른 사람을 보는 시각과
다른 사람이 나를 보는 시각 가운데 어떤 쪽에 더 신경을 쓰느냐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대부분의 사람은 95% 이상의 관심이, 다른 사람이 나를 보는 시각에 맞추어져 있지만,
점점 성숙해 가면서 그것 보다는 내가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보고, 이해하고, 사랑하고, 섬길까 하는 것에 관심이 가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런의미에서…
나는…
아직도 멀~었다.

포스트모던 세대

내가 생각하기에,
나는 매우 모더니즘적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다.

소위 ‘신세대’로 분류되는 사람들은 특징은 포스트모던적이고.

오랬동안,
나는 내 모더니즘식 접근법이 ‘정공법’이고
포스트모던적 접근법은 ‘꽁수’라는 생각을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복음을 전달하는 가장 강력한 tool은 모더니즘식 논리라고 여겼었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조금씩 깨닫게 된다.

내가 보는 나, 다른 사람이 보는 나

1. 내 professional field에서
나는, 내 지도교수가 나를 underestimate 한다는 생각이 들때마다 몹시 답답하고 화가 났었다.
지도교수가 보는 나보다, 내가 보는 나는 훨씬 더 능력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해왔다.
그리고 내 지도교수의 성향과 내 성향의 차이의 문제도 있겠지만,
내 지도교수에게 (아니면 주변의 다른 사람들에게) 내가 가진 것을 100% convice 시키지 못하면 정말 많이 답답하다.

2. Christian environment 에서
사람들이 나를, 실제 나보다 훨씬 더 괜찮게 본다.
정말 훌륭한 그리스도인으로 나를 봐주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Christian들에게는 서로 격려하고 칭찬하는 문화가 있긴 하지만,
때로는 그런 상황이 당황스러울 때도 있다.

국가보안법 폐지가 나와 무슨 상관이람?

이데올로기의 특징은,
자신과 다른 생각 모두를 적으로 만들어 버린다는데 있다.

저쪽이 죽어야 내가 산다.
자신의 적을 무찌르는 것이 내 존재의 근거가 된다.

쳐부수자 공산당, 때려잡자 김일성.

나도 한때 이걸로 전국 웅변대회에 나가 상도 받았었다. 괴수 김일성을 이땅에서 몰아내자고 이 연사 힘차게 부르짖습니다~ -.-;

아마 나와 같은 열살짜리 꼬마애 하나는… 비슷한 시기 북쪽에서 남조선 괴뢰정권을 무찌르고 미제의 각을 뜨자고 웅변을 했겠지.

…..

국가 보안법 폐지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주장을 인터넷 등에서 읽어보면… 그들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자세는 ‘증오’이다. 빨갱이에 대한 증오.

자신의 부모가 그 빨갱이들에 의해 죽창에 살해당하고, 그 빨갱이들이 쏜 포탄에 의해 내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면…
사실 그 ‘증오’를 털어내기란 쉽지 않으리라.

그런데,
이해가 되지 않는건… 그 전쟁을 겪지 않았던 사람들까지고 그 ‘증오’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지난 수십년간 철저하게 실행되어왔던 ‘이데올로기 교육’ 탓이다. 아직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는 어린 나이부터, 빨갱이를 때려잡는 것이 인생의 목표로 세뇌당한 사람들에게 그것을 떨쳐버리도록 하는 것은 쉽지 않은 것일게다.

내가 내 스스로를 평가해 보면,
‘자유’라는 가치와 ‘평등’이라는 가치 가운데… ‘자유’라는 가치를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수 많은 사람들을 죽음과 억압과 빈곤으로 내몰았던 레닌 식의 공산주의를, 김일성의 주체사상을 증오한다.

그러나,
그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수 많은 사람들에게서 자유를 빼앗아갔던,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의 독재를 증오한다. 자유민주주의의 신봉자임을 스스로 자임했던 그들의 얼굴에 침을 뱉고 싶다.

그리고,
그 우스꽝스러운 독재자들의 이데올로기적 논리를 가지고…
국가보안법을 지켜내고자하는 인간들의 모습에 조소를 보낸다.

어설픈 ‘자유주의자’로서,
도무지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말이 되지 않는…
국가보안법을 신주단지처럼 지키고 있는…
자칭 ‘자유민주주의 신봉자’들을 보면… 우습다못해 안쓰럽기까지 하다.

이 세상에서 그 누구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해주신 존엄함을 빼앗아 갈수는 없다.

그것이 이데올로기이건, 국가권력이건, 국가보안법이건 간에.

한국의 신문을 읽으며 참 마음이 답답하다…

The Passion of Christ –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상상력?

대히트를 친 영화

The Passion of Christ 영화에 대한 평가가 대단하다.
교회에서도 그 시리즈의 설교가 계속되고, 그 영화를 기초로한 성경공부 교재들이 나오는가 하면 전도용으로 이 영화가 사용될 기대를 많은 사람들이 하고 있는 듯 하다.
이 영화를 보고 자신이 살인을 저지른 것을 자수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 영화를 보다가 심장마비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이야기도 들린다.

참 잘 만들어진 영화인가보다.
나는 보고 싶지만… 여태껏 여러가지 사정이 되지 않아 보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한가지 이 영화의 대 성공을 보면서 드는 생각이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소위 ‘거룩한 상상력’에 대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고 보이는 반응은 대부분,
그리스도의 고난을 매우 생생하게 그려놓았기 때문에 그 영화를 보면서 그리스도의 고뇌와 고난등을 다시한번 깊이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소설을 영화로 만들면

내가 어릴때 부터 들었던 말은, 소설을 영화로 만들면 그 맛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었다. 소설을 글로 읽으면
머리 속에서 각종의 상상을 해 내기 때문에 눈으로 보는 것보다 오히려 더 다채롭고 다양한 장면들을 그려낼 수 있는데, 일단
그것이 영화로 만들어지면 모든 상상력을 죽여버려 스토리가 입체적이지 못하고 단편적이 된다는 것이다.

중학교 교과서에
나온 소설 ‘소나기’를 TV 방송에서 단편 드라마로 보고나서의 내 느낌이 바로 그랬다. 그전엔 그 소설 속에 나오는 소년과
소녀의 모습, 시골의 풍경 등이 이전엔 입체적이고 다채롭게 머리속에 그려졌었는데, 그 TV 방송을 보고 난 후에는 모든 등장
인물들이 해당 배우들로 고정되어 버렸고 모든 장면들이 매우 평면적으로 축소되는 경험을 했다.

혹시 The Passion of Christ 영화에 대하여 이런 우려는 하지 않아도 괜찮을까.

거룩한 상상력

성경공부 훈련을 받다보면 성경을 읽을 때 ‘거룩한 상상력’을 발휘하라는 이야기를 듣게된다. 성경의 상황과 인물들에 대하여 때로는
감정이입을하고, 때로는 논리적 분석을 하고, 때로는 상황을 상상해 냄으로써 성경의 내용을 더 사실적(graphic)으로
머리속으로 그려내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매우 자주 성경에서 발견하지 못하는 것들을 보게 된다는 제안이다.

예수님을
10년쯤 믿은 고학력의 헌신된 그리스도인이 있다고 가정하자. 이 사람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몇번이나 묵상했을까. QT, 성경공부, 설교, 기타 다른 여러가지 경로를 통해 적어도 일년에 2-3회 정도는 이 내용을
접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20-30회 정도 같은 내용을 묵상했다는 이야기인데…

소나기와 같은 소설을 10년에
걸쳐 20-30번 반복해서 읽었다고 생각해보자. 그것도 그냥 가볍게 읽는 것이 아니고 밑줄도 그어가면서, 고민도 해가면서, 내
삶에 적용도 해 가면서, 소설을 읽기 전과 읽은 다음 기도도 하고, 따로 노트도 작성하고.

그리고 아주 훌륭한
감독이 만든 소나기 영화를 봤다고 생각해보자. 그 영화속에서 우리가 얼마나 더 많이 새로운 것을 얻을 수 있을까. 우아, 저기서
까무룩 잠이 들었다가 잠결에 어른들의 이야기를 듣는 소년의 표정이 저렇게 그려졌구나… 하면서 무뤂을 치고 감탄을 하고
그럴까. 몇 장면에서는 ‘그래 저런건 내가 미처 생각을 못했는데 감독이 참 잘 그렸네’ 할 수 있겠지만 영화 자체가 그렇게도
충격이겠는가.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나는, 나를 포함한 현대인이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방식이
어쩌면 지나치게 피상적인 것은 아닌가 생각해본다. 내가 성경을 처음 읽기 시작한 것은 내가 기억도 나지않는 어린시절, 아마도
성경을 읽어온지 30년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을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고 정기적으로 QT도 하고 성경공부도 한것은 약
15년 가량 되었다.

그런데도 헐리우드의 한 액션배우가 만든 영화를 보면서 그 내용이 너무나도 새로와서 신선한 충격을 받는 것이 정상적일 것인가.


론, 내가 그토록 사랑하는 우리 주님의 고난과 죽으심이 멜깁슨의 ‘거룩한 상상력’에 의해 사실적으로 그려졌으니 내 마음에 이미
가지고 있던 그분에대한 사랑이 다시 마음속에 새겨져 눈물이 흐를수도 다시 묵상에 잠길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고뇌가
너무도 새로와서, 주님의 고난이 너무도 새로와서 ‘영적 quantum junp’를 경험했다면… 한편 감사한 일이겠으나 한편
매우 안타까운 일이 아닐까.

성경을 제대로 읽자. 저자이신 성령님께서 정말 그 내용을 내게 보이시도록 기도하면서
기대감을 가지고 성경을 읽자. 그저 한 종교의 경전을 읽는 것이 아니고,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이 스스로를 우리에게 보이신
내용으로 읽자. ‘내가 아는 누구’에게 적용되는 말씀으로 읽는 것이 아니고 ‘나’에게 ‘골수와 관절을 쪼개는’ 말씀으로 읽자.
혹시라도 성경이 그렇게 읽혀지지 않는다면 가슴을 치며 눈물을 흘리며 밥을 굶으며라도 그 말씀이 내게 그렇게 다가오도록 바래야
할일이 아니겠는가.

The Passion of Christ 영화를 본 후,
그 내용을 보면서 다시 감사하고 감동하는 기쁨이 있어야하겠으나, 혹 조금이라도 내가 이미 ‘알고’있던 성경의 말씀이 지나치게 평면적으로 축소되는 것 같은 그런 답답함을 경험할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렇게 이야기를 풀어놓았으니… 나 스스로 그 영화를 쉽게 보러가기는 어려울 듯 하다.

이 글은 eKOSTA http://www.ekosta.org 2004년 9월호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