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의 잘못된 리더의 잘못을 상쇄시키기 위해서는,
다섯사람 정도의 그보다 아주 더 뛰어난 바른 리더들이 있어야 하는 듯 하다.
때로는 분노하고, 때로는 안타깝고…
그리고 더 자주… 두렵다.
한 사람의 잘못된 리더의 잘못을 상쇄시키기 위해서는,
다섯사람 정도의 그보다 아주 더 뛰어난 바른 리더들이 있어야 하는 듯 하다.
때로는 분노하고, 때로는 안타깝고…
그리고 더 자주… 두렵다.
이제 다음달이면 2008년 코스타 여름수양회의 등록이 시작된다. 매년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코스타를 홍보하다 보면, “고지론을 주장하는 코스타에는 참가하기 싫다”는 반응을 접하곤 한다. 작
년에는 코스타에 강사로 참여했던 어떤 분이 자신의 교회 홈페이지에 코스타 후기를 쓰면서 고지론의 근원지인 코스타에서 그에 반하는
메세지를 전한 것에 대한 감회를 마치 적지에 아군 깃발을 꽂고 온 것처럼 감격스럽게 적어 올리기도 했다. 이러한 일들을 겪을 때마다 나는 크게 두 가지 생각이 든다.
(1) “아, 이 사람 참 공부 안하는구나. 코스타에서 고지론을 이야기했던 것 (그리고 그 폐해를 주장하기까지 했던 것)이 언제적 이야기인데… 그 이후의 흐름을 전혀 접하지 않는 사람이거나, 아예 “코스타=고지론”의 개념도 어디선가 대충 흘려들은 정도가 아닐까”
(2) “이제 고지론은 커녕 그에 대한 비판도 더 이상 회자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정말 질기게 따라다니는 꼬리표구나. 정말 고지론은 코스타의 주홍글씨인 걸까“
고지론은 잘못된 성경 해석인가?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미국의 유학생들은 선진학문을 배워서 조국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기대와 의무를 지고 있었다. 고지론은 그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당시 유학생들에게 적용될 수 있는 하나의 이론 (a theory)이었다. 하지만 그 이후에 수많은 비판이 제기된 것처럼, 고지론은 그것의 implementation 차원에서 우리들의 죄성과 결합하여 커다란 취약점과 폐해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그러한 비판이 홍수를 이룬 1990년대 후반 이후로는 이제는 아무도 – 심지어는 고지론을 최초로 주장했던 그 목사님도 – 더 이상 고지론을 중심으로 신학을 전개해 나가지 않는다.
고지론은 성경 해석의 법칙(law)이 아니라 말 그대로 론(theory)이다. 이러한 적용범위와 한계, 그리고 시대적인 배경을 고려한다면, 고지론은 그 현실적인 한계들에도 불구하고 성경적인 근거가 있는 이론이다. 또한, 고지론이 주장되던 초기와는 달리, 이제는 더이상 우리 그리스도인 청년들이 그 위험성을 모른 채 무비판적으로 고지론을 수용하지 않게 되었으니만큼, 이제는 이 고지론에 대해 무작정 비판만 하는 일은 그 의의도, 효과도 불분명하다.
고지론, 코스타의 주홍글씨인가?
솔직히, 두 귀를 막고 시대의 흐름과 교계의 움직임에 관심 없이 그저 코스타를 고지론이라는 제목으로 덧입혀 비판하는 사람들과의 대화는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 실체가 있는지 여부도 확인하지 않고 그저 비판 자체에 목소리를 높임으로써 자신의 순수성에 대한 인식을 강화하려는 움직임은 사실 역사 속에서 그다지 새로울 것도 없다. 탈냉전시대가 열리고 공산주의가 세계적이로 실패한 운동임이 증명되고 몰락한지 한참이 지난 지금에도 “반공주의”로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는 것으로 굳게 믿는 사람들처럼…
나는 코스타가 이러한 대중들에게 설명/해명을 제공하는 일에 노력하되, “코스타=고지론”이라는 낙인을 주홍글씨로 가지고 있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고지론은 이미 성경적/신학적/경험적으로 충분한 평가가 이루어졌으며, 코스타는 이 고지론의 위험성과 폐해를 누구 못지 않게 많이 강조하며 지적해 왔다. 그렇다면, 이제 코스타는 눈을 들어 조금 더 미래를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
The Show Must Go On; 코스타, 그래도 계속 이슈를 던져라.
고지론은, 적어도 그 시대에는, 일정부분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며 시대를 앞서가는 화두를 던졌다. 내가 생각하는 문제점은 코스타가 1990년대 초반에 고지론이 주장되는 통로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 그 이후의 이슈를 선점하지 못하고 이 시대에 화두를 던지지 못해온 것이다.
고지론은 코스타의 중심세력인 청년/학생들로부터 발의된 움직임이 아니라, 코스타 여름수양회에 강사로 오셨던 어느 목사님에 의해서 주장된 이론이다. 그 당시에 코스타는 강사 중심, 집회 중심의 여름 수양회였으나, 2000년대 이후로 코스타는 강사에 의존하는 수양회가 아닌, 청년/학생들의 자발적인 움직임과 생각들이 운동(movement)으로 나타나는 색깔을 갖게 되었다.
따라서 이제 코스타는 그 책임과 소명을 더 절감해야 한다. 인터넷 문화의 발달과 함께 우후죽순격으로 생겨난 “반(反, Anti-) OO주의”식의 대안 없는 비판이 아니라, 진정 앞날을 내다보고 시대를 앞서가는 이슈를 던지고 선점하는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도 코스타에게 요구되고 있다.
만약 코스타가 현대 복음주의의 잘못된 흐름 한 가지를 지적하는 데에 집착한다면, 거의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반–고지론”을 주장하며 positioning을 하고 있는 무리들과 다를 바가 없게 된다. 또한 만약 시대를 읽기를 거부하며 “예수 잘 믿어라”라는 원론적인 목소리만 높인다면, 그 또한 복음주의 학생운동으로서의 역할의 큰 부분을 외면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아 마땅할 것이다.
이제 얼마 후면 코스타는 2009년의 주제를 정하게 된다. 복음주의 학생운동의 100년을 가늠할 수 있는 좋은 주제가 나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안된다면, 1990년대의 고지론처럼, 비록 그 생명은 짧고 단점은 많더라도 적어도 몇 년 앞을 내다보고 이슈를 선점할 수 있는 화두라도 나오기를 기도한다.
코스타여, 고지론이라도 좋으니 이슈를 던져라!
당신께 가까이 – 하덕규
당신께 가까이 다가갈수록
내안에 촛불 하나씩 켜져요
이제 더 이상 어둠을 노래 할수가 없어요
얼마나 쓴 뿌리들이 내안에 있는지
당신은 아셔도 그냥 조용히 웃으시며
내 안에 촛불 하나둘 켜지요
당신께 가까이 다가갈수록
나는 처음 보는 것들을 보아요
모든 것들이 새로운 갓 태어난 어린나비처럼
새롭게 열리는 푸른하늘과
눈부시게 빛나는 저 태양 이제 더 이상
슬픔이 날 어찌하지 못해요
그동안 내속을 흘러 나의 노래가 되었던
하얀 눈물의 강과
내가 숲에서 잊고 살았던 푸른껍데기의
슬프고도 슬픈 무늬와
내가 그토록 숨기려 했던 내안에 이름모를
아픔의 모습들조차
당신 앞에선 아무것도 가릴수 없는
벌거숭이가 되네요
오늘…
이 노래의 가사가 내 머리에서 떠나질 않는다…
나는 늘 멀티 태스킹을 하면서 사는 것 같다.
어느 한 순간을 놓고 봤을때, 내가 어떤 한가지 일만을 하고 있는 경우는 그리 흔치 않은 것 같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나는 한편에서 실험을 돌리면서 생각을 하고 있다.
실험장비가 돌아가는 약 9분 정도 동안 이 글을 써야 하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대개의 경우에는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마친 이후, 그 다음에 어떤 일을 할 것인가가 항상 머리 속에 있기 때문에… (대략 10분-15분 가량의 단위로 시간을 쪼갠다)
어떤 일을 하면서 그 다음 일에 대한 계획도 끊임없이 머리속에서 돌아가는 것 같다.
그래서,
자신의 point를 매우 지루하게 반복적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나는 몹시 힘들어 하는 것 같다.
2분만에 이야기할 것을 30분씩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있다보면… 혹은 이미 한 이야기를 또 하고 또 하는 것을 듣고 있다 보면…
나는 이미 그 이야기의 줄거리를 다 머리속에 담은 이후에 한참 다른 생각을 하곤 한다.
그런데 그 다른 생각을 하는 자유조차 대화중에 주어지지 않는다거나 (그 사람이 계속 내 반응을 요구한다든가…) 하면 참 많이 힘들어 하는 듯 하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직장 동료 한 사람이 와서 3분이나 이야기를 하고 갔다.
내가 다 아는 얘기를 새로운 이야기처럼 하고는…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을 했다. 이걸 9분만에 마치고 실헝장비로 가야 그 다음 실험을 하고…
그래야 오늘 12시에 예정된 함께 성경공부를 하는 형제와의 점심 식사 이전에 계획된 실험들을 다 마칠 수 있는데…)
어떤 사람과 목적없이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도 잘 하지 못한다.
시간을 10분 간격으로 쪼개서 해야 할 일들을 하루종일 하면서 지내도,
자기전 내 outlook에는 그날 다 끝내지 못한 일들이 8개씩 뜨곤 한다.
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때로… 그저 시간을 낭비하면서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경험한다.
그저 무엇인가를 아뢰는 것을 하지 않는 상태로… 30분이고 1시간이고 그냥 하나님과 함께 이야기하고… 말씀도 읽다가… 눈을 감고 하나님 생각을 하고… 심지어는 그러다 깜빡 졸기도 하고…
그런 시간이 내 삶에 고갈되면,
나는 이내 쫓기는 마음이 되고 불안해하는 듯 하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렇듯,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그저 함께 시간을 보내며 그 사람과 공감하고… 함께 시간을 죽이는 일도 중요한데…
내가 내 생명을 다해 사랑하는 하나님과 함께 시간을 낭비하고,
내가 사랑하는 가족과…. 내 주변의 사람들, 그리고 내가 섬겨야 하는 사람들과 시간을 낭비할 계획을 미리 좀 짜놓는 것이 필요한 듯 하다.
내가 블로그를 시작한 이유도,
시간낭비하는 법을 배우고 싶어서인지도 모른다.
이번 고난주간에 하는 묵상의 커다란 theme은,
만일 내가 예수님을 알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것이다.
여러가지를 이야기해볼 수 있지만,
내 마음 속에 드는 가장 큰 몇가지의 내용은,
자유, 어둠으로부터의 해방, 무지에서의 탈출 이다.
진리는 정말 나를 자유하게 했다. 무지 속에서 헤메고 있었을 수도 있었을 내게 생명과 해방과 자유와 깨달음을 주었다.
그 cost가…
예수님의 고난과 피흘리심었던 것이다…
Matrix에서 보면,
Morpheus가 Neo에서 red pill과 blue pill을 보여주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Morpheus: You take the blue pill and the story ends. You wake in your bed and believe whatever you want to believe. You take the red pill and you stay in Wonderland and I show you how deep the rabbit-hole goes. Remember — all I am offering is the truth, nothing more.
가끔 나는,
내가 정말 red pill을 먹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내 안에 있는 복음으로 인해서,
도무지… 마치 내 안에 그 복음이 없는 것 처럼 살 수 없게 되어가고 있음을 발견한다.
그냥 다른 사람들처럼 살아갈 수가 없다…. 도무지 그게 이젠 안된다….
예수의 그 십자가는… 내가 이전에 가졌던 계획, 내 세계관, 내 꿈, 내 가치 그 모든 것을 다 mess up 해놓고 말았다.
이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
토요일
기름부음을 받으심 (아마 토요일 저녁, 유대법으로는 주일이 토요일 밤에 시작됨)
주일
예루살렘 입성 (마 21:1-17, 요 12:12)
월요일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심 (마 21:18-20)
제2차 성전 숙청 (막 11:15-18)
화요일
여러가지 비유와 논쟁 (마 21:20-25:45, 막 11:20-12:37, 눅 20:1-21:38 등)
공관복음에는 이날의 기사가 가장 많이 기록되어 있으나 요한복음은 그 사건들을 생략하고 있다.
수요일
공관복음에는 이날에 기름부음을 받으신 것으로 기록됨 (마 26:1-5)
이 날에는 다른 사건은 없고 베다니에서 휴식하셨다.
목요일
최후의 만찬 (막 14:12-21)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 (요 13:1-17)
베드로의 부인을 예언하심 (마 26:30-35, 요 13:36-38)
다락방 강화 (요 14:1-16:33)
대제사장의 기도 (요 17장)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 (마 26:35-46)
잡히심 (마 26:45-56, 요 18:1-11)
금요일
공회에서의 심문 (막 14:53-65, 요 18:12-27)
베드로의 부인 (막 14:66-72, 요 18:15-18)
빌라도의 심문 (막 15:1-15)
십자가에 달리심 (마 27:33-56, 요 19:17-30)
장사됨 (마 27:57-61, 요 19:38-42)
토요일
무덤에 계심 (마 27:62-66)
주일
부활하심 (마 28장, 요 20장)
내 아내가 어제 blogging을 시작했다.
http://mnrji.tistory.com/
내가 생각하기에 (내 아내는 동의하지 않지만 ^^)
내 아내는 로마서 12:1 성향의 사람이고,
나는 로마서 12:2 성향의 사람이다.
그래서… 내가 일에 자꾸만 치이고 늘 supercharge 된 듯 보이고… 그렇게 되다가…
내 아내를 보면 주님을 더 깊이 알고 있고 함께 앉아 있는 마리아를 보는 마르다가 된 것 같이 느낀다.
It’s so~ great to have her as my wife…
KCF
@ Stanford 마가복음 성경공부, 2008
하나님
나라의 비유, 그 감추어 지지 않는 신비
(마가복음
4:1-34)
성경공부 리더를 하고 있는 성식은 최근 함께 성경공부를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깊은 실망과 회의에 빠져있다. 몇몇의 사람들은 성경공부를 하는 것을 즐기기도 하고 함께 토론에 참여도 하면서 함께 성장해 가는데 반해, 같은과 후배 동철이는 도무지 아무런 변화도 없는 것이다. 동철과 따로 차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해보고, 격려도 해보고 하지만 어떤 방법도 소용이 없었다.
도대체 하나님의 말씀에 힘이 있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만 적용되는 이야기인가.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나누는데 왜 동철이에게는 아무런 변화도 없는 것인가. 성식은 하나님 말씀의 힘(power)에 대한 회의가 드는 것과 동시에 동철에 대한 미운 마음마저 들기 시작한다. 집에가서 조금만 더 생각을 해보면 알텐데 왜 저렇게 꽉 막힌 것일까.
과연, 성식의 이러한 생각과 느낌은 정당한 것일까. 예수님께서 지금 성식의 입장이었다면 어떻게 느끼셨을까. 2000여년전, 예수님께서는 성식의 상황과 거의 비슷한 상황을 겪으셨고, 그런 상황에서 오늘 본문의 비유를 말씀하신다. 성식은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어떤 신비를 깨달을 수 있을까.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
(1-9절,
14-20절)
1.
14절-20절을 참고하여 3-9절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비유에 나오는 등장인물과 내용들이 각각 무엇을 상징하는지 자세히 정리해보자. (씨 뿌리는 사람, 씨, 네가지 토양, 새, 뿌리, 싹, 열매 등등)
2.
당신 주변에서 아직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 이 네가지 토양에 해당하는 사람들을 각각 몇 % 정도쯤 되는 것으로 생각하는가?
교회 내에서는 이 네가지 토양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각각 몇 % 정도 쯤 되는 것으로 생각하는가?
당신은 어떤 토양에 해당하는 사람인가? 구체적으로 설명해보라. (가령, 가시밭이라면, 막고 있는 걱정들이 어떤 것들이 있는지 등)
3.
본문에서 씨를 뿌리는 사람은 씨를 어떤 방식으로 뿌리는가? 이것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어떠한 특징을 말해주는가? (씨를 뿌리는 사람의 심정을 생각하면서 정리해보라)
4.
열매를 맺는 여부를 결정하는 요소들을 정리해 보라.
이를 통해 알게되는,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사람들이 가져야 하는 자세는 어떤 것인가?
5.
당신이 좋은 토양이 되기 위해서 당신의 삶 속에 바뀌어야 할 것들은 어떤 것들이 있는가?
숨겨져
있는
하나님
나라의
신비,
감출
수
없는
하나님
나라의
신비
(10-13절,
21-25절,
33-34절)
6.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10-12절)
(본문에서 “비밀”로 번역된 단어는 이전에는 감추어져 있었지만 예수님으로 인해 드러난, “신비(mystery)”라고 해석하면 그 내용이 더 자연스럽다. 또한 12절에 ~깨닫지 못하게(so that) 이라고 되어 있는 부분은 ~의 결과로 (with the
result that) 이라고 해석을 하면 더 자연스럽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병행구절에서는 이 부분을 더 부드럽게 표현했다.)
7.
21-22절의 비유는 무슨 뜻인가? 이 비유는 10-12절의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데 어떤 도움을 주는가?
8.
예수님께서는, 21-22절에서 나타난 것과 같이 드러나는 신비에 대하여 어떤 반응을 촉구하고 계시는가? (23-24절)
9.
“가진 사람은 더 받을 것이고 가지지 못한 사람은 그 가진 것 마저 빼앗기는 일”(25절)들을 당신의 삶과 당신 주변에서 본 경험이 있으면 나누어 보자. 이 구절은 영적 성장에 관하여 어떤 사실을 이야기해주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스스로
자라는
씨
비유,
겨자씨
비유
(26-32절)
10.
하나님의 나라가, 당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 자랐던 것을 경험한 적이 있었는가? 나누어보라.
11.
하나님의 나라가, 세상의 눈으로 보아 형편없어 보이는 경우를 열거해보라. 당신에게 임한 하나님 나라가, 처음에는 보잘것 없지만 큰 힘이 있다는 것을 다른 이들에게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정리
12.
당신에게 드러난 비밀/신비에 당신은 어떻게 반응하며 살고 있는가? 그 신비는 당신의 삶의 여러 영역 (삶의 목적, 사람들과의 관계, 직업/커리어, 삶의 자세 등)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살아가다보면, 내가 개인적으로 제일 대하기 힘든 사람들은,
나보다 어른이거나, 나를 감독해야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인데… 나보다 미숙한 사람이다.
혹은, 분명히 나보다 현저하게 미숙한데 계속해서 나를 가르치려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을 대할때에는, 물론 내가 그런 사람들 앞에서 겸손하려고 노력하지만…
내 노력과 무관하게 그런 사람들과 진솔한 대화를 하기란 쉽지 않음을 경험한다.
그런데,
점점 나도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리고 때로 ‘어른’의 위치에 있거나 다른 누군가를 이끌어야 하는 위치에 있게 되면서…
내가 섬기고 가르치고 돌보는 사람들이 나에데하여 그런 어려움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지 자꾸만 점검해보게 된다.
더 어렸을 때에는… “미숙한 어른들”을 보면서 그저 답답하게만 느꼈는데,
이젠 그런 “미숙한 어른들”을 보면서 내 모습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