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hannine Corpus

연초에 요한일서 말씀묵상을 했고,
또 올해 KOSTA 집회를 준비하면서 요한일서로 주제 묵상을 좀 하고 있는데다,
최근에는 QT 본문이 요한계시록이어서,
요한의 저작들(Johannine Corpus)를 금년에는 유난히 많이 접하고 있는 중이다.

몇가지 reflection들이 있다.

1. 최근 1-2년동안 깊이 관심을 가졌던 공관복음이 그리고 있는 복음과 정말 많이 다르다!
어떤 의미에서 꽤 자명한 것일수도 있지만, 정말 새롭게… 아… 다르구나… 하는 것을 많이 느끼고 있다.
ground-up 이라기보다는 to-down의 느낌이랄까.
귀납적이라기 보다는 연역적인 느낌이고,
어떤 의미에서, scale이 훨씬 더 크다는 느낌을 받는다. 
뭐랄까… 공관복음이나, 바울서신들이 어떤 case를 만들고 싶어한다면, 요한의 저작들은 선언에 가깝다는 느낌이다.

2. 내가 처음 복음을 접했을때 만났던 복음은, 어떤 의미에서 요한이 그리고 있던 복음에 가깝다.
그리고, 정말 내 깊은 곳에서 더 공명하는 내용도 역시 요한의 복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잠깐 스치기도 한다. 

3. 어쩌면… 정말 어쩌면… post-modern generation에게 더 공감되는 내용이,
공관복음적 접근, 바울 서신적 접근 보다는 요한의 저작에서 하는 접근은 아닐까 하는 조심스러운, 설익은 생각을 해본다.
특히, 요한계시록은, 현대에 정말 꼭 많이 읽혀져야하는 성경인 것 같다.
재림을 예비하기 위해서라던가, 거짓 재림 예언이 많아서라던가 그런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요한계시록의 상징들을 현대의 어떤 모습으로 해석하려는 일부 사람들의 억지주장 때문도 아니다. (요한계시록에 computer, 바코드, 비자카드가 666이라던가, 불병거가 현대의 탱크나 미사일이라던가 하는등의 억지 해석은 이제 좀 제발 잠잠해졌으면 좋겠다. -.-;)

요한계시록이 이야기하고 있는 제국에 대항하는 하나님 나라의 그림이 더 많이 선포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아직 성경을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가야할 길이 먼 듯 하다. 

Beyond my comfort zone

최근에,
어찌어찌하다보니…
두가지 정도의 일을 놓고 기도하게 되었다.

하나는,
다니고 있는 미국 교회 내에서 한국어 소그룹을 시작하는 일이다.
아직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나와 우리 가족이 어떤 role을 play 해야 할지 고민중인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도하시는지 기도중이다.

다른 하나는,
몇달전부터 우리동네 친구 하나가 (최근에 엄마가 된 ㅋㅋ)
San Francisco 지역에 있는 Asian American들을 위해서 영어 성경공부를 인도해달라고 집요하게 압박하고 있다. ^^
영어로 ‘사실’을 전하는 것은 어느정도 자신이 있지만,
영어로 ‘heart’를 전하는 것이 영 자신이 없어서…
그 친구의 강력한 압박에도 지지부진 선뜻 답을 못해주고 있다.

뭔가… 밀린 숙제들을 쌓아놓고 고민하고 있는 중인데…

거룩한 절망

지난 토요일에 있었던 성경공부도,
정말 열띤 모임이었다.

역시 내가 말을 너무 많이 하긴 했지만… -.-;
(말을 다소 공격적으로 하는 내가 말을 많이 하는 바람에 분위기가 쓸데없이 뜨거워진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공동체,
공동체적 구원,
구원의 확신,
미래적 구원과 현재적 구원,
penal substitution에 근거한 구원과 다른 견해의 대비 (이 용어를 사용하지는 않았으나 내용은 그런 것이 되었다.)
거룩한 절망,
성화 등등의 이슈를 나누었다.
다들 이 heavy한 문제들을 개인의 영역으로부터 이끌어 내는 모습이 참 멋있어 보였다.

그중,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과 자신의 현재 모습의 괴리로 인한 절망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누어주신 분이 있었다.
다들 진지하게 그 이야기를 경청했는데,
나는 그 분에게 물었다.
“무엇이 어떤 사람으로 하여금 그 거룩하고 진지한 고민을 하게 하느냐”고.
그분은 답을 하지 않으셨는데…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내게 아내가 물었다.
“당신은 거룩한 절망을 해본적이 있느냐”고.
한참의 침묵 속에 내가 할 수 밖에 없는 대답은….
그런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거룩한 절망조차도 하지 못하는 천박함이 내 모습인 것을…

일석이조?

요즈음,
Encounter with God 을 따라서 하는 내 성경본문이 ‘베드로후서’이다.
그런데 역시 매주말 베드로후서 성경공부를 하고 있어서…
본문이 겹친다!

처음엔,
뭔가 더 깊이 있는 묵상을 할 수 있을 것 같아 기대했었는데…
오히려 방해가 되는 것 같다.

성경공부를 할때의 mode와 QT를 할때의 mode가 다른데,
그 mode 전환이 잘 안되어서 그런 것일까…

베드로전서 성경공부를 하면서…

토요일 베드로전서 성경공부를 하면서,
고민하고 있는 것 몇가지를 정리하자면 대충 다음과 같다.

1. 흩어진 나그네
디아스포라로 흩어진 그 당시 유대그리스도인들의 상황 (다른 세계관과 신관을 가진 이방 세상으로 흩어지게 되었다는)을 생각해보면서…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을 그 상황과 대비시켜서 바라보는 것.
그리고, 한국인 디아스포라에 대하여 황간사님이 정리해 주셨던 내용들을 생각하면서… 결국은, 지금 미국내의 그리고 전 세계의 한인 디아스포라의 흩어짐이 그 당시 유대그리스도인들의 흩어짐과 비슷한 것인지 하는 것에 대한 생각. (자민족중심주의적인 고찰이 아니라, 복음 안에서 객관적이고 정직한 고찰을 해보려고 노력하고 있다.)

2. 여러가지 시험에 대한 이슈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않는 세상 속에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하며 사는 백성의 삶은, 필연적으로 고난과 시험을 수반하게 되는데…
지금 내게 있어서 그 고난과 시험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고난과 시험이 아닌 것을 고난과 시험인 것으로 착각하는 오류와… 고난과 시험인것을 고난과 시험이 아니라고 착각하는 오류 두가지 모두를 피해야 한다는 생각.

3. 세상과 구별된 거룩함
자칫 주변 세상의 흐름을 섞여버릴 수 있었던 당시 그리스도인들에게, 구별됨을 강조하는 베드로 사도.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microscopic한 level에서의 개인적 거룩함과 성숙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방향 자체를 세상과는 다르게 사는 macroscopic level에서의 구별됨에 대한 고민.
복음의 사유화가 극으로 치닫다 못해 기독교의 범위를 벗어나기까지한 현대교회 속에서…
복음이 이야기하는 세상과 구별되는 삶(거룩함)을 내 개인적으로 열심히 추구하며 사는 것이 과연 충분한 것인가 하는 고민 (그것이 가능할 것인가 하는 것은 별개의 이슈이지만.)

4. 공동체
베드로 사도가 고난받는 흩어진 유대그리스도인들에게 ‘합당한 삶’으로 제시한 중요한 덕목인 ‘서로 사랑함’
공동체성이 중요함을 드러내고 있는 것인데…
애나뱁티스트의 전통이라던가… 나찌 치하에서 본회퍼가 추구했던 공동체 들의 특징은,
세상과의 구별이어다는 생각. (배타적이라던가 폐쇄적이라는 것은 아니다.)
타락한 세상 – 세상과 구별되는 거룩함 의 context에서는 늘 자연스럽게 ‘공동체’가 등장하곤 하는데…
과연 이것은 정말 그렇게 organically integrate 되어 있는 개념인것인가.

5. 오염된 복음도 복음인가.
이것에 대해선… 적어도 지금은 말을 많이 아껴야 할 것 같다…
그러나 도무지 내 마음을 진정시키지 않는 그런 이슈이다.

베드로전서 1장이 끝났는데…
제대로 하려면 거의 4-5개월 정도 해야할 분량을 후다닥 끝내고 나니…
진도 못따라가는 학생이 허덕거리는 것 같은 부담감이 화악~ 다가오고 있다. -.-;

흩어진 나그네

지난 주말에 했던,
베드로후서 1장의 전반부의 내용이 계속 머리 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흩어진 나그네됨에 대한 여러 생각들.

좀 더 정리가 되면 그 내용에 대해서는 점차 이 블로그에서도 나눌 수 있겠지만…
5년전 KOSTA 주제가 바로 이 내용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KOSTA를 10년이 훨씬 넘게 섬겼던 한 사람으로서,
참 부끄럽기 짝이 없다.

아니,
이런 내용을 그때 좀 더 깊이 생각해보지 못했단 말인가.

참… 오랫만이었다.

지난 토요일 저녁,
우리 집에서 어른 7, 아이 3명이 모여 함께 조촐한 식사를 나누었다.
서로 자신의 삶에 있었던 이야기를 나누고…
다소 추하고 부족한 모습도 이야기하고…
찡~하고 마음을 울리는 감동도 있었고, 뭔가 주먹을 불끈쥐게하는 결심도 있었다.

2005년 이었던가,
‘우리집’에서 이렇게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성경공부 모임을 가졌던 것이.
나와 아내가 나란히 앉아서, 내가 주책없이 떠드는걸 아내가 보며 옆구리를 찔렀던 것이.
(이번엔 어깨를 툭 쳤지만.^^)

참, 오랫만이었다.
뭐랄까…
아내와 민우가 California로 이사온지 1년이 벌써 훌쩍 넘었는데,
우리가 사는 집에 생명의 물줄기가 흐르는 것 같은 느낌이.

우리 집이…
한결 더 따뜻해졌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가복음 8:1-9:1)

형수: 나는 예수께서 치유자(healer)이신게 참 마음에 들어. 상처받은 마음도 고쳐주시고, 육체적인 병도 고쳐주시고
문정: 무슨 소리야. 예수께선 누가 뭐래도 정말 훌륭한 선생님이시지. 늘 내 길을 인도해주시고. 지금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 길을 가르쳐 주시는 현자(賢者)이시란 말이야.
성훈: 야, 야. 예수는 하나님 이셨어. 그분이 물위를 걸으시거나 각종 기적을 행하신게 그분이 하나님 이심을 드러내는 것이었다니까.
당신은 위와 비슷한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는가? 책을 읽다보면, 신문 기사를 통해서,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다양한 방향으로 예수를 해석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만난다.
예수는 기적을 행하는 사람이었을까? 종교 개혁을 주창했던 종교 지도자였을까? 정치권력을 행해 직언을 했던 정치지도자였을까? 그렇지 않다면 삶의 길을 가르쳐주는 스승이었을까?

사천명을 먹이심 (8:1-13)

1. 오늘 본문은, 이전에 예수님께서 오천명을 먹이신 사건(6:30-44)과 어떻게 비교/대비되는가? 공통점과 차이점을 찾아서 나열해보라. 왜 이런 차이가 있다고 추론하는가?
(오늘 본문이 일어나고 있는 장소는, 바로 이전 7장 마지막 부분의 장소 부근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

2. 예수께서는 거의 비슷한 기적을 두번 행하고 계신데, 제자들은 처음 기적을 행하셨던 때와 그 자세가 별로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당신은, 이전에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것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했던 경험이 있었는가? 그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3. 사천명을 먹이신 사건 직후에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와서 표적/표징(sign)을 요구하는 것으로 마가는 그리고 있다. 바리새인들의 요구를 예수께서 거부하신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4:21-26 참조)

바리새인과 헤롯의 누룩 (14-21)

4.예수께서 바리새인과 헤롯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셨을때 그 의미는 무엇인가? 바리새인의 누룩은 무엇인가? 헤롯의 누룩은 무엇인가? (바리새인은 당시 종교 지도자로 자신의 종교, 자신의 전통에 사로잡혀 있던 사람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리고 헤롯은 당시 정치 지도자로 권력, 성공 등에 사로잡혀 있던 사람으로 그려지고 있다. 6:14-29, 7:1-23등을 참조하라.)

이 말씀에 비추어 보아, 예수께서 제자들을 꾸짖으시는 내용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21절)

5. 당신에게 있어 헤롯의 누룩은 어떤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가? 바리새인의 누룩은 어떤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가? 그것들이 당신이 예수의 제자로서 살아가는데 어떤 장애가 되고 있는가? 구체적이고 솔직하게 이야기해보라.

벳세다의 눈먼사람을 고치심 (22-26)

6. 예수께서 이 눈먼 사람을 고치시는데 왜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셨다고 생각하는가? 그리고 고치시고 나서 마을로 들어가지 말라고 하셨다고 생각하는가?

7. 이 병자를 고치는것은 한번에 하지 않으시고 두단계를 거쳐서 고치신다. 처음에는 희미하게 보이다가 결국 완전히 다 보이게 하신다. 왜 그러셨다고 생각하는가? 혹시 이것을 통해서 제자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시려 하셨다면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지금 이 본문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 본문과,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연이은 실수 사이에 위치하고 있음을 감안하여 생각해보라.)

베드로의 신앙고백, 예수께서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심 (27-9:1)

8.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는 질문을 하시기 전에 왜 사람들이 누구라고 하는지를 물으셨다고 생각하는가?

9. 베드로가 했던 대답은 무엇이었는가? 이 대답은 어떤 의미에서 의미가 있는가?

10. 베드로의 그 신앙고백이 있자 예수께서는 비로소 자신의 수난과 부활에 대하여 예고하신다.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예수님의 이러한 행동은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가?

11. 조금전 예수께 멋진 신앙고백을 드렸던 베드로가 했던 반응은 어떠한가? 이를 통해서 베드로의 예수에 대한 이해가 어떠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가?

12.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예수를 따르는 제자도의 핵심은 무엇인가?

당신의 삶에서, 이 제자도의 모습은 어떻게 그려지고 있는가?

정리

오늘 본문을 정점으로 마가복음은 후반부에 접어든다.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희미한 그림만을 보여주시던 예수께서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전환점 삼아 사역의 새로운 단계로 들어가신다.

13.  오늘 본문에서 나온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 기적을 행하는 사람? 정치 지도자? 종교 지도자? 율법학자? 병을 고치는 사람? 선각자? 스승? 현자?
예수님의 이런 여러가지 모습중, 당신에게 가장 의미있게 다가오는 모습은 어떤 것인가?

14. 이 모든 예수의 단편적인 모습들 속에서 등장하는 베드로의 신앙 고백은 무엇인가? 그 신앙 고백은 어떤 의미에서 앞의 모든 단편적인 모습들을 통합하는가?

15. 당신은 예수를 누구라고 하는가?

어그러진 종교 까대기 (마가복음 7:1-37)

종교(religion)에서는, 관계의 주도권이 사람에게 있지만, 복음(gospel)에서는 하나님에게 있다.
종교는 앞으로 일어날 일에대한 조언(advice)이지만, 복음은 이미 일어난 이에 대한 소식(news)이다.
종교는 규칙을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복음은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당신은 이렇게 정리해놓은 말들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당신이 이해하고 있는 ‘기독교’라는 종교에서도 위에서 기술한 종교의 특징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께서 어그러진(distorted) 종교 까대기에 나서신다. 처음에는 멀리 예루살렘으로부터 종교적 열심으로 예수를 관찰하러 온 종교인들과의 대화를 통해 죽어있는 종교적 형식 까대기를 하시고, 곧 이어 그 당시 하드코어(hard-core) 유대인들이라면 상종하지 않았을 사람들과 만나시면서 그 당시 유대인들이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경계표지(boundary marker) 까대기에 나서신다.

죽어있는 종교적 형식 까대기 (7:1-23)

1. 본문에서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의 논점과 바리새인/율법학자가 이야기하는 논점을 정리해서 비교해 보라. 그 차이를 당신의 말로 풀어서 이야기해보라. (하나님과의 관계, 부정함과 청결함, 의식 등의 관점에서 생각해보라.)

2. 예수께서 진단하시는, 바리새인/율법학자의 문제는 어떻게 정리될 수 있는가? 무엇이 근본적인 문제인가?

3.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기 위해 만들어진 여러가지 전통이나 형식이, 오히려 하나님을 섬기는데 방해가 되는 경우가 있다. 우리 주변에서 그러한 예를 찾아서 나누어보자.

전통, 종교적 규례들은 본질을 더 명확하게 하기위해 만들어진 것들이다. 그런데 어떤 이유로 전통과 종교적 규례들이 본질과 충돌하게 되었다고 생각하는가? 당신 개인의 삶의 영역에서는 어떠한가?

경계표지(boundary marker) / 사회적 편견 까대기  (24-37절)

4. 이어 예수께서는 두로(Tyre)라는 이방지역에서 그리스 사람, 게다가 여자를 만나신다. 바로 이전에 바리새인/율법학자들과의 논쟁 이후에 이방지역으로 가시는 예수께서는 어떤 의도를 가지셨다고 생각하는가?

5. 여인은 예수께 무엇을 간청했는가?  이에대해 예수께서는 어떻게 반응하시는가? 여기에서 예수께서 가지고 계신 의도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6. 예수께서 이 여인의 딸을 고쳐주심으로써 나타내시고자 하시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7. 이어서 청각장애인을 고쳐주시는 장소는 데가볼리(Decapolis)이다. 이 장소는 이전에 예수께서 어떤 일을 하셨던 지역이었는가? (5:1-20) 이 지역에 예수께서 오셨다는 사실, 바로 이전의 그리스 여인을 고쳐주신 일, 또 그 이전에 바리새인/율법학자들과 논쟁하신 일은 어떤 연관이 있는가?

8. 예수께서 이 사람을 고쳐주시면서 하시는 행동들을 정리해 보라. 왜 말로만 하시지 않고 이렇게 하셨다고 생각하는가?

정리

9. 진정한 영성은, 마음과 세계관의 변화를 요구한다. 그러나 일반적인 ‘종교’는 깊은 내면의 변화 없이 형식이나 정성등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기계적으로) 얻을 수 있는 특성을 가진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왜 진정한 영성 보다는 형식적 종교를 선택한다고 생각하는가? 당신의 경우는 어떠한가?

10. 지난 한달동안, 당신의 삶을 구체적으로 찬찬히 돌이켜보라. 당신이 추구하고 있는 형식적 종교성이 당신 안에 있는 생명을 죽이고 있는 것은 없는가? 나누어 보자.

You still don’t get it? (마가복음 6:30-56)

오랫동안 함께 부부생활을 해온 배우자, 나를 낳아서 키워주신 부모님, 내가 수고해서 낳고 키운 내 자녀, 피를 나눈 것과 같이 친한 친구, 존경하여 따르던 선배나 선생님등 내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던 사람이, 문득 낮설게 느껴진 적이 있었는가? 그렇게 잘 알고 있다고 자신하고 있던 사람을 내가 잘 모르고 있음을 발견한 적이 있었는가?
제자들은 예수를 따라다니며 많은 것을 보았고, 가르침도 들었고, 심지어 자신이 많은 일을 하기도 하였다. 그런 과정에서 예수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본문에서 예수께서는, 그 제자들에게 아직도 그들이 메시아를, 하나님 나라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함을 보여주신다.

예수께서 오천명을 먹이심 (6:30-44)

1. 본문에서, 예수와 제자들이 어떤 일정으로 사역하고 있는지 관찰하여 보라.

2.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제안/충고에 주목하여 보라. 이것을 바탕으로 다음에 대하여 생각을 나누어 보라.
열정/열심 vs 전략적 사고, 하나님 나라의 즉각성vs. 점진성, 헌신 vs. 자아성찰

3. 예수께서 무리를 목자없는 양으로 여기신 구체적인 행동을 찾아서 정리해보라.

4. 먹을 것에 대한 예수님과 제자들의 대화를 보라. 누구의 제안이 더 실제적인 것으로 보이는가?

어떤 경우에 실제적인 생각과 제안이 하나님 나라의 일과 배치되는가?

5. 군중을 먹이는 일에서, 제자들이 해야했던 일들을 자세히 정리해보라. 예수께서 하셨던 일을 정리해보라. 일반적으로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는 것과는 어떻게 대비되는가?

6. 빵과 물고기가 남은 것을 정리하여 바구니에 담으면서 제자들이 했던 생각은 무엇이었을 것으로 생각하는가?

예수께서 물 위를 걸으심 (45-56)

 7. 무리를 보내실때,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필요와 자신의 필요를 어떻게 채우고 계신가?

8. 본문을 바탕으로, 예수를 만나기 전, 제자들의 정신적, 육체적 상태가 어떠했을 것으로 유추해볼 수 있는가?

9. 48절의 ‘pass by’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임하시는 모습(출 33:19, 욥9:11 등)을 생각하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예수께서 나타나심을 보고 어떻게 반응하는가?

10. 4장에서 풍랑을 잠잠하게 하신 기적과 대비해서 오늘 본문을 살펴보라. 둘 다 밤에 바다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4장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꾸짖으셨던 반면, 오늘 본문에서는 제자들을 다독이시고 격려하신다. 왜 이런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11. 바로 앞 본문(오병이어)에서, 예수께서 제자들을 통해 하게 하신 여러가지 구체적인 일들, 그리고 제자들로하여금 목격하고 기억나도록 하신 일들을 다시 생각해보라. 그런 맥락에서 52절의 제자들의 반응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12. 게네사렛 땅에서 다시 바쁜 사역의 루틴에 들어가면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바라보았을 것으로 생각하는가? 당신이 제자들중 한 사람이었다면 어떻게 느꼈을 것으로 생각하는가?

정리

13. 여러가지 당신에게 닥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거나 인정하고 있지 못할 때, 하나님께서 당신의 믿음없음을 드러내심과 동시에 그것을 위로하시고 격려하신 경험이 있는가? 나누어보라.

14. 당신이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실제 한계 상황에 닥치면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지식/깨달음/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해가 있을 것이다. 피상적인 이해나 생각에서 벗어나 구체적인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삶을 사는 지혜에 대하여 묵상하고 나누어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