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절망

지난 토요일에 있었던 성경공부도,
정말 열띤 모임이었다.

역시 내가 말을 너무 많이 하긴 했지만… -.-;
(말을 다소 공격적으로 하는 내가 말을 많이 하는 바람에 분위기가 쓸데없이 뜨거워진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공동체,
공동체적 구원,
구원의 확신,
미래적 구원과 현재적 구원,
penal substitution에 근거한 구원과 다른 견해의 대비 (이 용어를 사용하지는 않았으나 내용은 그런 것이 되었다.)
거룩한 절망,
성화 등등의 이슈를 나누었다.
다들 이 heavy한 문제들을 개인의 영역으로부터 이끌어 내는 모습이 참 멋있어 보였다.

그중,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과 자신의 현재 모습의 괴리로 인한 절망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누어주신 분이 있었다.
다들 진지하게 그 이야기를 경청했는데,
나는 그 분에게 물었다.
“무엇이 어떤 사람으로 하여금 그 거룩하고 진지한 고민을 하게 하느냐”고.
그분은 답을 하지 않으셨는데…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내게 아내가 물었다.
“당신은 거룩한 절망을 해본적이 있느냐”고.
한참의 침묵 속에 내가 할 수 밖에 없는 대답은….
그런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거룩한 절망조차도 하지 못하는 천박함이 내 모습인 것을…

나는 절망한다

요즈음 인터넷의 ‘젊은 세대’를 보면… 대략 두부류로 나누어 지는 것 같다.

첫번째 부류는, 모더니즘적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이다.
미국의 Northeastern liberal들과 매우 비슷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다.
정치적으로는 중도 혹은 중도 좌파의 성향을 가지고,
문화적으로는 개방적이며,
윤리적으로는 비교적 건전하고 (적어도 표방하는 자세로는)
종교적으로는 무신론이다.
이들이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은 다소 낙관적이고, humanitarianist 들이라고 할 수 있다.

두번째 부류는, 포스트모더니즘적 사고방식을 가진사람들이다.
정치적으로는 무당파,
문화적으로는 매우 개방적,
윤리적으로는 구속을 싫어하고,
종교적으로는 무신론보다는 무심론(無心論:관심이 없음)에 가깝다. 때로 다신론적 입장을 취하기도 한다.
‘I don’t care’가 이들을 표현하는 key point이다.

나는 이 시대의 이런 흐름들에 절망한다.
적어도 현재의 성향이 5-10년정도 지속된다면 한국교회는 지금의 유럽교회만도 못해질지도 모른다.

왜 이 모양이 되었을까?

그 이유에 대한 분석이야 이미 많이들 되어 있으므로 내가 따로 여기에 늘어놓는 것은 크게 의미가 없을 듯 보이나…
정말 더 마음을 짓누르는 것은… 앞으로 5-10년 이내에 이런 trend를 뒤집을 가능성이라도 볼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어떤 큰 일을 행하신다면 모르겠으나…
적어도 내가보기엔 매우 희박하다.

내 딸 민우가 대학생이 되었을 때에는,
born-again Christian 친구와의 fellowship을 누리며 인생의 계획을 나누느라 밤을 새우는… 그런 모습을 기대하기는 어려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절망한다…

누가복음 7:31-32
31 또 가라사대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꼬 무엇과 같은고
32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을 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