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ngs for Peace

누가복음 19장 후반부에 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도성을 보시며 우신다.
그러면서 말씀하시는 것이… 오늘 너도 평화에 이르게 하는 일 (things for peace)을 알았더라면 좋을 터인데!

그 평화에 이르지 못하는 도성을 보시며 우셨던 예수님.
우크라이나를 보시며 아마 우시고 계실 것 같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 예수님의 눈물을 담아…
뉴스를 보며 울어야 할 것 같다.

A Vision Worth Living

John Ortberg는 Dallas Willard의 아주 가까운 친구였다.
Dallas Willard는 그리고 John Ortberg의 멘토가 되어주었던 것 같다.

Ortberg는 최근 개인적으로 매우 고통스러운 일들을 겪었고,
자신이 섬기던 교회에서도 사임해야만 했다.

그리고는 이렇게 ‘fellowship of weathered hands’라는 그룹으로 이렇게 매일 video를 올린다.

어제 이분이 올렸던 비디오는 조금 더 특별했다.

참 감사했다.

정치와 신앙

나는 신앙이 충분히 정치적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니, 오히려 진정한 신앙인이라면 정치적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도 역시 신앙인으서,
꽤 분명한 정치적 성향을 가지고 있는 편이다.
적어도 내가 여태껏 투표를 했던 모든 선거에서 나는 한쪽의 후보만을 지지해왔다.

그러나,
자신의 정치적성향을 정당화하기 위해 신앙을 사용하는 것을 보는 것은 참 안타깝다.

어제 밤에 천년만에 내 facebook에 들어가 보았다.
뭐 내가 facebook에 연결되어 있는 분들중 당연히 기독교 신앙을 가진 분들이 많다.
그리고 정치적으로는 진보성향을 가진 분들이 더 많은 편이다.

그런데 이분들이 facebook에서 자신들의 정치적 견해를 정당화하는 방편으로 신앙을 사용하는 모습에는 실망이 되었다.
더 치열한 신앙적 고민이 바탕이 되어서 정치 진영이나 가치 혹은 정책등에 대한 제대로된 점검과 비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몇가지 꼬투리 잡을 것을 가지고 그러니까 누구는 안된다…. 뭐 그런 식인거다.

한국의 대통령 선거철이 되니 그런류의 포스팅이 넘쳐나는 것 같은데,
조금더 성숙하면서도 깊이있는 신앙적 성찰이 있는 모습들을 더 보고 싶다.
그리고 진지하면서도 신중한 고민들이 나누어지면 좋겠다.
그러려면, 적어도 이번 한국 대통령선거와 같이 진영별 정책의 차이가 적은 경우에는,
개별 정책들에대한 기독교적 평가와 비판등도 좀 잘 이루어지면 좋겠다는 생각도 있다.ㄱ그래서 그렇게 하고나서 보니까 아무개는 어떤 장점과 비판할점이 있고, 아무개는 다른 장점과 단점이 있다… 그러니 이러이러한 가치를 중심으로 투표하려면 어떤 후보가 좋다..
이런식의 좀 이성적인 이야기들이 좀 많이 들리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해외거주자이므로, 이번 토요일에 이곳 산호세에서 투표한다.
제일 마음이 가는 어떤 후보가 한 사람 있는데, 그 사람을 찍으면 내 표가 사표가 될 것 같고,
지금같이 박빙인 상황에서는 나 한사람이라도 표를 던져서… 누가 대통령되는건 좀 막아야 겠다는 생각으로 한표 던질 생각이다.

사랑을 포기하지 않기

미치도록 stress 받고 있는 중 ㅠㅠ

같이 일하는 대만 사람들은 완전 이상한 소리만 해대고,
중요한 deadline 어떻게 되었느냐고 거의 우리 사장 level부터 계속 졸라대고,
함께 일하는 우리 회사 사람들도 이상한 헛소리 틱틱 해대고,
그 와중에 잠자는 시간, 밥 먹을 시간도 부족해서 헥헥거리고 있는데…

성경공부 준비에, 설교준비에…

그럼에도 그게 누가 되었던 그 사람을 경멸하지 않고,
어떤 사람도 이 일이 되는데 장애가 되는 ‘장애물’로 여기지 않고,
모든 사람을 사랑할 대상으로 여기고,
내가 받는 stress를 다른 곳에 쏟아놓지 않고.

이를 악물고 사랑하기.
정말 사랑을 포기하지 않기.

고린도전서 15:58

고린도전서는 다들 아는 것 처럼 ‘부활장’이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에 대해 여러가지 이야기를 쭉~ 하고는,
나중에 아주 강력한 선언을 한다.

죽음아 너희 승리가 어디 있느냐,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있느냐.
죽음의 독침은 죄요, 죄의 권세는 율법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우리는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고나서 나오는 것이 고린도 전서 15:58이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주님의 일을 더욱 많이 하십시오.
여러분이 아는 대로, 여러분의 수고가 주님 안에서 헛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으니 우리가 하는 수고가 주님 안에서 헛되지 않다는 말.

우리의 수고가 헛되지 않는 근거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고, 죄와 죽음에 대하여 승리하셨기에,
우리의 수고가 헛된 것으로 돌아가지 않는 다는 것.
우리 삶과 사역에 대한 희망의 근거가 되는 것은 결국 예수님의 부활인 셈이다.

요즘 회사일 때문에 아침 7시 반부터 자정까지 컴퓨터 앞에 딱 붙어있다.
낮에 운동삼아 밖에 한 시간 뛰다 걷다를 하는데, 그때 그냥 전화로 쏟아지는 이메일과 text를 해결하면서 그나마 최소한의 운동 아닌 운동을 한다.
대만시간 새벽 2시에 그 사람들에게 text보내고, 내 시간 새벽 1시에 그 사람들이 보내는 이메일을 받는다.

이 와중에 괜히 어려운 갈라디아서 성경공부는 시작해가지고… ㅠㅠ
또, 목사님이 안식월 떠나시는 기간중에 하는 설교도 준비해야 하고.

가끔은 이렇게 미친듯이 stress받고 바쁜데,
한편 또 성경공부가 되었건 KOSTA가 되었던 그런 일을 함께 해야하는 일들이 있었다.
솔직히 꽤 자주 그랬다.

그럴때마다 나는
“그래, 네가 이기냐 내가 이기냐 한번 해보자”는 식으로 이를 악물고 그 터널을 지나곤 했다.
그리고 그때 매우 자주 이 고린도전서 말씀이 나를 붙들어주는 버팀목이 되었다.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자.
우리의 수고가 주님 안에서 헛되지 않다.

거대담론의 위험성?

기독교가 거대담론을 잃어버린채 개인윤리만을 이야기하는 종교라는 비판이 있었다.
그것에 대해 기독교에서도 거대담론을 이야기하는 여러가지 흐름이 있어왔다.

그중 매우 의미있기도 하고, 매우 큰 영향력이 있는 사람은 John Howard Yoder이다.
예수께서 이땅에 만들고자 하신 것은 세상의 악에 저항하는 공동체라는 것이다.

Christianity today에서 아마 20세기에 가장 영향력있는 책을 선정했는데,
1위는 CS Leiws의 Mere Christianity
2위는 Dietrich Bonhoeffer의 The Cost of Discipleship
3위는 Karl Barth의 Church Dogmatics
4위는 JRR Tolkien의 The Lord of the Rings
5위가 John Howard Yoder의 The Politics of Jesus 였다.

1,2위 책은 일종의 ‘경건서적,
3위는 12권인가 13권짜리 무지막지한 시리즈,
4위는 소설이니…
5위만이 그 나름대로의 학문적인 입장을 제시한 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요더는 성폭력을 저질렀던 것으로 나중에 알려졌다. 내용을 들어보면 아주 죄질이 나쁘다.

아니, 왜 그럴까?
어쩌면 그 사람의 기독교가 ‘거대담론만의 기독교’였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기독교에 거대담론이 필요한 것은 분명히 맞지만,
그리고 기독교에 거대담론이 담겨져 있는 것은 맞지만,
그 거대담론외에도 개인윤리가 분명히 담겨져 있는데 그것을 무시하거나 가볍게 여겼기 때문에 그런 끔찍한 일들을 저지르고도 기독교 윤리학자라고 이야기하고 다닐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요즘 갈라디아서를 공부하면서,
그리고 요한복음을 매일 묵상하면서,
거대담론이 담아내지 못하는 기독교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게 된다.

우…씨… 일이 터졌다.

대만의 어떤 회사에서 무슨 테스트를 해서 그걸 이번 주말전까지 보내주었어야 했다.
그런데 그게 3월 중순이나 되어야 된다고 갑자기 오늘 이야기를 해왔다.

이런게 말하자면… 폭탄이다.

이번주말전까지 그걸 받아서 다음주 초에 무슨 process를 하나 돌리고,
그래서 결국 2월 20일경에 여러 나라에서 clinical trial (임상실험)을 하도록 되어 있는데,
이 대만 회사가 빵꾸를 내는 바람에,
좁게 보면 수십명, 넓게보면 수백명에게 영향을 미치는 일이 터지게 된 것이다.
최소 수백만불, 어쩌면 수천만불 수준이 걸려있는…

부랴부랴 밤에 대만에 전화를 해서,
그쪽이랑 video call을 하고,
한편 소리도 지르고, 한편 부탁도 하고, 사탕발림으로 아부도 하고…
그래서 그 회사에서 폭탄 터뜨린걸 빨리 좀 수습해보려고 어제 오후 2시 이후 자기전까지 죽을 맛이었다.

그동안 회사 일이 많아서,
간당간당 살짝 아슬아슬하게 견디며 버티고 있었는데,
이 폭탄때문에 그냥 넘어가 버렸다. ㅠㅠ

농담반 진담반, 회사 사람들에게…
나 break-down 직전이다… 라고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이젠 무너졌다.

작은 냄비같은 내게,
엄청나게 일이 밀리면서 어…어… 이러다 끓으면 넘치는데… 그러고 있는데,
누가 갑자기 거기에 커다란 돌덩어리 하나를 확~ 던져 집어넣은 거다.

냄비 다 넘치고,
넘친거 타고,
여기저기 튀고,
내게 아무도 말도 시키지 마! 나 지금 죽을 맛이니까.
죽도록 이거 수습해야하니까.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사랑하기

I feel about John’s gospel like I feel about my wife; I love her very much, but I wouldn’t claim to understand her.
– N. T. Wright.

요한복음은 정말… 어렵다.ㅠㅠ
이건 거의 다른 종교의 경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한편, 그러니 요한이… 공관복음과는 다른 이 이야기가 문서로 남겨져 있지 않아서, 안타까움에 이런 복음서를 기록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할 수 있겠다.
그리고 리차드 보컴 같은 사람은 오히려 요한복음서가 더 역사적 기록에 가까울 것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했고.

이렇게까지 다른 복음서를 읽으면서 생각하게 되는 것은,
내가 믿고 있는 기독교는 정말 너무나도 다양한 얼굴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러니 내가 기독교를 이해하고 있다고, 그리고 예수님을 이해하고 있다고 착각하지 말아야 하겠다는 것.

그러니 N T Wright이 요한복음서에 대해서 한 이야기는 어떤 의미에서,
그냥 일반적으로 신앙의 대상을 예수님으로 삼는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에 대해서도 똑같이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나는 예수님을 다 이해하는 것 같지는 않지만,
그리고 여전히 계속 더 배워가고 있지만,
나는 그분을 사랑한다…

Honor Society

군대는 현대에 남아있는 유일한 명예사회 (honor society)이다.

나는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군대와 같은 ‘명예사회’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명예사회는 은혜가 작동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때로,
현대교회가 honor라는 것을 잃어버렸다는 생각이 들곤한다.
그것은 결국 honor의 가장 강력한 적(enemy)인 탐욕(greed)가 교회를 장악해버렸기 때문이다.

교회에 honor가 없다는 사실은, 교회가 탐욕에 의해 정복당했다는 일종의 사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