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불만족

어디에서 읽었는지 정확하기 기억이 나지도 않고,
내가 기억하고 있는 문구가 정확하지도 않지만,
내가 기억하기로는 John Stott가 했던 말이었던 것 같다.

리더는, 현 상태에대한 거룩한 불만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말하자면 앞으로 가야할 것에 대한 vision, 그리고 그렇게 가면 지금보다 훨씬 더 나을 수 있다는 소망이 있기 때문에, 지금의 상태가 만족스럽지 않은 것이다.

살아가면서,
흔히 이야기하는 ‘감사하는 삶’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계속해서 거룩한 불만족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참 힘들다.

그런데 더 힘든 것은,
그런 거룩한 불만족을 건강하게 가지고 있는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닌가 싶다.

판별식

나는 어떤 선택의 기로에 있을때, 그 선택의 기준을 명확하게 하기위한 판별식을 만들어보는 것을 좋아한다.

가령,
“지금 내가 정말 올바른 가치와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판별식은
“내가 그것을 위해서 죽을 수 있는가?” 라는 것이다.

지금 내가 나의 행복과 자아실현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는데, 이렇게 잘 살고 있는 거 맞아? 라는 질문이 들때, 내가 내 행복을 위해 죽을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던져보는 거다.
그러면 이게 말이 안된다. 내가 죽는데 행복이 무슨 소용이 있어?

그러니, 내가 그것을 위해서 죽을 수 있는가? 라는 질문에 ‘그렇다’라고 대답할 수 있다면, 적어도 나는 그것을 위해 내 인생을 걸고 꾸준히 살아갈 만한 가치가 있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고,
그 질문에 ‘아니다’라고 대답할 수 밖에 없다면, 그렇게 열심히 추구할만한 가치가 없는 것에 목매어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이건 꼭 내가 그 가치를 위해서 죽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내가 그것을 위해 죽을 수 있는가? 라는 것에 대한 대답이 논리적으로 말이 되는지를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마틴 로이드 존스에 대한 평가

마틴 로이드 존스는 내가 20대일때 다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괜히 좋아했던 분이다. ㅎㅎ
그분이 뭐라고 했는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괜히 그분이 좋다고 이야기하곤 했다.

그분이 쓰신 책 중에서 가장 명저라고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로마서 강해도 나는 사실 읽어본적이 없다.그렇지만 한 1~2년 동안 현존하는 그분의 설교 녹음을 엄청 열심히 들었던 적이 있었다.
하루에 거의 두편씩 그분의 설교를 들었었다.
그러니 마틴 로이드 존스에 대해서 아주 잘 안다고 이야기할수는 없겠지만 전혀 모르는 수준도 아니라고 할 수 있겠다.

최근에 youtube feed에 떠서, 박영선 목사님이 마틴 로이드-존스에 대해서 평가하는 clip을 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분의 그 평가가 참 좋다고 생각했다.

  • 그분은 기본적으로 신학자라기 보다는 부흥사라고 할 수 있다.
  • 그분의 가장 큰 장점은 ‘권위’에 있다. 같은 이야기를 해도 그분이 하면 훨씬 더 권위있게 느껴진다.

이렇게 박영선 목사님이 정리한 이야기를 듣고 나니, 어… 정말 그렇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그런 것 같다.

잔치에 대한 설교

작년 가을에 간사들에게 online으로 설교를 하나 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짧은 설교를 한 것이 있었다.

이제 금년 KOSTA의 주제가 website에 공개되고 등록도 시작되었으므로…
그래도 그때 했던 설교문을 여기 올리는 것도 괜찮겠다 싶어 하나 올려본다.

누가복음 19:1-10
예수께서 여리고에 들어가 지나가고 계셨다. 삭개오라고 하는 사람이 거기에 있었다. 그는 세관장이고, 부자였다.
삭개오는 예수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려고 애썼으나, 무리에게 가려서, 예수를 볼 수 없었다. 그가 키가 작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예수를 보려고 앞서 달려가서, 뽕나무에 올라갔다. 예수께서 거기를 지나가실 것이기 때문이었다.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러서 쳐다보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삭개오야, 어서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서 묵어야 하겠다.”
그러자 삭개오는 얼른 내려와서, 기뻐하면서 예수를 모셔 들였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서, 모두 수군거리며 말하였다. “그가 죄인의 집에 묵으려고 들어갔다.”
삭개오가 일어서서 주님께 말하였다. “주님, 보십시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습니다. 또 내가 누구에게서 강제로 빼앗은 것이 있으면, 네 배로 하여 갚아 주겠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인자는 잃은 것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너무 여러분들 모두가 잘 알고 계셔서, 여러분중 누구보고 설교를 하라고 해도 할 수 있을 만큼 유명한 본문입니다.

한국도 그렇고 미국도 그렇고,
밀레니얼 generation 이후의 사람들이 소위 ‘공정’에 대해 민감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저는 나이로보면 X generation에 해당하긴 한데요, 제 스타일이랄까, 사고방식이랄까 그런 것은 baby boomer에 더 가깝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제가 하는 이야기가 소위 ‘꼰대질’로 들려지지는 않을까 하는 고민이 사실 조금 있습니다.

왜 밀레니얼들이, 그리고 Z generation들이, 그렇게 공정에 목말라 하나요?
그건 세상이 공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그렇지요.
그런데요, 저 같은 X generation이나, 제 앞의 boomer들, 아니 한국에서는 제 부모님에 해당하는, 일제시대나 전쟁마당에 태어나서 자라신 분들과 한번 비교해 보지요.
지금 여러분이 살고 있는 세상이, 그분들의 살았던 세상보다 정말 더 불공정할까요?
아… 여기까지 듣고….
에이, 저 인간 꼰대야… 그렇게 마음 떠나시지 말기 바랍니다.
그러니까 너희들이 문제야… 라떼는 말이야… 그런 이야기하려는거 아닙니다. 조금만 참고 더 들어주십시오.

자, 다시 질문을 던져봅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그리고 우리가 섬기고 있는 코스탄들이 살고 있는 시대가, 예전보다 더 불공정할까요?
음… 뭐 여러가지 이야기를 해볼수 있지만, 저는 정말 그렇다고 확실하게 이야기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 생각엔요, 지금 여러분의 세대가, 저희 세대에 비해서는 좀 더 불공정한 측면도 있다고 봅니다.
그렇지만 제 부모님 세대와 비교해서는 말로 더 할 수 없이 공정한 시대에 살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렇다면 왜 여러분들에게, 코스탄 세대에게, 공정이 그렇게도 중요할까요?

제가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지금 제가 이야기드리는 이 예화가 어디에서 나왔었는지 좀 찾아봤는데 내용은 기억이 나지만 출처는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출처가 좀 명확하지 않습니다만…그리고 detail이 조금 틀릴수도 있겠습니다.
아마도 Tim Keller의 Redeemer 교회에서의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교회에서 제 기억이 맞다면 이라크 전쟁후에 그 지역에 정신과의사와 상담가들을 선교팀으로 보냈다고 합니다.
여러분 아시지만 전쟁이라는게 정말 참혹하지 않습니까.
잔인하기도 하고요.
옆에서 사람이 폭격을 맞아 몸이 갈기갈기 찢기며 죽는것을 경험하는 것이 전쟁이지요.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을 내가 눈으로 보는 앞에서 잃게되면, 그런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평생에 트라우마로 남겠지요.
그래서 그런 사람들을 도와주고자 정신적인 것을 도와주려고 사람들을 보냈다고 합니다.
그런데요… 이 사람들이 그곳에 갔다가는… 다소 허무하게 거의 빈손으로 그냥 돌아왔다고 합니다.
이 사람들은 그 참혹한 전쟁을 겪었는데도요, 생각보다 그렇게 심각한 트라우마가 그렇게 많지 않은 겁니다. 왜 그럴까요? 이 사람들에게 있어서 고통이라는건 그냥 너무나 당연한 심지어는 자연스러운 삶의 일부였던 거지요.

대개 한국에서 군대를 다녀온 남자들과 이야기를 해보면요,
자기가 제일 힘든 군대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죽을뻔 했다, 너희는 군생활 편하게 하는거나, 나때는 진짜 힘들었다…

대개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들과 이야기해보면요, 자기가 하는 직장생활이 제일 힘들답니다.
네가 몰라서 그렇지 이 직종에 얼마나 스트레스가 많은줄 아느냐….

육아를 하는 아빠나 엄마는요, 자기 애를 키우는게 제일 어렵고요,

공부를 하는 학생은 자기 지도교수가 제일 악당입니다.
자기 전공이 제일 힘들고요.

그래서 사람들은 성경을 읽을때,
사자굴에 들어간 다니엘이 자기라고 생각하면서 막 은혜를 받습니다.
그래, 나는 지금 사자굴에 있는 거야… 여기서 은혜받아야돼…

여러분,
불과 지금으로부터 200년전 정도만 하더라도요,
세계 대부분의 나라에서 그 인구가 유지되려면요,
한 부부 사이에서 적어도 4~5명의 아이가 태어났어야 했다고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정말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죽었던 거지요.
어릴때 아이들이 죽기도 하고요, 조금 커서 죽기도 하고, 여성은 아이를 낳다가 죽는 일도 많았고요, 크고 작은 전쟁도 있으니 남자들은 그렇게 죽기도 했겠고요.

여태껏 전 세계에서요,
그리고 전 세계의 역사속에서요,
여러분과 저같이 현대의 서구사회와 선진국에살고 있는 사람들과 같이
고통, 어려움, 아픔, 불공정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사람들은 없었습니다.
우리들은 인류 역사상 그런 의미에서 가장 형편없이 연약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고통을 어떻게 다룰지 정말 잘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삶에는 당연히 고통이 없어야 한다고생각하고요,
고통이나 문제가 생기면, 이걸 어떻게 해결해야지? 이거 누구책임이지? Who do I sue for this? 뭐 이런걸 따져본다는 겁니다.

저는 여러분이, 우리 코스탄들이 경험하는 불공정이나 힘든 상황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특히 저는 그런 이야기를 하면 안됩니다. 저는 그래도 20대, 30대에 여러분들보다는 더 공정해보이는 상황과 환경에 있었거든요. 저때는 적어도 제게 주어진 환경에서는, 노력하면 미래에 대한 꿈을 꾸어볼 수 있었으니까요.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세상에서 제일 힘든 거야…
우리 세대가 제일 불공정에 노출되어 있는 거야…
그래서 맨날 눈물 짜고, 맨날 분노에만 사로잡혀 있고,
내가 세상에서 제일 힘들고, 내가 세상에서 제일 억울하고….
이거는요, 어쩌면 지극히 자기중심적으로만 세상을 보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닐지 한번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자, 공정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을 했으니,
예수님 당시 로마시대는 얼마나 공정했을까 하는 것을 한번 살펴보지요.

이 slide는 로마시대에 수도인 로마시에 살고 있었던 사람들의 계층별 퍼센트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보시면요, 0.04%의 제국 엘리트, 2~3%의 지역 엘리트, 7% 정도의 약간 여유가 있는 계층의 사람들, 주로 상업등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나 군인들이었던 것이고요,
그리고는 22%의 사람들이 최소의 생존가능한 수준에 살고 있었습니다.
또, 40%의 사람이 아슬아슬하게 최소 생존이 가능하거나 살짝 모자른 수준의 삶을 살고 있었고요,
28%는 최소생존레벨보다 낮은 상태에서 살고있었습니다.

이건 로마제국중에서도 그래도 제일 번성한 수도의 통계이니까요,
변방인 이스라엘 지역은 이보다 아마도 훨씬 상태가 좋지 않았을 겁니다.
전체 인구의 절반 이상은 생존자체가 어렵다고 느껴질만한 상태에 놓여있었을 수도 있겠지요.
예수님께서 주로 활동하시던 나사렛 같은 지역은 특별히 더 가난한 지역이기도 했고요.
물론 삭개오가 있던 여리고는 나사렛보다는 조금 나았겠습니다만.

여기에 공정이 어디 있겠습니다.
균등한 기회, 공정한 경쟁… 이건 뭐 꿈도 꾸어보지 못하는 세상인거죠.

오늘 우리가 읽은 삭개오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배경은 이렇습니다.
그야말로 금수저로 태어나지 않으면 생존 자체가 대단히 어려운 그런 사회입니다.

그런데요,
여기서 삭개오는 키가 작았다고 했습니다.
글쎄요, 얼마나 키가 작았는지는 본문에 나와있지 않으니 잘 모르겠습니다만 혹시 유전적 왜소증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볼 수 있겠습니다. 키가 다 커봐야 1m도 안되는 거죠.
뭐 그렇게까지 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키가 작다는 것이 이 사람에게 일종의 컴플렉스가 될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세관장/세리장이라고 했습니다. Chief tax collector
많이들 아시겠습니다만 그 당시 로마는 이스라엘땅같은 곳까지 모든 관리를 파견해서 모든 행정을 control하지 않았습니다.
세금에 관한한, 말하자면 이 지역에서 세금을 걷어서 로마에 바칠 사람을 구한다… 라고 공고를 내면 사람들이, 나는 이정도를 거두겠습니다… 는 식으로 각각 프로포잘을 내고, 로마는 그중 괜찮은 사람을 골라서 그 사람이 세금을 걷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로마는 그 사람이 약속한 세금 액수를 제대로 징수만 한다면 그 사람이 어떻게 하든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세리들, 세금 공무원들이 정해진 세금보다 더 많이 걷어서, 자기가 챙기고, 약속한 액수를 로마에 바치는 방식으로 살았죠.

그러니,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런 세리들을 정말 미워했습니다.
오죽해야, 죄인들을 표현할때, 세리와 죄인들 이라고 복음서에 표현된 것이 있지요.
세리는 그냥 죄인들과 함께 포함시키고 싶지 않을 정도로 사람들이 미워했습니다.

그런데요,
이 삭개오는 왜 이런 직업을 선택했을까요?
뭐 본문에 나와있지 않으니, 우리가 알 수 없지만,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아주 특출하게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지도 않았고, 게다가 자라면서 몸이 왜소하니 사람들로부터 무시를 당하거나, 힘으로 하는 일에는 자꾸 뒤로 쳐졌을 지도 모르지요.
정말 죽어라고 열심히 하면 겨우 먹고 살 수 있을까 말까 하는 정도로 살 수 있는데, 자기가 가진 상황을 보니, 먹고살수 있을만큼 벌수 있을 것 같지도 않은 겁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과연 살아남는 건 가능하긴 한걸까…

그런데 세금 공무원이 되어서 엄청 욕먹으면서 살면, 그래도 먹고 살수 있게 되는 거죠.
아니, 먹고 살수있게 되는 걸 넘어서 심지어는 부를 축적하는 사람도 있는 겁니다.

그래 그거다…
그래서 세금 공무원이 되는걸 선택했을 지도 모르지요.

성경에는요, 특히 복음서에서는
예수님께서 그 죄에 대해서 아주 관대한 부류의 죄인이 있고요,
별것 아닌 것 같은데 엄청 까탈스럽게 하시는 부류의 죄인이 있습니다.

가령 간음하다 걸린 여인, 향유를 깨뜨린 여인 같은 사람들이요.
예수님이 그냥 이 사람들에게는 관대하십니다.
그런데 바리새인, 율법학자들 이런 사람들에게는 세상 까칠하시지요.

왜 그럴까요?

예수님께서 관대하신 부류의 사람들은,
Sinned sinners들입니다.
그러니까, 사회체제의 부당함 때문에 죄를 짓지 않고는 살아갈 길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죄를 짓게된 부류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까칠하신 부류의 사람들은
Sinning sinners들 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살수 있는데 적극적으로 죄를 짓기로 선택함으로써, 부당한 사회체제를 구성하는데 일조를 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삭개오에게 그렇게 관대하셨던 것은 삭개오가 전자,sinned sinner 즉,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살았던 사람이었기 때문은 아니었을지요.

그래서 삭개오는 돈은 많은데, 이게 뭐야…생각하던중 예수님 소식을 듣고 나무위에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스토리는 여러분들이 잘 압니다. 오늘 말씀 읽은 것 같이, 예수님이 삭개오를 발견하셨지요. 그리고는 너희집에 가자고 하십니다.

그런데요,
그 당시 이렇게 유력한사람이 말하자면 부자집에 가면요, 그 마을 사람들에게 그 음식을 먹는 그 장소를 개방하는 일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마을 잔치를 여는 거지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깨어진 사회 체제 속에서,
나름대로 살아보겠다고 버둥버둥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렇게 저렇게 살아남은 삭개오를 부르시면서 아주 뜬금없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삭개오야,
너희집에 가자. 그리고 오늘은 저희 집에서 파티다!

이거, 파격입니다.
삭개오는 사람들이 다들 기피하는 인물입니다. 이 사람이 그 마을 사람들의 돈을 빼앗아서 그것으로 자기 배를 채웠다고 해서 사람들이 다들 미워하는 사람입니다.
사회적, 경제적인 부조리함, 그 속에서 그 깨어진 사회 체제 내에서 살아남기 위해 수동적으로 죄를 선택한 사람, 그리고 그 사람을 미워하는 사람들…
이런 상황 속에서 예수님의 solution은 잔치였습니다.

잔치가 조금 진행이 되었겠지요.
사람들은, 그 가난한 사람들은, 오랜만에 이렇게 동네 잔치가 벌어진 곳에서 배를 채우며 살짝 기분이 좋아졌겠지요. 술도 한잔씩 했을 지도 모르고요.
그리고 그 잔치에서 삭개오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습니다. 또 내가 누구에게서 강제로 빼앗은 것이 있으면 네배로 하여 갚아 주겠습니다.”
이거 살짝 맛이 간 얘기입니다.
삭개오의 전재산은 결국 다른 사람의 재물을 강제로 빼앗아서 모아진거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강제로 빼앗은 것을 네배로 갚아주면요? 이건 수학적으로 불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삭개오는 어쩌면 술에 살짝 취해서 얼굴이 벌개져서 그렇게 이야기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듣고 와아~ 그렇게 조리를 지르며 박수를 치고,
노래해, 노래해… 뭐 그런 소리를 함께 질렀을지도 모르고요.
그리곤 삭개오가, 그 사람들로 부터 손가락질 받고, 미움받던, 그래서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갈수도 없었던 그 삭개오가,
기분이 좋아져서 자기가 평소 좋아하던 노래 한곡을 쭉~ 뽑았을지도 모르지요.
그렇게 한참 분위기가 최고조에 이르렀을때,
함께 음식과 술을 즐기며 계시던 예수님께서 선언하십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사람들은 우아~ 함께 박수를 치고 그 삭개오를 다시 그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입니다.
함께 뭐 기차놀이 그런거라도 했을려나요.
마당을 함께 빙빙 돌면서 춤도 추고.
이 일이후로 삭개오는 다시는 세금 더 걷어서 자기 잇속 챙기는 일은 하지 않았겠지요,
그렇게 되면, 안그래도 빡빡한 삶을 살아가던 사람들에게는 그만큼의 숨쉴 여유가 조금 더 생기는 것이겠고요.

잔치입니다.
이렇게 잔치가 벌어지면,
그 가난해서 먹기살기 힘들었던 사람들이 함께 먹을 것을 나누는 일이 벌어집니다.
어쩔 수 없이 살아남기 위해서 죄를 지었던 사람이, 하나님과 사람들로부터 용서를 받고 다시 공동체에 받아들여지는 일도 벌어집니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예수님이 그 모든 사람들과 함께 노래도 부르시고, 어깨동무도 하시면서, 그 함께 하시는 겁니다.

복음서에는 얼마나 많은 잔치에 대한 비유들이 나옵니까? 예수님도 정말 많은 잔치에 참석하시기도 하시고요.

마태복음 9장 에 금식에 대해 말씀하실때, 신랑이 있을때는 금식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실때 잔치의 모티프가 나오지요.
마태복음 25장 열처녀 비유, 이거 완전 잔치얘기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잃어버린 양을 찾았을때, 잃어버린 돈을 찾았을때 사람들이 기뻐해서 이웃과 함께 잔치를 벌이는 것이 나오고요,
무엇보다도 탕자의 비유에서 그 아들이 돌아왔을때 아버지는 살진 송아지를 잡아서 온 동네 사람들을 다 초대해서 잔치를 벌이지요.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예수님이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사건,
마태복음 22장에 나오는 혼인잔치의 비유 – 천국은 마치… 혼인잔치를 베푼 것 같다고 하셨죠.
생각해보면 허허벌판에서 먹을 것이 없었던 군중에게 베푸셨던 오병이더도 잔치 였을 테고요,
아이러니컬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최후의 만찬도 유월절 만찬, 잔치였습니다.
거기 보면 그렇게 사람들이 만찬을 마치고나서 함께 노래를 부르면서 올리브산으로 올라갔다고 나오고요, 잔치 끝나고 함께 노래하면서 간거죠. 그리고 나서 겟세마네에서 제자들이 그렇게 예수님과 함께 기도하지 못한것도 아마도 이 사람들이 취해서 그런게 아니었겠나 싶기도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질병을 고쳐주신 그 많은 사람들…
그런 치유가 있는 곳마다 사람들은,
잔치를 벌이지 않았겠습니까?
예수님이 쭉~ 지나가시면 그 길을 따라 잔치가 쭈욱~ 펼쳐지는 겁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잔치 없는 세상에 잔치를 베풀어 주시고자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믿는 복음은요,
이 잔치 없는 세상에 잔치를 전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잔치를 베풀어 주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는 것은,
아직 그렇게 우리가 전하는 잔치는 완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여전히 어떤 이들에게 잔치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언젠가는…. 우리 주님께서 친히 베풀어주시는 정말 즐거운 잔치가 있을 것입니다.

제가 앞에서,
예수님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절망적인 상태에 있었는지를 잠깐 설명해드렸습니다.
경제적 어려움을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이들에게 닥친건 경제적 어려움만은 아니었지요. 정치적으로도 이방의 지배하에 있었고,
중교적으로도 여전히 ‘extile’의 상태에 놓여있었지요.

거기에서 예수님이 하신건…
그 사람들에게…
그 걱정과 두려움에 눌려있는,
답답함과 억울함게 휩싸여 있는,
무기력함과 패배감에 빠져있는
그 사람들에게…
그냥 뜬금없이 얘들이, 잔치다!!! 이렇게 외치시는 것 같은 거죠.

그 잔치를 모르는 사람들이라면 이렇게 얘기할겁니다.
아니, 지금 상황이 이렇게 힘든데,
도대체 잔치가 무슨 말이냐고.
예수님, 그렇게 개념없는 얘기 하지 마시라고.

그런데 오늘 삭개오의 이야기에서 보듯,
예수님의 그 잔치는 개인을 변화시키고, 공동체가 변화되고, 깨어진 관계가 회복되고, 무기력감과 패배감에 눌려있는 그들의 얼굴에 웃음을 되찾아 줍니다.
그래서 이들이 그 처해있는 상황과는 다른 대안을 보게하고 꿈꾸게 하는 겁니다.

지금 살기가 힘들다고요?
그래서 잔치같은 이야기는 통하지 않을 것 같다고요?
전체 인구의 절반 이상이 정말 절망적인 상태에 놓여 있었고,
자신이 믿던 종교가 강력한 역사상 최고의 제국에의해 짓눌리고 있는 상황이었던 그곳에서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잔치가 벌어질 수 있었다면요,
지금도 그 잔치는 가능한 겁니다.
그 잔치가 어떻게 벌어지는지 지금 당장 우리가 모든 그림을 다 그리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잔치는 우리에게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네, 그 잔치가 아직은 완벽하지 않을수도 있습니다.
그 잔치가 전파되더라도, 여전히 고통과 가난과 불평등과 폭력이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 잔치가 벌어지는 한편에서 어떤 사람의 눈에는 여전히 눈물이 남아 있을 것이고요, 여전히 어떤 사람은 매일 프로작을 먹으며 하루하루를 보낼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잔치가 아닌 것은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깊은 아픔과 상처의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면서도,
여전히 우리 하나님이 참 좋으신 분이라고,
여전히 우리 예수님의 은혜가 놀랍다고…
그렇게 잔치에 사람들이 참여하게 되는건…
그런 일들이 벌어지는 신기하고 놀라운 것이 이 하나님 나라 잔치입니다.

삭개오 집에서의 잔치도,
분석적으로 문제 하나 하나를 해결하기위한 전략을 세우고,
그것을 실행하는 task force team만들어서…
Execution을 하기 위한 resource 확보하고..
그렇게 이루어 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삭개오야, 오늘 너희집에서 내가 간다. 그리고 잔치다!
그렇게 하면서 삭개오의 과거 삶속에 쌓여왔던 개인의 문제도,
그 마을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관계의 문제도,
함께 확~ 드러나고 풀려나가는 일이 벌어지는 거죠.
그러면서, 그 당시 사회체제가 가지고 있던 불공정의 문제를 공동체가 어떻게 다루어낼 수 있는가 하는 가능성도 확인하게 되고요,
무엇보다도 그러면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가 드러나고,
그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하는 것이 드러나게 되는 겁니다.

이미 자신의 문제가 다 해결된 사람들에게만 잔치가 허용된다면 그것이야 말로 ‘은혜’가 아니잖아요.
그 사람의 상태가 어떠하던지 간에, 자격에 관계 없이 그곳에 초대되어야 은혜잖아요.
그래서 이 은혜의 잔치에는 역설적이게도 눈물도 아픔도 상처도 아직 남아 있습니다.

그렇지만 잔치 입니다.
실망에, 눈물에, 아픔에, 좌절에, 두려움에 눌려 있던 사람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는 잔치 입니다.

지금 전 세계적으로요,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기독교 종파가 어디인지 아십니까?
오순절입니다.
우리 간사님들중 오순절 계통 교회를 다니시는 분들이 얼마나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오순절, assembly of God, 순복음 교회 그런 쪽이요.
왜 그럴까요?
이분들에게 신앙생활은 잔치입니다.
이분들 예배드리는거 보십시오. 정말 잔치입니다. African American들이 많이 있는 오순절 교회 가보시면요, 정말 엄청 잔치입니다.
이분들은 아… 오늘은 창세기 1장 1절부터 2절까지 강해를 하겠습니다…
뭐 이런거 안합니다 .

이 오순절 계열의 교회들은 주로 가난한 나라에서 아주 급격하게 퍼지고 있습니다.
이분들이 그 가난 속에서도, 그렇게 잔치를 하면서 자신이 그렇게 눌려있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지요.
이 잔치는, 눈물이 많고 상처가 많은 사람도 함께 참여할 수 있는 그런 은혜의 잔치라는 것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드러난 그 하나님의 사랑으로 펼쳐지는 이 잔치에 참여하면,
지금 이 땅에서도 이 눈물많은 땅에서도 잔치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게 되고요.
그리고, 그리고, 언젠가 그 백성의 눈에서 눈물 닦아주시는 다른 차원의 잔치가 있을 것이라는 가슴 터지는 기대가 그들을 사로잡게 되는 것입니다.

이번 코로나 바이러스가 막 퍼지기 시작할때쯤,
유튜브에서 여러 형태로 많이 나오기 시작한 ‘blessing’ 찬양 아십니까?
각 지역에서 그 지역의 교회들이 일종의 연합 찬양단을 만들고, 함께 production한 찬양 영상들입니다.

또, 안드레아 보첼리가 팬데믹과 함께 처음 맞이하는 부활절에 텅빈 광장에서 amazing grace를 불렀던 영상을 보신분들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요,
이렇게 찬양을 하는 사람들도 다 두렵고 혼란스럽고 움츠려들 수 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러니 그런 상황에서 이렇게 찬양을 하고,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축복한다는 것은 이상한 일입니다. 뭐랄까 정신나간 일 같아 보인다고 할까요.
Absurd 한겁니다. 부조리 한겁니다.
그런데요, 이런 찬양을 하는 것은 우리의 시각을 확~ 다른 곳으로 옮겨다 놓습니다.
이거 어쩌나, 나는 어떻게하나… 하는 것으로부터,
우리가 정말 어떤 존재인가,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가,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영원한가 하는 정말 바라보아야할 것을 바라보게 합니다.

여러분도 그런 경험들 많이 있으실줄 압니다.
나도 힘들어 죽겠는데,
내 상황도 너무 어려워서, 내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데,
때로는 이렇게 다른 사람을 축복하면서 다른 시각을 가질때 새로운 것을 보게되는 거지요.

가령,
내 문제가 산더미같이 산적되어 있을때,
혹은 그렇게 문제가 산더미 같이 산적되어 있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공동체가있을때,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한시간동안 자신을 위한 기도를 멈춘채 세상을 축복하는 기도만 해보는 거지요.
그러면서… 아… 그렇구나…. 하나님의 나라는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구나…
그리고 이렇게 하니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정말 보이는구나…
나는 이렇게 축복을 하면서, 베풀면서, 사랑하면서, 섬기면서 살아가야 생명력이 삶 속에서 살아나는 사람인거구나… 이런걸 깨닫는거죠.

저도 KOSTA 하면서 그런 경험 숱하게 했습니다.
공부를 하던 시절에는 너무 공부하는게 잘 풀리질 않아서 정말 죽고싶을만큼 힘들었는데요, 그때도 죽어라고 잔치를 베푸는 사람으로 살려고 버둥거렸습니다.
학생시절 돈이 너무 없어서 세븐일레븐에 있는 복권기계를 보면서 눈물이 핑~돌면서 하나님 저는 왜 이렇게 돈이 없나요…. 그렇게 기도했던 때에도, 제돈 들여서 잔치에 참여하고, 잔치를 베푸는 사람으로 살려고 온갖 힘을 다 쏟았습니다.
인간관계 갈등으로 정말 말로 다 할수 없이 고통스러웠을 때에도,
회사에서 layoff를 당했을 때에도,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 많은 아픔을 갖게되어서, 그 아픔을 함께 짊어지며 고통스러워할때에도,
사람들을 축복하고, 잔치를 벌이고, 잔치에 참여하는 일에는 죽어라고 제 머리를 디밀며 살았습니다.

하나님나라는, 정말 잔치와 같은 거지요.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어쩌면 우리들에게 하시는 이야기는 이것입니다.
너희도 그렇게 잔치를 전하라고.
그 웃음없는 세상에서, 어쩌면 그렇게 뜬금없어 보이더라도, 그렇게 잔치를한번 해보라고.
너도 힘든거 아는데,
네 코가 석자라는 것도 아는데,
그래도 해보라고.

내가 선포하는 하나님의나라는,
그렇게 잔치 없는 세상에 잔치를 가져다 주는 것이라고.

여러분 그것 아십니까.
정말 하나님나라가 그렇게 잔치라면요…
어쩌면 그것을 사람들이 조금 더 경험할 수 있도록 하는 일을 하고 있는 우리 간사님들은,
정말 말로 다 할 수 없는 특권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섬기는 KOSTA를 통해서,
어떤 사람들의 얼굴에 웃음을 되찾아 주고,
움츠려 있는 어떤 사람들에게 감격의 눈물을 선물로 주는 일을 하는 거잖아요.

우리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는 그 잔치, 그 파티, 그걸 우리가 베푸는 거잖아요.

그리고 그렇게 하면,
아니, 그렇게 할때에야,
그 잔치에 참여하할때에야,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제자리를 찾아가는 겁니다.
그렇게, 그렇게… 하나님 나라는 잔치입니다.

삭개오와 그 마을에게 벌어진 잔치가,
우리들에게도,
우리 간사님들의 삶 속에서도,
우리가 섬기는 KOSTA에도,
또 우리 귀한 KOSTAN들에게도…
정말 그렇게 벌어지길 바랍니다.

늘 하는 얘기를 또 하는 거라고?

교회에서 예전에 ‘하나님나라’에 대한 설교를 한번 해보겠다고 이야기했던 적이 있었다.
그랬더니 반응은…
‘그거 다 아는 얘기인데 왜 또 하냐’라는 것이었다.

혹은,
‘그건 이미 다 했으니 너 같은 직장인이 할 수 있는 얘기를 좀 해라’ 라는 반응이기도 했다.

한편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나는 우리 교회에서도, 그리고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라는 개념은 익숙하지 않은 개념이라고 확신한다.

실제로 그렇게 다 안다고 말하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해 보아도,
그 하나님 나라의 관점으로 세상을 해석하는 경험자체가 전혀 없는 경우도 많고,
하나님 나라의 관점으로 성경을 읽는다던가 하는 것도 전혀…

그래서 막상 그 다 안다고 이야기하는 하나님 나라 이야기를 해보면, 엥? 그런거였냐고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내가 맨날 하는 얘기 또 하는 것 같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분명 있는데,
그리고 그분들 말이 일부 맞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하는 얘기 또 하는 것이 당분간 더 필요할 것 같다.

시간을 낭비하여야할까?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당연히 바람직하지 않다.
해야할 일보다 할 수 있는 시간이 제약이 많은 경우, 시간을 아껴서 잘 쪼개쓰는 지혜는 필요하다.

그러나,
가령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이렇게 효율적 시간관리의 차원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좋은 친구가 되는 일은 그냥 그 사람과 많은 시간을 보내며 시간을 낭비하는 일이 필요하기도 하다.

또한 나는,
하나님과의 관계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를 위해서는 하나님과 보내는 시간을 낭비해야할 필요가 있다.
매우 비효율적으로 하나님과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바쁘게살아가면서,
어떻게, 어떤 사람들과, 언제 시간을 낭비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내게 더 큰 지혜를 요구한다.

이것이 어떤 경우에는 그저 미련한 시간낭비가 될수도 있고,
어떤 경우에는 건강한 시간낭비가 될수도 있으니…

작년정도부터,
나는 교회에서 시간낭비를 좀 줄여야겠다고 결심했고, 그렇게 실행을 했다.
그건 어떤 사람들에게 야박하게 느껴질수도 있었겠지만,
다른 곳에 시간낭비할 여유를 찾기 위해서였다.
정말 내가 더 도움이 되고, 내게도 유익이 있는 곳에 시간을 낭비해야겠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 결정이 정말 잘 한 것일까?
점점… 그렇다는 쪽으로 생각과 확신이 깊어진다.

지난 몇달,
미친듯이 회사일이 바빴는데,
지난 몇주,
미친듯이 그 일을 줄이고 일을 해결하려고 뛰었다.

그래서 잘하면 이 일의 일부를 다른 사람들과 조금 나누어질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면 조금은 더 살만해지는 것.
그러니 시간낭비할 여력이 조금은 더 생기게 되는 것.

이번 여름까지는 KOSTA를 위해 시간낭비를 조금 더 하게되겠고,
5월 이후에는 민우를 위해 시간낭비를 더 하게 되지 않을까.

이런 일련의 조정들은,
연초에 결심한대로…
내가 기능하지 않고 존재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 같다.

Gabriels’s Oboe

Gabriel’s Oboe는 영화 The Mission에서 가브리엘 수사가 과라니족과 처음 만날때 연주하는 곡으로 영화 전체의 가장 중요한 theme이 된다.

사실 위의 영상보다 아래 링크에 나와있는 것이 훨씬 더 스케일도 크고 좋은데, 이건 embedd가 되지 않아서, 아래 링크로만 남긴다.

이곳 링크

이 영화는 내가 대학을 합격하고서 그 겨울에 보았던 영화였다.
그 스토리와 영상과 음악에 압도되어서 그 삭막한 예비공돌였음에도 그 감동이 넘쳐났던 기억이 있다.

어제 문득 내 youtube feed에 이 곡이 떠서,
한참동안 이 곡을 몇번이나 다시 들었다.

이렇게 좋은 곡을 선사해준 Ennio Morricone가 참 감사하다…

기울어진다, 그러나 지지 않는다

어쨌든,
적어도 내가 판단하는바, 한국 교회는 기울어지고 있다.
미국에 있는 한인 교회도 그렇다.
그리고 적어도 내가 경험하는바 미국의 많은 교회들 역시 마찬가지다.

더 심각한것은 이 기울어지는 추세를 뒤집을 방법이 없어보인다.
그리고 계속 더 추악하게, 더 빨리 기울어가게될 것 같다.

대단히 고통스럽다.

그러나,
다시한번 주먹을 불끈쥐고 결심한다.
기울어지지만, 지지는 않는다.
나는 계속 내가 할 수 있는 한, 믿음 지키며 살거다.
내가 그렇게 믿음 지키며 사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다른 소리 하는 사람들 있는것을 당연히 여기고,
나는 그냥 그렇게 믿음 꼭 지킬거다.

어제밤에는 어떤 사람과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전화를 했다.
전화를 끊고 혼자 울었다.
그리곤 다시 그렇게 결심했다.

아, 전달이 잘 안된다.

요즘 갈라디아서 성경공부를 하고 있는데,
나는 정말 엄청나게 큰 전율을 느끼며 공부를 하고 있다.

그리고 요즘 교회에서
다니엘서를 가지고 설교를 몇번 하고 있는데,
나름대로 그 설교를 준비하면서 꽤 깊은 감동이 있다.
그리고 마음속에 아주 깊은 간절함도 있고.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내 안에서는 뭔가 끓어오르기도 하고,
내 안에서는 이렇게 간절하기도 한데…
이게 그렇게 막상 잘 전달이 안되는 것 같은 거다. ㅠㅠ

성경공부를 함께 하는 사람들에게도 미안하고,
주일 아침에 다른 교회보다 한시간이나 일찍 나와서 설교를 듣는 사람들에게도 미안하고

내가 30대에는…
내 안에 있는 내용의 깊이에 비해 나는 참 presentation을 잘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게 뒤집혔다.
내 presentation이 많이 약해지지 않았다면… 내 안에 있는 내용의 깊이가 더 깊어졌다는 뜻일까? 그런데 도대체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것 같지는 않은데.

요즘 정말 죽을만큼 바쁜데…
그런 중에도 말씀을 읽는 내게 하나님께서 이렇게 뭔가를 공급해주시는 걸 보면…
그분도 정말 간절히 하시고 싶으신 말씀들이 많은 것 같다. ㅠㅠ